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1. 스피노자의 성격이 확실히 보이는 공리2. 그러니까 이 세상에 “인식할 수 없는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들, 그래서 “초월성”이라는 아우라를 자동적으로 갖게 되는 것들에 대해 철저하게 그런 건 있을 수 없다고 못 박는 것. 그 “초월성”이라는 아우라가 중세신학의 신에게 비합리적인 동시에 커다란 권위를 주는 것의 싹을 아예 뽑아버리려는 것.
공리2 다른 것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 말을 반대로 바꿔서 써보면, “다른 것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인식 불가능하다.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다.” -> 신비한 것. 인간의 의지로 접근불가능한 것
*** 이게 바로 칸트가 했던 말. 칸트: “속성이란 물자체. 하지만 우리는 물 자체를 알 수 없다. 현상만 알 수 있다” -> 다른 것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 (주관적 해석론과 괘를 같이 하기도)
*** 스피노자는 여기서 더 밀고 나가는 것이다. 스피노자 입장에서, “아니다, 물 자체는 인식되어야 한다. 자신에 의해서.” 이것이 칸트식 사고와 스피노자식 사고의 큰 차이다.
***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성격이 굉장히 잘 드러난 것이 공리2다. “자신에 의해 인식”이라는 개념(“인식할 수 없는 것”에 있어서 “자신에 의해 인식”이라는 개념을 넣어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아예 없앴다). 그래서 공리2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사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다른 것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자신에 의해 인식될 수”도“ 있다.”크크. 하지만 스피노자는 저렇게도 말 안 하고 매우 세게 “되어야 한다!”라고 당위를 넣어 말함 -> 우리에게 인식 불가능한 초월적 영역이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 합리적 인식을 벗어나는 것을 거부(이것이 스피노자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아예 없앤 이유).
2. 공리3이 너무나 당연한 말을 쓴 것 같지만(모든 일에는 다 규정된 원인이 있다는), 그리고 인간-특히나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성적 인간-은 누구나 다 저 당연한 말에 동의할 것 같지만, 잘 생각해보면 인간은 어떤 초월적 영역, 불가지한 영역에 쉽게 유혹된다.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한 원인의 결과로 존재하는 것(종교에서의 신, 사주나 별점 같은 미신)을 “믿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면 얼마든지 ‘신비’와 ‘초월성’에 이성의 영역을 내어주면서까지 믿으려고 든다. 믿고 싶은 것 앞에서는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한 원인’에 대한 그럴만한 이유를 어떻게든 붙여주고 싶어하고, 심지어 그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한 원인에 어떻게든 ‘합리’를 부여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사주나 별점의 경우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이야기가 “인류 역사를 거쳐 쌓인 통계에 기반한다”인데, 몇 세기를 걸쳐 몇십 만명을 대상으로 그들의 운명과 성격을 탄생일과 탄생시간별로 자료를 모아 분석하고 통계를 낸 흔적으로서의 실질적 자료를 본 적 있는 사람? ‘통계에 기반한다’는 아직까지 누구도 제시하지 못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그리고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건 불가능한 작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기독교에서 겅경에 근거하여 신의 기적이라는 초월에 ‘합리’를 덧입히려고 하는 것은 또 어떻고.
‘합리’가 통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신은/오컬트는 초월적 영역에 속해있는 거라서 인간의 지성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는 말로 믿고 싶은 것을 그냥 ‘영역 밖의 어떤 미지의 세계’라는 신비를 덧바른다. 물론 인간의 지성은 매우 하찮다. 하지만 자연만물을 신이 만들어냈고 조종한다는 이유를 붙여 ‘인간’의 삶에 종속시켜버리고, 자연 그 자체로 존재하는 별자리를 미지의 영역이라는 이유를 붙여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해주는 어떤 것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이미 너무 인간 중심주의 아닌가. 인간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ㅋㅋㅋ 자연만물들이 인간의 운명에 대해 다 말해주고 신앙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돈독하게 하기 위해 기독교적 수단으로 존재하겠어. 제발 인간처럼 하찮은 존재에 자연만물이 그리 관심이 있을 거라고, 거기서 인간의 운명을 읽고 점칠 수 있고 신앙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할 텐데.
아무튼 초월적 존재인 신에 대한 중세신학의 이런 비합리적인 점들이 스피노자는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식할 수 없는 영역” 따위를 아예 뿌리뽑아버리려는 의지가 듬뿍 담긴 공리2와, 공리2에서 분명히 그은 선 위에 한 번 더 분명한 선을 긋는 공리3이 어쩐지 좋았다. 그리고 나는 장담할 수 있다. 공리3을 읽으면서 “뭐야, 이거 너무 당연한 말이잖아?”라고 말하는 현대사회의 이성적 사람들 중에도 “믿고 싶은 것” 앞에서는 저 공리3을 쉽게 버려버릴 사람이 많을 거라는 것을. 중세신학의 시대에 살면서 스피노자는 얼마나 속이 터졌을까ㅋㅋㅋ 4-5년이라는 시간 동안 사주나 별점을 잠깐 믿고 재미있어하고 귀담아 듣기도 했던 사람= 공리3처럼 생각하지만 믿고 싶은 것 앞에서는 지성을 잠시 버리고 초월적 영역에 쉽게 무너졌던 사람으로서 매우 찔렸고 반성했다...
아울러 공리3을 정의7과 함께 생각해보면, “자유로움”에 대해 오해하는 많은 사람들이(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부정적 감정을 주거나 압박- ‘잘하고 싶다’라는 성취욕까지 포함하는 압박-을 주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것을 진정한 ‘자유로움’이라고 오해하는) 합리적 인식 영역을 벗어나는 것 앞에서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게 느껴진다. 객관적 이성의 토대가 단단하지 않을 때 쉽게 빠져들 수 있는 것들이니까. 자유에 대한 오해(이성이 헐거우면 감성과 부딪히는 ‘제약’적인 것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버거우니까)와 비이성적 영역에 대한 맹신(이성 대신 감성을 건드리는 마음에 드는 것들이 주는 위안은 매우 크니까).
공리3 주어진 규정된 원인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결과가 따라 나오며, 반대로 아무런 규정된 원인도 주어져 있지 않다면 결과가 따라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전통적 의미에서의 공리: 인과율. (ex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은 원인을 갖고 있다.) 결과에서 출발해서,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겠지’ 하는 것. 그럼 이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은 언제나 가능한가? 그건 아니다. 전통적인 공리는 우리가 일어난 결과에 대해 반드시 그 규정된 원인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당연히 원인은 있겠지만 불가지할 수도 있다.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하는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 왜? 신은 세상 모든 일의 원인이자 근거라고 가정되어 있지만 이것이 우리가 신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거나 그가 만물을 생산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음을 함축하지 않는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거나 만물을 생산하는 방식은 신비로,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작용으로 남을 수 있다.
*** 스피노자의 공리: 이러한 초월성이나 신비의 여지를 배제한다. “주어진 규정된 원인”(<- 매우 중요한 말)이 반드시 있다= “주어진 규정된 원인에서 결과가 따라 나오는 것은 필연적이다“ 특히 정의7을 보면 ”규정되다“는 말이 2번이나 나온다(“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a) 규정되는 실재는 자유롭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실재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b) 규정되는 실재는 필연적이라고 또는 오히려 제약되어 있다고 한다.”) 즉, 자유로운 것은 규정되지 않은 것이 자유가 아니라 정의7처럼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실재에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자유롭고, 자유로운 실재는 다 규정되어 있고 제약적이다. 즉, “임의로”인 게 아니다. 신이 기분이 좋아서 어떨 때는 놔두고 어떨 때는 제약하고 이런 게 아니다. 그것이 자유로울 때조차도 규정된 방식, 질서, 제약이 있다. 임의가 아님.
3. 이런 생각을 한 적 있다. 사실 시중에는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관한 책들이 제법 많이 나와있다. 요약본, 개론서, 해설서 등등. 아니, 여기까지 갈 것도 없이 <에티카> 원서도 있고, 번역서들도 여러 권있다. 이 중에 서너 권만 골라서 읽으면 되지 않을까. 보통 내가 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재미나 지식, 지혜, 저 모든 것들을 즐길 수 있는 방법적 틀, 같은 것들일 테니까.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렇게이렇게 말했고 이것은 이러저러이러저러한 것이며 여기서 우리는 이렇고저렇고를 배울 수 있다” 정도의, 생산적이고 삶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결론에 해당하는 메시지들을 바로 가져가고 넘어가는 것이 여러모로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에 2시간 30분씩, 네 번의 세미나를 거쳐 겨우 책에서 ‘한 장’에 해당하는 분량을 읽어내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렇게 문장 by 문장으로 해석하고 파고들면서 a-> b-> c-> d.... 그러다가 마침내 Z를 얻어내는, 결국에는 저 Z에 해당하는 것들을 얻거나 알고자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인데 그 과정인 a, b, c, d, e, f....에 이렇게 1년 이상을 통째로 쏟아 붓는 것이 과연 현명한가. 비생산적이지 않은가. 이런 현타가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10시간동안 ‘한 장’을 읽은 경험이 그동안 했던 몇 안 되는 철학공부 비스무리와 비교했을 때 훨씬 재미있었고, 이 과정을 쫓아가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철학에서 얻고 싶은 것 그 자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만큼 느리게느리게 걸어가는 시간들이 무척 황홀했다. 세미나가 끝나고 녹초가 된 상태로 집에 돌아갈 때면 늘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릴 수가 없었다.
이런 소회들을 느끼던 중에 공리4를 접했고, 스피노자가 했던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으로”라는 표현이 성큼 와 닿았다. 첫 시간에 스피노자가 "어떻게 해야 자신이 갖고 있는 철학사상을 최대한 진리의 소실 없이 전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그 오랜 고민 끝에 기하학적 방식으로 집필한 것이 <에티카>라는 이야기와 하나의 맥락에서 생각하면, 나는 지금 ”최대한 진리의 소실 없이 전할 수 있는“ 고민이 담긴 <에티카>를 ”최대한 진리의 소실 없이“ 가져가기 위해서,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이 끼어들 여지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이렇게 한 문장 한 문장에 몇 시간씩을 들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아무리 이렇게해도 당연히 엄청나게 많은 진리의 소실이 있을 것이고,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으로 남는 진리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행위 자체에서 오는 감동이 크다. 이를테면 10시간의 소요 끝에 공리4에서 2부 정리7로 넘어갔을 때, 그리고 공리5에서 공리6으로 넘어갔을 때 몰려오는 커다란 감동 같은 것은 이런 방식이 아니었다면 얻을 수 없었을 것이기에.
공리4 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며 그것을 함축한다(involvit).
공리4는 공리3에서 자연스럽게 따라나온다(공리4는 공리3의 인식론적 귀결이다) 원인이 결과를 생산하는 방식이 어떤 매커니즘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결과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결과를 필연적으로 산출하는 원인에 대하여, 또는 원인이 결과를 생산하는 필연적인 규칙이나 법칙에 대하여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 없이는 결과 또는 사건에 대한 인식은 불완전하고 부적합한 것에 머물게 된다.
*** 공리4= 원인을 모르면 결과를 알 수 없다. 스피노자의 말을 더 자세히 풀어보면, 원인을 모르고도 결과를 알 수는 있는데,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으로(=부적합한 방식으로)” 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이런 식이다. ex “사람은 모두 죽는다.” 다들 이 사실을 알지만 왜 인지는 잘 모른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경험적으로 그냥 아는 것이다. “불은 물로 끌 수 있다” 근데 왜? 이것도 앎은 앎이지만 결과“만” 아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부적합한 앎. 물로 못 끄는 불도 있을 수 있는데, 이 경우 원인을 알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텐데 모르면 거기서 끝인 것이다.
*** 2부 정리7 44p. 각각의 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고-> 정리7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 정리7은 공리4을 펼쳐놓은 이야기다. 증명 이는 1부 공리4로부터 명백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원인지어진 것에 대한 관념은, 이것이 그 결과가 되는 그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신의 사유 역량은 신의 현행적인 행위 역량과 동등하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곧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신의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
주석 곧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 가령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이것 역시 신 안에 존재한다)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는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한 하나의 동일한 인과 연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신은 오직 그가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만 어떤 관념, 가령 원의 관념의 원인이며, 오직 그가 연장되는 실재인 한에서만 원의 원인이라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니라 원의 관념의 형상적 존재는 가까운 원인으로서의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지각될 수 있고, 이 다른 사유 양태 역시 또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그럴 수 있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재들이 사유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동안에는 우리는 자연 전체의 질서, 또는 인과 연관을 사유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해야 하고. 그것들이 연장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한에서는 자연 전체의 질서는 마찬가지로 연장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되어야 하며, 다른 속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그리하여 신은 사실 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한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실재들의 원인이다.
3-1. 2부 정리7은 공리4를 펼쳐 풀어놓은 것이다. 저 공리4의 한 문장이 2부 정리7의 증명과 따름정리와 주석을 거치면서 “신은 사실 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한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실재들의 원인이다”라는 커다란 결론으로 이어지는 저 과정이 약간 뭉클할 정도로 멋졌다. 아이슬란드 952도로가 문득 떠올랐다.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아이슬란드의 고속도로 초입. 그러나 계속 차를 타고 가다보면 말문을 잃고 광대한 우주 같은 풍광을 펼쳐 보여주는 그 잊지 못할 도로. 지금 내가 1부의 첫 시작에서 배우고 있는 것들은 어디로 닿을지 모를 커다란 나무를 품고 있는 작은 씨앗들.
공리5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못한 것들은 서로 이해될 수 없다. 또는 하나의 개념이 다른 것의 개념을 함축하지 않는다.
공리 3과 공리4가 원인과 결과의 보편성, 그리고 그 인식의 보편성을 함축하는 반면, 공리5는 이러한 보편성에는 제약이 존재한다고 언표한다. 곧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공통적인 것을 갖는 것들” 사이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정의2에서, 그리고 뒤에서 제시할 표현대로 하면 같은 속성을 공유하는 것들 사이에서만, 다시 말해 하나의 속성 안에서만 실재들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게 된다. 한 물체는 다른 물체를 움직일 수 있지만, 물체가 관념을 움직일 수 없고, 관념도 물체를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 공리3, 4를 한정하는 의미. 아무것도 공통적인 것을 갖지 못하는 것들은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될 수 없다. => 원인과 결과가 성립하려면 공통된 것이 있어야 한다. 즉, 공리3, 4에서 말하는 인과관계가 속성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속성과 속성 사이에서, 한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와 다른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설명할 수 없다.
*** 근데 이렇게 되면 무슨 질문이 제기될 수 있냐면, 그렇다면 연장속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고, 사유속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제 3 속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고, 제 4 속성, 제 5 속성....등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을 텐데, 무수히 많은 속성 안에서의 인과관계들, 즉, 서로 독립적인 무한한 속성의 체계들이 있고, 각각의 속성은 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체계를 갖고 있는 것인데. 그럼 우주는 여러 개의 우주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기에 대한 답은 공리6에 나온다.
공리6 참된 관념은 그것의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
여기에서 ‘합치하다’는 convenire의 번역이다. 이것은 ‘진리는 지성과 사물의 일치’라는 중세철학 이래의 기본원리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cf 2부 정리4의 “적합한 관념”에 대한 정의
*** “합치해야 한다”는 말이 2부에서 앞으로 엄청 자주 나온다. convenire-> correspond의 어근을 가진. 오래전에 헤어진 오누이가 반쪽짜리 거울을 갖고 있다가 나중에 다시 만나서 합치하는 것 같은.
*** 중세철학: “진리라는 것은 지성과 사물의 일치다“ 2부에서 adequatio와 convenire가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참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사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 생각이 원래의 사물과 딱 들어맞는 것.
*** 왜 공리5 뒤에 공리6이 왔을까. 저 의문, 우주란 것이 다수의 우주로 존재하는 것 아닌가에 대한 답. 그리고 답은 아니다. 참된 관념은 대상이랑 합치해야 하니까(지성-사유속성과 사물-연장속성이 일치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다른 속성들끼리는 인과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지만, 사유속성 속에서 존재하는 인과관계의 질서는 물체(연장속성) 속에서 존재하는 인과관계의 질서와 합치한다. (와, 공리6은 매우 큰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속성이 여러 개 있다고 해도, 그것이 각각 별도의 합리성, 인과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즉, 하나의 속성에서 표현되는 인과관계는 각각 다른 속성에서의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것. 우리가 어떤 관념이 진리라고 하려면 그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
3-2. 앞에서도 말했지만, 공리5에서 공리6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와...하는 감탄사가 나왔다. 공리6의 준비된 답으로 모든 게 해결되다니. 더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는 식의 유독 짧은 문장이지만, 여기에 함축된 진리의 양은 굉장히 크다. 그러니까 3강 때 읽었던 정의6과 그에 따른 강의 내용과도 통하는 부분.
4. 인상적이었던 질문.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의 두 가지 속성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전부라고 확정적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음으로해서(그가 확정적인 것에 대해서 얼마나 확정적으로 말하는지 우리는 공리1에서도 이미 봤다ㅋㅋ) 인지 하지못하는 다른 무한한 속성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 열어둔 스피노자의 이론을 두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다른 무한한 속성의 가능성에는 뭐가 있을까를 생각해본 상상력이 인상적이었다.
- 질문: 무한한 속성이라는 것이 계속 무한하게 있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인간 존재들의 생명체 내에서 나타나는 것-사유속성과 연장속성- 이외의 무한한 속성을 생각했을 때 가능한 형태는, 그 생명체가 어떤 생명체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다른 생명체 내에서 나타나는 질서 아니면 생각해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속성이 다차원이라면 (인간이 사유/연장 속성을 담당하듯이) 그 다차원을 이루는 부분들은 다른 어떤 생명체 내의 질서가 아닐까라는 질문
- 답: 그렇게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스피노자 자신이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놓은 바가 없어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정신하고 실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유속성 연장속성 두가지밖에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속성은 무한하게 많다“ 이렇게만 이야기했습니다. 아마 제3의 속성 제 4의 속성 이런 것도 존재를 하고 스피노자적 관점에 따르면 더 무한하게 많이 존재할텐데, 그런데 스피노자가 그런 제안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정신과 신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밖에 인식할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3의 속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하려면 우리가 신체와 정신이외의 제3의 양태를 갖고 있다는 제시가 되어야 할 텐데 그런 게 어떤 것인지 스피노자가 그런 여지를 허용했는지, 그것은 좀 논의의 여지는 있죠. 물론 이제 우리가 꼭 스피노자에 얽매이지 않고도, 스피노자적인 방식으로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신체와 정신의 관계라든가.
5. ‘시간’이라는 개념을 매우 하찮게 보는ㅋㅋㅋ 스피노자의 이야기 어쩐지 좋았다. 그의 삶과도 무척 어울린다. 특히 스피노자가 시간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가, 스피노자의 진리는 ”영원성“의 차원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 너무 좋았다. 스피노자에게 시간은 그저 추상적이고 상상적인 양, 1분 3시간 5년처럼 사람이 외부의 대상을 판단할 때 상상적으로 인위적으로 재단하는 양의 단위들 중 하나. ”그것은 스피노자가 철학적으로 사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대체 이 하루를 1분 1시간 단위로 쪼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그리고 그걸 왜 철학적인 사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냐. 이게 스피노자의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에게 시간은 단지 단위일 뿐. 본질과 진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좋아!!
- 답: 스피노자에게 시간과 공간은 우연속성들, 양태적인 차원에 들어가는 것. 물리적 차원의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 어떻게 보면 상상적이고 임의적인 것. 그러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념은 1미터, 1센치, 1분, 1시간 이렇게 인위적으로 절단해서 생각하는 상상적이고 추상적인 관념이다. 스피노자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아주 사소하게 생각했다. 연장속성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정도(뭔가 아인슈타인적이다) 시간과 공간이 상당히 중요한 철학적인 문제가 된 것은 뉴턴과 라이프니츠, 칸트를 거치면서다. 스피노자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스피노자가 만약 자연철학에 대한 책을 썼다면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썼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에티카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 질문: 근데 칸트는 시간을 사유속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스피노자는 시간을 연장속성으로만 취급한 거예요? 사유속성으로 전혀 고려하지 않고?
- 답: 네. 스피노자의 진리는 “영원성”의 차원에 있으니까 시간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답, 너무 낭만적이고 좋지 않은가)
- 질문: 시간을 배제한 사유가 있을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변해 가는데 스피노자가 시간을 ‘연장’으로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걸 분리해서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연장속성만인지 전 잘... 양쪽 속성에 다 내재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 답: 칸트가 생각하는 시간과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은 다른데 그걸 같은 걸로 여기니까 혼동하는 겁니다. 스피노자가 “시간을 연장속성이다”라고 확고하게 귀속해놓지는 않았지만 스피노자의 시간이 연장의 차원에 속해있는 것은 거의 부정하기 힘든 점이다.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을 다른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같은 차원에 놓으면 곤란합니다. 다른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시간을 스피노자는 시간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지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지속”과 “영원”이라고 스피노자가 부르는 그 두 가지에는 또 차이가 있죠.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의 개념은 범위가 그리 넓지 않습니다. 스피노자가 시간이라는 것을 아주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은 아주 인위적으로 절단된, 단위로서의 시간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칸트나 다른 철학자들,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질문: 스피노자의 시간을 그럼, 연장의 누적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요?
- 답: 음... 근데 스피노자의 시간은 아주 단순한 겁니다. 스피노자가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추상적인 양이에요. 추상적인 양. 1분 2분 1초 3초 할 때 이렇게 사람이 외부의 대상을 판단할 때 상상적으로 인위적으로 재단하는 양의 단위들 중 하나가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시간입니다. 추상적이고 상상적인 양이라고. 그것은 스피노자가 철학적으로 사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대상의 본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대체 이 하루를 1분 2분 3분 1시간 단위로 쪼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그리고 그걸 왜 철학적인 사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냐. 이게 스피노자의 생각입니다.
6. 관념의 외연을 가늠해보는 우아하고 철학적인 계산법. 1) 표상적 실재성/ 형상적 실재성 2) 우리가 알 수 없는 속성 안에 담겨있는 양태들을 표상하고 있는 관념 3) 참된 관념= 자신의 계산을 다하고 있는 관념(<- 이 표현이 참 또 좋았네)과 관념이 없는 대상 4) 허구적 상상적인 관념들
- 질문: 공리6에서 “참된 관념은 그것의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참되지 않은 관념들은 대상이 있는지. 참되지 않은 관념에 대한 대상이 따로 있다면 개수가 같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관념이 더 많고 대상이 더 적은 것인지.
- 답: 관념의 외연이 대상의 외연보다 큰 것 아닌가, 가 질문의 내용인데. 속성과 속성의 외연의 차이의 문제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고 특히 2부에 가게 되면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2부의 평행론에 가게 되면. 스피노자는 (요즘 철학자들한테는 이해하기 어려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관념에 대해 두 가지 지위를 부여합니다. 1) 관념이라는 것은 표상적 실재성, 표상적 본질을 갖는다. essential of objectiva(objective) 근데 이게 객관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2) 형상적 본질 essential of formalis(formal) -> 독자적 실재. essential of objective/ essential of formalis 어떤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그 관념이 표상하는 실재가 있다는 말.
1) 즉,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그것이 표상하는 어떤 대상, 실재와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되는 관념이 바로 표상적 본질.
2) 근데 이런 차원만 갖고 있다면 단순한데,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것은 또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는 관념은 뭐냐면. 관념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과 마찬가지로 관념도 독자적 실재라는 것. 관념이라는 것도 독자적 실재다. 단지 관념 바깥에 있는 어떤 대상을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 자체도 독자적인 실재가 된다는 말.
1) + 2) 그러면 어떤 복잡한 문제가 생기게 되냐면 형상적 본질을 갖는 이 관념을 표상하는 관념이 또 있는 거예요(마트로슈카처럼). 형상적 본질로서, 하나의 독재적인 실재로서의 관념 A가 있다고 합시다. 이 관념 A에는 역시 표상적 측면이 있고 형상적 측면 두 가지가 있어요. 그리고 여기 형상적 측면을 갖는 관념A를 표상하는 또 다른 관념B가 있다고 합시다. 관념A를 표상하고 관념A를 대상으로 하는 관념. 그러면 이 관념B도 또한 표상적 측면과 형상적 측면으로 나뉘구요, 그러면 관념B를 표상하는 또 다른 관념C가 또 있겠죠. 이렇게 계속 D E F G....로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관념들이 모여서 구성하는 사유속성의 세계는 연장속성의 세계보다 외연이 더 클 수밖에 없죠. 여기에는 관념이 있으면 관념을 표상하는 또 다른 관념이 있고 또 다른 관념이 또 있고.
3) 또 어떤 점이 있냐면, 관념이 표상하는 대상에는 연장속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제 3의 속성, 제4의 속성, 제 5의 속성 안에 담겨있는 양태들도 다 관념이 표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유속성의 범위가 훨씬 크죠. 다른 속성에 비해서. 그러면 또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죠. 이럴 경우에 우리가 정확하게 속성과 속성의 평행이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냐. 사유속성이 다른 속성과 동등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냐. 사유속성이라는 것이 뭔가 특권적인 지위를 갖고 있는 게 아니냐 이런 질문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의 외연 문제는 그 자체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4) 그리고 지금 제기한 질문은 또 다른 측면을 갖고 있어요. 왜냐면 지금 얘기했던 관념들은 다 말하자면 참된 관념들인데 다시 말하면 자신의 계산을 다하고 있는 관념들에 관한 이야기인데 지금 질문하신 것처럼 관념 없는 대상의 경우도 있구요. 또 그런 경우도 있잖아요. 허구적인 관념이라든가 날개달린 말이라든가 뿔이 달린 말이라든가 가공의 어떤 대상과 관련한 관념들이 있죠. 그러니까 허구적 상상적인 관념들. 그렇다면 이런 관념들의 지위는 어떤 것이고, 이 관념들은 아무런 상응하는 대상이 없는 관념들인데 이 관념들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형상된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냐. 이런 질문들이 제기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정리8의 두 번째 주석을 할 때 한 번 다시 이야기를 합시다.
7.
- 질문: 보통 우리가 실체라고 말하면 속성을 담지하고 있는 담지자지 속성과 교환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 답: 그것은 우리가 보통 실체나 속성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이고, 스피노자 당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실체”라는 것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속성”이라는 것은 실체에 깃들어 있는, 실체에 의존하는 성질이고. 그래서 다들 어떻게 실체와 속성이 같냐는 의문을 가졌었고 더 이해하기 힘들어했던 것은 왜 실체가 하나냐.
- 질문: (다른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실체가 하나라구요?!
- 답: 아까 논증구조에서 이야기했듯이 정리8까지는 실체가 하나라는 이야기는 아직 안 나오죠. 정리8까지는 실체는 정의상 다수가 존재한다는 가정이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 나는 어쩌다보니 예습을 하게 되어서 실체는 하나고, 그것은 신이고, 자연과 물체는 양태고를 이미 아는 상태로 강의에 왔는데 저렇게 화들짝 놀라시는 분들이 좀 있는 거 보니 아예 모르는 채로 정리 1, 2, 3, 4, 5를 혼돈의 상태로, 대체 여기서 무슨 논증을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라는 혼란스럽고 희미한 상태에서 실체-> 실체를 이루는 속성들은 무한하다 -> 실체는 무한할 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아마도 하기 쉬울 것 같은데 여기서 -> 아니다, 실체는 하나야! 에에에에??? 이런 과정을 느꼈다면, 흐릿한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눈앞에 있는 사물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내다가 조금씩 식별 가능해지는 그런 과정을 실시간으로 겪었다면 저런 감동과 놀라움이 더 극적으로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 스포일러를 이미 알아버린 느낌인데, 그래도 여전히 놀랄 일들이 너무나 많을 테니까.
8.
정리5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증명 만약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구별되는 실체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속성들의 차이나 변용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어야 한다(앞의 정리에 의해). 만약 속성들의 차이에 의해서만 구별된다면, 오직 동일한 속성을 지닌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는 점이 인정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변용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된다면, 실체가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서기 때문에(정리 1에 의해), 일단 변용들은 제쳐두고 실체를 그 자체로 고려한다면, 곧 (정의3과 정의6에 의해) 참되게 고려한다면, 한 실체는 다른 것(실체)과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곧 (위의 정리에 의해) 다수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할 것이다. Q.E.D.
*** 두 개 이상의 실체를 구별하는 두 가지 방식은 1) 속성 2) 변용이다.
1) 실체가 속성에 의해서만 구별된다면, 이 말은 한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속성이 다 다르니까 실체가 속성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가능한 걸 테니까 말이다!! (만약에 한 속성에 여러 개의 실체가 있다면, 그건 속성에 의해서는 구별되지 못할 것이고, 속성이 아닌 다른 것, 이를테면 변용에 의해 구별될 것이다) 하지만 속성의 차이에 의해서만 실체들이 구별된다 = 속성이 다 다르다 =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 1) 증명!
2) 실체가 변용에 의해서 구별된다면- 그런데 이것은 이 문장 자체에서 이미 불가능하다. 왜냐면, 변용은 실체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으니까. 실체가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서기 때문에(정리 1에 의해), 일단 변용들은 제쳐두고 실체를 그 자체로 고려한다면, 곧 (정의3과 정의6에 의해) 참되게 고려한다면, 한 실체는 다른 것(실체)과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키포인트는 정리1이다. “실체는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선다.”= 변용은 실체를 구별짓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변용이라는 것은 실체에 의해 성립되고, 실체에 의해 근거를 부여받는 건데 우리가 거꾸로 어떻게 변용을 가지고 실체를 구별할 수 있고, 실체를 구별하는 근거를 삼을 수가 있는가. 전제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우리가 변용에 의해서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변용뿐이다 ex) 예를 들면 컵A와 컵B를 구별할 때 (스피노자 표현으로 말하면) 변용을 가지고 구별한다. 검은색이라는 양태, 하얀색이라는 양태로. 우리가 이 두 개의 컵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은 변용의 차이로 구별하는 것이다. 변용의 차이로 구별하는 것은 실체 그 자체를 구별하는 것은 아니다.
요약: 우리가 실체를 구별하는 방식은 저 두 가지 밖에 없는데 1) 증명 끝! 2) 증명 끝!
-> 와 정말 깔끔한 논증!!! 박수쳤다. 정리4, 정리1, 정의3, 정의6이 다 동원되면서 착착착 논리를 이끌어내는 과정이라니. <에티카>가 기하학적으로 쓰였기 때문에 당연한 거겠지만, 기하학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추리소설의 서사랄지, 이런저런 공식들을 다 적용시켜서 수학의 정석 응용문제를 혼자 풀어냈을 때의 희열이랄지. 정리5의 증명을 보면서 너무 아름답다고 느꼈다. 스피노자 밑밥 까는 솜씨 대단. 만약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구별되는 실체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속성들의 차이나 변용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어야 한다(앞의 정리에 의해). 멋짐 포인트1: 그래서 1) 속성으로 구별할 경우- 그 말은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 있다는 말 (속성에 두 개, 세 개의 실체가 있다면= 같은 속성을 가진 실체가 여러 개 있다면 이 실체들을 ‘속성’을 어떻게 구분하겠는다. 실체마다 고유한 하나의 속성이 있어야, 그 ‘속성’으로 구분하지. 그러니까 속성으로 구별한다는 것은 이미 저 문장 자체에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 있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2) 그럼 변용으로 구별할 경우- 그런데 정의3, 정의5를 바탕으로 정리1까지 생각해보면 실체가 본성상 변용에 앞서기 때문에 변용으로는 구별조차 할 수 없다 -> 고로 결론: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 있다!!) 멋짐 포인트2: 그래서 이 정리5가 데카르트 유한실체 비판까지 이어진다는 점-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 이상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데카르트주의자다라는 생각으로 연장속성을 지니는 두 개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면 물통하고 컵. 물통과 컵은 데카르트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본성(연장속성이라는)을 지닌 두 개의 실체다. 근데 정리5가 부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저 두 개는 실체가 아니다! 라는 말. 그러니까 정리5는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를 비판하는 것이다.>>>>>
9.
1661년 9월 27일 런던에서 스피노자에게 보낸, 올덴부르그의 세 번째 편지(강의록 2 3P)
“선생께서는 제게 전해주신 공리들을 자연의 빛에 의해 알려지며 아무런 증거도 요구하지 않는, 증명 불가능한 원리들이라고 간주하시는 것인지요?” -> “자연의 빛에 의해 알려지며”. 공리라는 것은 자연의 빛에 의해 알려진다. 자명하다. 증명할 필요없이. -> 이 표현 좀 낭만적이다. 그리고 여기에 ‘빛’이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이 뒤에 나오는 빛 이야기들도 같이 빛난다. 고풍스러운 옛 서양 지식인들의 편지.
“공리는 저의 무딘(어두침침한) 지성에게는 썩 명증하지 않아서 아주 많은 빛을 비쳐줄 필요가 있습니다.” / “제가 가르침을 주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는 한, 저로서는 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을 기꺼이 고백하겠습니다.”-> “아주 많은 빛을 비쳐줄 필요가 있겠습니다“귀엽다ㅋㅋ
스피노자의 답: “저는 이점에 관해 다투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선생께서는 그 공리들의 진리성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계십니다. 실로 선생께서는 이 공리들과 반대되는 것이 더 그럴듯하고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 스피노자가 편지로 이렇게 답할 때마다 너무나 트위터리안 같다. sns에서 논박 펼치는 어조의 근대 서양버전이야...
10. 철학 세미나에서 오타는 치명적이다. 빠르게 필기하는 과정에서 “참되다는 것은 뭐냐”를 내가 “참되다는 것은 무냐”로 잘못 적었는데 정말 한참 고민했다. 참되다는 것 is 무? 무슨 뜻이지? 참된 것은 무다, 라니 갑자기 이 불교적 사상 뭐지? 하고 고민했는데 알고보니 오타였던 것. 수업 첫 시간에 교재 248페이지에서 “삼각형의 정의가 내각의 합이 180도라고 했을 때 이는 삼각형이라는 용어의 뜻을 정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원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라는 문장을 보고 누군가가 무슨 뜻인지 질문했던 것도 비슷한 일이다. 사실 누가 봐도 오타이고, 질문하신 분도 다른 책에 쓰여있었다면 분명 오타라는 걸 알았을텐데, 철학책에, 그것도 단어 하나하나가 알 듯 모를 듯 여기에 이게? 여기서 이 표현이? 같은 놀라움을 계속 주는 애매모호한 <에티카>에 그렇게 쓰여있으니 뭔가 의미가 있을 법하게 느껴지기 너무 쉽다ㅋㅋㅋㅋ
5강
1. “우리는 보통 ‘정신- 어떤 틀/ 관념- 그 정신 안에 들어있는 하나의 아이템’이라고, 정신-관념의 관계를 생각하는데, 스피노자에게는 정신도 이데아다. 그것은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단어를 훨씬 역동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표상처럼 생각하는데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았다.”
2. 우리가 하나의 속성만을 인식할 수 있었다면, 우리가 다른 속성들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유나 연장 중 하나만이 아니라 두 개를 인식하고, 이 두 개의 속성이 동일한 어떤 실체에 속한다. 같은 실체의 두 가지 표현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두 개가 세 개가 되든 네 개가 되든 다섯 개가 되든 무한하게 많든 상관이 없다. 왜냐면 우리는 서로 다른 속성의 공통적인 구조를 인식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속성만 인식하는 것하고 두 개의 속성의 공통된 질서, 구조를 인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생각해보지 못했는데 하나의 속성이 아니라 마침 정신과 신체라는 두 개의 속성을 인지할 수 있고, 그래서 비교/대조라는 것을 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에티카>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포인트구나. 2부 정리7 평행론도 그렇고 이 “두 가지” 속성이 기반이 되어서 만들어진. 물론 나는 여전히 ‘공통 질서’나 ‘공통 구조’ 같은, 어떤 ‘공통’을 뽑아내기에는- 심지어 뽑아낸 이후 그걸로 이론 하나를 구축해내기에는- “두 가지” 요소는 너무 적다고 생각하지만. 나처럼 소심한 사람은 적어도 열 개가 아니면 ‘공통’을 말할 수 없다...)
3. 정리5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 이상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데카르트주의자다라는 생각으로 연장속성을 지니는 두 개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면 물통하고 컵. 물통과 컵은 데카르트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다. 근데 정리5가 부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저 두 개는 실체가 아니다! 라는 말. 그러니까 정리5는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를 비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 “실체 중에는 유한한 실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데카르트처럼 유한한 실체를 인정해야만! 같은 본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정리5에서 유한한 실체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
4. 정리6 하나의 실체는 다른 실체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증명 자연 안에는 동일한 속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다(앞의 정리에 의해). 곧 (정리2에 의해) 서로 공통적인 것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정리3에 의해) 하나의 실체는 다른 실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곧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Q.E.D.
*** 근데 정리6에 대해서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상이한 속성에 속하는 각각의 실체들은 모두 신에 의해서는 생산될 수 있잖아? 이때의 신은 실체가 아닐 수도 있죠. 실체보다 더 상위의 초월적인 어떤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가 ‘따름정리’를 붙였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왜냐하면 공리1과 정의3과 5에 의해 명백한 것처럼 자연 안에는 실체들과 그 변용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정의3과 정의5에서 증명된 이 사실이 이 대목에서 ‘신이 실체들을 생산했다’를 정리7과 함께 원천봉쇄해버리는구나!!) 그런데 그것은 실체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위의 정리에 의해). 따라서 실체는 절대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Q.E.D
다른 증명 이는 모순을 통한 귀류법에 의해 좀 더 쉽게 증명된다. 왜냐하면 많은 실체가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된다면, 그것(실체)에 대한 인식은 그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해야 할 것인데(공리4에 의해) 그렇게 되면(정의 3에 의해)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함의: 창조론을 부정! 기독교 신학의 창조개념이 ‘실체들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에 반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