3) 스피노자와 속성의 문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주요속성”이라고 부른 것, 곧 사유와 연장을 단적으로 “속성”(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단 2가지)으로 규정하고, 데카르트가 모호하게 성질들이나 속성들 또는 양태들이라고 부른 개념들을 좀 더 엄밀하게 구별하여 분류한다.
속성: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존재하지만, 인간은 사유와 연장이라는 속성들만 이해할 수 있음. 왜냐하면 인간은 정신과 신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
특성 proprietas/ property : 실체 또는 실재의 본질을 구성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고유하게 속하고, 실재의 본질로부터 파생되는 성질들. ex) 신의 경우: 유일성, 무한성, 영원성, 자기원인 등. 삼각형의 경우: 세 각을 가지고 있고 세 변을 가지고 있고...등등
상상적 성질: 인간 자신의 신체의 상태에 대한 상상적 통념들을 신이나 외부의 대상들에게 투사하는 것 ex) 신의 경우: 전지성, 긍휼함, 선함, 최고선 등
4) 속성개념을 둘러싼 논쟁
A. 주관적 해석론
헤겔에서 유래한 이 관점. 정의4에서 “지성이 지각하는”이라는 구절을 주목. 이 구절이 속성이 실체의 객관적 본질이 아니라 인간지성이 실체를 파악하는 하나의 관점이라는 점을 말해준다고 간주한다. 20세기 전반까지 이 관점에 대한 상당수의 지지자들이 존재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스피노자가 속성과 특성, 상상적 성질 등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이유를 해명하지 못함. 이 관점에 따를 경우 속성자체가 이미 주관적인 성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는 스피노자가 속성들을 실체의 객관적 본질로 제시하는 다른 구절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1부 정리 19/ 두 번째, 네 번째 편지 등)
*** 1804년 <스피노자 저작집>이 독일에서 나온다. 파울루스라는 사람이 냈는데 이때 같이 협력했던 사람이 헤겔. 스피노자 철학에 논평 제시. 자신의 철학과의 차이 제기. 유명한 문장: “실체는 더 이상 실체에 머물지 말고 주체가 되어야 한다.”
*** 헤겔이 말한 스피노자의 한계: 스피노자의 철학은 절대자(=자기원인)에서 출발한다. 에티카 봐라. 정의1에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부터 딱 나오잖아. 절대자-> 속성 -> 양태, 이렇게 넘어가는 구조인데, 저것은 가장 완전한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내려가는 것(하강하는 것, 퇴락해가는 것) 말고는 “운동”할 방법이 없는 구조다. 절대자에서 속성으로 내려오면 여기서부터 벌써 절대자의 완전성이 감소한다. 지성에 의해 실체가 지각되는 것<- 봐봐 벌써 여기서 인간적 유한성이 들어간다. 양태로 오잖아? 그럼 절대자에게서 볼 수 있던 완전성은 이미 사라지고 양태에 오면 완전히 유한한 것. 타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유한성/ 불완전성. 그리고 양태= 인간
*** 즉, 스피노자 이론에서는 인간에게 주체성이 없다. 절대자에서 출발했고 그랬기 때문에 계속 내려가야 하는 하강의 길 밖에 없다. 이러면 안 된다. 진보도 했다가 뒤로 잠시 갔다가 앞으로도 나아가야 역사가 만들어지고, 이성의 진보가 가능해지는데 계속 내려가기만 한다. = 실체가 실체로만 머물러 있다. 실체가 주체가 되어야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실체가 영원히 1장 그 상태로 머무르니 아무 가능성도 없다. 그래서 내가 자기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는 절대자로 다시 개념화하겠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스피노자 철학과의 대결이 헤겔철학의 추동력.
*** 헤겔이 재구성한 이 이미지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은 세 가지 측면에 따라 비춰진다. 첫째는 수학의 형식적 방법을 철학에 도입함으로써, 지성의 관점의 한계에 갇혀 있는 모습이다. 둘째는 시초에 절대적으로 충만하게 정립되어 더 이상 역동적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외재적인 속성의 관점에 따라 추상적으로 반성되고 있는 실체 또는 절대자의 한계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시초의 절대자로부터 속성으로, 다시 여기서 양태로 점점 더 퇴락해가는 유출론적 체계의 모습인데, 이는 스피노자가 순수한 부정주의에 빠져 부정적인 것의 구체적인 운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 헤겔이 스피노자를 잘못 해석한 결과)
->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의 해석이 오늘날 “속성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론”의 시발점. 많이들 받아들였다.
*** Harry Wolfson 1934년에 스피노자 책에 대한 2권의 책 출간. 그는 중세유대사상연구를 대표하는, 중세유대사상가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였다. 이 책의 특징은 “스피노자의 연구라는 것은, 특히 에티카는 중세 여러 사상가들의 저작에서 이 구절, 저 구절, 여러 구절을 따와서 꼴라쥬한 것이다. 스피노자가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중세유대교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다”라고 주장. 실제로 이 구절은 여기서 따왔다며 인용문을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1900년대에 프랑스어로 번역됨.
(프랑스는 사실 외국에 관심이 없는 나라다. 특히 외국 철학계에. 전부 자기네 나라 안에서 동료나 나의 선생님들이 뭐하는지에만 관심이 잔뜩 있다. 그러니 다른 나라 철학계에 관심돌릴 틈이 없음. 그래서 다른 나라 책 번역도 거의 안 된다. 예를 들면 프랑크푸르트 학파(1920년대)도 1970년대에야 소개된다. 그전까지는 러셀, 아도르노가 누군지 전혀 몰랐던 분위기. 하버마스도 한참 나중에나 알게 됐다. 사실 우리나라가 비정상이다. 선진국들은 우리 동료/선생님들이 뭐하는지에 더 관심 많고 그러다가 어쩌다가 어? 외국에 이런 애도 있네? 하다가 번역하고 그런다. 문화선진국일수록 더욱 그렇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1940년에 새롭게 처음부터 시작하다보니 외국의존도가 너무 심해져서 한국 학계는 당연한 듯 늘 요즘 미국은 뭐하나? 일본에서는 뭐가 연구되고 있나?에 관심이 많고 반대로 주변 동료나 선생님이 무엇을 연구하는지에는 관심이 전혀 없는 분위기. 놀랍게도 프랑스에는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말이 없다. 2000년대 들어서야 포스트 막스주의/포스트 식민주의라는 말도 들어갔다.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 이 정도까지다. 2000년 들어서 이것들을 역수입하기 시작. 이런 분위기에서) 울프슨 책이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즉, 그것은 중세 유대사상가와 스피노자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 책만한 것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 울프슨의 주장: 스피노자 속성개념은 매우 주관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이건 중세유대사상에서 매우 유명하게 퍼져있던 개념이다. 이런 식이다. “신” 이라는 절대자의 통일성을 생각해봤을 때. “속성은 실체의 본질, 즉 신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속성은 무한하게 많이 있다”라고 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는가. 속성이 실체의 본질인데, 이 본질이 이렇게 무한하게 많다면 이게 어떻게 (유일자로서의) 신일 수가 있는가. 즉, 신의 유일성 문제에 부딪히는 것이다. 울프슨의 주장은, 중세 유대신학에서는, “신은 초월적이라 신의 속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초월자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파악하겠는가. 이미 인간의 능력치 바깥에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단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신이 이런 본질을 가졌을 거라고 단지 ‘지각’만 할 수 있다. 즉, 객관적이지 않다. ”주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중세유대신학과 스피노자철학을 비교하면서, 스피노자 철학이 중세유대신학에서 뻗어나왔다는 것을 전제로 한 주장)
*** 20세기 전반까지 해서 헤겔 + 울프슨의 주관적 해석론을 학계에서 대세로 수용.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러한 주관적 해석론은 거의 사라지고 객관적 해석론이 대세가 되었다. 왜냐면 스피노자 텍스트를 고려해보면 그가 실제로 “속성과 실체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 여러 텍스트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속성이 ”객관적“으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254p에도 나와 있다.
*** 최종 요약을 하자면-
칸트: “속성이란 물자체다. 하지만 우리는 물 자체를 알 수 없다. 현상만 알 수 있다”를 참고하면, 우리는 속성을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인간 지성이 지각하는 대로만 이해할 수 있다. 즉, 속성이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인간지성이 주관적으로 투사하는 것 <- 속성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론.
하지만 스피노자의 속성을 객관주의적 해석론으로 받아들이면, 칸트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칸트는 물 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고 했고, 현상만 인식할 수 있다고 했지만, 스피노자는 NO! 물 자체도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생각했는데 20세기 와서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속성을 객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 근데 최근에는 여기에 대한 반론이 나와서, 주관주의적 해석론을 복원시키자는 움직이기 일어서 다시 논쟁 중)
B. 객관적 해석론
20세기 후반 이후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속성을 실체의 객관적 본질로 파악하고 있음. 마샬 게루/ 질 들뢰즈/ 피에르 마슈레/ 에드윈 컬리 등 <- 스피노자 연구의 대가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왜 속성에 대한 정의에 “지성이 지각하는”이라는 규정이 나와있는지 더 설명해주어야 한다. (지성이 지각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냐? <- 이에 대한 답은 2부 정리 7 주석)
더 나아가 속성이 실체의 객관적 본질을 구성하고 속성들이 하나가 아니라 다수, 더 나아가 무한하게 많이 존재한다면, 무한하게 많은 본질을 가지는 실체가 어떻게 유일한지, 어떻게 통일성을 가지는지 설명해주어야 함. <- 그래서 최근 2-3년간 다시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주관적 해석론>을 복원하려는 움직임. (아래 객관적해석론을 펼치는 주장을 보고 정리해본다면, 그 무한하게 많은 본질이 -> 하나의 유일한 실체로 수렴되고(그러니 그 무한한 본질 자체가 이미 유일함으로 수렴), 이 실체가 때로는 이 속성으로 때로는 저 속성으로 때로는 무한한 속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라는 이야기인 듯. 비유를 하자면 무한까지는 아니지만 무수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하나의 인간이 때로는 이 상황에서는 이 속성으로 저 상황에서는 저 속성으로 다채롭게 표현되지만 결국은 “나”는 유일하다는 그런 것과 비슷한 것)
*** 마샬 게루(20세기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1부 정의 4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 2부 정리7의 주석 “곧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사유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연장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 스피노자가 말한 “지성”은 인간 지성이 아니라 신의 지성이다. 즉, 객관적 지성이다. 그러므로 객관적 해석론이 옳다. 저 구절이 객관적 해석론자들이 많이 근거 삼는 지점.(철학도 결국 추리소설 같다. 여러저러 소스들을 종합해서 암호 해독하듯이 거기에 맞춰 해석한다. 거기에는 당연히 주관적인 것이 들어가고. 스피노자의 속성을 두고 이것을 주관적 속성론으로 보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다가(그리고 그걸 보면서 근데 그럼 1부 정의 4에서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고 말한 건 뭐야??)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나중에 “그 지성은 신의 지성이다!”라고 쳐버리니... 헐! 싶으면서. 이런 암호해독의 우위를 점해야하는 세계인걸까....? 라고 생각했다. 즉, 지성은 인간의 유한지성이 아니라 신의 무한지성이다!
*** 스피노자가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보통 우리가 부르는 속성이랑은 다르다. 스피노자가 부르는 속성은 의미가 아주 분명하다.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 그리고 딱 두 가지: 연장 속성/ 사유 속성. Attribute.
*** Property= 특성. 속성과 구분해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그건 오직 속성뿐이다) 실체의 고유한 것, 어떤 사물의 고유한 성질. EX) 삼각형. 본질: 내각의 합이 180도인 도형 // 특성: 3변을/ 3각을/ 등등등 property가 따라나올 몇 가지 특성들.
이렇게 본질이라는 것은 몇 가지의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본질-> 특성들이 따라나옴
신 – 사유라는 속성(본질): 유일성/무한성/영원성/자기원인성.... <- 여러 특성들이 따라나옴. 신은 여러 개가 아닌데, 오직 하나의 신만 존재하는데 특성들은 여러 개가 나온다.
*** 스피노자의 신의 유일성은 우연한 유일성이 아니다. 필연한 유일성이다.
- 우연한 유일성: 전 세계에 딱 하나 있는 다이아몬드, 책, 우표 이런 것들. 즉, 2개가 존재할 수도 있는데 (다 불에 탔다거나/ 사라졌다거나 어떻게 하다보니) 하나만 존재. 백만개 백개일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어쩌다보니 유일한 것.
- 필연한 유일성: 하지만 신은 다르다. 둘일 수 있는데 하나인 것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한 분일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가 나중에 논리적으로 증명한다)
*** 인간의 경우. 인간의 특성에 대해 스피노자가 뭐라고 했냐면(본질은 아닌데 특성인 것으로 나중에 2부에 가면 몇 가지 예가 나오는데) 이를테면 웃을 수 있는 것/ 털 없는 두발 짐승
*** 본질 속성 특성: 사물에 객관적으로 속하는. 이에 비해-
상상적 성질: 실제로 갖고 있지 않은데 투사하는 것. 어디에서 많이 나오냐면 신학 비판할 때 1부 부록에서. 신학정치론 책에서. 기독교 신학에서 얘기하는 신의 고유한 속성들은 다 상상적 성질이라고 일축. 불경한 거죠. 신이 객관적으로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이 갖고 있는 것들을 신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정의 5. 양태 Modus=mode
1) 정의
“나는 실체의 변용들, 곧 다른 것 안에 있으며 또한 이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을 양태로 이해한다.”
*** Modus=Mode. 양태와 실체는 아주 대조적이다.
실체에 대한 정의: 자기 안- 자립적 자율적 VS 양태에 대한 정의: 다른 것 안- 타율적. 상위의 존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에 의해 성립한다.
실체: 자신에 의해 인식- 자신을 초월하는 상위의 논리적 근거의 토대를 갖고 있지 않다. VS 양태: 다른 것에 의해 인식- 자신을 초월하는 상위의 논리적 근거에 의해 파생되는 것이다.
*** 연장- 운동. 운동이라는 개념은 연장이라는 개념 없이는 성립 하지 않는다. -> 운동이라는 개념은 연장이라는 개념에 의해 인식 가능하다. 그러나 연장은 운동이라는 개념 없이도 성립/인식 가능하다.
*** 운동-> 양태. 무한양태. 양태에 대한 정의에서 “변용들” Affections. 앞으로 이야기할 일이 굉장히 많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스피노자는 Affectio의 철학자다. 인간학 윤리학 자연학에 걸쳐 계속 나옴. 아주 문제적 개념.
2) 양태에 대한 정의의 독특성
스피노자는 실체에 대한 정의와 대비하여 양태를 “다른 것 안에 있으며 또한 이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양태에게는 아무런 자율성이나 자립성의 여지도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엄격한 결정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사물들이나 인간에게 아무런 자율성이나 자유의 여지를 주지 못한다고 비판받곤 했다. 이러한 비판이 타당한 것인지, 실제로 스피노자는 양태들 또는 인간에게 아무런 자율성의 여지도, 윤리적 역량의 가능성도 제시하지 않은 것인지 검토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피노자의 양태 개념의 특징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인간이 바로 양태다. 스피노자에게 실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 양태니까. 인간은 양태의 하나다. 그래서 헤겔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간은 너무 주체성이 없어서 역시 윤리학의 가능성이 없지 않냐고 한 것. 헤겔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양태고, 양태는 불완전/ 주체성 없고, 그런데 어떻게 제목이 “윤리학”이고 5부 제목(지성의 역량에 대하여 또는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이 이렇지? 라고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 그리고 바로 이 점이 헤겔이 에티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가능성! (에티카에서 인간은 주체가 없다....? <- 스피노자 철학에서 양태/변용을 잘 이해하는 것은 중요!) (아직까지의 나의 이해에서는 양태는 타율적이고 의존적인데, 그 양태와 양태 사이의 관계에 따라 자립과 자율의 가능성의 크기가 좌우된다는 점에서 헤겔이 양태를 잘못 이해한 것 같다. 즉 양태는 변용을 통해 역량을 얻는다)
*** 실체의 변용: 실체는 (자기 안에/ 자신을 통해서 존재/인식되고) 자기가 자기의 모습을 바꾼다. 실체가 자기를 표현하는/바꾸는 구체적인 여러 가지 방식들. 보통의 명칭대로 하면 : “실재들”= “사물들”= 인간도 해당하고 건물도 해당하고 실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 포함되는 넓은 범위로서의 사물들= 실체를 제외한 모든 것. (그러니까 실체는 실재(그리고 양태)가 아니다)
*** 1부에 나오는 변용과 2부 이하에 나오는 변용들은 조금 다르다.
- 1부에 나오는 변용: A라는 물체와 B라는 물체가 충돌-> 충돌해서 A는 찌그러짐-> 변용 // 외부물체가 인간신체에 부딪혔을 때 인간신체에 남은 것=흔적-> 변용
- 2부에 나오는 변용: 물리적인 변화 & 그 변화로 인해 생겨난 결과
- 요약: Affectio는 항상 ‘body’에 관련됨. 이게 2부 이하에 나오는 변용! 물리적 현상 (1부는 신체 + 정신 다 아우름)
*** 왜 문제적이냐. affection과 affect과의 관계. 상당히 중요! 이 관계는 스피노자의 인간학부터 아주 중요하다. 아펙투스 3부부터 본격적으로 윤리학, 인간학, 정치학에서 아주 중요. (책의 그림 참조 256p)
1) 유한에 관한 정의에서 생각은 생각을 한정할 수 있고, 신체는 신체를 한정할 수 있다.
=> 즉, 물체A는 인간의 신체에만 작용할 수 있다.
A------------> 신체
변용
A-------------> 물체/신체 하면 변용의 흔적이 남게 된다(빗 금쳐진 부분= image imago)
스피노자에게 이미지는 물리적인 개념이다. 신체에 닿는 흔적
즉, Affection(변용)의 결과 생겨난 것= image
염두해 둘 것은 우리 눈의 망막에 사물의 흔적이 남는 것 = image
꼭 망막만은 아니고 청각, 청각에 변용하면 청각 이미지가 남는다(2부 18)
즉, Image는 시각뿐만 아니라, 물체A가 신체를 변용했을 때 남는 모든 흔적들.
2) 그러면 동시에 정신에서는 인지작용/ 지각작용이 일어난다. 스피노자가 이것을 일컫어 뭐라고 하냐면 Imagination. image에 대응하는 정신의 작용. 우리가 보통 상상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도 훨씬 넓은 범위다. 지각, 감각지각.
1)2)를 요약하면,
물체A가 인간의 신체를 변용한다. -> 물리적: image/ 정신적 imagination 상상, 지각작용
3) 그러면 물체A가 신체를 변용했을 때 정신에서는 지각작용만 일어나는가??
아니다! 스피노자는 A-------> 정신 ==> Affectus가 또 일어난다. 고 말한다. 감정.
즉!! 물체가 신체를 변용하면 imago 낳고 지각작용imagination, 그리고 동시에 affectus(감정)이 일어난다!
예) 우리가 저녁을 먹어도 신체에 affaction(변용)
imago: 미각. 영양학
- imagination 지각(이마지나치오): 소갈비구나!
- affactus 감정(아펙투스): 기쁨이 마구 생성
즉, 인지적 작용 + 정서적 작용.
4) Affectus는 또! : Affectus------> 신체의 변화
ex) 기쁨--> 신체의 활력 / 뱀(지각), 두려움(감정) --> 신체가 오그라들고 위축
즉, Affectus는 감정의 변화지만 신체의 변화도 만들어 내는 것이다.(그러니까 imago는 철저히 신체-> 신체 // imagination은 철저히 정신-> 정신 // affactus는 신체+정신)
*** 여기서 다시 언어의 문제로 돌아오면 Affect -> Affection 어근이 같고 연결이 됨
그리고 다른 나라도 다 저렇게 어근이 같고 이어지는 형식인데 우리나라 말로는 저렇게 어근을 일치시킬 방법이 없다. Affection--> 정서, Affect 아펙투스-> 정동. 이라고도 하는데 이 방식도 사실은 좀 엉뚱하고. 왜냐면 affection는 정서랑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물리적 변화”라고 해야 한다. 아무튼 우리말로는 일치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
*** 질문: 그럼 물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안 일어나나요?
스피노자에 의하면, 물체A가 affection하고 image를 남기고 사라짐. 물체A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 하지만 물체A가 사라져도 정신은 A라는 물체가 계속 현존하고 있는 것처럼 계속 생각하고 있다. 부재하는데 현존하는 것처럼 계속 생각하는 것- 이마지나치오.
contemplatio 컨템플라치오: 정신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관성 (물체가 한번 작용하면 누가 멈추게 하기 전까지 계속 작용)
컨템플라치오는 B라는 다른 물체가 신체를 변용해서 다른 imago가 생길 때까지 작용한다.
(나의 질문. 그러면 A와 B사이에, A에 대한 컨템플라치오도 B에 대한 이마지나치오도 없는, 아무 지각이 없는 상태는 존재하지 않고 항상 A에서 B에서 C로 숨가쁘게 넘어가는 건가요? 스피노자의 논리안에서는?)
*** 들뢰즈 <스피노자 표현의 문제> 제일 중심 아이디어는 양태로서의 윤리적 역량. 초점은, 윤리학 3부를 재해석하는 것이 초점!
3)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양태는 데카르트에서 유래한 개념이지만, 스피노자의 개념과는 몇 가지 측면에서 차이난다.
A. 사물의 상태인가 사물 자체인가.
데카르트의 양태개념은 스콜라철학의 우연속성accidents과 달리 실체와의 내재적 관계를 함축한다. 양태는 실체가 “변용되거나 변화되는 것을 고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체의 경우 모양, 크기, 운동 등, 정신의 경우, 감각, 상상, 의지 등.(즉 데카르트에게 양태는 사물의 상태)
반면 스피노자에게 양태는 실체의 상태나 변화 방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 그 자체를 의미. 더 나아가 스피노자에게는 무한양태들도 존재. (스피노자에게 양태는 사물 그 자체)
직접적 무한양태: 연장 속성- 운동과 정지/ 사유 속성- 무한 지성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 전체의 모습
*** 양태개념 관련해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 스피노자는 올덴부르크와의 편지에서(1강의록2P) 초기에는 양태라는 표현 대신에 아키댄스accidence 우연적 속성. 우유라고 썼다. 그러나 에티카에서는 affection이라고 용어가 바뀌었다. 왜 그랬을까. 아키댄스(우연속성)과 사물, 이 두 개념 쌍을 사용하게 되면- 스콜라 철학에서 사람의 본질은 ‘이성을 가진 짐승’이고, 특성은 ‘웃을 수 있고, 직립보행이고... 등등’인데, “어떤 사람은 키가 190이고 어떤 사람은 170이고, 어떤 사람은 피부가 하얗고 어떤 사람은 까맣고...”<-바로 이런 것들이 아키댄스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아키댄스-사물 간의 관계는 외재적 관계, 우연히 갖게 되는 외재적인 것. 그러나 내재적 특성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실제 변용으로 그런 외적인 것‘만’을 생각하지 않았다. 외재적으로만 보면 제대로 설명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아키댄스 대신, affection, mode를 즐겨 쓰게 됨. 즉, 스피노자가 아키댄스 대신에 이 단어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변용이 “내재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 데카르트 또한 mode라는 말을 자기 철학의 주용법으로 채택했는데 데카르트의 경우 mode는 어떤 사물의 표현 방식/형태를 의미했다. 예를 들면
물체의 경우: 물체가 갖고 있는 무늬, 형태
정신의 경우: 감각, 상상
-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한 차이다!!
a. 데카르트에게 mode는 정말 의존적인 것이었다. 그 mode가 속해있는 사물하고 독립적으로 분리해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 VS 스피노자의 다섯 번째 정의와 정리1~36을 보면, 스피노자가 모드라고 부르는 것은 사물 일반이다. 실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다.
b. 데카르트에게는 무한 실체- 신/ 유한 실체: 정신, 물체, 사람 VS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오직 무한 실체 밖에 없다. 스피노자 사상에서 실체를 실체라고 부르려면 반드시 무한해야만 한다. 즉, 스피노자는 실체의 유한성을 배격했다! 매우 중요함!!!
c. 데카르트가 ‘유한실체’라고 불렀던 것이 스피노자에게는 양태가 된다. 데카르트는 사물과 독립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모드, 스피노자에게는 그 사물 자체!
*** 그럼 스피노자에게는 유한한 것들만 양태냐?
아니! 스피노자에게도 무한 양태가 있다! 에티카 1부 정리 21~23: 무한양태에 관한 내용.
- 직접적 무한양태: 연장속성의 경우 운동과 정지, 사유속성의 경우 무한지성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전체의 모습
*** 스피노자가 양태라고 부르는 범위가 굉장히 넓다. 그 이유는? 스피노자가 실체의 개념을 아주 엄밀하게 정하는 바람에 생긴 결과다. 그 실체를 제외한 나머지 것이 다 양태에 포함되니까. (이거 어쩐지 너무 멋있다..)
B. 양태와 변용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스피노자는 양태와 변용들을 동의어처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곧 전자와 달리 “변용들”이라는 개념은 실체와 개별 실재들 사이의 내적인 관계가 어떤 형태를 띠는지 잘 보여준다.
B-1) 실체의 변용
변용은 우선 실체가 개별 실재들을 생산하는 작용이 내재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곧 실체는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세계에 대해 외부에서 작용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스콜라철학/데카르트가 생각했던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한다. 또는 계속해서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켜(그러므로 말 그대로 ‘변용’이다) 나간다. 이러한 실체의 지속적인 자기-변용이 곧 개별 실재들의 생성과 변화, 소멸의 운동이다.
B-2) 양태들의 변용되기-변용하기
개별적인 실재의 차원에서 변용은 이중적인 양상을 띤다. “변용”이라는 명사는 사실 이중적인 활동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곧 “변용”은 한편으로 “변용되기”를 가리키며 다른 한편으로 “변용하기”를 의미한다.
개별 실재는 실체처럼 자기 안에 존재하고 자기 자신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이것은 오직 실체인 신만이 가능), 필연적으로 다른 실재들에 의해 존재하고 또 인식되어야 한다. “변용되기”는 이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러한 변용되기는 무기력한 피동성이나 심지어 구속성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개별 실재들은 변용되기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존재자, 하나의 실재로 성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는 역량을 얻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존과 행위의 역량은 “변용하기”로 표현된다. 따라서 변용되기와 변용하기는 대립하는 두 가지 작용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고 상호 연관적인 양태들의 두 가지 존재 양상들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변용들”이라는 개념은 스피노자에게 개별적인 사물들 또는 실재들이 다른 실재들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실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관계들로 구성된 존재자라는 점을 잘 말해준다.
*** 양태/변용
- 스피노자는 양태와 변용을 동의어로 쓰고 있는데, 그래도 양태라는 말보다 오히려 실체와 자연 사물들 간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건 변용affection. 이유는, 실체와 자연사물들 간의 “내재적” 관계를 잘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실체와 자연사물은 초월적 관계가 아니다!
- 실체가 변용된 것들: 자연 사물
실체가 자꾸 변용하는 것: 자연계의 운동.
- 스피노자에게서 affection은 물리적인 개념이다. affection: 1차적 작용
아키페레 affect: 변용하는 작용
아피키 being affected: 변용되는 작용
- 자연사물들은 항상 변용하면서 동시에 변용되는, 이런 2중적인 작용을 수행한다. 즉, 자연사물들이 실존하는 방식은 바로 변용하고 변용되는 방식인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가면 상당히 중요한 개념이다! 그리고 변용하고-변용되고를 수동-능동의 관계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에게 “변화된다”는 수동개념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시킨다”도 능동개념이 절대 아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큰일 난다.
- 그것을 혼동하면, “우리가 어떻게 수동성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있어서 이런 엉뚱한 답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능동적이 되려면 변용되지 말아야한다”= 먹지도 말아야하고 숨 쉬어도 안 된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다. 능동적인 것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변용되어야 한다! 3부 정의2에 가면 능동과 수동에 대한 정의가 나올 것이다. 그때 가서 더 자세히 보겠지만 아무튼 변용! 정말 중요한 개념이다!!!
정의 6. 신 나중에 1부 정리 11에서 더 자세히 나올 것이다.
1) 정의
“나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being entity, ens=> 신), 곧 각자(= 각각의 속성)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를 신으로 인식한다.”
*** 신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복잡하면서 어려운 정의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는,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각각의 속성들(속성 하나하나가 다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한다는 의미), 그리고 이런 속성들이 무한하게 많다“는 것.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속성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아니라, 단순히 여러 개가 아니라 무한하게 많이 존재한다는 것. 이렇게 무한함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 된 실체가 바로 신이다.
*** 여섯 번째 정의에 따르면 신이라는 실체는 유별난 실체다. 신이라는 실체는 여느 실체와는 다르게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이 무한하게 많으니까. 이 정의의 단계에서는 아직, 지금 이 실체가 하나 있는지, 여러 개 있는지 확정이 나지 않았다. 정의3에서 나오는 실체가 정의6의 이 신이라는 실체와 같은 건지, 아니면 정의3에서의 실체와 정의6의 실체가 각각 따로 있는, 별개의 실체인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쨌든 정의6에서는 스피노자는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라고 말한다. 절대적으로 무한하다=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속성이 무한하게 많다.
해명
“나는 절대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하지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의 본질에는,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 모든 것이 속한다.”
*** “자신의 유 안에서”라는 말은 정의2, 유한에 관한 정의, “동일한 본성의 다른 실재에 의해 한정될 수 있는 실재를 자신의 유 안에서 유한하다고 한다” 에서 나왔던 말. 자신의 유 안에서= 같은 본성을 지니는 속성 안에서. (사유속성 안에서/연장속성 안에서). “나는 절대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하지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연장 속성 안에서 무한하다/ 사유 속성 안에서 무한하다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 ”절대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한다.”
*** 가령 사유속성 안에서도 무한한 게 있고 유한한게 있다. 무한한 것- 사유속성 그 자체/ 유한한 것- 각각의 개념들, 이런저런 개별적인 관념들.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한 것만” 이야기해서는 “절대적 층위의 무한”에 대해서까지 포괄해서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속성이 무한하게 많은 어떤 실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 // 왜? 가령 사유속성이라는 것이 자신의 유안에서 무한하지만, 사유속성이랑 연장속성이랑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연장속성이라는 또 다른 무한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사유속성이나 연장속성과는 또 다른 제 3의 제 4의 제5의 속성들이 있을 수 있는데 -> 그러니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는 말을 가지고 “절대적 무한”을 이야기할 수 없고 이 각자 무한한 속성들이 무한하게 많이 구성하는 실체에 대해서만 절대적 무한을 이야기할 수 있다.
*** 스피노자의 뜻은 뭐냐면, 철학에서는 이것을 “가능 세계” “가능 우주”라고 말하는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실존해 있는 이 우주가 있다. 우리는 이런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우주 바깥에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우주가 있지 않을까. 4차원, 5차원, 10차원의 세계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우리가 실존하고 있는 이 우주가 우리가 사고할 수 있는 우주의 정체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인식하지 못하지만 이 우주와는 다른 우주가, 당장 파악할 수는 없지만 무한하게 많은 가능한 우주가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하나의 우주만이 있다고 말한다. 단 하나의 우주=단 하나의 자연= 단 하나의 신만이 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뒤에 가서 단 하나의 신 만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무한하게 많은 가능한 세계라는 것들을 전부 포괄할 수 있는 자연이어야, 그 모든 것을 다 묶어서 퉁치는 자연이라는 개념이 있어야 “하나의 자연”=하나의 신=하나의 우주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정의6에서 스피노자가 “절대적으로 무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4차원 5차원 10차원의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는게 아니라, 그 모든 것 자체가 “하나의 우주”라고 묶고 통합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의 우주”, “절대적으로 무한한 하나의 우주”가 탄생)
*** (저 비유를 생각해서 적용하면)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고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냐면 이 신 외에 또 다른 신이 있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 달리 말해서, 이 우주 외에 또 다른 (무한한) 우주가 있을 수 있다는 결과.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이다“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다“ ”그냥 무한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고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 가능한 무한들이, 무한하게 많은 무한들이 구성하는 실체가 신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여기에는 더 이상 다른 우주, 다른 자연, 다른 신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왜? 하.나.의. 신이 그 무한을 다 포괄해버리는 거니까.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유일한 신만이 존재한다, 신의 유일성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의 본질에는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 모든 것이 속한다.“ 이 말에 꽂혀 열광했던 철학자가 들뢰즈. 들뢰즈가 ”표현“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재구성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지침이 되어준 문장이다. 헤겔은 스피노자는 절대자/실체에서 출발한다-> 속성으로 간다, 속성이라는 것은 절대자에서 완전성이 줄어든 것, 이라고 말했는데. 에티카에서보면 속성은 하나가 아니라 사유/연장 속성 두 개인데, 이 두 개는 서로 섞이지 않는다. 사유에 속하는 것은 연장에 속할 수 없고 연장에 속하는 것도 사유에 속할 수 없다. 헤겔은 이 관계에 대해 ”모순 관계“, ”변증법적인 모순의 통일체가 실체다“라고 말한다, 즉, 헤겔은 사유와 연장은 대립/모순 관계지만, 이 모순되는 것이 통일되는 것이 실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사유속성이라는 것은 그 속성 자체에서 연장속성을 부정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 그런데 들뢰즈는 달랐다. 들뢰즈가 ”어떤, 다시 말해서 실체의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다“에 주목하는 이유는. 스피노자 적인 실체, 신이라는 실체의 본질에는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즉, 사유속성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무한함이라는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속성, 즉 연장속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지각하지 못하지만 무한하게 많은 다른 속성도 부정하지 않는다. 즉, 저 문장은 다른 속성은 부정하지 않으면서 절대자의 본질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모순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속성과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볼 때는 변증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론적인 논리를 표현할 수 있는 실마리가 바로 저 문장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정의 논리가 아니라 차이의 논리다. 그것도 긍정하는 차이의 논리(부정하는 차이의 논리가 아니라).
*** 그래서 정의6이라는 것이 매우 복잡하고 까다롭다. 나중에 배우게 될 정리 11과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 정의6에서는 신이라는 것이 정의의 대상이 되고, 정리11에 가면 신은 증명의 대상이 된다. 이런 신이 존재한다, 이런 신이 실존한다는 증명이 나오는 것이 바로 정리11. 정리11에서는 스피노자가 4가지 방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 이것이 어렵고 중요한 개념인 이유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이 어떻게 유일하다고, 하나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이 어떻게 ‘하나’의 실체를 구성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다르게 말하면 우리가 어떻게 통일성/유일성을 이야기할 수 있나. 우리가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에 대해 어떻게 숫자로, 산술적인 표현으로 ‘하나’라고 말할 수 있나.) 이게 참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속성 개념을 우리가 ‘주관적인 속성 개념이다’라고 이야기하면 이 어려운 문제는 제기가 되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신은 인식 불가능한,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초월해있다’라고 하면 이 문제가 해소 되어서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신을 초월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속성이라는 것이 신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구성한다고 이야기하니까 이 개념이 어려운 것이다.
정의 7. 자유
1) 정의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a) 규정되는 실재는 자유롭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실재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b) 규정되는 실재는 필연적이라고 또는 오히려 제약되어 있다고 한다.”
***
첫 번째 문장: 자유로운 것에 대한 정의- 실체(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
두 번째 문장: 필연적인 것/제약된 것에 대한 정의- 양태
- 하지만 이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a와 b의 동사를 보자. “행위한다” “작업한다”
actio-> act 행위한다
operatio -> 그러나 여기서는 produce on effect의 의미가 더 적절하다. 작업한다
*** 또 중요한 점: 자유-필연을 대비시키는 것이 아니다. 자유-제약을 대비하는 것.
제약 coactus 스피노자의 coactus를 제약으로 보냐, 강제로 보냐에 따라 정의7의 의미가 다른데, 강제로 본다면 b의 경우는 아무런 자유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봐야할텐데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coactus를 쓰는 용법을 보면 시민이 법에 coactus 된다는 표현을 쓴다. 법이 시민을 구속하고 강제하는 것보다는, 즉, 자유의 의지를 완전히 박탈한다고 보기보다는 ‘제약’이 더 적절하므로, 여기서도 ‘제약’으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 규정되는 실재는 자유롭다고 한다”=> 자기원인적인 것이 자유롭다 => 결국 자기원인적인 것은 신/자연이니까 자유로운 건 신/자연 뿐이다.
*** 1부 정리28(마트로슈카 정리)과 3부 정의2와 묶어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2) 자유에 대한 정의의 쟁점
이 정의 역시 스피노자의 결정론을 입증해주는 대표적인 전거 중 하나로 널리 인용되곤 한다. 하지만 이 정의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중요한 것은 a와 b의 차이를 잘 이해하는 일이다.
(1) 자유로운 실재
이것은 두 가지 특성을 지닌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agendum/act” 규정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2) 필연적인 또는 제약되어 있는 실재
이것 역시 두 가지 특성을 지닌다. “다른 실재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operandum/operate” 규정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3) “필연적 또는 오히려 제약”의 의미
스피노자는 “필연적”이라는 말 대신 “제약”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스피노자에게 “필연”과 “자유”는 대립/상반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필연은 “운명”이나 “숙명”처럼 맹목적인 힘을 의미하지 않으며, 자유는 자연의 합법칙적인 질서와 분리되어 있는 자유의지를 뜻하지도 않는다. 자유는 필연적인 법칙적 관계에 존재론적으로 기반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법칙적인 질서에 대한 인식과 참여를 통해서 비로소 실현된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필연”이라는 말 대신에 “제약”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둘째, “제약”이라는 말의 의미에 주의해야 한다. “제약”은 행위의 가능성과 자유를 전적으로 억제당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약은 합리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주며, 따라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반이 된다. “구속”과 “자유”의 차이는 노예와 시민의 차이와 비교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자유”와 “제약”은 서로 대비되는 것인가?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자유”와 “제약”은 실체와 양태의 차이로, 곧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과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 사이의 차이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자유”가 일체의 제약 또는 규정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럴 경우 실체의 행위는 임의적이고 불가사의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는 “본성의 필연성”이라는 말을 통해 “자유” 역시 필연성을 따르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스피노자에게서 ‘자유’는 일체의 제약과 규정으로부터 벗어나있는 것이 아니고, ‘제약’은 자유를 전적으로 억제당하는 상태도 아니다. 자유는 필연적인 법칙적 관계에 존재론적 기반을 두고, 법칙적인 질서에 대한 인식과 참여를 통해 실현된다. 이게 아닐 경우 실체의 행위는 임의적이고 불가사의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정의 8. 영원
1) 정의
“나는 오직 영원한 실재의 정의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으로 인식되는 한에서의 실존 그 자체를 영원으로 파악한다.”
해명
“왜냐하면 이러한 실존은, 실재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영원 진리로 인식되며, 따라서 지속이나 시간으로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속이 시작과 끝이 없는 것으로 인식된다 하더라도 그렇다.”
2) 영원에 대한 정의와 쟁점들
(1) 필연적 실존으로서의 영원
영원을 필연적 실존으로 정의하는 것은, 영구성sempiternity과 영원을 구별하기 위해서. 곧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원은 시간 속에서 무한정하게 지속되는 것(“시작과 끝이 없는” 지속)으로서의 “영구성”이 아니라 필연적 실존, 실존 그 자체를 의미함. cf. <윤리학> 5부 정리 23의 주석. -> 영혼 불멸, 사후 세계에 대한 비판적 함의 cf. <윤리학> 5부 정리 20의 주석, 5부 정리 41의 주석
(2) 영원 진리란?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원 진리”는 17세기 철학에 통용되던 표현. 시간이나 지속에 구애받지 않고 영원히 참된 진리들을 가리킴. 논리학 규칙들, 수학적 진리들 등. ex) 1+1=2 / 삼각형의 본성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세 개의 각이 따라 나온다.
*** 스피노자가 영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eternity. “영구성”이란 것과는 다르다. 윤리학 5부에 가면 정신의 영원성과 영혼불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 두 가지를 절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영혼불멸은 유대기독교 신학의 매우 중요한 개념인데 스피노자는 이 영혼불멸을 부정해서 쫓겨날 정도로 부정했다. 그러나 정신의 영원성은 긍정했다.
*** 영원진리. 스피노자가 쓰는 영원진리는 17세기 철학에서 많이 쓰는 표현. 시간이나 공간의 한정에 구애받지 않는 진리를 영원진리라고 한다. 논리적인 진리, 수학적인 진리. 왜 공간이라고 썼냐면, 동쪽에서 참인 것이 서쪽에서는 거짓이라고 하지 않으니까.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원성은 시간이랑 공간이랑 무관하다!
*** <강의록 1> 5p. 정의8 보충. 정의8과 관련해서 이런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다. 정의8을 보면 영원이 정의의 대상이 되는데, 스피노자가 영원을 정의하는 방식을 보면 “영원한 실재”를 통해서 영원을 정의하고 있다. 즉 정의되어야 될 대상이 이미 전제가 되어있는, 추납법. 사실 스피노자의 원래 뜻은 아까 말한 특성과도 관계가 있다. 특성이라는 말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본질로부터 파생되는 성질” 프로프리에타스. 그렇다면 영원성은 어떤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특성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원성은 어떤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영원한 것.
*** 다시 말하면, 정의8에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실재, 실재의 정의로부터, 그리고 스피노자가 말하는 정의는 어떤 사물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을 정의라고 하는데 영원한 것의 정의로부터 필연적으로 따라나온다=> 영원한 것의 본질로부터 하나의 특성으로 필연적으로 따라나온다. 영원성. 그러니까 영원성은 유일성과 마찬가지로 신, 또는 실체의 특성 중 하나다.
*** 나중에 5부에 가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다. 그럼 영원성이 실체의 특성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인간에게는 영원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다. 정신의 영원성. 신체의 영원성.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도 영원성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이 신의 일부라는 의미에서의 영원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