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기에 앞서

-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이 실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우리가 개별자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소크라테스. 책상. 이런 것들. 문법적/논리학적으로 보면 실체는 주어고, 속성은 술어다. “소크라테스는 키가 작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우리는 보통 실체와 속성에 대해 저런 문장구조로 파악하는데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실체 개념과 다르다. 스피노자에게 저 주어들은 실체가 아니라 양태다. 또는 변용이다. ? 우리가 보통 개체라고 부르는 것들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안에 있기 때문에. 다른 것에 의존하고 다른 것에 의해 변화하고 다른 것에 의해 소멸하니까.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 안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에 정리5까지에서 했던 이야기.

- 1)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하는 실체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것이냐 아니면 하나의 동일한 것이냐/ 2) 우주에는 속성이 존재하는 만큼 여러 실체가 존재하느냐 아니면 단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하느냐. <- 정리15까지 스피노자가 논증의 목표로 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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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록3 스피노자의 답장.

- 정의2 “동일한 본성의 다른 실재res에 의해 한정될 수 있는 실재를 자신의 유 안에서 유한하다고 한다

- 실재 res/thing : res의 범위가 thing보다 훨씬 넓다. 실체도 res 변용도 res.

<-> 반대되는 말: . 아무 것도 아닌.

동일한 본성”, “자신의 유가 가리키는 말은 속성이다

1) 연장 corpus : 물체(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를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

2) 사유 cogotation : 관념, 이데아 (스피노자는 우리의 정신도 하나의 이데아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것도 상당히 특이한 생각이다. 우리는 보통 정신- 어떤 틀/ 관념- 그 정신 안에 들어있는 하나의 아이템이라고, 정신-관념의 관계를 생각하는데, 스피노자에게는 정신도 이데아다. 그것은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단어를 훨씬 역동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표상처럼 생각하는데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았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정신, 감정, 정서도 관념이라고 생각함 (물론 3부에서는 정서와 관념을 뚜렷하게 나누지만 어쨌든 넓은 의미에서보면)

 

- “누군가가 연장은 연장이 아니라 사고에 의해 한정된다고 말한다면, 이는 연장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연장인 한에서만 무한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지요?” : 1) 사유라는 속성이 연장 속성에 경계를 지어 한정을 해준다고 해서, 연장이 유한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2) 연장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이 아니고(절대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은 그걸 한정해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인데 사유가 한정하니까) 3) 하지만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종류 밖에서는 사유에 한정되니까 유한하나 종류 안에서는 무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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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4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

*** 여기서 말하는 지성은 무한지성. 신의 지성. 인간의 지성은 무한지성의 일부이며, 이 무한지성은 사유속성에 포함된다 ->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사유속성의 특별한 지위라는 주제와 이어진다. 사유속성이 다른 속성에 비해 외연이 넓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게 무한지성 문제와도 연결된다.

*** 왜 스피노자가 우리는 사유속성과 연장속성만 인식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하냐면, 우리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사유속성에 속해있는 양태고 신체는 연장속성에 속해있는 양태니까. 우리가 또 다른 양태를 갖고 있다고 했다면 아마 그 양태가 속해있는 다른 속성도 인식할 수 있었겠죠.

*** 그러면 우리가 두 개의 속성만 인식할 수 있는데 왜 스피노자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가. 스피노자가 1부 정리6에서 신을 정리하면서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라고 이야기한다. 근데 만약 속성이라는 것이 두 가지만 존재한다면, 신이라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이 사유/연장 두 개만 있다고 하면-> 신이라는 실체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가 아니라 사유/연장 두 개만 있는 실체가 된다. 그러면 다시 어떤 결과가 나오면 신 바깥이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해진다. 그러면 신 바깥에 신보다 더 포괄적인 어떤 초월자가 생기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자연에 대한 인식은 완전한 인식, 적합한 인식이 아니라 제한적인 인식이 된다. 그렇게 되면 드래곤 볼에서 배속 우주가 생기듯이 신 바깥에 또 뭐가 있을 것이고, 그 바깥에는 또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고... 이런 세계가 펼쳐져버린다. 스피노자가 신이란 것을 절대적으로 무한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신 바깥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신은 궁극의 우주라는 것이다. 바깥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물리적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두 가지 속성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존재하고 그것이 신의 본질이다라고 이야기할 때만 우리가 자연의 내재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질문: 그 이야기는 자기 주장의 논리적인 완결성을 갖추기 위해서 자기 자신도 모르는 어떤 것을 가정을 해놓고 그게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사실 자기도 모르는 거 아닌지... : 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모두들 웃음) 근데 나중에 2부 정리7에 가서 살펴 볼 텐데 우리가 하나의 속성만을 인식할 수 있었다면, 우리가 다른 속성들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유나 연장 중 하나만이 아니라 두 개를 인식하고, 이 두 개의 속성이 동일한 어떤 실체에 속한다. 같은 실체의 두 가지 표현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두 개가 세 개가 되든 네 개가 되든 다섯 개가 되든 무하하게 많든 상관이 없다. 왜냐면 우리는 서로 다른 속성의 공통적인 구조를 인식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속성만 인식하는 것하고 두 개의 속성의 공통된 질서, 구조를 인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생각해보지 못했는데 하나의 속성이 아니라 마침 정신과 신체라는 두 개의 속성을 인지할 수 있고, 그래서 비교/대조라는 것을 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에티카>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포인트구나. 2부 정리7 평행론도 그렇고 이 두 가지속성이 기반이 되어서 만들어진. 물론 나는 여전히 공통 질서공통 구조같은, 어떤 공통을 뽑아내기에는- 심지어 뽑아낸 이후 그걸로 이론 하나를 구축해내기에는- “두 가지요소는 너무 적다고 생각하지만. 나처럼 소심한 사람은 적어도 열 개가 아니면 공통을 말할 수 없다...)

 

*

데카르트의 구별이론distinction theory과 스피노자의 수정

*** 데카르트의 이론

1) 실재적 구별 distinctio realis (real distinction) : 실체- 실체 ex) 컵과 책상

2) 양태적 구별 distinctio modalis (model distinction) : 실체- 양태

ex) 물통이라는 실체와 물통의 검은색이라는 양태 사이에 성립하는 구별. 물통과 검정색

3) 사고상의 구별 distinctio rationis (distinction of reason) : 실체- 속성

ex) 물체와 연장속성

*** 스피노자의 수정 : 데카르트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단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유한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스피노자에게 실체: only 자연전체 / 물체 & 정신: 양태

1) 실재적 구별: 속성- 속성

- 연장속성과 사유속성 사이에 실재적 구별 존재

-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와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 사이

- 그럼 실재적 구별이 성립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까?

: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으면/ 상호작용이 있을 수 없으면 -> “실재적 구별 성립

2) 양태적 구별: 같은 속성 안에서 양태-양태 / 양태- 속성

ex) 컵과 책상 (둘 다 같은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기 때문)

컵과 연장속성

컵에 대한 관념과 사유속성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A와 관념B => 양태적 구별/ 관념A와 사유속성 -> 양태적 구별

3) 사고상의 구별 : 실체- 속성.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 따라서 속성과 실체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양자 간의 분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관념적으로 구별

 

정리5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 이상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데카르트주의자다라는 생각으로 연장속성을 지니는 두 개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면 물통하고 컵. 물통과 컵은 데카르트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다. 근데 정리5가 부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저 두 개는 실체가 아니다! 라는 말. 그러니까 정리5는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를 비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 “실체 중에는 유한한 실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데카르트처럼 유한한 실체를 인정해야만! 같은 본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정리5에서 유한한 실체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

 

정리6 하나의 실체는 다른 실체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증명 자연 안에는 동일한 속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다(앞의 정리에 의해). (정리2에 의해) 서로 공통적인 것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정리3에 의해) 하나의 실체는 다른 실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곧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Q.E.D.

*** 그러니까 한 속성에 한 실체만 남게 된다. 다른 속성에는 또 다른 한 실체가 남게 되겠죠. 그런데 정리2에서 공통적인 것이 없으면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했으니 그 사이에서 어떤 연관도 있을 수 없고, 그건 생산도 마찬가지다.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더 쉽다

*** 사유속성에 속하는 실체는 연장 속성에 속하는 실체의 의해 생산될 수 없다

*** 근데 정리6에 대해서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상이한 속성에 속하는 각각의 실체들은 모두 신에 의해서는 생산될 수 있잖아? 이때의 신은 실체가 아닐 수도 있죠. 실체보다 더 상위의 초월적인 어떤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가 따름정리를 붙였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왜냐하면 공리1과 정의35에 의해 명백한 것처럼 자연 안에는 실체들과 그 변용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실체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위의 정리에 의해). 따라서 실체는 절대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Q.E.D

정리6과 따름정리의 차이: 정리6에서는 실체와 실체와의 관계. 따름정리에서는 실체라고 안 하고 다른 것에 의해라고 되어있다. 다른 것이라는 표현이 훨씬 막연하고 포괄적이다. 여기에는 실체도 포함될 수 있고, 변용, 양태일 수도 있고, 신 같은 가상의 초월자일 수도 있고. 그래서 스피노자는 실체라는 말 대신에 의도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했다.

다른 증명 이는 모순을 통한 귀류법에 의해 좀 더 쉽게 증명된다. 왜냐하면 많은 실체가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된다면, 그것(실체)에 대한 인식은 그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해야 할 것인데(공리4에 의해) 그렇게 되면(정의 3에 의해)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함의: 창조론을 부정! 기독교 신학의 창조개념이 실체들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에 반해서.

정리7 실체의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

증명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앞의 정리의 따름 정리에 의해). 따라서 그것은 자기원인일 것이다. (정의1에 의해)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실존을 함축할 것이다. 또는 그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

*** 다른 것에 의해서 생산되거나 그러지 않으니까 자기원인일 것이다. , 본성상 실존할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실체!

 

*** 2가지 반론이 존재한다.

1) 아까 정리6에서도 그랬지만 중세유대신학이나 스콜라신학에 기반을 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여기서 반론이 제기된 부분은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자기원인일 것이다에서, “따라서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는 데에서 곧바로 자기원인이라는 귀결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반론.

- 중세 최고의 유대 사상가 중 한명인 벤 마이모(유대식 표기), 마이모니데스(라틴어식 표기)에 따르면, “그 자신의 본질에 관해 필연적으로 실존하는 것(=, )은 자신의 실존에 대해 어떤 원인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기원인적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에 대해 어떤 원인도 갖지 않는다는 의미.

-“신은 아무런 원인도 갖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기본적인 방식인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방식을 따지지 않는다= 우리의 인식 기반을 초월한다. = 그러니 우리는 신에 대해 원인을 물을 수 없다. 신이란 만물의 궁극적인 원인이면서 자신이 원인 그 자체인,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신비한 존재다.

- 그러나 스피노자가 신, 실체를 자기원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실체도 원인이다라는 의미다. 이 말은 신의 원인도 밝혀낼 수 있다는 말. 신에 대해서도 우리는 인과관계를 밝힐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인과관계 지식의 범위 안에 신의 작용도 들어온다는 의미. 신은 불가지하거나 초월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인식 범위 안에 있으며, 신은 충분히 적합하게 인식될 수 있다.

 

2) - 칸트: 그래, 다 좋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진짜 있어? 그냥 관념상의 존재 아니야?(네 머릿속에 들어있는 백만 원이 진짜 존재하는 것이냐) 존재증명의 대상이 되는 신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냐. 네가 열심히 말하고 있지만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실체, 그게 실제로 실존하는 게 아닌지 맞는지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 이에 대한 스피노자 생각은, 우리가 자기원인적인 존재= 본질상 실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 본성상 필연적으로 실존을 함축하는 존재는 자연전체 밖에 없다. 자연전체야말로 유일하게 자기원인적인 존재다. 그런데 자연이라는 게 없다라고 한다면, 오직 무만이 있는 것이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자기원인적 실체를 부정하고 관념상의 존재라고만 한다면, 거기에 남는 것은 무밖에는 없는. 그렇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사고의 방식도 있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아무 것도 없다= 사고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원인적인 존재는 단지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참된 관념은 필연적으로 실존을 함축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자연전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 어떤 의미에서 진화론이랑 잘 연결되는 철학이다. 2부 정리13-14 사이의 자연학 소론을 두고 많은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스피노자가 물체와 운동을 설명하는 방식이 진화론적인 자연해석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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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1. 스피노자의 성격이 확실히 보이는 공리2. 그러니까 이 세상에 인식할 수 없는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들, 그래서 초월성이라는 아우라를 자동적으로 갖게 되는 것들에 대해 철저하게 그런 건 있을 수 없다고 못 박는 것. 초월성이라는 아우라가 중세신학의 신에게 비합리적인 동시에 커다란 권위를 주는 것의 싹을 아예 뽑아버리려는 것.

 

공리2 다른 것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 말을 반대로 바꿔서 써보면, “다른 것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인식 불가능하다.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다.” -> 신비한 것. 인간의 의지로 접근불가능한 것

*** 이게 바로 칸트가 했던 말. 칸트: “속성이란 물자체. 하지만 우리는 물 자체를 알 수 없다. 현상만 알 수 있다” -> 다른 것에 의해서인식될 수 있는 것 (주관적 해석론과 괘를 같이 하기도)

*** 스피노자는 여기서 더 밀고 나가는 것이다. 스피노자 입장에서, “아니다, 물 자체는 인식되어야 한다. 자신에 의해서.” 이것이 칸트식 사고와 스피노자식 사고의 큰 차이다.

 

***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성격이 굉장히 잘 드러난 것이 공리2. “자신에 의해 인식이라는 개념(“인식할 수 없는 것에 있어서 자신에 의해 인식이라는 개념을 넣어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아예 없앴다). 그래서 공리2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사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다른 것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자신에 의해 인식될 수있다.”크크. 하지만 스피노자는 저렇게도 말 안 하고 매우 세게 되어야 한다!”라고 당위를 넣어 말함 -> 우리에게 인식 불가능한 초월적 영역이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 합리적 인식을 벗어나는 것을 거부(이것이 스피노자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아예 없앤 이유).

 

 

2. 공리3이 너무나 당연한 말을 쓴 것 같지만(모든 일에는 다 규정된 원인이 있다는), 그리고 인간-특히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성적 인간-은 누구나 다 저 당연한 말에 동의할 것 같지만, 잘 생각해보면 인간은 어떤 초월적 영역, 불가지한 영역에 쉽게 유혹된다.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한 원인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종교에서의 신, 사주나 별점 같은 미신)믿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면 얼마든지 신비초월성에 이성의 영역을 내어주면서까지 믿으려고 든다. 믿고 싶은 것 앞에서는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한 원인에 대한 그럴만한 이유를 어떻게든 붙여주고 싶어하고, 심지어 그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한 원인에 어떻게든 합리를 부여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사주나 별점의 경우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인류 역사를 거쳐 쌓인 통계에 기반한다인데, 몇 세기를 걸쳐 몇십 만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운명과 성격을 탄생일과 탄생시간별로 자료를 모아 분석하고 통계를 낸 흔적으로서의 실질적 자료를 본 적 있는 사람? ‘통계에 기반한다는 아직까지 누구도 제시하지 못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그리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건 불가능한 작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기독교에서 겅경에 근거하여 신의 기적이라는 초월에 합리를 덧입히려고 하는 것은 또 어떻고.

합리가 통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신은/오컬트는 초월적 영역에 속해있는 거라서 인간의 지성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는 말로 믿고 싶은 것을 그냥 영역 밖의 어떤 미지의 세계라는 신비를 덧바른다. 물론 인간의 지성은 매우 하찮다. 하지만 자연만물을 신이 만들어냈고 조종한다는 이유를 붙여 인간의 삶에 종속시켜버리고,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하는 별자리를 미지의 영역이라는 이유를 붙여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해주는 어떤 것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 인간 중심주의 아닌가. 인간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ㅋㅋㅋ 자연만물들이 인간의 운명에 대해 다 말해주고 신앙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돈독하게 하기 위해 기독교적 수단으로 존재하겠어. 제발 인간처럼 하찮은 존재에 자연만물이 그리 관심이 있을 거라고, 거기서 인간의 운명을 읽고 점칠 수 있고 신앙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할 텐데.

아무튼 초월적 존재인 신에 대한 중세신학의 이런 비합리적인 점들이 스피노자는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식할 수 없는 영역따위를 아예 뿌리뽑아버리려는 의지가 듬뿍 담긴 공리2, 공리2에서 분명히 그은 선 위에 한 번 더 분명한 선을 긋는 공리3이 어쩐지 좋았다. 그리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공리3을 읽으면서 뭐야, 이거 너무 당연한 말이잖아?”라고 말하는 현대사회의 이성적 사람들 중에도 믿고 싶은 것앞에서는 저 공리3을 쉽게 버려버릴 사람이 많을 거라는 것을. 중세신학의 시대에 살면서 스피노자는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ㅋㅋㅋ 4-5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주나 별점을 잠깐 믿고 재미있어하고 귀담아 듣기도 했던 사람= 공리3처럼 생각하지만 믿고 싶은 것 앞에서는 지성을 잠시 버리고 초월적 영역에 쉽게 무너졌던 사람으로서 매우 찔렸고 반성했다...

아울러 공리3을 정의7과 함께 생각해보면, “자유로움에 대해 오해하는 많은 사람들이(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부정적 감정을 주거나 압박- ‘잘하고 싶다라는 성취욕까지 포함하는 압박-을 주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것을 진정한 자유로움이라고 오해하는) 합리적 인식 영역을 벗어나는 것 앞에서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게 느껴진다. 객관적 이성의 토대가 단단하지 않을 때 쉽게 빠져들 수 있는 것들이니까. 자유에 대한 오해(이성이 헐거우면 감성과 부딪히는 제약적인 것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버거우니까)와 비이성적 영역에 대한 맹신(이성 대신 감성을 건드리는 마음에 드는 것들이 주는 위안은 매우 크니까).

 

공리3 주어진 규정된 원인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결과가 따라 나오며, 반대로 아무런 규정된 원인도 주어져 있지 않다면 결과가 따라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전통적 의미에서의 공리: 인과율. (ex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은 원인을 갖고 있다.) 결과에서 출발해서,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겠지하는 것. 그럼 이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은 언제나 가능한가? 그건 아니다. 전통적인 공리는 우리가 일어난 결과에 대해 반드시 그 규정된 원인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당연히 원인은 있겠지만 불가지할 수도 있다.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하는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 ? 신은 세상 모든 일의 원인이자 근거라고 가정되어 있지만 이것이 우리가 신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거나 그가 만물을 생산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음을 함축하지 않는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거나 만물을 생산하는 방식은 신비로,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작용으로 남을 수 있다.

*** 스피노자의 공리: 이러한 초월성이나 신비의 여지를 배제한다. “주어진 규정된 원인”(<- 매우 중요한 말)이 반드시 있다= “주어진 규정된 원인에서 결과가 따라 나오는 것은 필연적이다특히 정의7을 보면 규정되다는 말이 2번이나 나온다(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a) 규정되는 실재는 자유롭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실재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b) 규정되는 실재는 필연적이라고 또는 오히려 제약되어 있다고 한다.”) , 자유로운 것은 규정되지 않은 것이 자유가 아니라 정의7처럼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실재에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자유롭고, 자유로운 실재는 다 규정되어 있고 제약적이다. , “임의로인 게 아니다. 신이 기분이 좋아서 어떨 때는 놔두고 어떨 때는 제약하고 이런 게 아니다. 그것이 자유로울 때조차도 규정된 방식, 질서, 제약이 있다. 임의가 아님.

 

3. 이런 생각을 한 적 있다. 사실 시중에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관한 책들이 제법 많이 나와있다. 요약본, 개론서, 해설서 등등. 아니, 여기까지 갈 것도 없이 <에티카> 원서도 있고, 번역서들도 여러 권있다. 이 중에 서너 권만 골라서 읽으면 되지 않을까. 보통 내가 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재미나 지식, 지혜, 저 모든 것들을 즐길 수 있는 방법적 틀, 같은 것들일 테니까.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렇게이렇게 말했고 이것은 이러저러이러저러한 것이며 여기서 우리는 이렇고저렇고를 배울 수 있다정도의, 생산적이고 삶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결론에 해당하는 메시지들을 바로 가져가고 넘어가는 것이 여러모로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에 2시간 30분씩, 네 번의 세미나를 거쳐 겨우 책에서 한 장에 해당하는 분량을 읽어내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렇게 문장 by 문장으로 해석하고 파고들면서 a-> b-> c-> d.... 그러다가 마침내 Z를 얻어내는, 결국에는 저 Z에 해당하는 것들을 얻거나 알고자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인데 그 과정인 a, b, c, d, e, f....에 이렇게 1년 이상을 통째로 쏟아 붓는 것이 과연 현명한가. 비생산적이지 않은가. 이런 현타가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10시간동안 한 장을 읽은 경험이 그동안 했던 몇 안 되는 철학공부 비스무리와 비교했을 때 훨씬 재미있었고, 이 과정을 쫓아가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철학에서 얻고 싶은 것 그 자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느리게느리게 걸어가는 시간들이 무척 황홀했다. 세미나가 끝나고 녹초가 된 상태로 집에 돌아갈 때면 늘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릴 수가 없었다.

이런 소회들을 느끼던 중에 공리4를 접했고, 스피노자가 했던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으로라는 표현이 성큼 와 닿았다. 첫 시간에 스피노자가 "어떻게 해야 자신이 갖고 있는 철학사상을 최대한 진리의 소실 없이 전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그 오랜 고민 끝에 기하학적 방식으로 집필한 것이 <에티카>라는 이야기와 하나의 맥락에서 생각하면, 나는 지금 최대한 진리의 소실 없이 전할 수 있는고민이 담긴 <에티카>최대한 진리의 소실 없이가져가기 위해서,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이 끼어들 여지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이렇게 한 문장 한 문장에 몇 시간씩을 들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아무리 이렇게해도 당연히 엄청나게 많은 진리의 소실이 있을 것이고,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으로 남는 진리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행위 자체에서 오는 감동이 크다. 이를테면 10시간의 소요 끝에 공리4에서 2부 정리7로 넘어갔을 때, 그리고 공리5에서 공리6으로 넘어갔을 때 몰려오는 커다란 감동 같은 것은 이런 방식이 아니었다면 얻을 수 없었을 것이기에.

 

공리4 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며 그것을 함축한다(involvit).

공리4는 공리3에서 자연스럽게 따라나온다(공리4는 공리3의 인식론적 귀결이다) 원인이 결과를 생산하는 방식이 어떤 매커니즘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결과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결과를 필연적으로 산출하는 원인에 대하여, 또는 원인이 결과를 생산하는 필연적인 규칙이나 법칙에 대하여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 없이는 결과 또는 사건에 대한 인식은 불완전하고 부적합한 것에 머물게 된다.

*** 공리4= 원인을 모르면 결과를 알 수 없다. 스피노자의 말을 더 자세히 풀어보면, 원인을 모르고도 결과를 알 수는 있는데,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으로(=부적합한 방식으로)” 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이런 식이다. ex “사람은 모두 죽는다.” 다들 이 사실을 알지만 왜 인지는 잘 모른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경험적으로 그냥 아는 것이다. “불은 물로 끌 수 있다근데 왜? 이것도 앎은 앎이지만 결과아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부적합한 앎. 물로 못 끄는 불도 있을 수 있는데, 이 경우 원인을 알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텐데 모르면 거기서 끝인 것이다.

 

*** 2부 정리7 44p. 각각의 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고-> 정리7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 정리7은 공리4을 펼쳐놓은 이야기다. 증명 이는 1부 공리4로부터 명백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원인지어진 것에 대한 관념은, 이것이 그 결과가 되는 그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신의 사유 역량은 신의 현행적인 행위 역량과 동등하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곧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신의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

주석 곧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 가령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이것 역시 신 안에 존재한다)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는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한 하나의 동일한 인과 연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신은 오직 그가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만 어떤 관념, 가령 원의 관념의 원인이며, 오직 그가 연장되는 실재인 한에서만 원의 원인이라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니라 원의 관념의 형상적 존재는 가까운 원인으로서의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지각될 수 있고, 이 다른 사유 양태 역시 또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그럴 수 있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재들이 사유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동안에는 우리는 자연 전체의 질서, 또는 인과 연관을 사유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해야 하고. 그것들이 연장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한에서는 자연 전체의 질서는 마찬가지로 연장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되어야 하며, 다른 속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그리하여 신은 사실 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한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실재들의 원인이다.

 

3-1. 2부 정리7은 공리4를 펼쳐 풀어놓은 것이다. 저 공리4의 한 문장이 2부 정리7의 증명과 따름정리와 주석을 거치면서 신은 사실 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한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실재들의 원인이다라는 커다란 결론으로 이어지는 저 과정이 약간 뭉클할 정도로 멋졌다. 아이슬란드 952도로가 문득 떠올랐다.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아이슬란드의 고속도로 초입. 그러나 계속 차를 타고 가다보면 말문을 잃고 광대한 우주 같은 풍광을 펼쳐 보여주는 그 잊지 못할 도로. 지금 내가 1부의 첫 시작에서 배우고 있는 것들은 어디로 닿을지 모를 커다란 나무를 품고 있는 작은 씨앗들.

 

공리5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못한 것들은 서로 이해될 수 없다. 또는 하나의 개념이 다른 것의 개념을 함축하지 않는다.

공리 3과 공리4가 원인과 결과의 보편성, 그리고 그 인식의 보편성을 함축하는 반면, 공리5는 이러한 보편성에는 제약이 존재한다고 언표한다. 곧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공통적인 것을 갖는 것들사이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정의2에서, 그리고 뒤에서 제시할 표현대로 하면 같은 속성을 공유하는 것들 사이에서만, 다시 말해 하나의 속성 안에서만 실재들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게 된다. 한 물체는 다른 물체를 움직일 수 있지만, 물체가 관념을 움직일 수 없고, 관념도 물체를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 공리3, 4를 한정하는 의미. 아무것도 공통적인 것을 갖지 못하는 것들은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될 수 없다. => 원인과 결과가 성립하려면 공통된 것이 있어야 한다. , 공리3, 4에서 말하는 인과관계가 속성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속성과 속성 사이에서, 한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와 다른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설명할 수 없다.

*** 근데 이렇게 되면 무슨 질문이 제기될 수 있냐면, 그렇다면 연장속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고, 사유속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3 속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고, 4 속성, 5 속성....등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을 텐데, 무수히 많은 속성 안에서의 인과관계들, , 서로 독립적인 무한한 속성의 체계들이 있고, 각각의 속성은 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체계를 갖고 있는 것인데. 그럼 우주는 여러 개의 우주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기에 대한 답은 공리6에 나온다.

 

공리6 참된 관념은 그것의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

여기에서 합치하다convenire의 번역이다. 이것은 진리는 지성과 사물의 일치라는 중세철학 이래의 기본원리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cf 2부 정리4적합한 관념에 대한 정의

*** “합치해야 한다는 말이 2부에서 앞으로 엄청 자주 나온다. convenire-> correspond의 어근을 가진. 오래전에 헤어진 오누이가 반쪽짜리 거울을 갖고 있다가 나중에 다시 만나서 합치하는 것 같은.

*** 중세철학: “진리라는 것은 지성과 사물의 일치다“ 2부에서 adequatioconvenire가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참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사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 생각이 원래의 사물과 딱 들어맞는 것.

*** 왜 공리5 뒤에 공리6이 왔을까. 저 의문, 우주란 것이 다수의 우주로 존재하는 것 아닌가에 대한 답. 그리고 답은 아니다. 참된 관념은 대상이랑 합치해야 하니까(지성-사유속성과 사물-연장속성이 일치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다른 속성들끼리는 인과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지만, 사유속성 속에서 존재하는 인과관계의 질서는 물체(연장속성) 속에서 존재하는 인과관계의 질서와 합치한다. (, 공리6은 매우 큰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속성이 여러 개 있다고 해도, 그것이 각각 별도의 합리성, 인과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 하나의 속성에서 표현되는 인과관계는 각각 다른 속성에서의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것. 우리가 어떤 관념이 진리라고 하려면 그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

 

3-2. 앞에서도 말했지만, 공리5에서 공리6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와...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공리6의 준비된 답으로 모든 게 해결되다니. 더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는 식의 유독 짧은 문장이지만, 여기에 함축된 진리의 양은 굉장히 크다. 그러니까 3강 때 읽었던 정의6과 그에 따른 강의 내용과도 통하는 부분.

 

4. 인상적이었던 질문.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의 두 가지 속성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전부라고 확정적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음으로해서(그가 확정적인 것에 대해서 얼마나 확정적으로 말하는지 우리는 공리1에서도 이미 봤다ㅋㅋ) 인지 하지못하는 다른 무한한 속성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 열어둔 스피노자의 이론을 두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다른 무한한 속성의 가능성에는 뭐가 있을까를 생각해본 상상력이 인상적이었다.

 

- 질문: 무한한 속성이라는 것이 계속 무한하게 있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인간 존재들의 생명체 내에서 나타나는 것-사유속성과 연장속성- 이외의 무한한 속성을 생각했을 때 가능한 형태는, 그 생명체가 어떤 생명체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다른 생명체 내에서 나타나는 질서 아니면 생각해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속성이 다차원이라면 (인간이 사유/연장 속성을 담당하듯이) 그 다차원을 이루는 부분들은 다른 어떤 생명체 내의 질서가 아닐까라는 질문

- : 그렇게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스피노자 자신이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놓은 바가 없어서. 스피노자는 리가 정신하고 실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유속성 연장속성 두가지밖에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속성은 무한하게 많다이렇게만 이야기했습니다. 아마 제3의 속성 제 4의 속성 이런 것도 존재를 하고 스피노자적 관점에 따르면 더 무한하게 많이 존재할텐데, 그런데 스피노자가 그런 제안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정신과 신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밖에 인식할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3의 속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하려면 우리가 신체와 정신이외의 제3의 양태를 갖고 있다는 제시가 되어야 할 텐데 그런 게 어떤 것인지 스피노자가 그런 여지를 허용했는지, 그것은 좀 논의의 여지는 있죠. 물론 이제 우리가 꼭 스피노자에 얽매이지 않고도, 스피노자적인 방식으로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신체와 정신의 관계라든가.

 

5. ‘시간이라는 개념을 매우 하찮게 보는ㅋㅋㅋ 스피노자의 이야기 어쩐지 좋았다. 그의 삶과도 무척 어울린다. 특히 스피노자가 시간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가, 스피노자의 진리는 영원성의 차원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 너무 좋았다. 스피노자에게 시간은 그저 추상적이고 상상적인 양, 13시간 5년처럼 사람이 외부의 대상을 판단할 때 상상적으로 인위적으로 재단하는 양의 단위들 중 하나. ”그것은 스피노자가 철학적으로 사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대체 이 하루를 11시간 단위로 쪼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그리고 그걸 왜 철학적인 사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냐. 이게 스피노자의 생각입니다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 시간은 단지 단위일 뿐. 본질과 진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좋아!!

 

- : 스피노자에게 시간과 공간은 우연속성들, 양태적인 차원에 들어가는 것. 물리적 차원의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 어떻게 보면 상상적이고 임의적인 것. 그러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념은 1미터, 1센치, 1, 1시간 이렇게 인위적으로 절단해서 생각하는 상상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이다. 스피노자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아주 사소하게 생각했다. 연장속성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정도(뭔가 아인슈타인적이다) 시간과 공간이 상당히 중요한 철학적인 문제가 된 것은 뉴턴과 라이프니츠, 칸트를 거치면서다. 스피노자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스피노자가 만약 자연철학에 대한 책을 썼다면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썼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에티카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 질문: 근데 칸트는 시간을 사유속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스피노자는 시간을 연장속성으로만 취급한 거예요? 사유속성으로 전혀 고려하지 않고?

- : . 스피노자의 진리는 영원성의 차원에 있으니까 시간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답, 너무 낭만적이고 좋지 않은가)

- 질문: 시간을 배제한 사유가 있을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변해 가는데 스피노자가 시간을 연장으로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걸 분리해서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연장속성만인지 전 잘... 양쪽 속성에 다 내재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 : 칸트가 생각하는 시간과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은 다른데 그걸 같은 걸로 여기니까 혼동하는 겁니다. 스피노자가 시간을 연장속성이다라고 확고하게 귀속해놓지는 않았지만 스피노자의 시간이 연장의 차원에 속해있는 것은 거의 부정하기 힘든 점이다.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을 다른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같은 차원에 놓으면 곤란합니다. 다른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시간을 스피노자는 시간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지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지속영원이라고 스피노자가 부르는 그 두 가지에는 또 차이가 있죠.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의 개념은 범위가 그리 넓지 않습니다. 스피노자가 시간이라는 것을 아주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은 아주 인위적으로 절단된, 단위로서의 시간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칸트나 다른 철학자들,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질문: 스피노자의 시간을 그럼, 연장의 누적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요?

- : ... 근데 스피노자의 시간은 아주 단순한 겁니다. 스피노자가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추상적인 양이에요. 추상적인 양. 1213초 할 때 이렇게 사람이 외부의 대상을 판단할 때 상상적으로 인위적으로 재단하는 양의 단위들 중 하나가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시간입니다. 추상적이고 상상적인 양이라고. 그것은 스피노자가 철학적으로 사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대상의 본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대체 이 하루를 1231시간 단위로 쪼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그리고 그걸 왜 철학적인 사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냐. 이게 스피노자의 생각입니다.

 

6. 관념의 외연을 가늠해보는 우아하고 철학적인 계산법. 1) 표상적 실재성/ 형상적 실재성 2) 우리가 알 수 없는 속성 안에 담겨있는 양태들을 표상하고 있는 관념 3) 참된 관념= 자신의 계산을 다하고 있는 관념(<- 이 표현이 참 또 좋았네)과 관념이 없는 대상 4) 허구적 상상적인 관념들

 

- 질문: 공리6에서 참된 관념은 그것의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참되지 않은 관념들은 대상이 있는지. 참되지 않은 관념에 대한 대상이 따로 있다면 개수가 같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관념이 더 많고 대상이 더 적은 것인지.

- : 관념의 외연이 대상의 외연보다 큰 것 아닌가, 가 질문의 내용인데. 속성과 속성의 외연의 차이의 문제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고 특히 2부에 가게 되면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2부의 평행론에 가게 되면. 스피노자는 (요즘 철학자들한테는 이해하기 어려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관념에 대해 두 가지 지위를 부여합니다. 1) 관념이라는 것은 표상적 실재성, 표상적 본질을 갖는다. essential of objectiva(objective) 근데 이게 객관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2) 형상적 본질 essential of formalis(formal) -> 독자적 실재. essential of objective/ essential of formalis 어떤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그 관념이 표상하는 실재가 있다는 말.

1) ,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그것이 표상하는 어떤 대상, 실재와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되는 관념이 바로 표상적 본질.

2) 근데 이런 차원만 갖고 있다면 단순한데,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것은 또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는 관념은 뭐냐면. 관념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과 마찬가지로 관념도 독자적 실재라는 것. 관념이라는 것도 독자적 실재다. 단지 관념 바깥에 있는 어떤 대상을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 자체도 독자적인 실재가 된다는 말.

1) + 2) 그러면 어떤 복잡한 문제가 생기게 되냐면 형상적 본질을 갖는 이 관념을 표상하는 관념이 또 있는 거예요(마트로슈카처럼). 형상적 본질로서, 하나의 독재적인 실재로서의 관념 A가 있다고 합시다. 이 관념 A에는 역시 표상적 측면이 있고 형상적 측면 두 가지가 있어요. 그리고 여기 형상적 측면을 갖는 관념A를 표상하는 또 다른 관념B가 있다고 합시다. 관념A를 표상하고 관념A를 대상으로 하는 관념. 그러면 이 관념B도 또한 표상적 측면과 형상적 측면으로 나뉘구요, 그러면 관념B를 표상하는 또 다른 관념C가 또 있겠죠. 이렇게 계속 D E F G....로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관념들이 모여서 구성하는 사유속성의 세계는 연장속성의 세계보다 외연이 더 클 수밖에 없죠. 여기에는 관념이 있으면 관념을 표상하는 또 다른 관념이 있고 또 다른 관념이 또 있고.

3) 또 어떤 점이 있냐면, 관념이 표상하는 대상에는 연장속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제 3의 속성, 4의 속성, 5의 속성 안에 담겨있는 양태들도 다 관념이 표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유속성의 범위가 훨씬 크죠. 다른 속성에 비해서. 그러면 또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죠. 이럴 경우에 우리가 정확하게 속성과 속성의 평행이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냐. 사유속성이 다른 속성과 동등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냐. 사유속성이라는 것이 뭔가 특권적인 지위를 갖고 있는 게 아니냐 이런 질문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의 외연 문제는 그 자체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4) 그리고 지금 제기한 질문은 또 다른 측면을 갖고 있어요. 왜냐면 지금 얘기했던 관념들은 다 말하자면 참된 관념들인데 다시 말하면 자신의 계산을 다하고 있는 관념들에 관한 이야기인데 지금 질문하신 것처럼 관념 없는 대상의 경우도 있구요. 또 그런 경우도 있잖아요. 허구적인 관념이라든가 날개달린 말이라든가 뿔이 달린 말이라든가 가공의 어떤 대상과 관련한 관념들이 있죠. 그러니까 허구적 상상적인 관념들. 그렇다면 이런 관념들의 지위는 어떤 것이고, 이 관념들은 아무런 상응하는 대상이 없는 관념들인데 이 관념들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형상된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냐. 이런 질문들이 제기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정리8의 두 번째 주석을 할 때 한 번 다시 이야기를 합시다.

 

7.

- 질문: 보통 우리가 실체라고 말하면 속성을 담지하고 있는 담지자지 속성과 교환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 : 그것은 우리가 보통 실체나 속성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이고, 스피노자 당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실체라는 것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속성이라는 것은 실체에 깃들어 있는, 실체에 의존하는 성질이고. 그래서 다들 어떻게 실체와 속성이 같냐는 의문을 가졌었고 더 이해하기 힘들어했던 것은 왜 실체가 하나냐.

- 질문: (다른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실체가 하나라구요?!

- : 아까 논증구조에서 이야기했듯이 정리8까지는 실체가 하나라는 이야기는 아직 안 나오죠. 정리8까지는 실체는 정의상 다수가 존재한다는 가정이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 나는 어쩌다보니 예습을 하게 되어서 실체는 하나고, 그것은 신이고, 자연과 물체는 양태고를 이미 아는 상태로 강의에 왔는데 저렇게 화들짝 놀라시는 분들이 좀 있는 거 보니 아예 모르는 채로 정리 1, 2, 3, 4, 5를 혼돈의 상태로, 대체 여기서 무슨 논증을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라는 혼란스럽고 희미한 상태에서 실체-> 실체를 이루는 속성들은 무한하다 -> 실체는 무한할 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아마도 하기 쉬울 것 같은데 여기서 -> 아니다, 실체는 하나야! 에에에에??? 이런 과정을 느꼈다면, 흐릿한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눈앞에 있는 사물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다가 조금씩 식별 가능해지는 그런 과정을 실시간으로 겪었다면 저런 감동과 놀라움이 더 극적으로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 스포일러를 이미 알아버린 느낌인데, 그래도 여전히 놀랄 일들이 너무나 많을 테니까.

 

8.

정리5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증명 만약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구별되는 실체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속성들의 차이나 변용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어야 한다(앞의 정리에 의해). 만약 속성들의 차이에 의해서만 구별된다면, 오직 동일한 속성을 지닌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는 점이 인정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변용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된다면, 실체가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서기 때문에(정리 1에 의해), 일단 변용들은 제쳐두고 실체를 그 자체로 고려한다면, (정의3과 정의6에 의해) 참되게 고려한다면, 한 실체는 다른 것(실체)과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위의 정리에 의해) 다수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할 것이다. Q.E.D.

*** 두 개 이상의 실체를 구별하는 두 가지 방식은 1) 속성 2) 변용이다.

1) 실체가 속성에 의해서만 구별된다면, 이 말은 한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속성이 다 다르니까 실체가 속성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가능한 걸 테니까 말이다!! (만약에 한 속성에 여러 개의 실체가 있다면, 그건 속성에 의해서는 구별되지 못할 것이고, 속성이 아닌 다른 것, 이를테면 변용에 의해 구별될 것이다) 하지만 속성의 차이에 의해서만 실체들이 구별된다 = 속성이 다 다르다 =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 1) 증명!

2) 실체가 변용에 의해서 구별된다면- 그런데 이것은 이 문장 자체에서 이미 불가능하다. 왜냐면, 변용은 실체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으니까. 실체가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서기 때문에(정리 1에 의해), 일단 변용들은 제쳐두고 실체를 그 자체로 고려한다면, (정의3과 정의6에 의해) 참되게 고려한다면, 한 실체는 다른 것(실체)과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키포인트는 정리1이다. “실체는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선다.”= 변용은 실체를 구별짓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변용이라는 것은 실체에 의해 성립되고, 실체에 의해 근거를 부여받는 건데 우리가 거꾸로 어떻게 변용을 가지고 실체를 구별할 수 있고, 실체를 구별하는 근거를 삼을 수가 있는가. 전제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우리가 변용에 의해서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변용뿐이다 ex) 예를 들면 컵A와 컵B를 구별할 때 (스피노자 표현으로 말하면) 변용을 가지고 구별한다. 검은색이라는 양태, 하얀색이라는 양태로. 우리가 이 두 개의 컵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은 변용의 차이로 구별하는 것이다. 변용의 차이로 구별하는 것은 실체 그 자체를 구별하는 것은 아니다.

요약: 우리가 실체를 구별하는 방식은 저 두 가지 밖에 없는데 1) 증명 끝! 2) 증명 끝!

-> 와 정말 깔끔한 논증!!! 박수쳤다. 정리4, 정리1, 정의3, 정의6이 다 동원되면서 착착착 논리를 이끌어내는 과정이라니. <에티카>가 기하학적으로 쓰였기 때문에 당연한 거겠지만, 기하학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추리소설의 서사랄지, 이런저런 공식들을 다 적용시켜서 수학의 정석 응용문제를 혼자 풀어냈을 때의 희열이랄지. 정리5의 증명을 보면서 너무 아름답다고 느꼈다. 스피노자 밑밥 까는 솜씨 대단. 만약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구별되는 실체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속성들의 차이나 변용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어야 한다(앞의 정리에 의해). 멋짐 포인트1: 그래서 1) 속성으로 구별할 경우- 그 말은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 있다는 말 (속성에 두 개, 세 개의 실체가 있다면= 같은 속성을 가진 실체가 여러 개 있다면 이 실체들을 속성을 어떻게 구분하겠는다. 실체마다 고유한 하나의 속성이 있어야, 속성으로 구분하지. 그러니까 속성으로 구별한다는 것은 이미 저 문장 자체에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 있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2) 그럼 변용으로 구별할 경우- 그런데 정의3, 정의5를 바탕으로 정리1까지 생각해보면 실체가 본성상 변용에 앞서기 때문에 변용으로는 구별조차 할 수 없다 -> 고로 결론: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 있다!!) 멋짐 포인트2: 그래서 이 정리5가 데카르트 유한실체 비판까지 이어진다는 점-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 이상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데카르트주의자다라는 생각으로 연장속성을 지니는 두 개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면 물통하고 컵. 물통과 컵은 데카르트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본성(연장속성이라는)을 지닌 두 개의 실체다. 근데 정리5가 부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저 두 개는 실체가 아니다! 라는 말. 그러니까 정리5는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를 비판하는 것이다.>>>>>

 

9.

1661927일 런던에서 스피노자에게 보낸, 올덴부르그의 세 번째 편지(강의록 2 3P)

선생께서는 제게 전해주신 공리들을 자연의 빛에 의해 알려지며 아무런 증거도 요구하지 않는, 증명 불가능한 원리들이라고 간주하시는 것인지요?” -> “자연의 빛에 의해 알려지며”. 공리라는 것은 자연의 빛에 의해 알려진다. 자명하다. 증명할 필요없이. -> 이 표현 좀 낭만적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이 뒤에 나오는 빛 이야기들도 같이 빛난다. 고풍스러운 옛 서양 지식인들의 편지.

 

공리는 저의 무딘(어두침침한) 지성에게는 썩 명증하지 않아서 아주 많은 빛을 비쳐줄 필요가 있습니다.” / “제가 가르침을 주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는 한, 저로서는 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기꺼이 고백하겠습니다.”-> 아주 많은 빛을 비쳐줄 필요가 있겠습니다귀엽다ㅋㅋ

 

스피노자의 답: “저는 이점에 관해 다투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선생께서는 그 공리들의 진리성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계십니다. 실로 선생께서는 이 공리들과 반대되는 것이 더 그럴듯하고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 스피노자가 편지로 이렇게 답할 때마다 너무나 트위터리안 같다. sns에서 논박 펼치는 어조의 근대 서양버전이야...

 

10. 철학 세미나에서 오타는 치명적이다. 빠르게 필기하는 과정에서 참되다는 것은 뭐냐를 내가 참되다는 것은 무냐로 잘못 적었는데 정말 한참 고민했다. 참되다는 것 is ? 무슨 뜻이지? 참된 것은 무다, 라니 갑자기 이 불교적 사상 뭐지? 하고 고민했는데 알고보니 오타였던 것. 수업 첫 시간에 교재 248페이지에서 삼각형의 정의가 내각의 합이 180도라고 했을 때 이는 삼각형이라는 용어의 뜻을 정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원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라는 문장을 보고 누군가가 무슨 뜻인지 질문했던 것도 비슷한 일이다. 사실 누가 봐도 오타이고, 질문하신 분도 다른 책에 쓰여있었다면 분명 오타라는 걸 알았을텐데, 철학책에, 그것도 단어 하나하나가 알 듯 모를 듯 여기에 이게? 여기서 이 표현이? 같은 놀라움을 계속 주는 애매모호한 <에티카>에 그렇게 쓰여있으니 뭔가 의미가 있을 법하게 느껴지기 너무 쉽다ㅋㅋㅋㅋ

 

문단띠로 사각형입니다.

  

5강 


1. “우리는 보통 정신- 어떤 틀/ 관념- 그 정신 안에 들어있는 하나의 아이템이라고, 정신-관념의 관계를 생각하는데, 스피노자에게는 정신도 이데아다. 그것은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단어를 훨씬 역동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표상처럼 생각하는데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았다.”

 

2. 우리가 하나의 속성만을 인식할 수 있었다면, 우리가 다른 속성들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유나 연장 중 하나만이 아니라 두 개를 인식하고, 이 두 개의 속성이 동일한 어떤 실체에 속한다. 같은 실체의 두 가지 표현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두 개가 세 개가 되든 네 개가 되든 다섯 개가 되든 무한하게 많든 상관이 없다. 왜냐면 우리는 서로 다른 속성의 공통적인 구조를 인식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속성만 인식하는 것하고 두 개의 속성의 공통된 질서, 구조를 인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생각해보지 못했는데 하나의 속성이 아니라 마침 정신과 신체라는 두 개의 속성을 인지할 수 있고, 그래서 비교/대조라는 것을 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에티카>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포인트구나. 2부 정리7 평행론도 그렇고 이 두 가지속성이 기반이 되어서 만들어진. 물론 나는 여전히 공통 질서공통 구조같은, 어떤 공통을 뽑아내기에는- 심지어 뽑아낸 이후 그걸로 이론 하나를 구축해내기에는- “두 가지요소는 너무 적다고 생각하지만. 나처럼 소심한 사람은 적어도 열 개가 아니면 공통을 말할 수 없다...)

 

3. 정리5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 이상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데카르트주의자다라는 생각으로 연장속성을 지니는 두 개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면 물통하고 컵. 물통과 컵은 데카르트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다. 근데 정리5가 부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저 두 개는 실체가 아니다! 라는 말. 그러니까 정리5는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를 비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 “실체 중에는 유한한 실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데카르트처럼 유한한 실체를 인정해야만! 같은 본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정리5에서 유한한 실체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

 

4. 정리6 하나의 실체는 다른 실체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증명 자연 안에는 동일한 속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다(앞의 정리에 의해). (정리2에 의해) 서로 공통적인 것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정리3에 의해) 하나의 실체는 다른 실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곧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Q.E.D.

*** 근데 정리6에 대해서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상이한 속성에 속하는 각각의 실체들은 모두 신에 의해서는 생산될 수 있잖아? 이때의 신은 실체가 아닐 수도 있죠. 실체보다 더 상위의 초월적인 어떤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가 따름정리를 붙였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왜냐하면 공리1과 정의35에 의해 명백한 것처럼 자연 안에는 실체들과 그 변용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정의3과 정의5에서 증명된 이 사실이 이 대목에서 신이 실체들을 생산했다를 정리7과 함께 원천봉쇄해버리는구나!!) 그런데 그것은 실체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위의 정리에 의해). 따라서 실체는 절대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Q.E.D

다른 증명 이는 모순을 통한 귀류법에 의해 좀 더 쉽게 증명된다. 왜냐하면 많은 실체가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된다면, 그것(실체)에 대한 인식은 그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해야 할 것인데(공리4에 의해) 그렇게 되면(정의 3에 의해)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함의: 창조론을 부정! 기독교 신학의 창조개념이 실체들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에 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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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정의 7개의 공리

 

공리1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 안에 있거나 다른 것 안에 있다.

*** 정의3 실체/ 정의5 양태. 정의하는 모든 것은 실체이거나 양태, 양태의 변용들이다.

 

공리2 다른 것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 말을 반대로 바꿔서 써보면, “다른 것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인식 불가능하다.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다.” -> 신비한 것. 인간의 의지로 접근불가능한 것 -> 이게 바로 칸트. -> 칸트: “속성이란 물자체. 하지만 우리는 물 자체를 알 수 없다. 현상만 알 수 있다” -> 다른 것에인식될 수 있는 것 VS 스피노자: 물 자체는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 바로 저 차이.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성격이 굉장히 잘 드러난 것이 공리2. “자신에 의해 인식이라는 개념. 그래서 공리2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사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다른 것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자신에 의해 인식될 수도 있다.”크크. 하지만 스피노자는 저렇게도 말 안 하고 매우 세게 되어야 한다라고 말함 -> 우리에게 인식 불가능한 초월적 영역이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 합리적 인식을 벗어나는 것을 거부.

*** 자신을 통해 인식된다= 나보다 상위 개념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 자체로 궁극적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된다= 그 자체가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상위의 개념에 의해 인식. ex ‘운동이 연장속성에 의해 인식되는 것.

 

공리3 주어진 규정된 원인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결과가 따라 나오며, 반대로 아무런 규정된 원인도 주어져 있지 않다면 결과가 따라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전통적 의미에서의 공리: 인과율. (ex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은 원인을 갖고 있다.) 결과에서 출발해서,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겠지하는 것. 그럼 이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은 언제나 가능한가? 그건 아니다. 전통적인 공리는 우리가 일어난 결과에 대해 반드시 그 규정된 원인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당연히 원인은 있겠지만 불가지할 수도 있다.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하는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 ? 신은 세상 모든 일의 원인이자 근거라고 가정되어 있지만 이것이 우리가 신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거나 그가 만물을 생산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음을 함축하지 않는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거나 만물을 생산하는 방식은 신비로,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작용으로 남을 수 있다.

*** 스피노자의 공리: 이러한 초월성이나 신비의 여지를 배제한다. “주어진 규정된 원인”(<- 매우 중요한 말)이 반드시 있다= “주어진 규정된 원인에서 결과가 따라 나오는 것은 필연적이다특히 정의7을 보면 규정되다는 말이 2번이나 나온다(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a) 규정되는 실재는 자유롭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실재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b) 규정되는 실재는 필연적이라고 또는 오히려 제약되어 있다고 한다.”) , 자유로운 것은 규정되지 않은 것이 자유가 아니라 정의7처럼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실재에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자유롭고, 자유로운 실재는 다 규정되어 있고 제약적이다. , “임의로인 게 아니다. 신이 기분이 좋아서 어떨 때는 놔두고 어떨 때는 제약하고 이런 게 아니다. 그것이 자유로울 때조차도 규정된 방식, 질서, 제약이 있다. 임의가 아님.

 

공리4 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며 그것을 함축한다(involvit).

공리4는 공리3에서 자연스럽게 따라나온다(공리4는 공리3의 인식론적 귀결이다) 원인이 결과를 생산하는 방식이 어떤 매커니즘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결과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결과를 필연적으로 산출하는 원인에 대하여, 또는 원인이 결과를 생산하는 필연적인 규칙이나 법칙에 대하여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 없이는 결과 또는 사건에 대한 인식은 불완전하고 부적합한 것에 머물게 된다.

*** 공리4= 원인을 모르면 결과를 알 수 없다. 스피노자의 말을 더 자세히 풀어보면, 원인을 모르고도 결과를 알 수는 있는데,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으로(=부적합한 방식으로)” 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이런 식이다. ex “사람은 모두 죽는다.” 다들 이 사실을 알지만 왜 인지는 잘 모른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경험적으로 그냥 아는 것이다. “불은 물로 끌 수 있다근데 왜? 이것도 앎은 앎이지만 결과아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부적합한 앎. 물로 못 끄는 불도 있을 수 있는데, 이 경우 원인을 알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텐데 모르면 거기서 끝인 것이다.

 

*** 2부 정리7 44p. 각각의 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고-> 정리7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 정리7은 공리4을 펼쳐놓은 이야기다. 증명 이는 1부 공리4로부터 명백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원인지어진 것에 대한 관념은, 이것이 그 결과가 되는 그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신의 사유 역량은 신의 현행적인 행위 역량과 동등하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곧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신의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

주석 곧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 가령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이것 역시 신 안에 존재한다)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는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한 하나의 동일한 인과 연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신은 오직 그가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만 어떤 관념, 가령 원의 관념의 원인이며, 오직 그가 연장되는 실재인 한에서만 원의 원인이라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니라 원의 관념의 형상적 존재는 가까운 원인으로서의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지각될 수 있고, 이 다른 사유 양태 역시 또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그럴 수 있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재들이 사유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동안에는 우리는 자연 전체의 질서, 또는 인과 연관을 사유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해야 하고. 그것들이 연장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한에서는 자연 전체의 질서는 마찬가지로 연장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되어야 하며, 다른 속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그리하여 신은 사실 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한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실재들의 원인이다.

 

공리5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못한 것들은 서로 이해될 수 없다. 또는 하나의 개념이 다른 것의 개념을 함축하지 않는다.

공리 3과 공리4가 원인과 결과의 보편성, 그리고 그 인식의 보편성을 함축하는 반면, 공리5는 이러한 보편성에는 제약이 존재한다고 언표한다. 곧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공통적인 것을 갖는 것들사이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정의2에서, 그리고 뒤에서 제시할 표현대로 하면 같은 속성을 공유하는 것들 사이에서만, 다시 말해 하나의 속성 안에서만 실재들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게 된다. 한 물체는 다른 물체를 움직일 수 있지만, 물체가 관념을 움직일 수 없고, 관념도 물체를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 공리3, 4를 한정하는 의미. 아무것도 공통적인 것을 갖지 못하는 것들은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될 수 없다. => 원인과 결과가 성립하려면 공통된 것이 있어야 한다. , 공리3, 4에서 말하는 인과관계가 속성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속성과 속성 사이에서, 한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와 다른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설명할 수 없다.

*** 근데 이렇게 되면 무슨 질문이 제기될 수 있냐면, 그렇다면 연장속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고, 사유속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3 속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고, 4 속성, 5 속성....등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을 텐데, 무수히 많은 속성 안에서의 인과관계들, , 서로 독립적인 무한한 속성의 체계들이 있고, 각각의 속성은 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체계를 갖고 있는 것인데. 그럼 우주는 여러 개의 우주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기에 대한 답은 공리6에 나온다.

 

공리6 참된 관념은 그것의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

여기에서 합치하다convenire의 번역이다. 이것은 진리는 지성과 사물의 일치라는 중세철학 이래의 기본원리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cf 2부 정리4적합한 관념에 대한 정의

*** “합치해야 한다는 말이 2부에서 앞으로 엄청 자주 나온다. convenire-> correspond의 어근을 가진. 오래전에 헤어진 오누이가 반쪽짜리 거울을 갖고 있다가 나중에 다시 만나서 합치하는 것 같은.

*** 중세철학: “진리라는 것은 지성과 사물의 일치다“ 2부에서 adequatioconvenire가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참되다는 것은 뭐냐. 우리가 사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 생각이 원래와 딱 들어맞는 것.

*** 왜 공리5 뒤에 공리6이 왔을까. 저 의문, 우주란 것이 다수의 우주로 존재하는 것 아닌가에 대한 답. 그리고 답은 아니다. 참된 관념은 대상이랑 합치해야 하니까(지성-사유속성과 사물-연장속성이 일치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다른 속성들끼리는 인과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지만, 사유속성 속에서 존재하는 인과관계의 질서는 물체(연장속성) 속에서 존재하는 인과관계의 질서와 합치한다. (, 공리6 매우 큰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속성이 여러 개 있다고 해도, 그것이 각각 별도의 합리성, 인과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 하나의 속성에서 표현되는 인과관계는 각각 다른 속성에서의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것. 우리가 어떤 관념이 진리라고 하려면 그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

 

공리7 실존하지 않는다고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이것은 공리1과도 관련되어 있다. 공리1에서 자신 안에 있는 것은 또한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과 다른 근거나 원인을 가질 수 없고 자기 자신을 원인이나 근거로 삼는 것이며, 따라서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자기원인적인 것이다. 반면 다른 것 안에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 다시 말하면 다른 것을 근거나 원인으로 지니는 것이며 따라서 자기원인적일 수 없는 것이다.

*** 실존하지 않는다고 인식될 수 있는= 자기원인적이지 않은

*** 공리7은 정의1의 대칭적인 이면이다. 정의1(“나는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것, 곧 그 본성이 실존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것을 자기원인으로 이해한다.”= 실존 없이는 본질이 성립되지 않는다)에서는 자기원인적인 것을 정의했고, 공리7에서는 자기원인적이지 않은 것은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 다른 것에 의해 규정된다.

*** 자신 안에 있다는 것- 실체의 본성// 다른 것 안에 있다는 것- 양태의 본성

*** 공리1과의 비교: 공리1에서는 인식되는 측면을 빼고 말했다.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측면= 자기보다 상위의 논리에 근거하지 않는 측면. // 공리7은 그 다른 측면에 대한 이야기. 그 다른 측면= 다른 원리가 먼저 있어야 성립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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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타임

- 질문: 무한한 속성이라는 것이 계속 무한하게 있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인간 존재들의 생명체 내에서 나타나는 것-사유속성과 연장속성- 이외의 무한한 속성을 생각했을 때 가능한 형태는, 그 생명체가 어떤 생명체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다른 생명체 내에서 나타나는 질서 아니면 생각해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속성이 다차원이라면 (인간이 사유/연장 속성을 담당하듯이) 그 다차원을 이루는 부분들은 다른 어떤 생명체 내의 질서가 아닐까라는 질문인 듯) 녹음 파일 27. 스피노자 41

- : 그렇게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스피노자 자신이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놓은 바가 없어서. 우리가 왜 사유속성과 연장속성만 예측할 수 있느냐. 스피노자 이야기는 우리가 정신하고 실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유속성 연장속성 두가지밖에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속성은 무한하게 많다. 이렇게만 이야기했습니다. 아마 제3의 속성 제 4의 속성 이런 것도 존재를 하고 스피노자적 관점에 따르면 더 무한하게 많이 존재할텐데, 그런데 스피노자가 그런 제안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정신과 신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밖에 인식할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3의 속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하려면 우리가 신체와 정신이외의 제3의 양태를 갖고 있다는 제시가 되어야 할 텐데 그런 게 어떤 것인지 스피노자가 그런 여지를 허용했는지, 그것은 좀 논의의 여지는 있죠. 물론 이제 우리가 꼭 스피노자에 얽매이지 않고도, 스피노자적인 방식으로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신체와 정신의 관계라든가.

 

- 질문: 시간 같은 경우에는 완전히 이걸 사유속성이라고 보기에는 실체가 있을 것 같고. 이렇게 완전히 구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어떻게 보는건지.

- : 강의록 3쪽에 보면 마침 올덴부르크가 셋째, 라고 한 부분의 네 번째 줄부터 보면, “두번째 공리는 자연 안에는 실체들과 우연속성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지만(스피노자가 이때만 해도 이것을 공리2로 제시했다), 많은 이들은 시간과 공간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에도 이런 의문이 나온다. 스피노자에게는 시간과 공간은 우연속성들, 양태적인 차원에 들어가는 것. 다 물리적인 차원의 성격을 갖고 있고, 어떤 경우에는 상상적인 것.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념은 인위적으로 절단해서 생각하는, 1미터 1센치 11시간, 상상적이고 추상적인. 스피노자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장속성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뭔가 아인슈타인적이네요”- 누군가 답) 시간과 공간이 상당히 중요한 철학적인 문제가 된 것은 뉴턴과 라이프니츠, 칸트를 거치면서. 스피노자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스피노자가 만약 자연철학에 대한 책을 썼다면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썼을텐데 일단 에티카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 질문: 근데 칸트는 시간을 사유속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스피노자는 전혀 사유속성으로 고려하지 않고 연장속성으로만 취급한 거예요?

: 그렇습니다. 스피노자에게 진리는 영원성의 차원에 있으니까 시간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고. (, 이 답 되게 낭만적이고 좋다)

 

- 질문: 시간을 배제한 사유가 있을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변해가는데 스피노자가 시간을 연장으로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걸 분리해서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연장속성 만인지 전 잘... 양쪽 속성에 다 내재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 칸트가 생각하는 시간과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은 다른데 그걸 같다고 하니까 혼동하는 거다. 스피노자가 시간을 연장속성이다라고 확고하게 귀속해놓지는 않았지만 그가 시간이 연장의 차원에 속해있는 것은 거의 부정하기 힘든 점이다.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을 다른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같은 차원에 놓으면 곤란합니다. 스피노자는 지금 이야기한대로라면 시간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지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지속하고 영원이라고 스피노자가 부르는 그 두 가지에는 또 차이가 있죠.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의 개념은 범위도 그렇게 넓지 않고, 스피노자가 시간이라는 것을 별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는게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은 아주 인위적으로 절단된, 단위로서의 시간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칸트나 다른 철학자들,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질문: 스피노자의 시간을 그럼, 연장의 누적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요?

: ... 근데 스피노자의 시간은 아주 단순한 겁니다. 스피노자가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추상적인 양이에요. 추상적인 양. 1213초 할 때 이렇게 사람이 외부의 대상을 판단할 때 상상적으로 인위적으로 재단하는 양의 단위들 중 하나가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시간입니다. 추상적이고 상상적인 양이라고. 그것은 스피노자가 철학적으로 사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대상의 본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대체 이 하루를 1231시간 단위로 쪼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그리고 그걸 왜 철학적인 사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냐. 이게 스피노자의 생각입니다.

 

- 질문: 공리6에서 참된 관념은 그것의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참되지 않은 관념들은 대상이 있는지. 참되지 않은 관념에 대한 대상이 따로 있다면 개수가 같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관념이 더 많고 대상이 더 적은 것인지.

- : 아주 재밌고 좋은 질문이네요. 질문이 내용은, 참되지 않은 관념은 대상과 합치하지 않은 관념이지 않느냐, 그러면 참되지 않은 관념들에 대상이 따로 없다면, 대상의 숫자보다 관념의 숫자가 더 많다는 이야기 아니냐, , 관념의 외연이 대상의 외연보다 큰 거 아니냐. 이런 질문인데 상당히 좋은 질문입니다. 속성과 속성의 외연의 차이의 문제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고 특히 2부에 가게 되면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2부의 평행론에 가게 되면. 스피노자는 (요즘 철학자들한테는 이해하기 어려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관념에 대해 두 가지 지위를 부여합니다. 1) 관념이라는 것은 표상적 실재성, 표상적 본질을 갖는다. essential of objectiva(objective) 근데 이게 객관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2) 형상적 본질 essential of formalis(formal) -> 독자적 실재. essential of objective/ essential of formalis 어떤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그 관념이 표상하는 실재가 있다는 말.

***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그것이 표상하는 어떤 대상, 실재와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되는 관념. 표상적 본질. 근데 이런 차원만 갖고 있다면 단순한데,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것은 또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는 관념은 뭐냐면. 관념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과 마찬가지로 관념도 독자적 실재라는 것. 관념이라는 것도 독자적 실재다. 단지 관념 바깥에 있는 어떤 대상을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 자체도 독자적인 실재가 된다는 말.

*** 그러면 또 어떤 복잡한 문제가 생기게 되냐면 형상적 본질을 갖는 이 관념을 표상하는 관념이 또 있는 거예요(마트로슈카처럼). 형상적 본질로서, 하나의 독재적인 실재로서의 관념 A가 있다고 합시다. 이 관념 A에는 역시 표상적 측면이 있고 형상적 측면 두 가지가 있어요. 그리고 여기 형상적 측면을 갖는 관념A를 표상하는 또 다른 관념B가 있다고 합시다. 관념A를 표상하고 관념A를 대상으로 하는 관념. 그러면 이 관념B도 또한 표상적 측면과 형상적 측면으로 나뉘구요, 그러면 관념B를 표상하는 또 다른 관념C가 또 있겠죠. 이렇게 계속 D E F G....로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관념들이 모여서 구성하는 사유속성의 세계는 연장속성의 세계보다 외연이 더 클 수밖에 없죠. 여기에는 관념이 있으면 관념을 표상하는 또 다른 관념이 있고 또 다른 관념이 또 있고.

*** 여기에다가 또 뭐가 있냐면 관념이 표상하는 대상에는 연장속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제 3의 속성, 4의 속성, 5의 속성 안에 담겨있는 양태들도 다 관념이 표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유속성의 범위가 훨씬 크죠. 다른 속성에 비해서. 그러면 또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죠. 이럴 경우에 우리가 정확하게 속성과 속성의 평행이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냐. 사유속성이 다른 속성과 동등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냐. 사유속성이라는 것이 뭔가 특권적인 지위를 갖고 있는 게 아니냐 이런 질문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의 외연 문제는 그 자체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 그리고 지금 제기한 질문은 또 다른 측면을 갖고 있어요. 왜냐면 지금 얘기했던 관념들은 다 말하자면 참된 관념들인데 다시 말하면 자신의 계산을 다하고 있는 관념들에 관한 이야기인데 지금 질문하신 것처럼 관념 없는 대상의 경우도 있구요. 또 그런 경우도 있잖아요. 허구적인 관념이라든가 날개달린 말이라든가 뿔이 달린 말이라든가 가공의 어떤 대상과 관련한 관념들이 있죠. 그러니까 허구적 상상적인 관념들. 그렇다면 이런 관념들의 지위는 어떤 것이고, 이 관념들은 아무런 상응하는 대상이 없는 관념들인데 이 관념들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형상된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냐. 이런 질문들이 제기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정리8의 두 번째 주석을 할 때 한 번 다시 이야기를 합시다.

 

*

에티카 1부의 논증구조 260p.

1. 전반부: 정리1-15

=실체=자연의 논리적 구조. 다시 말하면 신 또는 실체는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이루어진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라는 것. 그리고 이런 존재자는 딱 하나만 존재한다.

1) 정리1-8

데카르트의 유한실체 개념에 대한 비판. “모든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다” (정리8)

모든이라는 말은 적어도 하나 이상이라는 건데(속성은 무한하니까) 근데 그러면 실체가 다수 존재하는가 하나만 존재하는가. 스피노자의 답: 정리9-15. 아니다. 하나다. 그 하나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

2) 정리9-15

복수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무한한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

신 또는 각자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한다”(정리11)

정리9-11이 가장 핵심적이다->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인 신이 실존한다!!

 

*

정리1 실체는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선다.

= 실체가 변용들의 근거가 된다 = 변용들은 실체를 근거로 해서 성립될 수 있다.

증명 이는 정의35에 의해 명백하다

*** 정의3 실체 정의5 양태. > 연장> 운동

*** 실체는 다른 것을 전제하지도 않고 없이도 존재/인식가능한 본성상, 다른 것을 전제해야만 하고 없으면 존재 불가능한 양태에 앞선다.

 

정리2 상이한 속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는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다.

증명 이 또한 정의3에 의해 명백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것(실체)은 자신 안에 존재해야 하고 자신을 통해 인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곧 그 개념의 형성이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실체는 독립적/자율적이니까-> 어떤 실체가 있어도 다른 실체에 근거하지도 않고 연관도 없는 것이다(독립적이니까!)

정리3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 것들은 서로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증명 만약 그것들이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다면, (공리5에 의해) 그것들은 서로 이해될 수 없다. 따라서 (공리4에 의해) 서로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이것이 증명되어야 할 점이었다. Q.E.D.

 

정리4 서로 구별되는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재들은 실체들의 속성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든가 아니면 그 실체들의 변용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다수의 사물들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다수의 사물들이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다수의 사물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거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1) 속성의 차이에 의해서 2) 변용의 차이에 의해서. , 사물들은 속성에 의해서 달라지든가 변용에 의해서 달라지든가.

증명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 안에 존재하든가 다른 것 안에 존재한다(공리1에 의해). (정의3과 정의5에 의해) 지성 바깥에는 실체들과 그 변용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지성 바깥에는 실체들 또는 같은 것이지만 (정의4에 의해) 그 속성들과 그 변용들 말고는, 다수의 실재들이 서로 구별될 수 있게 해주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Q.E.D.

*** 지성 바깥에는= 자연 안에는, 실제로는

*** 지성 바깥에는 실체들 또는 같은 것이지만 그 속성들 -> 스피노자는 실체들과 속성들을 같은 걸로 제시하고 있다 by 정의4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 러니까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니까 속성은 실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초기 편지를 보면 실체에 대한 정의와 속성에 대한 정의가 사실 똑같다. <에티카>에 와서 스피노자가 속성에 대한 정의를 정의4로 이야기했지만 편지에서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에티카>에서의 실체의 정의와 같은 걸로 말했다.

 

*** 질문: 보통 우리가 실체라고 말하면 속성을 담지하고 있는 담지자지 속성과 교환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 그것은 우리가 보통 실체나 속성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이자, 스피노자 당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실체라는 것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속성이라는 것은 실체에 깃들어 있는, 실체에 의존하는 성질이고. 그래서 다들 어떻게 실체와 속성이 같냐는 의문을 가졌었고 더 이해하기 힘들어했던 것은 왜 실체가 하나냐.

질문: (다른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실체가 하나라구요?!

: (모두 웃음) 아까 논증구조에서 이야기했듯이 정리8까지는 실체가 하나라는 이야기는 아직 안 나오죠. 정리8까지는 실체는 정의상 다수가 존재한다는 가정이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 질문: 그럼 정신이랑 물체가 같은 건가요? 실체라는 점에서.

: 질문에 이미 문제가 있는데, 일단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체를 모두 실체라고 봤습니다(- 무한실체, 정신/물체- 유한 실체).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물체는 실체가 아니라 양태입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그런 말을 안 하고 있죠. 그래서 이 시점에서는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어요. 아직까지 스피노자는 실체가 뭐다, 양태가 뭐다라고 그 사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고 있지요. 그저 정의3과 정의5만 이야기했을 뿐. 왜냐면 지금 스피노자의 논증의 목표는 과연 실체라는 것이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든 간에) 과연 유한할 수 있느냐 아니면 실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무한하냐.”, 바로 이걸 논증하는 과정이거든요. 만약 실체가 무한하다는 것이 입증이 되면 정신이나 물체 같은 것이 실체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게 입증이 됩니다. 정신이나 물체는 유한하니까. 그럼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것이 증명이 됩니다. , 일단 여기서 논증의 목표는 실체라는 것을 정의3 이라고 내린다면 그 실체에 유한한 실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느냐그것입니다.

 

*** 다시 증명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문장을 봅시다. 따라서 지성 바깥에는 실체들 또는 같은 것이지만 (정의4에 의해) 그 속성들과 그 변용들 말고는, 다수의 실재들이 서로 구별될 수 있게 해주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다수의 실재들이 서로 구별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속성들과 변용들 뿐이다. , 사물A, 사물B, 사물C를 구별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실체냐! 양태냐! = 이것이 어떤 속성에 속하는 실체인지, 어떤 변용에 따라 구별되는 양태인지. 이것이 사물들을 구별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방식이다. 이것 외에 우리가 사물을 구별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은 없다.

 

정리5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 , 같은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실체는 하나뿐이다. 어떤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연장 속성에는 연장 속성에 속하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 사유 속성에는 사유속성에 속하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

*** 데카르트의 유한실체가 가능하려면, 같은 속성을 지닌 다수의 실체가 존재해야 한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의 유한실체에서처럼 물체가 실체라면-> 물체는 연장속성을 가질 테고-> “연장속성이라는 동일한 속성을 가진 물체라는 것은 다수이기 때문에 -> “같은 본성을 지닌 실체는 다수다라는 결론. 그런데 정리5에서 스피노자는 이와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같은 본성을 지닌 실체는 하나다라고.

*** 정리5에서 일단 논증의 한 마디가 끊어진다. 정리8까지에서 펼쳐질 스피노자 논증의 한 부분(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 데카르트 비판의 한 측면이 여기서 증명이 되는 것이다.

증명 만약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구별되는 실체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속성들의 차이나 변용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어야 한다(앞의 정리에 의해). 만약 속성들의 차이에 의해서만 구별된다면, 오직 동일한 속성을 지닌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는 점이 인정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변용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된다면, 실체가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서기 때문에(정리 1에 의해), 일단 변용들은 제쳐두고 실체를 그 자체로 고려한다면, (정의3과 정의6에 의해) 참되게 고려한다면, 한 실체는 다른 것(실체)과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위의 정리에 의해) 다수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할 것이다. Q.E.D.

*** 두 개 이상의 실체를 구별하는 두 가지 방식은 속성/ 변용이다.

1) 실체가 속성에 의해서만 구별된다면, 이 말은 한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속성이 다 다르니까 실체가 속성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가능하니까. 만약에 한 속성에 여러 개의 실체가 있다면, 그건 속성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속성 내에서 다른 것, , 변용에 의해 구별되는 거겠죠. 하지만 속성의 차이에 의해서만 실체들이 구별된다= 속성이 다 다르다=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

2) 실체가 변용에 의해서 구별된다면, 그런데 이것은 이 문장 자체가 벌써 불가능하다. 왜냐면, 변용은 실체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으니까! 실체가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서기 때문에(정리 1에 의해), 일단 변용들은 제쳐두고 실체를 그 자체로 고려한다면, (정의3과 정의6에 의해) 참되게 고려한다면, 한 실체는 다른 것(실체)과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키포인트는 정리1이다. “실체는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선다.”= 변용은 실체를 구별짓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변용이라는 것은 실체에 의해 성립되고, 실체에 의해 근거를 부여받는 건데 우리가 거꾸로 어떻게 변용을 가지고 실체를 구별할 수 있고, 실체를 구별하는 근거를 삼을 수가 있는가. 전제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우리가 변용에 의해서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변용뿐이다 ex) 예를 들면 컵A와 컵B를 구별할 때 (스피노자 표현으로 말하면) 변용을 가지고 구별한다. 검은색이라는 양태, 하얀색이라는 양태로. 우리가 이 두 개의 컵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은 변용의 차이로 구별하는 것이다. 변용의 차이로 구별하는 것은 실체 그 자체를 구별하는 것은 아니다.

요약: 우리가 실체를 구별하는 방식은 저 두 가지 밖에 없으니 증명 끝!

*** 여기까지해서 정리5까지 해서 데카르트 비판의 한 측면이 끝났다.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 하나의 속성을 갖는 두 개 이상의 실체는 없다!가 증명된 것. 근데 그 실체가 유한한지 무한한지는 아직 증명이 안 됐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정리6- 정리8까지이다.

 

*

강의록2 3p. 올덴부르그의 3번째 편지. 1661927일 런던에서 스피노자에게 보낸 편지

당대의 사람들이 스피노자를 잘 이해 못했던 이유는 아마 칸트/데카르트적인 생각에 그동안 철저히 매몰되어서 일 것 같다. 그만큼 스피노자가 새로웠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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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성개념을 둘러싼 논쟁. 정의4의 저 한 문장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 특히 저 한 구절, “지성이 지각하는한 구절을 두고 많은 연구와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논의가 엎치락뒷치락하며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 철학의 세계. 철학자들은 추리소설 속 탐정들과도 비슷하다. 특히 움베르트 에코나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풍의 소설 속 탐정역할을 맡은 사람들. 명쾌하지 않은 한 구절을 붙들고 숨겨진 뜻을 해석하거나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열쇠가 될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대한 소스들을 모으고, 이리저리 이어붙여 하나의 가설을 만들고, 진리로 증명해내기 위해 연구하고 논문을 쓰고. 이런 해석에는 당연히 주관적인(이번 논쟁의 핵심인 그 문제의 주관적’!) 시선이 들어가는데 이 시선을 통해 <에티카>를 잠시 바라보는 것도 마치 하나의 사건을 두고 여러 화자들의 시점이 교차하는 추리소설 같아 흥미진진하다.

일단 헤겔의 해석, 흥미로웠다. 사실 나는 헤겔의 정전을 제대로 완독한 적이 없고 늘 이런 식으로 다른 철학서에 레퍼런스로 들어가 있을 때 해당 부분을 찾아보고 발췌해서 읽는 게 전부였다. (철학서는 아니지만) <다뉴브>에서 헤겔과 키르케고르를 대비한 대목이 내가 헤겔과 잠시 코드가 통했던 유일한 순간이었고, 주디스 버틀러 속에서도 헤겔은 다른 철학자들의 이론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에서 헛다리짚는 예로 계속 나오더니 스피노자 수업에서도 그런 예로 또다시 헤겔을 만났다ㅋㅋ 아무튼 여기서 인상적이었던 것들.

 

A. 주관적 해석론

헤겔에서 유래한 이 관점. 정의4에서 지성이 지각하는이라는 구절을 주목. 이 구절이 속성이 실체의 객관적 본질이 아니라 인간지성이 실체를 파악하는 하나의 관점이라는 점을 말해준다고 간주한다. 20세기 전반까지 이 관점에 대한 상당수의 지지자들이 존재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스피노자가 속성과 특성, 상상적 성질 등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이유를 해명하지 못함. 이 관점에 따를 경우 속성자체가 이미 주관적인 성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는 스피노자가 속성들을 실체의 객관적 본질로 제시하는 다른 구절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1부 정리 19/ 두 번째, 네 번째 편지 등)

 

*** 헤겔이 말한 스피노자의 한계: 스피노자의 철학은 절대자(=자기원인)에서 출발한다. 에티카 봐라. 정의1에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부터 딱 나오잖아. 절대자-> 속성 -> 양태, 이렇게 넘어가는 구조인데, 저것은 가장 완전한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내려가는 것(하강하는 것, 퇴락해가는 것) 말고는 운동할 방법이 없는 구조. 절대자에서 속성으로 내려오면 여기서부터 벌써 절대자의 완전성이 감소한다. 지성에 의해 실체가 지각되는 것<- 봐봐 벌써 여기서 인간적 유한성이 들어간다. 양태로 오잖아? 그럼 절대자에게서 볼 수 있던 완전성은 이미 사라지고 양태에 오면 완전히 유한한 것. 타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유한성/ 불완전성. 그리고 양태= 인간

 

*** , 스피노자 이론에서는 인간에게 주체성이 없다. 절대자에서 출발했고 그랬기 때문에 계속 내려가야 하는 하강의 길 밖에 없다. 이러면 안 된다. 진보도 했다가 뒤로 잠시 갔다가 앞으로도 나아가야 역사가 만들어지고, 이성의 진보가 가능해지는데 계속 내려가기만 한다. = 실체가 실체로만 머물러 있다. 실체가 주체가 되어야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실체가 영원히 1장 그 상태로 머무르니 아무 가능성도 없다. 그래서 내가 자기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는 절대자로 다시 개념화하겠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스피노자 철학과의 대결이 헤겔철학의 추동력.

 

*** 헤겔이 재구성한 이 이미지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은 세 가지 측면에 따라 비춰진다. 첫째는 수학의 형식적 방법을 철학에 도입함으로써, 지성의 관점의 한계에 갇혀 있는 모습이다. 둘째는 시초에 절대적으로 충만하게 정립되어 더 이상 역동적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외재적인 속성의 관점에 따라 추상적으로 반성되고 있는 실체 또는 절대자의 한계. 마지막으로 이러한 시초의 절대자로부터 속성으로, 다시 여기서 양태로 점점 더 퇴락해가는 유출론적 체계의 모습인데, 이는 스피노자가 순수한 부정주의에 빠져 부정적인 것의 구체적인 운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 헤겔이 스피노자를 잘못 해석한 결과)

->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의 해석이 오늘날 속성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론의 시발점. 많이들 받아들였다.

 

*** 울프슨의 주장: 스피노자 속성개념은 매우 주관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이건 중세유대사상에서 매우 유명하게 퍼져있던 개념이다. 여기서는 이렇게 말한다. “속성이 무한하게 많이 있고, 속성은 실체/신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는가. 속성이 실체의 본질인데, 이 본질이 이렇게 무한하게 많다면 이게 어떻게 (유일하다고 알려진) 신일 수가 있는가. , 신의 유일성 문제에 부딪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세 유대신학은 신은 초월적이라 신의 속성을 개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초월자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파악하겠는가. 이미 인간의 능력치 밖에 있는 사람인데.) 그렇기 때문에 단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신이 이런 본질을 가졌을 거라고 단지 지각만 할 수 있다. -> , 객관적이지 않다. “주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B. 객관적 해석론

20세기 후반 이후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속성을 실체의 객관적 본질로 파악하고 있음. 마샬 게루/ 질 들뢰즈/ 피에르 마슈레/ 에드윈 컬리 등 <- 스피노자 연구의 대가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왜 속성에 대한 정의에 지성이 지각하는이라는 규정이 나와있는지 더 설명해주어야 한다. (지성이 지각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냐? <- 이에 대한 답은 2부 정리 7 주석)

더 나아가 속성이 실체의 객관적 본질을 구성하고 속성들이 하나가 아니라 다수, 더 나아가 무한하게 많이 존재한다면, 무한하게 많은 본질을 가지는 실체가 어떻게 유일한지, 어떻게 통일성을 가지는지 설명해주어야 함. <- 그래서 최근 2-3년간 다시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주관적 해석론>을 복원하려는 움직임.

 

*** 마샬 게루(20세기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1부 정의 4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 2부 정리7의 주석 곧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사유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연장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1) 헤겔이 스피노자를 절대자-> 속성-> 양태, 가장 완전한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내려가는 것, 하강하는 것, 퇴락해가는 것 말고는 운동할 방법이 없는 유출론적 구조로 읽어낸 것이 흥미로웠다.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이라서 아,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싶어 놀랍기도 했고. 나에게 있어 아직 어떤 기표에 불과했던 개념들이, 헤겔의 이런 해석, “그 이후라는 일상적 시간과 하강이라는 운동성이 부여된 해석과 함께 내 눈 앞에 피와 살이 덧붙여진 실존적인 형태로 생기를 띠며 다가왔다. 그전까지 <에티카> 속 글들은 나에게 흑백이었는데 헤겔의 해석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면서 눈앞에 색깔이 입혀진 느낌. 비록 헤겔의 저 논리는 스피노자의 양태와 변용의 개념을 오해해서 생긴 것이라고 하더라도, 헤겔의 눈으로 잠시 <에티카> 1부의 초반을 바라봤던 순간, 그리고 그 이후의 달라진 온도차는 잊지 못할 것 같다.

 

2) 헤겔이 했던, “실체는 더 이상 실체에 머물지 말고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 대학교 때 좀 좋아했던 말인데, 이 말이 스피노자 오독에서 비롯됐다는 걸 이번에 알고 나니 이 구절의 아우라가 매우 바래버린 느낌인데ㅋㅋ 그래도 여전히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맥락을 따로 떼어놓고 저 말 자체만 본다면, 저 구절에서 실체실재res“로 바꾼다면 스피노자와도 통하는 말이고.

 

3) 그나저나 주관적 해석론에 대항하는 객관적 해석론이 대체 저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어떻게 처리(?)하려는지 굉장히 궁금했는데 생각도 못한 방식으로 치고 나와서 와! 했다. ”저 지성은 인간의 유한지성이 아니라 신의 무한지성이다라니, 추리소설 비유를 이어가자면, 마지막에 가서 서술트릭에 한 방 먹은 느낌. 2부 정리7 같은 어려운 복선들이 심어져있는 추리소설 (아무튼 저기서 "저기서 말한 지성은 인간의 지성이 아니라 신의 지성이다!!!"라고 해버리니까 정말 할 말은 없다.....ㅋㅋㅋㅋ 그냥 잘 엮으면 되는 것 같은. 이런 부분 보면 철학 좀 귀엽기도 하고 좀 할일없는 떼쓰기 같아보이기도 하고 이런 떼쓰기도 지성적 발전의 눈부신 업적이라고 생각하면 소중하기도 하고.)

 

4) 관련해서 이 글 저 글 읽다가 진태원 철학자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 역자해제를 읽었는데, 그 중에 메모해두고 싶은 대목

 

<<<<< 실체와 속성의 관계는 유출론적 이행의 관계도 위계적 종속의 관계도 아니며, 게루 같은 사람이 주장하듯 구축construction”의 관계도 아니다. 오히려 실체와 속성의 관계는 스피노자 자신이 강조하듯 구성constitution”의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 구성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마슈레가 제시하는 실체 안에서 속성들의 동일성이라는 테제의 의미를 정확히 해명하는 게 중요하다. 이 테제는 속성들의 실재적 상이성과 동시에 실체 안에서 속성들의 통일성을 뜻하는데, 이러한 난해한 주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마슈레는 2부 정리 7의 이른바 평행론정리,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과 동일하다는 정리에서 발견한다.

 

여기서 우선 피해야 할 오해는 이 정리가 주장하는 것은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의 평행성, 그리고 두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 곧 관념들과 물체들 사이의 일치나 합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정리에서 사물은 관념들 및 물체들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정리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의 속성에 따라 파악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속성들에 따라 파악된 것들과 동일하다는 것에 있다. 이는 각각의 속성에서 실체가 항상 이미 자기자신을 절대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며, 역으로 실체의 절대적인 자기표현은 각각의 속성이 아무런 외적 제한 없이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각각의 속성이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실체의 절대적 통일성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는 바로 질서와 연관의 동일성에 있다. 각각의 속성은 그 자신의 형식/형상에 따라 동일한 인과질서와 연관을 표현하며, 이 동일한 인과질서와 연관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에 따라 표현되기 때문에 단 하나의 유일한 것이다(“동일한 인과 질서와 연관이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단 하나의 유일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근거. , 속성들은 실재적으로 상이하지만, 실체 안에서 통일성을 이루는데, 이 통일성이 단 하나의 유일한 것을 만들어주고, 이 통일성은 질서와 연관의 동일성에서 나온다)

 

따라서 헤겔이 속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범하고 있는 해석상의 오류1) 속성들을 지성이 절대자를 반성하는 외적 형식으로 간주하고, 2) 속성들은 두 개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3) 속성들 사이의 관계를 외재적 대립관계로 해석하고, 4) 속성들과 실체의 관계를 퇴락하는 이행의 관계로 해석하는 것는 부정적인 매개의 운동을 통해서만 무한자의 구체적인 보편성과 유한자의 실재성을 얻을 수 있다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에서 비롯한다는 것이 마슈레의 주장이다. 이 때문에 4부에서는 부정규정의 관계가 논의되며, 여기에서 쟁점은 스피노자에서 유한자의 실재성을 어떻게 긍정할 수 있는지, 따라서 무한자의 구체적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 >>>>>

 

5) 그리고 같은 글 속에서 이 부분을 읽다가 약간 울컥했다. <<<<<왜 이러한 이중적 독법이 필요한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마슈레가 말하는 대결은 외재적인 대결,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독립적인 개체들 사이의 상호파괴의 대결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는 너무 비()스피노자적인 발상일 것이다. 반대로 마슈레가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는 대결하이데거라면 오히려 Auseinandersetzung이라고 말했을 것이다은 서로 전혀 다른 것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서로 다르다는 그 이유 때문에, 공통적인 것을 지니게 되며, 또 이 공통적인 것에 의해 각자 독특한 자기자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대결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름을 통한 같음, 같음에 의한 다름이야말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보편성의 철학이 아닌 독특성의 철학, 독특한 사물의 철학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며, 또 스피노자의 철학이 그 영원성 속에서 현재화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만 제대로 머릿속에 새겨두고 체화해도 나는 이미 스피노자로 인해 크게 변용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독립적인 개체들 사이의 상호파괴의 대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너무 비스피노자적인 발상일 것이다에서 이미 마음 한구석이 털썩했는데, 이어지는 글이 마음에 깊이 남았다. 전혀 이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가지를 이으면서도 하나의 세계 속에서 통하는. 마법 같은. 그리고 마슈레가 이 책을 통해서 하고 있는 그 행위, 그러니까 스피노자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저자가 그 글을 쓰고 사유하는 태도도 스피노자적이라는 점도 좋았고, 거기에 빛을 한 번 비춰주는 진태원 철학자의 시선도 좋았고, <다름을 통한같음, 같음에 의한다름>에서의 단어선택도 정말 좋았다. 진태원 철학자의 글을 (테크니컬리) 좋아하는 이유 중에는 통한” “의한같은, 특히 인문학 연구자들이 두루뭉술하게 쓰고 넘어가는 표현들 하나도 정확하게, 때로는 정확하면서 문학적이게 잘 선택하는 점과 빛을 한 번 더 비추고 지나가면 여운이 남을 부분을 정확히 안다는 점, 그때 빛을 비추는 강도 조절을 매우 잘 한다는 점도 있다. 그가 쓴 <알튀세르 효과> 서문도 좋아하는 글 중 하나인데, 생각난 김에 이것도 옮겨본다.

 

<<<<<엮은이가 보기에 철학자로서, 맑스주의자로서 알튀세르의 가장 비범한 측면은 그의 비교조적인 사유 양식, 가장 이단적인 방식으로 맑스주의를 쇄신하고 구원하려고 했던 그의 사유 양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공산당의 정치적 사상 통제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던 시대에 그는 대담하게도 비맑스주의적인 사상의 요소들을 동원하여 맑스 사상의 핵심을 복원하고 맑스주의를 개조하려고 했다.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하여(더욱이 그의 스피노자 해석은 당대의 맥락에서 볼 때 가장 이단적이고 가장 특이한 해석이었는데, 놀랍게도 오늘날 그의 해석은 현대 스피노자 연구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1960년대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학계에서 스피노자 연구의 흐름에 관해서는 진태원, 피에르 마슈레의 스피노자론, 피에르 마슈레, 󰡔헤겔 또는 스피노자󰡕, 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0(2); 범신론의 주박에서 벗어나기-프랑스에서 스피노자 연구 동향, 󰡔근대철학󰡕 22, 2007; 관계론, 대중들, 민주주의: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 󰡔시와 반시󰡕 71, 2010 등을 참조하라.]) 헤겔의 변증법과 구별되는 맑스주의 변증법을 사고하려는 시도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및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을 통해 맑스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론을 구성하려는 시도, 바슐라르나 캉길렘에 근거하여 맑스주의 인식론을 쇄신하려는 시도 등이 그 단적인 사례들이다. 그의 사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것은 그의 사상이 지닌 이러한 이단적 성격, 개방적 성격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고해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교조적으로 되풀이하거나 단순히 찬양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알튀세르에 대한, 알튀세르의 사상에 대한 가장 큰 배반이 될 것이다. 알튀세르의 사상은 비판적 대결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해되거나 수용될 수 없는 사상, 새롭게 변용되고 굴절되는 것을 통해서만 계승되고 재개될 수 있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헤겔 또는 스피노자> 해제의 저 부분, 한 번 더 쓰면서 또 마음에 새겨야지. 다이어리에 따로 필사도 해놔야지. “서로 전혀 다른 것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서로 다르다는 그 이유 때문에 공통적인 것을 지니게 되며(”각각의 속성에서 실체가 항상 이미 자기자신을 절대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며, 역으로 실체의 절대적인 자기표현은 각각의 속성이 아무런 외적 제한 없이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공통적인 것에 의해 각자 독특한 자기자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대결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름을 통한 같음, 같음에 의한 다름이야말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보편성의 철학이 아닌 독특성의 철학, 독특한 사물의 철학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며, 또 스피노자의 철학이 그 영원성 속에서 현재화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6) *** 스피노자의 신의 유일성은 우연한 유일성이 아니다. 필연한 유일성이다.

- 우연한 유일성: 전 세계에 딱 하나 있는 다이아몬드, , 우표 이런 것들. , 2개가 존재할 수도 있는데 (다 불에 탔다거나/ 사라졌다거나 어떻게 하다보니) 하나만 존재. 백만개 백개일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어쩌다보니 유일한 것.

- 필연한 유일성: 하지만 신은 다르다. 둘일 수 있는데 하나인 것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한 분일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가 나중에 논리적으로 증명한다)

 

7) *** 스피노자에 의하면, 물체Aimago, image, 그리고 affection을 남기고 사라짐. 물체A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 하지만 물체A가 사라져도 정신은 A라는 물체가 계속 현존하고 있는 것처럼 계속 생각하고 있다. 부재하는데 현존하는 것처럼 계속 생각하는 것- 이마지나치오.

contemplatio 컨템플라치오: 정신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관성 (물체가 한번 작용하면 누가 멈추게 하기 전까지 계속 작용) 컨템플라치오는 B라는 다른 물체가 신체를 변용해서 다른 imago가 생길 때까지 작용한다.

-> 여기서 나의 의문: 스피노자 논리의 세계에서는, AB사이에, A에 대한 컨템플라치오도 B에 대한 이마지나치오도 없는, 아무 지각이 없는 상태는 존재의 영역으로 보지 않는 건가? 항상 A에서 B로 끊김없이 넘어가는 건가?

 

8)

 

3)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양태는 데카르트에서 유래한 개념이지만, 스피노자의 개념과는 몇 가지 측면에서 차이난다.

 

A. 사물의 상태인가 사물 자체인가.

데카르트의 양태개념은 스콜라철학의 우연속성accidents과 달리 실체와의 내재적 관계를 함축한다. 양태는 실체가 변용되거나 변화되는 것을 고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체의 경우 모양, 크기, 운동 등, 정신의 경우, 감각, 상상, 의지 등.(즉 데카르트에게 양태는 사물의 상태)

반면 스피노자에게 양태는 실체의 상태나 변화 방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 그 자체를 의미. 더 나아가 스피노자에게는 무한양태들도 존재. (스피노자에게 양태는 사물 그 자체)

직접적 무한양태: 연장 속성- 운동과 정지/ 사유 속성- 무한 지성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 전체의 모습

 

*** 양태개념 관련해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 스피노자는 올덴부르크와의 편지에서(1강의록2P) 초기에는 양태라는 표현 대신에 아키댄스accidence 우연적 속성. 우유라고 썼다. 그러나 에티카에서는 affection이라고 용어가 바뀌었다. 왜 그랬을까. 아키댄스(우연속성)와 사물, 이 두 개념 쌍을 사용하게 되면- 스콜라 철학에서 사람의 본질은 이성을 가진 짐승이고, 특성은 웃을 수 있고, 직립보행이고... 등등인데, “어떤 사람은 키가 190이고 어떤 사람은 170이고, 어떤 사람은 피부가 하얗고 어떤 사람은 까맣고...”<-바로 이런 것들이 아키댄스에 해당하는 것이다. , 아키댄스-사물 간의 관계는 외재적 관계, 우연히 갖게 되는 외재적인 것. 그러나 내재적 특성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실제 변용으로 그런 외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외재적으로만 보면 제대로 설명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아키댄스 대신, affection, mode를 즐겨 쓰게 됨. , 스피노자가 아키댄스 대신에 이 단어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변용이 내재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 데카르트 또한 mode라는 말을 자기 철학의 주용법으로 채택했는데 데카르트의 경우 mode는 어떤 사물의 표현 방식/형태를 의미했다. 예를 들면

물체의 경우: 물체가 갖고 있는 무늬, 형태

정신의 경우: 감각, 상상

 

-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한 차이다!!

a. 데카르트에게 mode는 정말 의존적인 것이었다. mode가 속해있는 사물하고 독립적으로 분리해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 VS 스피노자의 다섯 번째 정의와 정리1~36을 보면, 스피노자가 모드라고 부르는 것은 사물 일반이다. 실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다.

b. 데카르트에게는 무한 실체- / 유한 실체: 정신, 물체, 사람 VS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오직 무한 실체 밖에 없다. 스피노자 사상에서 실체를 실체라고 부르려면 반드시 무한해야만 한다. , 스피노자는 실체의 유한성을 배격했다! 매우 중요함!!!

c. 데카르트가 유한실체라고 불렀던 것이 스피노자에게는 양태가 된다. 데카르트는 사물과 독립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모드, 스피노자에게는 그 사물 자체!

 

*** 그럼 스피노자에게는 유한한 것들만 양태냐?

아니! 스피노자에게도 무한 양태가 있다! 에티카 1부 정리 21~23: 무한양태에 관한 내용.

- 직접적 무한양태: 연장속성의 경우 운동과 정지, 사유속성의 경우 무한지성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전체의 모습

*** 스피노자가 양태라고 부르는 범위가 굉장히 넓다. 그 이유는? 스피노자가 실체의 개념을 아주 엄밀하게 정하는 바람에 생긴 결과다. 그 실체를 제외한 나머지 것이 다 양태에 포함되니까. (이거 어쩐지 너무 멋있다..)

 

B. 양태와 변용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스피노자는 양태와 변용들을 동의어처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곧 전자와 달리 변용들이라는 개념은 실체와 개별 실재들 사이의 내적인 관계가 어떤 형태를 띠는지 잘 보여준다.

 

B-1) 실체의 변용

변용은 우선 실체가 개별 실재들을 생산하는 작용이 내재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곧 실체는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세계에 대해 외부에서 작용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스콜라철학/데카르트가 생각했던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한다. 또는 계속해서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켜(그러므로 말 그대로 변용이다) 나간다. 이러한 실체의 지속적인 자기-변용이 곧 개별 실재들의 생성과 변화, 소멸의 운동이다.

 

B-2) 양태들의 변용되기-변용하기

개별적인 실재의 차원에서 변용은 이중적인 양상을 띤다. 변용이라는 명사는 사실 이중적인 활동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변용은 한편으로 변용되기를 가리키며 다른 한편으로 변용하기를 의미한다.

개별 실재는 실체처럼 자기 안에 존재하고 자기 자신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이것은 오직 실체인 신만이 가능), 필연적으로 다른 실재들에 의해 존재하고 또 인식되어야 한다. “변용되기는 이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러한 변용되기는 무기력한 피동성이나 심지어 구속성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개별 실재들은 변용되기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존재자, 하나의 실재로 성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는 역량을 얻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존과 행위의 역량은 변용하기로 표현된다. 따라서 변용되기와 변용하기는 대립하는 두 가지 작용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고 상호 연관적인 양태들의 두 가지 존재 양상들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변용들이라는 개념은 스피노자에게 개별적인 사물들 또는 실재들이 다른 실재들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실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관계들로 구성된 존재자라는 점을 잘 말해준다.

 

*** 양태/변용

- 스피노자는 양태와 변용을 동의어로 쓰고 있는데, 그래도 양태라는 말보다 오히려 실체와 자연 사물들 간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건 변용affection. 이유는, 실체와 자연사물들 간의 내재적관계를 잘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실체와 자연사물은 초월적 관계가 아니다!

- 실체가 변용된 것들: 자연 사물

실체가 자꾸 변용하는 것: 자연계의 운동.

- 스피노자에게서 affection은 물리적인 개념이다. affection: 1차적 작용

아키페레 affect: 변용하는 작용

아피키 being affected: 변용되는 작용

- 자연사물들은 항상 변용하면서 동시에 변용되는, 이런 2중적인 작용을 수행한다. , 자연사물들이 실존하는 방식은 바로 변용하고 변용되는 방식인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가면 상당히 중요한 개념이다! 그리고 변용하고-변용되고를 수동-능동의 관계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에게 변화된다는 수동개념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시킨다도 능동개념이 절대 아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큰일 난다.

- 그것을 혼동하면, “우리가 어떻게 수동성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있어서 이런 엉뚱한 답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능동적이 되려면 변용되지 말아야한다”= 먹지도 말아야하고 숨 쉬어도 안 된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다. 능동적인 것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변용되어야 한다! 3부 정의2에 가면 능동과 수동에 대한 정의가 나올 것이다. 그때 가서 더 자세히 보겠지만 아무튼 변용! 정말 중요한 개념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강의의 하이라이트 파트 :

1. 스피노자가 아키댄스(우연속성)라는 말 대신, “변용이라는 말을 선택한 것에 이미 변용이 내재적이라는 것이 들어가 있다는 것(!)

2. 스피노자가 양태라고 부르는 범위는 굉장히 넓은데, 그 이유는 스피노자가 실체의 개념을 아주 엄밀하게 정하는 바람에 생긴 결과라는 것! 실체를 제외한 나머지 것이 다 양태에 포함되니까(! 스피노자가 실체를 왜 그렇게 엄밀하게 정했는지- 기존 신학의 창조론과 영혼불멸론을 격파하기 위해서-를 알기 때문에 그 결과로 양태의 범위가 넓어졌다는 것이 어쩐지 근사하게 느껴졌다)

3. 1에서 다음과 같은 이론, <에티카>의 정수 중에 하나인 다음의 이론이 따라나온다는 것: “변용은 우선 실체가 개별 실재들을 생산하는 작용이 내재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 곧 실체는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세계에 대해 외부에서 작용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한다. 또는 계속해서 자신의 모습을 변용시켜 나간다. 이러한 실체의 지속적은 자기 변용이 곧 개별 실재들의 생성과 변화, 소멸의 운동이다” (요약하면: 실체가 변용된 것들- 자연사물/ 실체가 자꾸 변용하는 것- 자연계의 운동)

, “변용은 실체와 자연사물들 간의 내재적 관계를 잘 설명해주는 말이며, 실체와 자연사물은 초월적 관계가 아니다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저 단어 하나에!)

4. 결코 <변용하다-능동적/ 변용되다-수동적>가 아니라는 것! 절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혼동해서 능동-수동으로 이해하면, 에티카의 커다란 테마, “우리가 어떻게 수동성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엉뚱한 답을 내릴 수 있다. 능동적이 되는 것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중요한 해답은 잘 변용되기이니까.

<<개별 실재는 실체처럼 자기 안에 존재하고 자기 자신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이것은 오직 실체인 신만이 가능), 필연적으로 다른 실재들에 의해 존재하고 또 인식되어야 한다. “변용되기는 이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러한 변용되기는 무기력한 피동성이나 심지어 구속성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개별 실재들은 변용되기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존재자, 하나의 실재로 성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는 역량을 얻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존과 행위의 역량은 변용하기로 표현된다. 따라서 변용되기와 변용하기는 대립하는 두 가지 작용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고 상호 연관적인 양태들의 두 가지 존재 양상들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변용들이라는 개념은 스피노자에게 개별적인 사물들 또는 실재들이 다른 실재들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실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관계들로 구성된 존재자라는 점을 잘 말해준다.>>

 

9) 프랑스가 외국 철학계에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프랑스에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1970년대에서야 소개되었기 때문에 그 전까지 프랑스 철학자들이 러셀이나 아도르노가 누군지 전혀 몰랐다는 것은 좀 놀라울 정도다(프랑스에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말 자체가 프랑스어로 없다니 말 다했다. 포스트 막스주의/포스트 식민주의라는 말도 2000년대에나 들어갔다니 대단) 심지어 하버마스도 한참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됐다고. 자국의 동료나 교수가 뭐하는지에 관심 기울이기에 바빠서 다른 나라 철학계에 관심 돌릴 틈이 없어서이고, 다른 나라 책이 번역되는 경우도 많이 없는데, 한국 학계의 경우 너무 비정상적일 정도로 외국 의존도가 높아서 국내의 동료/교수가 뭐하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고 당연한 듯이 늘 요즘 미국은? 유럽은? 일본은? 뭐가 연구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지대하게 높다고. 한국이 철학적 토대가 얼마나 부실한지에 대해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

 

10) 철학 공부의 매력은 방해요소가 집중도를 극적으로 차이나게 한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물론 나의 경우에). 집중력이 풀가동하고 있는 동안은 한 구절 한 구절 읽어나갈 때마다 머릿속으로 이해, 응용, 상상, 정리가 한꺼번에 진행되면서 그 틈새로 생각이 하나하나 비어져 나오며 조금씩 생각의 벽을 밀고 밀어서 넓혀나가고 있는 기분. 뇌 전체를 엄청나게 굴리고 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아마 그래서 세미나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는 녹초가 되어 있는 듯. 그런데 어느 순간 방해 요인이 하나 끼어들면 읽어도 읽어도 이게 무슨 말인지, 그냥 글자의 나열로 보이고 만다. 물론 이건 다른 책을 읽거나 일을 할 때도 종종 생겨나는 현상인데 철학은 이 차이가 너무나 급격하다. 한순간에 눈에 끼우고 있던 렌즈가 툭 떨어져나가거나 누군가 텍스트와 내 눈 사이에 간유리가 끼워진 막을 확 들이민 것 같은. 집중과 몰입이 주는 희열과 그렇지 못했을 때의 공허의 대비가 철학 공부 시간만큼 명확한 경우를 아직 보지 못했다.

 

11) 정의6에서 을 정의하면서 맨 앞의 속성개념(주관적 해석론-객관적 해석론)의 문제가 또 한 번 나온다. 결국은 이라는 단어의 외연을 논리적으로 합당하게 확장해서 신의 유일성을 지키면서 그 안에 무한 속성을 포괄해내는 데에 성공하는, 추상적 단어들끼리의 치열한 영토확장 싸움 같은 느낌. 어떻게든 이라는 개념 하나에 무한을 우겨넣으려는 스피노자의, 스피노자의 객관적 해석론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숭고한 노력들.

 

해명

나는 절대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하지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의 본질에는,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 모든 것이 속한다.”

 

*** 가령 사유속성 안에서도 무한한 게 있고 유한한게 있다.

무한한 것- 사유속성 그 자체/ 유한한 것- 각각의 개념들, 이런저런 개별적인 관념들.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한 것만이야기해서는 절대적 층위의 무한에 대해서까지 포괄해서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속성이 무한하게 많은 어떤 실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 /

*** ? 가령 사유속성이라는 것이 자신의 유안에서 무한하지만,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은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연장속성이라는 또 다른 무한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사유속성이나 연장속성과는 또 다른 제 3의 제 4의 제5의 속성들이 있을 수 있는데 -> 그러니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는 말을 가지고 절대적 무한을 이야기할 수 없고 이 각자 무한한 속성들이 무한하게 많이 구성하는 실체에 대해서만 절대적 무한을 이야기할 수 있다.

 

*** 스피노자의 뜻은 이런 것이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가능 세계” “가능 우주라고 말하는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실존해 있는 이 우주가 있다. 우리는 이런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우주 바깥에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우주가 있지 않을까. 4차원, 5차원, 10차원의 세계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우리가 실존하고 있는 이 우주가 우리가 사고할 수 있는 우주의 정체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인식하지 못하지만 이 우주와는 다른 우주가, 당장 파악할 수는 없지만 무한하게 많은 가능한 우주가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하나의 우주만이 있다고 말한다. 단 하나의 우주=단 하나의 자연= 단 하나의 신만이 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뒤에 가서 단 하나의 신 만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무한하게 많은 가능한 세계라는 것들을 전부 포괄할 수 있는 자연이어야, 그 모든 것을 다 묶어서 퉁치는자연이라는 개념이 있어야 하나의 자연”=하나의 신=하나의 우주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정의6에서 스피노자가 절대적으로 무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4차원 5차원 10차원의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는게 아니라, 그 모든 것 자체가 하나의 우주라고 묶고 통합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의 우주”, “절대적으로 무한한 하나의 우주가 탄생)

 

*** (저 비유를 생각해서 적용하면)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고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냐면 이 신 외에 또 다른 신이 있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 달리 말해서, 이 우주 외에 또 다른 (무한한) 우주가 있을 수 있다는 결과. 하지만 스피노자는 그냥 무한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고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 가능한 무한들이, 무한하게 많은 무한들이 구성하는 실체가 신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여기에는 더 이상 다른 우주, 다른 자연, 다른 신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 ... 신이 그 무한을 다 포괄해버리는 거니까.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유일한 신만이 존재한다, 신의 유일성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12) 이번 강의에서 감동받았던 부분. ((사실 처음에는 최대 위기인 정의6이었다. ! .... 이거 이해하기 너무 어려웠다. 특히나 "반면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의 본질에는,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 모든 것이 속한다"라는 문장, 들뢰즈가 꽂혔다는 저 문장은 정말 어려웠다. 저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그러다가 들뢰즈가 왜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의 본질에는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 모든 것이 속한다.“ 이 말에 꽂혀 열광했고, 이 구절을 마음의 지침으로 삼아 표현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재구성해야겠다고 결심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변증법적 모순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속성과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들뢰즈의 말에서 어쩐지 데리다가 재해석한 햄릿이 떠올랐다. 물론 들뢰즈의 저 모색은 신이라는 실체안에서 사유속성과 연장속성, 그 밖의 다른 제 3,4,5...의 속성들에 관한 것이겠지만, 내가 요즘 현실에서 하고 있는 고민들, 많은 머뭇거림들에 대한 어떤 태도를 제시해주는 말이라서 나 혼자 지레 들뢰즈의 해석에 격려를 받았다.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 A가 본질을 표현한다고 해서 A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을 부정으로 후려쳐버리지 않으면서, A가 아니라고 해서 틀린 것이라고 부정하지 않으면서, 차이를 차이대로 바라보면서 긍정의 방향을 모색해보는 것. ”부정의 논리가 아니라 차이의 논리다. 그것도 긍정하는 차이의 논리.“

 

***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의 본질에는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 모든 것이 속한다.“

 

헤겔은 스피노자는 절대자/실체에서 출발한다-> 속성으로 간다, 속성이라는 것은 절대자에서 완전성이 줄어든 것, 이라고 말했는데. 에티카에서보면 속성은 하나가 아니라 사유/연장 속성 두 개인데, 이 두 개는 서로 섞이지 않는다. 사유에 속하는 것은 연장에 속할 수 없고 연장에 속하는 것도 사유에 속할 수 없다. 헤겔은 이 관계에 대해 모순 관계“, ”변증법적인 모순의 통일체가 실체다라고 말한다, , 헤겔은 사유와 연장은 대립/모순 관계지만, 이 모순되는 것이 통일되는 것이 실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사유속성이라는 것은 그 속성 자체에서 연장속성을 부정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 그런데 들뢰즈는 달랐다. 들뢰즈가 어떤, 다시 말해서 실체의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다에 주목하는 이유는. 스피노자 적인 실체, 신이라는 실체의 본질에는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 사유속성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무한함이라는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속성, 즉 연장속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지각하지 못하지만 무한하게 많은 다른 속성도 부정하지 않는다. , 저 문장은 다른 속성은 부정하지 않으면서 절대자의 본질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모순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속성과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볼 때는 변증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론적인 논리를 표현할 수 있는 실마리가 바로 저 문장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정의 논리가 아니라 차이의 논리다. 그것도 긍정하는 차이의 논리(부정하는 차이의 논리가 아니라).

 

13) 12에서 감동받은 상태로 스피노자의 자유에 관한 정의를 읽으니, 스피노자가 어떤 면에서 통념적 이분법, 혹은 통념적 이분법을 포함한 통념적 관념들을 해체하는 철학자라는(이미 스피노자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한국의 겨울은 매우 춥다정도로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할 같은) 감이 오기 시작했다. 변용하다-변용되다를 능동-수동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잘 변용되는 것이 능동이다라고 두 개념을 동그랗게 말아 잇는 것처럼,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독립적인 개체들 사이의 상호파괴의 대결이 아니라 서로 전혀 다른 것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서로 다르다는 그 이유 때문에, 공통적인 것을 지니게 되며, 또 이 공통적인 것에 의해 각자 독특한 자기자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대결로서의 다름을 통한 같음, 같음에 의한 다름으로 역시 두 개념을 동그랗게 말아 잇는 것처럼, 스피노자는 자유제약도 동그랗게 말아 잇는다. 진태원 철학자가 스피노자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피노자 철학을 읽는 데 있어서 왜 이중적 독법이 필요하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스피노자는 자유와 제약을 대비하지만, 여기서 자유는 일체의 제약 또는 규정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의미하지 않고, ”제약은 행위의 가능성과 자유를 전적으로 억제당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는 법칙적 관계론에 존재론적 기반을 두고 있는 상태에서, 그러니까 법칙적인 질서에 대한 인식과 참여를 통해 비로소 실현된다(만약 자유가 일체의 법칙과 필연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자유를 갖고 있는 유일자인 실체, 즉 신은 불가사의하고 임의적인 존재가 되어버리므로 이는 맞지 않는다),

 

13) 6)과 비슷한 이유에서 좋았던 부분. 뭉뚱그려 생각했던 것에, 그래서 자칫 세밀하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개념에 구획을 나눠 정확히 분류해내는.

 

영원을 필연적 실존으로 정의하는 것은, 영구성sempiternity과 영원을 구별하기 위해서. 곧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원은 시간 속에서 무한정하게 지속되는 것(“시작과 끝이 없는지속)으로서의 영구성이 아니라 필연적 실존, 실존 그 자체를 의미. cf. <윤리학> 5부 정리 23의 주석. -> 영혼 불멸, 사후 세계에 대한 비판적 함의 cf. <윤리학> 5부 정리 20의 주석, 5부 정리 41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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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는 아쉬탕가 두 번, 빈야사 한 번으로 가장 바라마지 않던 스케줄로 움직였고, 무엇보다 아침 요가를 두 번이나 갔다! 사실 아침 요가는 너무 일찍 일어나야하는 부담이 있어서 애초에 요가 시작할 때도 당연히 저녁 타임만을 생각했는데 아침 시간대 요가선생님이 가장 꼼꼼하게 가르쳐주는데다가 어쩐지 보고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어서 자꾸 아침요가를 가고 싶어진다.. 이 선생님이 저녁 타임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 덕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요가로 하루를 시작하는 게 굉장히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았으니 뭐 하나 포기하면 뭐 하나 얻고 다 그렇지 뭐. 앞으로도 아침 수업을 가기 위해 계속 노력하게 될 것 같다. 오늘은 빈야사 수업 마지막에 누워서 명상을 하는 중에 아직 여운처럼 남아있는 허벅지가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호흡을 맞추는 기분으로 가만히 집중했다. 그러다가 지금 내가 이렇게 누워 요가를 하고 있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그러니까 요즘처럼 살고 있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여러 가까운, 그리고 떨어져있는 원인들에 굉장히 감사하고 소중하고, 어쩌면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이 기분과 기운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싶은데 방법이 없네. 아, 정말 감사하다, 라는 마음 뒤에 항상 애틋한 마음이 따라오는 것은, 지금의 내 상태에 대한 행복감이 지나가고 나면 어떤 류의 비장함이 남게 되는 것은 아마 모든 감사한 것들의 뒤에는 항상 그만큼의 빚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나 혼자 분투해서 얻어낸 감사라고 해도 그걸 얻어내기 위해 분투하는 동안 외면하거나 모르고 지나갔던, 그래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을 테니까. 감사에서 누리는 행복을 몸에 가득 담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빚을 하나씩 갚아나가기 위해 오늘도 또 힘내자. 요가 하이 상태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점심 시간에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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