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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기에 앞서
-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들이 ‘실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우리가 개별자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소크라테스. 책상. 이런 것들. 문법적/논리학적으로 보면 실체는 주어고, 속성은 술어다. “소크라테스는 키가 작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우리는 보통 실체와 속성에 대해 저런 문장구조로 파악하는데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실체 개념과 다르다. 스피노자에게 저 주어들은 실체가 아니라 양태다. 또는 변용이다. 왜? 우리가 보통 개체라고 부르는 것들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안에 있기 때문에. 다른 것에 의존하고 다른 것에 의해 변화하고 다른 것에 의해 소멸하니까. 스피노자에게 실체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 안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지난 시간에 정리5까지에서 했던 이야기.
- 1)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하는 실체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것이냐 아니면 하나의 동일한 것이냐/ 2) 우주에는 속성이 존재하는 만큼 여러 실체가 존재하느냐 아니면 단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하느냐. <- 정리15까지 스피노자가 논증의 목표로 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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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록3 스피노자의 답장.
- 정의2 “동일한 본성의 다른 실재res에 의해 한정될 수 있는 실재를 자신의 유 안에서 유한하다고 한다”
- 실재 res/thing : res의 범위가 thing보다 훨씬 넓다. 실체도 res 변용도 res.
<-> 반대되는 말: 무. 아무 것도 아닌.
“동일한 본성”, “자신의 유”가 가리키는 말은 “속성”이다
1) 연장 corpus : 물체(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를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
2) 사유 cogotation : 관념, 이데아 (스피노자는 우리의 정신도 하나의 이데아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것도 상당히 특이한 생각이다. 우리는 보통 ‘정신- 어떤 틀/ 관념- 그 정신 안에 들어있는 하나의 아이템’이라고, 정신-관념의 관계를 생각하는데, 스피노자에게는 정신도 이데아다. 그것은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단어를 훨씬 역동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표상처럼 생각하는데 스피노자는 그렇지 않았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정신, 감정, 정서도 관념이라고 생각함 (물론 3부에서는 정서와 관념을 뚜렷하게 나누지만 어쨌든 넓은 의미에서보면)
- “누군가가 연장은 연장이 아니라 사고에 의해 한정된다고 말한다면, 이는 연장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연장인 한에서만 무한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지요?” : 1) 사유라는 속성이 연장 속성에 경계를 지어 한정을 해준다고 해서, 연장이 유한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2) 연장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이 아니고(절대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은 그걸 한정해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인데 사유가 한정하니까) 3) 하지만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종류 밖에서는 사유에 한정되니까 유한하나 종류 안에서는 무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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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4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
*** 여기서 말하는 지성은 무한지성. 신의 지성. 인간의 지성은 무한지성의 일부이며, 이 무한지성은 사유속성에 포함된다 ->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사유속성의 특별한 지위”라는 주제와 이어진다. 사유속성이 다른 속성에 비해 외연이 넓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게 무한지성 문제와도 연결된다.
*** 왜 스피노자가 우리는 사유속성과 연장속성만 인식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하냐면, 우리가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사유속성에 속해있는 양태고 신체는 연장속성에 속해있는 양태니까. 우리가 또 다른 양태를 갖고 있다고 했다면 아마 그 양태가 속해있는 다른 속성도 인식할 수 있었겠죠.
*** 그러면 우리가 두 개의 속성만 인식할 수 있는데 왜 스피노자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가. 스피노자가 1부 정리6에서 신을 정리하면서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라고 이야기한다. 근데 만약 속성이라는 것이 두 가지만 존재한다면, 신이라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속성이 사유/연장 두 개만 있다고 하면-> 신이라는 실체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가 아니라 사유/연장 두 개만 있는 실체가 된다. 그러면 다시 어떤 결과가 나오면 “신 바깥”이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가능해진다. 그러면 신 바깥에 신보다 더 포괄적인 어떤 초월자가 생기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자연에 대한 인식은 완전한 인식, 적합한 인식이 아니라 제한적인 인식이 된다. 그렇게 되면 드래곤 볼에서 배속 우주가 생기듯이 신 바깥에 또 뭐가 있을 것이고, 그 바깥에는 또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고... 이런 세계가 펼쳐져버린다. 스피노자가 신이란 것을 절대적으로 무한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신 바깥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신은 궁극의 우주라는 것이다. 바깥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물리적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두 가지 속성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이 존재하고 그것이 신의 본질이다라고 이야기할 때만 우리가 자연의 내재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 질문: 그 이야기는 자기 주장의 논리적인 완결성을 갖추기 위해서 자기 자신도 모르는 어떤 것을 가정을 해놓고 그게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사실 자기도 모르는 거 아닌지... 답: 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모두들 웃음) 근데 나중에 2부 정리7에 가서 살펴 볼 텐데 우리가 하나의 속성만을 인식할 수 있었다면, 우리가 다른 속성들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유나 연장 중 하나만이 아니라 두 개를 인식하고, 이 두 개의 속성이 동일한 어떤 실체에 속한다. 같은 실체의 두 가지 표현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면 두 개가 세 개가 되든 네 개가 되든 다섯 개가 되든 무하하게 많든 상관이 없다. 왜냐면 우리는 서로 다른 속성의 공통적인 구조를 인식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하나의 속성만 인식하는 것하고 두 개의 속성의 공통된 질서, 구조를 인식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생각해보지 못했는데 하나의 속성이 아니라 마침 정신과 신체라는 두 개의 속성을 인지할 수 있고, 그래서 비교/대조라는 것을 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에티카>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포인트구나. 2부 정리7 평행론도 그렇고 이 “두 가지” 속성이 기반이 되어서 만들어진. 물론 나는 여전히 ‘공통 질서’나 ‘공통 구조’ 같은, 어떤 ‘공통’을 뽑아내기에는- 심지어 뽑아낸 이후 그걸로 이론 하나를 구축해내기에는- “두 가지” 요소는 너무 적다고 생각하지만. 나처럼 소심한 사람은 적어도 열 개가 아니면 ‘공통’을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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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구별이론distinction theory과 스피노자의 수정
*** 데카르트의 이론
1) 실재적 구별 distinctio realis (real distinction) : 실체- 실체 ex) 컵과 책상
2) 양태적 구별 distinctio modalis (model distinction) : 실체- 양태
ex) 물통이라는 실체와 물통의 검은색이라는 양태 사이에 성립하는 구별. 물통과 검정색
3) 사고상의 구별 distinctio rationis (distinction of reason) : 실체- 속성
ex) 물체와 연장속성
*** 스피노자의 수정 : 데카르트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단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유한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스피노자에게 실체: only 자연전체 / 물체 & 정신: 양태
1) 실재적 구별: 속성- 속성
- 연장속성과 사유속성 사이에 실재적 구별 존재
-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와 사유속성에 속하는 양태 사이
- 그럼 실재적 구별이 성립한다는 것은 어떻게 알까?
답: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으면/ 상호작용이 있을 수 없으면 -> “실재적 구별 성립”
2) 양태적 구별: 같은 속성 안에서 양태-양태 / 양태- 속성
ex) 컵과 책상 (둘 다 같은 연장속성에 속하는 양태들이기 때문)
컵과 연장속성
컵에 대한 관념과 사유속성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A와 관념B => 양태적 구별/ 관념A와 사유속성 -> 양태적 구별
3) 사고상의 구별 : 실체- 속성.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 따라서 속성과 실체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양자 간의 분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관념적’으로 구별
정리5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 이상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가 데카르트주의자다라는 생각으로 연장속성을 지니는 두 개의 실체를 예로 들어보면 물통하고 컵. 물통과 컵은 데카르트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본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다. 근데 정리5가 부정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저 두 개는 실체가 아니다! 라는 말. 그러니까 정리5는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를 비판하는 것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근본원리: “실체 중에는 유한한 실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데카르트처럼 유한한 실체를 인정해야만! 같은 본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가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정리5에서 유한한 실체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
정리6 하나의 실체는 다른 실체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증명 자연 안에는 동일한 속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다(앞의 정리에 의해). 곧 (정리2에 의해) 서로 공통적인 것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정리3에 의해) 하나의 실체는 다른 실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곧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Q.E.D.
*** 그러니까 한 속성에 한 실체만 남게 된다. 다른 속성에는 또 다른 한 실체가 남게 되겠죠. 그런데 정리2에서 공통적인 것이 없으면 관계를 맺을 수 없다고 했으니 그 사이에서 어떤 연관도 있을 수 없고, 그건 생산도 마찬가지다.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더 쉽다
*** 사유속성에 속하는 실체는 연장 속성에 속하는 실체의 의해 생산될 수 없다
*** 근데 정리6에 대해서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상이한 속성에 속하는 각각의 실체들은 모두 신에 의해서는 생산될 수 있잖아? 이때의 신은 실체가 아닐 수도 있죠. 실체보다 더 상위의 초월적인 어떤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가 ‘따름정리’를 붙였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왜냐하면 공리1과 정의3과 5에 의해 명백한 것처럼 자연 안에는 실체들과 그 변용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실체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위의 정리에 의해). 따라서 실체는 절대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Q.E.D
정리6과 따름정리의 차이: 정리6에서는 실체와 실체와의 관계. 따름정리에서는 실체라고 안 하고 ‘다른 것에 의해’라고 되어있다. 이 ‘다른 것’이라는 표현이 훨씬 막연하고 포괄적이다. 여기에는 실체도 포함될 수 있고, 변용, 양태일 수도 있고, 신 같은 가상의 초월자일 수도 있고. 그래서 스피노자는 실체라는 말 대신에 의도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했다.
다른 증명 이는 모순을 통한 귀류법에 의해 좀 더 쉽게 증명된다. 왜냐하면 많은 실체가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된다면, 그것(실체)에 대한 인식은 그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해야 할 것인데(공리4에 의해) 그렇게 되면(정의 3에 의해) 그것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함의: 창조론을 부정! 기독교 신학의 창조개념이 ‘실체들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에 반해서.
정리7 실체의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
증명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앞의 정리의 따름 정리에 의해). 따라서 그것은 자기원인일 것이다. 곧 (정의1에 의해)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실존을 함축할 것이다. 또는 그 본성에는 실존함이 속한다.
*** 다른 것에 의해서 생산되거나 그러지 않으니까 자기원인일 것이다. 즉, 본성상 실존할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실체!
*** 2가지 반론이 존재한다.
1) 아까 정리6에서도 그랬지만 중세유대신학이나 스콜라신학에 기반을 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여기서 반론이 제기된 부분은 “실체는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자기원인일 것이다”에서, “따라서”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될 수 없다는 데에서 곧바로 자기원인이라는 귀결이 따라 나오지 않는다는 반론.
- 중세 최고의 유대 사상가 중 한명인 벤 마이모(유대식 표기), 마이모니데스(라틴어식 표기)에 따르면, “그 자신의 본질에 관해 필연적으로 실존하는 것(=곧, 신)은 자신의 실존에 대해 어떤 원인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기원인적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에 대해 어떤 원인도 갖지 않는다는 의미.
-“신은 아무런 원인도 갖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기본적인 방식인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방식을 따지지 않는다= 우리의 인식 기반을 초월한다. = 그러니 우리는 신에 대해 원인을 물을 수 없다. 신이란 만물의 궁극적인 원인이면서 자신이 원인 그 자체인, 우리의 이해를 초월한 신비한 존재다.
- 그러나 스피노자가 신, 실체를 자기원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실체도 원인이다”라는 의미다. 이 말은 신의 원인도 밝혀낼 수 있다는 말. 신에 대해서도 우리는 인과관계를 밝힐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인과관계 지식의 범위 안에 신의 작용도 들어온다는 의미. 신은 불가지하거나 초월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인식 범위 안에 있으며, 신은 충분히 적합하게 인식될 수 있다.
2) - 칸트: 그래, 다 좋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진짜 있어? 그냥 관념상의 존재 아니야?(네 머릿속에 들어있는 백만 원이 진짜 존재하는 것이냐) 존재증명의 대상이 되는 신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냐. 네가 열심히 말하고 있지만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실체, 그게 실제로 실존하는 게 아닌지 맞는지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 이에 대한 스피노자 생각은, 우리가 자기원인적인 존재= 본질상 실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 본성상 필연적으로 실존을 함축하는 존재는 자연전체 밖에 없다. 자연전체야말로 유일하게 자기원인적인 존재다. 그런데 자연이라는 게 없다라고 한다면, 오직 무만이 있는 것이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자기원인적 실체를 부정하고 관념상의 존재라고만 한다면, 거기에 남는 것은 무밖에는 없는. 그렇다면 거기에는 아무런 사고의 방식도 있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아무 것도 없다= 사고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원인적인 존재는 단지 관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참된 관념은 필연적으로 실존을 함축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자연전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한다.
- 어떤 의미에서 진화론이랑 잘 연결되는 철학이다. 2부 정리13-14 사이의 자연학 소론을 두고 많은 스피노자 연구자들이 스피노자가 물체와 운동을 설명하는 방식이 진화론적인 자연해석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