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성개념을 둘러싼 논쟁. 정의4의 저 한 문장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 특히 저 한 구절, “지성이 지각하는” 한 구절을 두고 많은 연구와 논문들이 쏟아져 나오고, 논의가 엎치락뒷치락하며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 철학의 세계. 철학자들은 추리소설 속 탐정들과도 비슷하다. 특히 움베르트 에코나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풍의 소설 속 탐정역할을 맡은 사람들. 명쾌하지 않은 한 구절을 붙들고 숨겨진 뜻을 해석하거나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열쇠가 될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대한 소스들을 모으고, 이리저리 이어붙여 하나의 가설을 만들고, 진리로 증명해내기 위해 연구하고 논문을 쓰고. 이런 해석에는 당연히 주관적인(이번 논쟁의 핵심인 그 문제의 ‘주관적’!) 시선이 들어가는데 이 시선을 통해 <에티카>를 잠시 바라보는 것도 마치 하나의 사건을 두고 여러 화자들의 시점이 교차하는 추리소설 같아 흥미진진하다.
일단 헤겔의 해석, 흥미로웠다. 사실 나는 헤겔의 정전을 제대로 완독한 적이 없고 늘 이런 식으로 다른 철학서에 레퍼런스로 들어가 있을 때 해당 부분을 찾아보고 발췌해서 읽는 게 전부였다. (철학서는 아니지만) <다뉴브>에서 헤겔과 키르케고르를 대비한 대목이 내가 헤겔과 잠시 코드가 통했던 유일한 순간이었고, 주디스 버틀러 속에서도 헤겔은 다른 철학자들의 이론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에서 헛다리짚는 예로 계속 나오더니 스피노자 수업에서도 그런 예로 또다시 헤겔을 만났다ㅋㅋ 아무튼 여기서 인상적이었던 것들.
A. 주관적 해석론
헤겔에서 유래한 이 관점. 정의4에서 “지성이 지각하는”이라는 구절을 주목. 이 구절이 속성이 실체의 객관적 본질이 아니라 인간지성이 실체를 파악하는 하나의 관점이라는 점을 말해준다고 간주한다. 20세기 전반까지 이 관점에 대한 상당수의 지지자들이 존재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스피노자가 속성과 특성, 상상적 성질 등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이유를 해명하지 못함. 이 관점에 따를 경우 속성자체가 이미 주관적인 성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는 스피노자가 속성들을 실체의 객관적 본질로 제시하는 다른 구절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1부 정리 19/ 두 번째, 네 번째 편지 등)
*** 헤겔이 말한 스피노자의 한계: 스피노자의 철학은 절대자(=자기원인)에서 출발한다. 에티카 봐라. 정의1에 자기원인에 대한 정의부터 딱 나오잖아. 절대자-> 속성 -> 양태, 이렇게 넘어가는 구조인데, 저것은 가장 완전한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내려가는 것(하강하는 것, 퇴락해가는 것) 말고는 “운동”할 방법이 없는 구조다. 절대자에서 속성으로 내려오면 여기서부터 벌써 절대자의 완전성이 감소한다. 지성에 의해 실체가 지각되는 것<- 봐봐 벌써 여기서 인간적 유한성이 들어간다. 양태로 오잖아? 그럼 절대자에게서 볼 수 있던 완전성은 이미 사라지고 양태에 오면 완전히 유한한 것. 타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유한성/ 불완전성. 그리고 양태= 인간
*** 즉, 스피노자 이론에서는 인간에게 주체성이 없다. 절대자에서 출발했고 그랬기 때문에 계속 내려가야 하는 하강의 길 밖에 없다. 이러면 안 된다. 진보도 했다가 뒤로 잠시 갔다가 앞으로도 나아가야 역사가 만들어지고, 이성의 진보가 가능해지는데 계속 내려가기만 한다. = 실체가 실체로만 머물러 있다. 실체가 주체가 되어야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실체가 영원히 1장 그 상태로 머무르니 아무 가능성도 없다. 그래서 내가 자기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는 절대자로 다시 개념화하겠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스피노자 철학과의 대결이 헤겔철학의 추동력.
*** 헤겔이 재구성한 이 이미지에 따르면 스피노자 철학은 세 가지 측면에 따라 비춰진다. 첫째는 수학의 형식적 방법을 철학에 도입함으로써, 지성의 관점의 한계에 갇혀 있는 모습이다. 둘째는 시초에 절대적으로 충만하게 정립되어 더 이상 역동적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외재적인 속성의 관점에 따라 추상적으로 반성되고 있는 실체 또는 절대자의 한계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시초의 절대자로부터 속성으로, 다시 여기서 양태로 점점 더 퇴락해가는 유출론적 체계의 모습인데, 이는 스피노자가 순수한 부정주의에 빠져 부정적인 것의 구체적인 운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 헤겔이 스피노자를 잘못 해석한 결과)
-> 스피노자에 대한 헤겔의 해석이 오늘날 “속성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론”의 시발점. 많이들 받아들였다.
*** 울프슨의 주장: 스피노자 속성개념은 매우 주관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이건 중세유대사상에서 매우 유명하게 퍼져있던 개념이다. 여기서는 이렇게 말한다. “속성이 무한하게 많이 있고, 속성은 실체/신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겠는가. 속성이 실체의 본질인데, 이 본질이 이렇게 무한하게 많다면 이게 어떻게 (유일하다고 알려진) 신일 수가 있는가. 즉, 신의 유일성 문제에 부딪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세 유대신학은 신은 초월적이라 신의 속성을 개관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말한다(초월자를 어떻게 객관적으로 파악하겠는가. 이미 인간의 능력치 밖에 있는 사람인데.) 그렇기 때문에 단지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신이 이런 본질을 가졌을 거라고 단지 ‘지각’만 할 수 있다. -> 즉, 객관적이지 않다. “주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B. 객관적 해석론
20세기 후반 이후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속성을 실체의 객관적 본질로 파악하고 있음. 마샬 게루/ 질 들뢰즈/ 피에르 마슈레/ 에드윈 컬리 등 <- 스피노자 연구의 대가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왜 속성에 대한 정의에 “지성이 지각하는”이라는 규정이 나와있는지 더 설명해주어야 한다. (지성이 지각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냐? <- 이에 대한 답은 2부 정리 7 주석)
더 나아가 속성이 실체의 객관적 본질을 구성하고 속성들이 하나가 아니라 다수, 더 나아가 무한하게 많이 존재한다면, 무한하게 많은 본질을 가지는 실체가 어떻게 유일한지, 어떻게 통일성을 가지는지 설명해주어야 함. <- 그래서 최근 2-3년간 다시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주관적 해석론>을 복원하려는 움직임.
*** 마샬 게루(20세기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1부 정의 4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 2부 정리7의 주석 “곧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사유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연장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1) 헤겔이 스피노자를 절대자-> 속성-> 양태, 가장 완전한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내려가는 것, 하강하는 것, 퇴락해가는 것 말고는 “운동”할 방법이 없는 유출론적 구조로 읽어낸 것이 흥미로웠다.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이라서 아,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싶어 놀랍기도 했고. 나에게 있어 아직 어떤 ‘기표’에 불과했던 개념들이, 헤겔의 이런 해석, “그 이후”라는 일상적 시간과 “하강”이라는 운동성이 부여된 해석과 함께 내 눈 앞에 피와 살이 덧붙여진 실존적인 형태로 생기를 띠며 다가왔다. 그전까지 <에티카> 속 글들은 나에게 흑백이었는데 헤겔의 해석이 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면서 눈앞에 색깔이 입혀진 느낌. 비록 헤겔의 저 논리는 스피노자의 양태와 변용의 개념을 오해해서 생긴 것이라고 하더라도, 헤겔의 눈으로 잠시 <에티카> 1부의 초반을 바라봤던 순간, 그리고 그 이후의 달라진 온도차는 잊지 못할 것 같다.
2) 헤겔이 했던, “실체는 더 이상 실체에 머물지 말고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 대학교 때 좀 좋아했던 말인데, 이 말이 스피노자 오독에서 비롯됐다는 걸 이번에 알고 나니 이 구절의 아우라가 매우 바래버린 느낌인데ㅋㅋ 그래도 여전히 좋은 말이라고 생각한다. 맥락을 따로 떼어놓고 저 말 자체만 본다면, 저 구절에서 ‘실체’를 ‘실재res“로 바꾼다면 스피노자와도 통하는 말이고.
3) 그나저나 주관적 해석론에 대항하는 객관적 해석론이 대체 저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어떻게 처리(?)하려는지 굉장히 궁금했는데 생각도 못한 방식으로 치고 나와서 와! 했다. ”저 지성은 인간의 유한지성이 아니라 신의 무한지성이다“라니, 추리소설 비유를 이어가자면, 마지막에 가서 서술트릭에 한 방 먹은 느낌. 2부 정리7 같은 어려운 복선들이 심어져있는 추리소설 (아무튼 저기서 "저기서 말한 지성은 인간의 지성이 아니라 신의 지성이다!!!"라고 해버리니까 정말 할 말은 없다.....ㅋㅋㅋㅋ 그냥 잘 엮으면 되는 것 같은. 이런 부분 보면 철학 좀 귀엽기도 하고 좀 할일없는 떼쓰기 같아보이기도 하고 이런 떼쓰기도 지성적 발전의 눈부신 업적이라고 생각하면 소중하기도 하고.)
4) 관련해서 이 글 저 글 읽다가 진태원 철학자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 역자해제를 읽었는데, 그 중에 메모해두고 싶은 대목
<<<<< 실체와 속성의 관계는 유출론적 “이행”의 관계도 “위계적 종속”의 관계도 아니며, 게루 같은 사람이 주장하듯 “구축construction”의 관계도 아니다. 오히려 실체와 속성의 관계는 스피노자 자신이 강조하듯 “구성constitution”의 관계로 파악해야 한다. 구성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마슈레가 제시하는 실체 안에서 속성들의 동일성이라는 테제의 의미를 정확히 해명하는 게 중요하다. 이 테제는 속성들의 “실재적 상이성”과 동시에 “실체 안에서 속성들의 통일성”을 뜻하는데, 이러한 난해한 주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마슈레는 2부 정리 7의 이른바 “평행론” 정리, 곧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사물들의 질서와 연관과 동일하다”는 정리에서 발견한다.
여기서 우선 피해야 할 오해는 이 정리가 주장하는 것은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의 평행성, 그리고 두 속성에 속하는 양태들, 곧 관념들과 물체들 사이의 일치나 합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정리에서 “사물”은 관념들 및 물체들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정리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의 속성에 따라 파악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속성들에 따라 파악된 것들과 동일하다는 것”에 있다. 이는 각각의 속성에서 실체가 항상 이미 자기자신을 절대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며, 역으로 실체의 절대적인 자기표현은 각각의 속성이 아무런 외적 제한 없이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각각의 속성이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실체의 절대적 통일성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근거는 바로 질서와 연관의 동일성에 있다. 곧 각각의 속성은 그 자신의 형식/형상에 따라 동일한 인과질서와 연관을 표현하며, 이 동일한 인과질서와 연관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에 따라 표현되기 때문에 단 하나의 유일한 것이다(“동일한 인과 질서와 연관”이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단 하나의 유일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근거. 즉, 속성들은 실재적으로 상이하지만, 실체 안에서 통일성을 이루는데, 이 통일성이 ‘단 하나의 유일한 것’을 만들어주고, 이 통일성은 ‘질서와 연관의 동일성’에서 나온다)
따라서 헤겔이 속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범하고 있는 해석상의 오류―1) 속성들을 지성이 절대자를 반성하는 외적 형식으로 간주하고, 2) 속성들은 두 개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3) 속성들 사이의 관계를 외재적 대립관계로 해석하고, 4) 속성들과 실체의 관계를 퇴락하는 이행의 관계로 해석하는 것―는 부정적인 매개의 운동을 통해서만 무한자의 구체적인 보편성과 유한자의 실재성을 얻을 수 있다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에서 비롯한다는 것이 마슈레의 주장이다. 이 때문에 4부에서는 “부정”과 “규정”의 관계가 논의되며, 여기에서 쟁점은 스피노자에서 유한자의 실재성을 어떻게 긍정할 수 있는지, 따라서 무한자의 구체적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다. >>>>>
5) 그리고 같은 글 속에서 이 부분을 읽다가 약간 울컥했다. <<<<<왜 이러한 이중적 독법이 필요한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마슈레가 말하는 대결은 외재적인 대결,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독립적인 개체들 사이의 상호파괴의 대결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는 너무 비(非)스피노자적인 발상일 것이다. 반대로 마슈레가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는 대결―하이데거라면 오히려 Auseinandersetzung이라고 말했을 것이다―은 서로 전혀 다른 것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서로 다르다는 그 이유 때문에, 공통적인 것을 지니게 되며, 또 이 공통적인 것에 의해 각자 독특한 자기자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대결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름을 통한 같음, 같음에 의한 다름이야말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보편성의 철학이 아닌 독특성의 철학, 독특한 사물의 철학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며, 또 스피노자의 철학이 그 영원성 속에서 현재화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만 제대로 머릿속에 새겨두고 체화해도 나는 이미 스피노자로 인해 크게 변용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독립적인 개체들 사이의 상호파괴의 대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너무 비스피노자적인 발상일 것이다”에서 이미 마음 한구석이 털썩했는데, 이어지는 글이 마음에 깊이 남았다. 전혀 이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가지를 이으면서도 하나의 세계 속에서 통하는. 마법 같은. 그리고 마슈레가 이 책을 통해서 하고 있는 그 행위, 그러니까 스피노자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저자가 그 글을 쓰고 사유하는 태도도 스피노자적이라는 점도 좋았고, 거기에 빛을 한 번 비춰주는 진태원 철학자의 시선도 좋았고, <다름을 “통한” 같음, 같음에 “의한” 다름>에서의 단어선택도 정말 좋았다. 진태원 철학자의 글을 (테크니컬리) 좋아하는 이유 중에는 “통한” “의한” 같은, 특히 인문학 연구자들이 두루뭉술하게 쓰고 넘어가는 표현들 하나도 정확하게, 때로는 정확하면서 문학적이게 잘 선택하는 점과 빛을 한 번 더 비추고 지나가면 여운이 남을 부분을 정확히 안다는 점, 그때 빛을 비추는 강도 조절을 매우 잘 한다는 점도 있다. 그가 쓴 <알튀세르 효과> 서문도 좋아하는 글 중 하나인데, 생각난 김에 이것도 옮겨본다.
<<<<<엮은이가 보기에 철학자로서, 맑스주의자로서 알튀세르의 가장 비범한 측면은 그의 비교조적인 사유 양식, 가장 이단적인 방식으로 맑스주의를 쇄신하고 구원하려고 했던 그의 사유 양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공산당의 정치적 사상 통제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던 시대에 그는 대담하게도 비맑스주의적인 사상의 요소들을 동원하여 맑스 사상의 핵심을 복원하고 맑스주의를 개조하려고 했다. 스피노자 철학을 원용하여(더욱이 그의 스피노자 해석은 당대의 맥락에서 볼 때 가장 이단적이고 가장 특이한 해석이었는데, 놀랍게도 오늘날 그의 해석은 현대 스피노자 연구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1960년대 이후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학계에서 스피노자 연구의 흐름에 관해서는 진태원, 「피에르 마슈레의 스피노자론」, 피에르 마슈레, 헤겔 또는 스피노자, 진태원 옮김, 그린비, 2010(제2판); 「범신론의 주박에서 벗어나기-프랑스에서 스피노자 연구 동향」, 근대철학 제2권 2호, 2007; 「관계론, 대중들, 민주주의: 에티엔 발리바르의 스피노자론」, 시와 반시 71호, 2010 등을 참조하라.]) 헤겔의 변증법과 구별되는 맑스주의 변증법을 사고하려는 시도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및 스피노자의 상상계 이론을 통해 맑스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론을 구성하려는 시도, 바슐라르나 캉길렘에 근거하여 맑스주의 인식론을 쇄신하려는 시도 등이 그 단적인 사례들이다. 그의 사상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그것은 그의 사상이 지닌 이러한 이단적 성격, 개방적 성격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알튀세르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고해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교조적으로 되풀이하거나 단순히 찬양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알튀세르에 대한, 알튀세르의 사상에 대한 가장 큰 배반이 될 것이다. 알튀세르의 사상은 비판적 대결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해되거나 수용될 수 없는 사상, 새롭게 변용되고 굴절되는 것을 통해서만 계승되고 재개될 수 있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헤겔 또는 스피노자> 해제의 저 부분, 한 번 더 쓰면서 또 마음에 새겨야지. 다이어리에 따로 필사도 해놔야지. “서로 전혀 다른 것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서로 다르다는 그 이유 때문에 공통적인 것을 지니게 되며(”각각의 속성에서 실체가 항상 이미 자기자신을 절대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며, 역으로 실체의 절대적인 자기표현은 각각의 속성이 아무런 외적 제한 없이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공통적인 것에 의해 각자 독특한 자기자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대결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름을 통한 같음, 같음에 의한 다름이야말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보편성의 철학이 아닌 독특성의 철학, 독특한 사물의 철학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며, 또 스피노자의 철학이 그 영원성 속에서 현재화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6) *** 스피노자의 신의 유일성은 우연한 유일성이 아니다. 필연한 유일성이다.
- 우연한 유일성: 전 세계에 딱 하나 있는 다이아몬드, 책, 우표 이런 것들. 즉, 2개가 존재할 수도 있는데 (다 불에 탔다거나/ 사라졌다거나 어떻게 하다보니) 하나만 존재. 백만개 백개일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데 어쩌다보니 유일한 것.
- 필연한 유일성: 하지만 신은 다르다. 둘일 수 있는데 하나인 것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한 분일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가 나중에 논리적으로 증명한다)
7) *** 스피노자에 의하면, 물체A가 imago, image, 그리고 affection을 남기고 사라짐. 물체A는 존재하지 않는 상태. 하지만 물체A가 사라져도 정신은 A라는 물체가 계속 현존하고 있는 것처럼 계속 생각하고 있다. 부재하는데 현존하는 것처럼 계속 생각하는 것- 이마지나치오.
contemplatio 컨템플라치오: 정신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관성 (물체가 한번 작용하면 누가 멈추게 하기 전까지 계속 작용) 컨템플라치오는 B라는 다른 물체가 신체를 변용해서 다른 imago가 생길 때까지 작용한다.
-> 여기서 나의 의문: 스피노자 논리의 세계에서는, A와 B사이에, A에 대한 컨템플라치오도 B에 대한 이마지나치오도 없는, 아무 지각이 없는 상태는 존재의 영역으로 보지 않는 건가? 항상 A에서 B로 끊김없이 넘어가는 건가?
8)
3)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양태는 데카르트에서 유래한 개념이지만, 스피노자의 개념과는 몇 가지 측면에서 차이난다.
A. 사물의 상태인가 사물 자체인가.
데카르트의 양태개념은 스콜라철학의 우연속성accidents과 달리 실체와의 내재적 관계를 함축한다. 양태는 실체가 “변용되거나 변화되는 것을 고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체의 경우 모양, 크기, 운동 등, 정신의 경우, 감각, 상상, 의지 등.(즉 데카르트에게 양태는 사물의 상태)
반면 스피노자에게 양태는 실체의 상태나 변화 방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 그 자체를 의미. 더 나아가 스피노자에게는 무한양태들도 존재. (스피노자에게 양태는 사물 그 자체)
직접적 무한양태: 연장 속성- 운동과 정지/ 사유 속성- 무한 지성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 전체의 모습
*** 양태개념 관련해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의 차이
- 스피노자는 올덴부르크와의 편지에서(1강의록2P) 초기에는 양태라는 표현 대신에 아키댄스accidence 우연적 속성. 우유라고 썼다. 그러나 에티카에서는 affection이라고 용어가 바뀌었다. 왜 그랬을까. 아키댄스(우연속성)와 사물, 이 두 개념 쌍을 사용하게 되면- 스콜라 철학에서 사람의 본질은 ‘이성을 가진 짐승’이고, 특성은 ‘웃을 수 있고, 직립보행이고... 등등’인데, “어떤 사람은 키가 190이고 어떤 사람은 170이고, 어떤 사람은 피부가 하얗고 어떤 사람은 까맣고...”<-바로 이런 것들이 아키댄스에 해당하는 것이다. 즉, 아키댄스-사물 간의 관계는 외재적 관계, 우연히 갖게 되는 외재적인 것. 그러나 내재적 특성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실제 변용으로 그런 외적인 것‘만’을 생각하지 않았다. 외재적으로만 보면 제대로 설명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아키댄스 대신, affection, mode를 즐겨 쓰게 됨. 즉, 스피노자가 아키댄스 대신에 이 단어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변용이 “내재적”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 데카르트 또한 mode라는 말을 자기 철학의 주용법으로 채택했는데 데카르트의 경우 mode는 어떤 사물의 표현 방식/형태를 의미했다. 예를 들면
물체의 경우: 물체가 갖고 있는 무늬, 형태
정신의 경우: 감각, 상상
-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한 차이다!!
a. 데카르트에게 mode는 정말 의존적인 것이었다. 그 mode가 속해있는 사물하고 독립적으로 분리해서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것 VS 스피노자의 다섯 번째 정의와 정리1~36을 보면, 스피노자가 모드라고 부르는 것은 사물 일반이다. 실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다.
b. 데카르트에게는 무한 실체- 신/ 유한 실체: 정신, 물체, 사람 VS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오직 무한 실체 밖에 없다. 스피노자 사상에서 실체를 실체라고 부르려면 반드시 무한해야만 한다. 즉, 스피노자는 실체의 유한성을 배격했다! 매우 중요함!!!
c. 데카르트가 ‘유한실체’라고 불렀던 것이 스피노자에게는 양태가 된다. 데카르트는 사물과 독립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모드, 스피노자에게는 그 사물 자체!
*** 그럼 스피노자에게는 유한한 것들만 양태냐?
아니! 스피노자에게도 무한 양태가 있다! 에티카 1부 정리 21~23: 무한양태에 관한 내용.
- 직접적 무한양태: 연장속성의 경우 운동과 정지, 사유속성의 경우 무한지성
매개적 무한양태: 우주전체의 모습
*** 스피노자가 양태라고 부르는 범위가 굉장히 넓다. 그 이유는? 스피노자가 실체의 개념을 아주 엄밀하게 정하는 바람에 생긴 결과다. 그 실체를 제외한 나머지 것이 다 양태에 포함되니까. (이거 어쩐지 너무 멋있다..)
B. 양태와 변용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스피노자는 양태와 변용들을 동의어처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곧 전자와 달리 “변용들”이라는 개념은 실체와 개별 실재들 사이의 내적인 관계가 어떤 형태를 띠는지 잘 보여준다.
B-1) 실체의 변용
변용은 우선 실체가 개별 실재들을 생산하는 작용이 내재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곧 실체는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세계에 대해 외부에서 작용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스콜라철학/데카르트가 생각했던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한다. 또는 계속해서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켜(그러므로 말 그대로 ‘변용’이다) 나간다. 이러한 실체의 지속적인 자기-변용이 곧 개별 실재들의 생성과 변화, 소멸의 운동이다.
B-2) 양태들의 변용되기-변용하기
개별적인 실재의 차원에서 변용은 이중적인 양상을 띤다. “변용”이라는 명사는 사실 이중적인 활동을 함축하는 개념이다. 곧 “변용”은 한편으로 “변용되기”를 가리키며 다른 한편으로 “변용하기”를 의미한다.
개별 실재는 실체처럼 자기 안에 존재하고 자기 자신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이것은 오직 실체인 신만이 가능), 필연적으로 다른 실재들에 의해 존재하고 또 인식되어야 한다. “변용되기”는 이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러한 변용되기는 무기력한 피동성이나 심지어 구속성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개별 실재들은 변용되기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존재자, 하나의 실재로 성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는 역량을 얻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존과 행위의 역량은 “변용하기”로 표현된다. 따라서 변용되기와 변용하기는 대립하는 두 가지 작용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고 상호 연관적인 양태들의 두 가지 존재 양상들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변용들”이라는 개념은 스피노자에게 개별적인 사물들 또는 실재들이 다른 실재들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실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관계들로 구성된 존재자라는 점을 잘 말해준다.
*** 양태/변용
- 스피노자는 양태와 변용을 동의어로 쓰고 있는데, 그래도 양태라는 말보다 오히려 실체와 자연 사물들 간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건 변용affection. 이유는, 실체와 자연사물들 간의 “내재적” 관계를 잘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실체와 자연사물은 초월적 관계가 아니다!
- 실체가 변용된 것들: 자연 사물
실체가 자꾸 변용하는 것: 자연계의 운동.
- 스피노자에게서 affection은 물리적인 개념이다. affection: 1차적 작용
아키페레 affect: 변용하는 작용
아피키 being affected: 변용되는 작용
- 자연사물들은 항상 변용하면서 동시에 변용되는, 이런 2중적인 작용을 수행한다. 즉, 자연사물들이 실존하는 방식은 바로 변용하고 변용되는 방식인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가면 상당히 중요한 개념이다! 그리고 변용하고-변용되고를 수동-능동의 관계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스피노자에게 “변화된다”는 수동개념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시킨다”도 능동개념이 절대 아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큰일 난다.
- 그것을 혼동하면, “우리가 어떻게 수동성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있어서 이런 엉뚱한 답을 내릴 수 있다. “우리가 능동적이 되려면 변용되지 말아야한다”= 먹지도 말아야하고 숨 쉬어도 안 된다. 하지만 오히려 반대다. 능동적인 것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변용되어야 한다! 3부 정의2에 가면 능동과 수동에 대한 정의가 나올 것이다. 그때 가서 더 자세히 보겠지만 아무튼 변용! 정말 중요한 개념이다!!!
(개인적으로) 이번 강의의 하이라이트 파트 :
1. 스피노자가 아키댄스(우연속성)라는 말 대신, “변용”이라는 말을 선택한 것에 이미 변용이 내재적이라는 것이 들어가 있다는 것(와!)
2. 스피노자가 양태라고 부르는 범위는 굉장히 넓은데, 그 이유는 스피노자가 실체의 개념을 아주 엄밀하게 정하는 바람에 생긴 결과라는 것! 실체를 제외한 나머지 것이 다 양태에 포함되니까(와! 스피노자가 실체를 왜 그렇게 엄밀하게 정했는지- 기존 신학의 창조론과 영혼불멸론을 격파하기 위해서-를 알기 때문에 그 결과로 양태의 범위가 넓어졌다는 것이 어쩐지 근사하게 느껴졌다)
3. 1에서 다음과 같은 이론, <에티카>의 정수 중에 하나인 다음의 이론이 따라나온다는 것: “변용은 우선 실체가 개별 실재들을 생산하는 작용이 내재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 곧 실체는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세계에 대해 외부에서 작용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자신의 결과들을 생산한다. 또는 계속해서 자신의 모습을 변용시켜 나간다. 이러한 실체의 지속적은 자기 변용이 곧 개별 실재들의 생성과 변화, 소멸의 운동이다” (요약하면: 실체가 변용된 것들- 자연사물/ 실체가 자꾸 변용하는 것- 자연계의 운동)
즉, “변용”은 실체와 자연사물들 간의 내재적 관계를 잘 설명해주는 말이며, 실체와 자연사물은 초월적 관계가 아니다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와! 저 단어 하나에!)
4. 결코 <변용하다-능동적/ 변용되다-수동적>가 아니라는 것! 절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혼동해서 능동-수동으로 이해하면, 에티카의 커다란 테마, “우리가 어떻게 수동성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엉뚱한 답을 내릴 수 있다. 능동적이 되는 것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중요한 해답은 “잘 변용되기”이니까.
<<개별 실재는 실체처럼 자기 안에 존재하고 자기 자신을 통해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이것은 오직 실체인 신만이 가능), 필연적으로 다른 실재들에 의해 존재하고 또 인식되어야 한다. “변용되기”는 이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러한 변용되기는 무기력한 피동성이나 심지어 구속성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개별 실재들은 변용되기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존재자, 하나의 실재로 성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실존하고 행위할 수 있는 역량을 얻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존과 행위의 역량은 “변용하기”로 표현된다. 따라서 변용되기와 변용하기는 대립하는 두 가지 작용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고 상호 연관적인 양태들의 두 가지 존재 양상들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에서 “변용들”이라는 개념은 스피노자에게 개별적인 사물들 또는 실재들이 다른 실재들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실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관계들로 구성된 존재자라는 점을 잘 말해준다.>>
9) 프랑스가 외국 철학계에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프랑스에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1970년대에서야 소개되었기 때문에 그 전까지 프랑스 철학자들이 러셀이나 아도르노가 누군지 전혀 몰랐다는 것은 좀 놀라울 정도다(프랑스에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는 말 자체가 프랑스어로 없다니 말 다했다. 포스트 막스주의/포스트 식민주의라는 말도 2000년대에나 들어갔다니 대단) 심지어 하버마스도 한참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됐다고. 자국의 동료나 교수가 뭐하는지에 관심 기울이기에 바빠서 다른 나라 철학계에 관심 돌릴 틈이 없어서이고, 다른 나라 책이 번역되는 경우도 많이 없는데, 한국 학계의 경우 너무 비정상적일 정도로 외국 의존도가 높아서 국내의 동료/교수가 뭐하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고 당연한 듯이 늘 요즘 미국은? 유럽은? 일본은? 뭐가 연구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지대하게 높다고. 한국이 철학적 토대가 얼마나 부실한지에 대해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
10) 철학 공부의 매력은 방해요소가 집중도를 극적으로 차이나게 한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물론 나의 경우에). 집중력이 풀가동하고 있는 동안은 한 구절 한 구절 읽어나갈 때마다 머릿속으로 이해, 응용, 상상, 정리가 한꺼번에 진행되면서 그 틈새로 생각이 하나하나 비어져 나오며 조금씩 생각의 벽을 밀고 밀어서 넓혀나가고 있는 기분. 뇌 전체를 엄청나게 굴리고 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아마 그래서 세미나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는 녹초가 되어 있는 듯. 그런데 어느 순간 방해 요인이 하나 끼어들면 읽어도 읽어도 이게 무슨 말인지, 그냥 글자의 나열로 보이고 만다. 물론 이건 다른 책을 읽거나 일을 할 때도 종종 생겨나는 현상인데 철학은 이 차이가 너무나 급격하다. 한순간에 눈에 끼우고 있던 렌즈가 툭 떨어져나가거나 누군가 텍스트와 내 눈 사이에 간유리가 끼워진 막을 확 들이민 것 같은. 집중과 몰입이 주는 희열과 그렇지 못했을 때의 공허의 대비가 철학 공부 시간만큼 명확한 경우를 아직 보지 못했다.
11) 정의6에서 ‘신’을 정의하면서 맨 앞의 속성개념(주관적 해석론-객관적 해석론)의 문제가 또 한 번 나온다. 결국은 ‘신’이라는 단어의 외연을 논리적으로 합당하게 확장해서 신의 유일성을 지키면서 그 안에 ‘무한 속성’을 포괄해내는 데에 성공하는, 추상적 단어들끼리의 치열한 영토확장 싸움 같은 느낌. 어떻게든 ‘신’이라는 개념 하나에 ‘무한’을 우겨넣으려는 스피노자의, 스피노자의 객관적 해석론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숭고한 노력들.
해명
“나는 절대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하지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의 본질에는,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 모든 것이 속한다.”
*** 가령 사유속성 안에서도 무한한 게 있고 유한한게 있다.
무한한 것- 사유속성 그 자체/ 유한한 것- 각각의 개념들, 이런저런 개별적인 관념들.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한 것만” 이야기해서는 “절대적 층위의 무한”에 대해서까지 포괄해서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속성이 무한하게 많은 어떤 실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 /
*** 왜? 가령 사유속성이라는 것이 자신의 유안에서 무한하지만, 사유속성과 연장속성은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연장속성이라는 또 다른 무한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사유속성이나 연장속성과는 또 다른 제 3의 제 4의 제5의 속성들이 있을 수 있는데 -> 그러니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는 말을 가지고 “절대적 무한”을 이야기할 수 없고 이 각자 무한한 속성들이 무한하게 많이 구성하는 실체에 대해서만 절대적 무한을 이야기할 수 있다.
*** 스피노자의 뜻은 이런 것이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가능 세계” “가능 우주”라고 말하는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실존해 있는 이 우주가 있다. 우리는 이런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우주 바깥에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우주가 있지 않을까. 4차원, 5차원, 10차원의 세계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우리가 실존하고 있는 이 우주가 우리가 사고할 수 있는 우주의 정체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인식하지 못하지만 이 우주와는 다른 우주가, 당장 파악할 수는 없지만 무한하게 많은 가능한 우주가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 그러나 스피노자는 하나의 우주만이 있다고 말한다. 단 하나의 우주=단 하나의 자연= 단 하나의 신만이 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뒤에 가서 단 하나의 신 만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무한하게 많은 가능한 세계라는 것들을 전부 포괄할 수 있는 자연이어야, 그 모든 것을 다 묶어서 ‘퉁치는’ 자연이라는 개념이 있어야 “하나의 자연”=하나의 신=하나의 우주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지금 정의6에서 스피노자가 “절대적으로 무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4차원 5차원 10차원의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는게 아니라, 그 모든 것 자체가 “하나의 우주”라고 묶고 통합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의 우주”, “절대적으로 무한한 하나의 우주”가 탄생)
*** (저 비유를 생각해서 적용하면)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고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냐면 이 신 외에 또 다른 신이 있을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 달리 말해서, 이 우주 외에 또 다른 (무한한) 우주가 있을 수 있다는 결과. 하지만 스피노자는 ”그냥 무한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고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 가능한 무한들이, 무한하게 많은 무한들이 구성하는 실체가 신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해버리면 여기에는 더 이상 다른 우주, 다른 자연, 다른 신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왜? 하.나.의. 신이 그 무한을 다 포괄해버리는 거니까. 그러니까 스피노자가 유일한 신만이 존재한다, 신의 유일성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런 것이다.
12) 이번 강의에서 감동받았던 부분. ((사실 처음에는 최대 위기인 정의6이었다. 신! 와.... 이거 이해하기 너무 어려웠다. 특히나 "반면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의 본질에는,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 모든 것이 속한다"라는 문장, 들뢰즈가 꽂혔다는 저 문장은 정말 어려웠다. 저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그러다가 들뢰즈가 왜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의 본질에는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 모든 것이 속한다.“ 이 말에 꽂혀 열광했고, 이 구절을 마음의 지침으로 삼아 ”표현“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스피노자 철학을 재구성해야겠다고 결심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변증법적 모순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속성과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들뢰즈의 말에서 어쩐지 데리다가 재해석한 햄릿이 떠올랐다. 물론 들뢰즈의 저 모색은 신이라는 ‘실체’ 안에서 사유속성과 연장속성, 그 밖의 다른 제 3,4,5...의 속성들에 관한 것이겠지만, 내가 요즘 현실에서 하고 있는 고민들, 많은 머뭇거림들에 대한 어떤 태도를 제시해주는 말이라서 나 혼자 지레 들뢰즈의 해석에 격려를 받았다.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 A가 본질을 표현한다고 해서 A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을 ‘부정’으로 후려쳐버리지 않으면서, A가 아니라고 해서 ‘틀린 것’이라고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차이’를 차이대로 바라보면서 긍정의 방향을 모색해보는 것. ”부정의 논리가 아니라 차이의 논리다. 그것도 긍정하는 차이의 논리.“
***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의 본질에는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 모든 것이 속한다.“
헤겔은 스피노자는 절대자/실체에서 출발한다-> 속성으로 간다, 속성이라는 것은 절대자에서 완전성이 줄어든 것, 이라고 말했는데. 에티카에서보면 속성은 하나가 아니라 사유/연장 속성 두 개인데, 이 두 개는 서로 섞이지 않는다. 사유에 속하는 것은 연장에 속할 수 없고 연장에 속하는 것도 사유에 속할 수 없다. 헤겔은 이 관계에 대해 ”모순 관계“, ”변증법적인 모순의 통일체가 실체다“라고 말한다, 즉, 헤겔은 사유와 연장은 대립/모순 관계지만, 이 모순되는 것이 통일되는 것이 실체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사유속성이라는 것은 그 속성 자체에서 연장속성을 부정하게 되어있는 것이다.
*** 그런데 들뢰즈는 달랐다. 들뢰즈가 ”어떤, 다시 말해서 실체의 본질은 표현하면서 부정은 함축하지 않는다“에 주목하는 이유는. 스피노자 적인 실체, 신이라는 실체의 본질에는 어떤 본질은 표현하면서, 즉, 사유속성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무한함이라는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속성, 즉 연장속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지각하지 못하지만 무한하게 많은 다른 속성도 부정하지 않는다. 즉, 저 문장은 다른 속성은 부정하지 않으면서 절대자의 본질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변증법적 모순이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속성과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볼 때는 변증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론적인 논리를 표현할 수 있는 실마리가 바로 저 문장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정의 논리가 아니라 차이의 논리다. 그것도 긍정하는 차이의 논리(부정하는 차이의 논리가 아니라).
13) 12에서 감동받은 상태로 스피노자의 ‘자유’에 관한 정의를 읽으니, 스피노자가 어떤 면에서 통념적 이분법, 혹은 통념적 이분법을 포함한 통념적 관념들을 해체하는 철학자라는(이미 스피노자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한국의 겨울은 매우 춥다’ 정도로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할 같은) 감이 오기 시작했다. 변용하다-변용되다를 능동-수동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잘 변용되는 것이 능동이다’라고 두 개념을 동그랗게 말아 잇는 것처럼, ”서로 마주보고 있는 독립적인 개체들 사이의 상호파괴의 대결이 아니라 서로 전혀 다른 것들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또는 바로 서로 다르다는 그 이유 때문에, 공통적인 것을 지니게 되며, 또 이 공통적인 것에 의해 각자 독특한 자기자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대결“로서의 ”다름을 통한 같음, 같음에 의한 다름“으로 역시 두 개념을 동그랗게 말아 잇는 것처럼, 스피노자는 ‘자유’와 ‘제약’도 동그랗게 말아 잇는다. 진태원 철학자가 ”스피노자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피노자 철학을 읽는 데 있어서 왜 ”이중적 독법“이 필요하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스피노자는 자유와 제약을 대비하지만, 여기서 ”자유“는 일체의 제약 또는 규정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의미하지 않고, ”제약“은 행위의 가능성과 자유를 전적으로 억제당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는 법칙적 관계론에 존재론적 기반을 두고 있는 상태에서, 그러니까 법칙적인 질서에 대한 인식과 참여를 통해 비로소 실현된다(만약 자유가 일체의 법칙과 필연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자유를 갖고 있는 유일자인 실체, 즉 신은 불가사의하고 임의적인 존재가 되어버리므로 이는 맞지 않는다),
13) 6)과 비슷한 이유에서 좋았던 부분. 뭉뚱그려 생각했던 것에, 그래서 자칫 세밀하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개념에 구획을 나눠 정확히 분류해내는.
영원을 필연적 실존으로 정의하는 것은, 영구성sempiternity과 영원을 구별하기 위해서. 곧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원은 시간 속에서 무한정하게 지속되는 것(“시작과 끝이 없는” 지속)으로서의 “영구성”이 아니라 필연적 실존, 실존 그 자체를 의미함. cf. <윤리학> 5부 정리 23의 주석. -> 영혼 불멸, 사후 세계에 대한 비판적 함의 cf. <윤리학> 5부 정리 20의 주석, 5부 정리 41의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