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틀 무렵까지도 잠이 오지 않아 이 책 저 책 이 메모 저 메모 뒤적이던 중 우연히 <데카르트의 철학원리> 서문의 한 구절을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서 당황했다.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모든 확실하고 굳건한 인식은 이미 확실하게 알려진 것으로부터만 끌어내고 도출될 수 있기 때문에, 후자의 것[이미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처음부터 견고한 토대로 놓여야 하며, 이 위에 그 이후 인간 지식의 건물 전체를 구성해야 한다.”
평범하다면 매우 평범한 문장이고, 기본이라면 너무 기본인 이야기인데 사실 나는 이 구절이 예전에 처음 읽었을 때도 무척 좋았다(인생의 제2원칙 정도로 삼고 싶었다). 오늘 새벽 갑자기 눈물이 났던 건 어제의(사실 요즘 계속 누적되어왔던) 여파로 잠을 거의 설친 상태에서 이 구절이 자동으로 #미투운동과 연결되어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미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공적으로” 견고한 토대로 제대로 놓여본 적이 없어서, 알려지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까지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토대가 될 [이미 확실하게 알려진 것]들에 대해 공적 합의를 제대로 해놓지 못해서, 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 모두는 사실 알고 있었지만 공적으로는 모르는 것으로 되어있었던 알려진 것들을 단단하고 견고한 공적 사실로 만들기 위해,
그래서 지금까지도 알려지지 않은 유형의 폭력 뒤에서 혼자 고통스럽게 견디고 있을 이들 또한 인식의 영역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해 이렇게 기를 쓰고 있구나, 살아온 삶을 걸고 살아갈 삶까지 다 걸고.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 모두를 걸고. 더 일찍 견고하게 토대를 닦아놓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좀 더 용기 내어 싸웠어야 하지 않았을까 같은 자책감도.
이 위에 어떤 건물을 짓기 시작할지, 지금 우리는 몇 번째 삽 정도를 뜬 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아직 겨우 첫삽을 뜨고 있는 중인 줄도 모른다. 이제야 겨우 일상에서 행해지는 권력형(젠더권력형도 포함) 성폭력을 당하는 한국여자들의 목소리들을 듣기 시작했다. 겨우 '듣기 시작'했다. 아직 제대로 듣고 있지도 않을 이주노동여성들, 장애인들, 성소수자들 문제까지 가려면 아직도 멀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