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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정의 7개의 공리

 

공리1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 안에 있거나 다른 것 안에 있다.

*** 정의3 실체/ 정의5 양태. 정의하는 모든 것은 실체이거나 양태, 양태의 변용들이다.

 

공리2 다른 것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 말을 반대로 바꿔서 써보면, “다른 것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인식 불가능하다. 인식을 초월하는 것이다.” -> 신비한 것. 인간의 의지로 접근불가능한 것 -> 이게 바로 칸트. -> 칸트: “속성이란 물자체. 하지만 우리는 물 자체를 알 수 없다. 현상만 알 수 있다” -> 다른 것에인식될 수 있는 것 VS 스피노자: 물 자체는 자신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 바로 저 차이. 그러므로 스피노자의 성격이 굉장히 잘 드러난 것이 공리2. “자신에 의해 인식이라는 개념. 그래서 공리2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사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다른 것에 인식될 수 없는 것은 자신에 의해 인식될 수도 있다.”크크. 하지만 스피노자는 저렇게도 말 안 하고 매우 세게 되어야 한다라고 말함 -> 우리에게 인식 불가능한 초월적 영역이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 합리적 인식을 벗어나는 것을 거부.

*** 자신을 통해 인식된다= 나보다 상위 개념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 아니다. 자체로 궁극적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된다= 그 자체가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상위의 개념에 의해 인식. ex ‘운동이 연장속성에 의해 인식되는 것.

 

공리3 주어진 규정된 원인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결과가 따라 나오며, 반대로 아무런 규정된 원인도 주어져 있지 않다면 결과가 따라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전통적 의미에서의 공리: 인과율. (ex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은 원인을 갖고 있다.) 결과에서 출발해서,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겠지하는 것. 그럼 이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은 언제나 가능한가? 그건 아니다. 전통적인 공리는 우리가 일어난 결과에 대해 반드시 그 규정된 원인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당연히 원인은 있겠지만 불가지할 수도 있다. 합리적으로 밝혀내지 못하는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 ? 신은 세상 모든 일의 원인이자 근거라고 가정되어 있지만 이것이 우리가 신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거나 그가 만물을 생산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음을 함축하지 않는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거나 만물을 생산하는 방식은 신비로,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작용으로 남을 수 있다.

*** 스피노자의 공리: 이러한 초월성이나 신비의 여지를 배제한다. “주어진 규정된 원인”(<- 매우 중요한 말)이 반드시 있다= “주어진 규정된 원인에서 결과가 따라 나오는 것은 필연적이다특히 정의7을 보면 규정되다는 말이 2번이나 나온다(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에 의해서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하도록(a) 규정되는 실재는 자유롭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실재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작업하도록(b) 규정되는 실재는 필연적이라고 또는 오히려 제약되어 있다고 한다.”) , 자유로운 것은 규정되지 않은 것이 자유가 아니라 정의7처럼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실재에 일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자유롭고, 자유로운 실재는 다 규정되어 있고 제약적이다. , “임의로인 게 아니다. 신이 기분이 좋아서 어떨 때는 놔두고 어떨 때는 제약하고 이런 게 아니다. 그것이 자유로울 때조차도 규정된 방식, 질서, 제약이 있다. 임의가 아님.

 

공리4 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며 그것을 함축한다(involvit).

공리4는 공리3에서 자연스럽게 따라나온다(공리4는 공리3의 인식론적 귀결이다) 원인이 결과를 생산하는 방식이 어떤 매커니즘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결과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결과를 필연적으로 산출하는 원인에 대하여, 또는 원인이 결과를 생산하는 필연적인 규칙이나 법칙에 대하여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 없이는 결과 또는 사건에 대한 인식은 불완전하고 부적합한 것에 머물게 된다.

*** 공리4= 원인을 모르면 결과를 알 수 없다. 스피노자의 말을 더 자세히 풀어보면, 원인을 모르고도 결과를 알 수는 있는데, “잘려나가고 혼동된 방식으로(=부적합한 방식으로)” 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이런 식이다. ex “사람은 모두 죽는다.” 다들 이 사실을 알지만 왜 인지는 잘 모른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경험적으로 그냥 아는 것이다. “불은 물로 끌 수 있다근데 왜? 이것도 앎은 앎이지만 결과아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부적합한 앎. 물로 못 끄는 불도 있을 수 있는데, 이 경우 원인을 알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텐데 모르면 거기서 끝인 것이다.

 

*** 2부 정리7 44p. 각각의 결과에 대한 인식은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고-> 정리7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 정리7은 공리4을 펼쳐놓은 이야기다. 증명 이는 1부 공리4로부터 명백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원인지어진 것에 대한 관념은, 이것이 그 결과가 되는 그 원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름정리 이로부터 신의 사유 역량은 신의 현행적인 행위 역량과 동등하다는 점이 따라 나온다. 곧 신의 무한한 본성으로부터 형상적으로 따라 나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 동일한 연관에 따라 신 안에 있는 신의 관념으로부터 표상적으로 따라 나온다.

주석 곧 무한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하며, 따라서 사유하는 실체와 연장되는 실체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로, 때로는 이 속성 아래에서, 때로는 저 속성 아래에서 파악된다. (....) 가령 자연 안에 실존하는 원과 실존하는 원의 관념(이것 역시 신 안에 존재한다)은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상이한 속성들에 의해 설명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연을 연장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사유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든 아니면 다른 어떤 속성 아래에서 인식하는 간에,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 또한 하나의 동일한 인과 연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동일한 실재들이 서로 따라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신은 오직 그가 사유하는 실재인 한에서만 어떤 관념, 가령 원의 관념의 원인이며, 오직 그가 연장되는 실재인 한에서만 원의 원인이라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니라 원의 관념의 형상적 존재는 가까운 원인으로서의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지각될 수 있고, 이 다른 사유 양태 역시 또 다른 사유 양태에 의해서만 그럴 수 있으며, 이처럼 무한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재들이 사유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동안에는 우리는 자연 전체의 질서, 또는 인과 연관을 사유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해야 하고. 그것들이 연장의 양태들로 고려되는 한에서는 자연 전체의 질서는 마찬가지로 연장 속성에 의해서만 설명되어야 하며, 다른 속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그리하여 신은 사실 그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한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실재들의 원인이다.

 

공리5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못한 것들은 서로 이해될 수 없다. 또는 하나의 개념이 다른 것의 개념을 함축하지 않는다.

공리 3과 공리4가 원인과 결과의 보편성, 그리고 그 인식의 보편성을 함축하는 반면, 공리5는 이러한 보편성에는 제약이 존재한다고 언표한다. 곧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공통적인 것을 갖는 것들사이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스피노자가 정의2에서, 그리고 뒤에서 제시할 표현대로 하면 같은 속성을 공유하는 것들 사이에서만, 다시 말해 하나의 속성 안에서만 실재들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존재하게 된다. 한 물체는 다른 물체를 움직일 수 있지만, 물체가 관념을 움직일 수 없고, 관념도 물체를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 공리3, 4를 한정하는 의미. 아무것도 공통적인 것을 갖지 못하는 것들은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될 수 없다. => 원인과 결과가 성립하려면 공통된 것이 있어야 한다. , 공리3, 4에서 말하는 인과관계가 속성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속성과 속성 사이에서, 한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와 다른 속성에 속해있는 양태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설명할 수 없다.

*** 근데 이렇게 되면 무슨 질문이 제기될 수 있냐면, 그렇다면 연장속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고, 사유속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3 속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고, 4 속성, 5 속성....등등 안에서 작용하는 인과관계가 있을 텐데, 무수히 많은 속성 안에서의 인과관계들, , 서로 독립적인 무한한 속성의 체계들이 있고, 각각의 속성은 다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체계를 갖고 있는 것인데. 그럼 우주는 여러 개의 우주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기에 대한 답은 공리6에 나온다.

 

공리6 참된 관념은 그것의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

여기에서 합치하다convenire의 번역이다. 이것은 진리는 지성과 사물의 일치라는 중세철학 이래의 기본원리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cf 2부 정리4적합한 관념에 대한 정의

*** “합치해야 한다는 말이 2부에서 앞으로 엄청 자주 나온다. convenire-> correspond의 어근을 가진. 오래전에 헤어진 오누이가 반쪽짜리 거울을 갖고 있다가 나중에 다시 만나서 합치하는 것 같은.

*** 중세철학: “진리라는 것은 지성과 사물의 일치다“ 2부에서 adequatioconvenire가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구별해야 한다. 참되다는 것은 뭐냐. 우리가 사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 생각이 원래와 딱 들어맞는 것.

*** 왜 공리5 뒤에 공리6이 왔을까. 저 의문, 우주란 것이 다수의 우주로 존재하는 것 아닌가에 대한 답. 그리고 답은 아니다. 참된 관념은 대상이랑 합치해야 하니까(지성-사유속성과 사물-연장속성이 일치해야 하니까). 그러니까, 다른 속성들끼리는 인과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지만, 사유속성 속에서 존재하는 인과관계의 질서는 물체(연장속성) 속에서 존재하는 인과관계의 질서와 합치한다. (, 공리6 매우 큰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속성이 여러 개 있다고 해도, 그것이 각각 별도의 합리성, 인과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 하나의 속성에서 표현되는 인과관계는 각각 다른 속성에서의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것. 우리가 어떤 관념이 진리라고 하려면 그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

 

공리7 실존하지 않는다고 인식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

이것은 공리1과도 관련되어 있다. 공리1에서 자신 안에 있는 것은 또한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과 다른 근거나 원인을 가질 수 없고 자기 자신을 원인이나 근거로 삼는 것이며, 따라서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자기원인적인 것이다. 반면 다른 것 안에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 다시 말하면 다른 것을 근거나 원인으로 지니는 것이며 따라서 자기원인적일 수 없는 것이다.

*** 실존하지 않는다고 인식될 수 있는= 자기원인적이지 않은

*** 공리7은 정의1의 대칭적인 이면이다. 정의1(“나는 그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는 것, 곧 그 본성이 실존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것을 자기원인으로 이해한다.”= 실존 없이는 본질이 성립되지 않는다)에서는 자기원인적인 것을 정의했고, 공리7에서는 자기원인적이지 않은 것은 본질이 실존을 함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 다른 것에 의해 규정된다.

*** 자신 안에 있다는 것- 실체의 본성// 다른 것 안에 있다는 것- 양태의 본성

*** 공리1과의 비교: 공리1에서는 인식되는 측면을 빼고 말했다.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측면= 자기보다 상위의 논리에 근거하지 않는 측면. // 공리7은 그 다른 측면에 대한 이야기. 그 다른 측면= 다른 원리가 먼저 있어야 성립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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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타임

- 질문: 무한한 속성이라는 것이 계속 무한하게 있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인간 존재들의 생명체 내에서 나타나는 것-사유속성과 연장속성- 이외의 무한한 속성을 생각했을 때 가능한 형태는, 그 생명체가 어떤 생명체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다른 생명체 내에서 나타나는 질서 아니면 생각해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속성이 다차원이라면 (인간이 사유/연장 속성을 담당하듯이) 그 다차원을 이루는 부분들은 다른 어떤 생명체 내의 질서가 아닐까라는 질문인 듯) 녹음 파일 27. 스피노자 41

- : 그렇게 생각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스피노자 자신이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놓은 바가 없어서. 우리가 왜 사유속성과 연장속성만 예측할 수 있느냐. 스피노자 이야기는 우리가 정신하고 실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사유속성 연장속성 두가지밖에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속성은 무한하게 많다. 이렇게만 이야기했습니다. 아마 제3의 속성 제 4의 속성 이런 것도 존재를 하고 스피노자적 관점에 따르면 더 무한하게 많이 존재할텐데, 그런데 스피노자가 그런 제안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정신과 신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두 가지밖에 인식할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제3의 속성을 인식할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하려면 우리가 신체와 정신이외의 제3의 양태를 갖고 있다는 제시가 되어야 할 텐데 그런 게 어떤 것인지 스피노자가 그런 여지를 허용했는지, 그것은 좀 논의의 여지는 있죠. 물론 이제 우리가 꼭 스피노자에 얽매이지 않고도, 스피노자적인 방식으로 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신체와 정신의 관계라든가.

 

- 질문: 시간 같은 경우에는 완전히 이걸 사유속성이라고 보기에는 실체가 있을 것 같고. 이렇게 완전히 구분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어떻게 보는건지.

- : 강의록 3쪽에 보면 마침 올덴부르크가 셋째, 라고 한 부분의 네 번째 줄부터 보면, “두번째 공리는 자연 안에는 실체들과 우연속성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지만(스피노자가 이때만 해도 이것을 공리2로 제시했다), 많은 이들은 시간과 공간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라고 주장합니다에도 이런 의문이 나온다. 스피노자에게는 시간과 공간은 우연속성들, 양태적인 차원에 들어가는 것. 다 물리적인 차원의 성격을 갖고 있고, 어떤 경우에는 상상적인 것.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념은 인위적으로 절단해서 생각하는, 1미터 1센치 11시간, 상상적이고 추상적인. 스피노자는 시간과 공간에 대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장속성에 들어간다고 생각했다(“뭔가 아인슈타인적이네요”- 누군가 답) 시간과 공간이 상당히 중요한 철학적인 문제가 된 것은 뉴턴과 라이프니츠, 칸트를 거치면서. 스피노자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스피노자가 만약 자연철학에 대한 책을 썼다면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썼을텐데 일단 에티카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 질문: 근데 칸트는 시간을 사유속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스피노자는 전혀 사유속성으로 고려하지 않고 연장속성으로만 취급한 거예요?

: 그렇습니다. 스피노자에게 진리는 영원성의 차원에 있으니까 시간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고. (, 이 답 되게 낭만적이고 좋다)

 

- 질문: 시간을 배제한 사유가 있을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변해가는데 스피노자가 시간을 연장으로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걸 분리해서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연장속성 만인지 전 잘... 양쪽 속성에 다 내재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 칸트가 생각하는 시간과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은 다른데 그걸 같다고 하니까 혼동하는 거다. 스피노자가 시간을 연장속성이다라고 확고하게 귀속해놓지는 않았지만 그가 시간이 연장의 차원에 속해있는 것은 거의 부정하기 힘든 점이다.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을 다른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시간과 같은 차원에 놓으면 곤란합니다. 스피노자는 지금 이야기한대로라면 시간이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지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지속하고 영원이라고 스피노자가 부르는 그 두 가지에는 또 차이가 있죠.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의 개념은 범위도 그렇게 넓지 않고, 스피노자가 시간이라는 것을 별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는게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시간은 아주 인위적으로 절단된, 단위로서의 시간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칸트나 다른 철학자들,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질문: 스피노자의 시간을 그럼, 연장의 누적 정도로 이해하면 될까요?

: ... 근데 스피노자의 시간은 아주 단순한 겁니다. 스피노자가 시간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추상적인 양이에요. 추상적인 양. 1213초 할 때 이렇게 사람이 외부의 대상을 판단할 때 상상적으로 인위적으로 재단하는 양의 단위들 중 하나가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시간입니다. 추상적이고 상상적인 양이라고. 그것은 스피노자가 철학적으로 사고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대상의 본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대체 이 하루를 1231시간 단위로 쪼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그리고 그걸 왜 철학적인 사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냐. 이게 스피노자의 생각입니다.

 

- 질문: 공리6에서 참된 관념은 그것의 대상과 합치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참되지 않은 관념들은 대상이 있는지. 참되지 않은 관념에 대한 대상이 따로 있다면 개수가 같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관념이 더 많고 대상이 더 적은 것인지.

- : 아주 재밌고 좋은 질문이네요. 질문이 내용은, 참되지 않은 관념은 대상과 합치하지 않은 관념이지 않느냐, 그러면 참되지 않은 관념들에 대상이 따로 없다면, 대상의 숫자보다 관념의 숫자가 더 많다는 이야기 아니냐, , 관념의 외연이 대상의 외연보다 큰 거 아니냐. 이런 질문인데 상당히 좋은 질문입니다. 속성과 속성의 외연의 차이의 문제는 스피노자 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고 특히 2부에 가게 되면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2부의 평행론에 가게 되면. 스피노자는 (요즘 철학자들한테는 이해하기 어려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관념에 대해 두 가지 지위를 부여합니다. 1) 관념이라는 것은 표상적 실재성, 표상적 본질을 갖는다. essential of objectiva(objective) 근데 이게 객관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2) 형상적 본질 essential of formalis(formal) -> 독자적 실재. essential of objective/ essential of formalis 어떤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그 관념이 표상하는 실재가 있다는 말.

***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그것이 표상하는 어떤 대상, 실재와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되는 관념. 표상적 본질. 근데 이런 차원만 갖고 있다면 단순한데, 스피노자는 관념이라는 것은 또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형상적 본질을 갖고 있는 관념은 뭐냐면. 관념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과 마찬가지로 관념도 독자적 실재라는 것. 관념이라는 것도 독자적 실재다. 단지 관념 바깥에 있는 어떤 대상을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련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 자체도 독자적인 실재가 된다는 말.

*** 그러면 또 어떤 복잡한 문제가 생기게 되냐면 형상적 본질을 갖는 이 관념을 표상하는 관념이 또 있는 거예요(마트로슈카처럼). 형상적 본질로서, 하나의 독재적인 실재로서의 관념 A가 있다고 합시다. 이 관념 A에는 역시 표상적 측면이 있고 형상적 측면 두 가지가 있어요. 그리고 여기 형상적 측면을 갖는 관념A를 표상하는 또 다른 관념B가 있다고 합시다. 관념A를 표상하고 관념A를 대상으로 하는 관념. 그러면 이 관념B도 또한 표상적 측면과 형상적 측면으로 나뉘구요, 그러면 관념B를 표상하는 또 다른 관념C가 또 있겠죠. 이렇게 계속 D E F G....로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관념들이 모여서 구성하는 사유속성의 세계는 연장속성의 세계보다 외연이 더 클 수밖에 없죠. 여기에는 관념이 있으면 관념을 표상하는 또 다른 관념이 있고 또 다른 관념이 또 있고.

*** 여기에다가 또 뭐가 있냐면 관념이 표상하는 대상에는 연장속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제 3의 속성, 4의 속성, 5의 속성 안에 담겨있는 양태들도 다 관념이 표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유속성의 범위가 훨씬 크죠. 다른 속성에 비해서. 그러면 또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죠. 이럴 경우에 우리가 정확하게 속성과 속성의 평행이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냐. 사유속성이 다른 속성과 동등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냐. 사유속성이라는 것이 뭔가 특권적인 지위를 갖고 있는 게 아니냐 이런 질문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유속성의 외연 문제는 그 자체로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 그리고 지금 제기한 질문은 또 다른 측면을 갖고 있어요. 왜냐면 지금 얘기했던 관념들은 다 말하자면 참된 관념들인데 다시 말하면 자신의 계산을 다하고 있는 관념들에 관한 이야기인데 지금 질문하신 것처럼 관념 없는 대상의 경우도 있구요. 또 그런 경우도 있잖아요. 허구적인 관념이라든가 날개달린 말이라든가 뿔이 달린 말이라든가 가공의 어떤 대상과 관련한 관념들이 있죠. 그러니까 허구적 상상적인 관념들. 그렇다면 이런 관념들의 지위는 어떤 것이고, 이 관념들은 아무런 상응하는 대상이 없는 관념들인데 이 관념들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형상된 본질을 갖고 있는 것이냐. 이런 질문들이 제기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정리8의 두 번째 주석을 할 때 한 번 다시 이야기를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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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1부의 논증구조 260p.

1. 전반부: 정리1-15

=실체=자연의 논리적 구조. 다시 말하면 신 또는 실체는 무한하게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이루어진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라는 것. 그리고 이런 존재자는 딱 하나만 존재한다.

1) 정리1-8

데카르트의 유한실체 개념에 대한 비판. “모든 실체는 필연적으로 무한하다” (정리8)

모든이라는 말은 적어도 하나 이상이라는 건데(속성은 무한하니까) 근데 그러면 실체가 다수 존재하는가 하나만 존재하는가. 스피노자의 답: 정리9-15. 아니다. 하나다. 그 하나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

2) 정리9-15

복수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무한한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

신 또는 각자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는 필연적으로 실존한다”(정리11)

정리9-11이 가장 핵심적이다->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인 신이 실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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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1 실체는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선다.

= 실체가 변용들의 근거가 된다 = 변용들은 실체를 근거로 해서 성립될 수 있다.

증명 이는 정의35에 의해 명백하다

*** 정의3 실체 정의5 양태. > 연장> 운동

*** 실체는 다른 것을 전제하지도 않고 없이도 존재/인식가능한 본성상, 다른 것을 전제해야만 하고 없으면 존재 불가능한 양태에 앞선다.

 

정리2 상이한 속성을 지닌 두 개의 실체는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다.

증명 이 또한 정의3에 의해 명백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것(실체)은 자신 안에 존재해야 하고 자신을 통해 인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곧 그 개념의 형성이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실체는 독립적/자율적이니까-> 어떤 실체가 있어도 다른 실체에 근거하지도 않고 연관도 없는 것이다(독립적이니까!)

정리3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 것들은 서로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증명 만약 그것들이 서로 아무런 공통적인 것도 갖지 않는다면, (공리5에 의해) 그것들은 서로 이해될 수 없다. 따라서 (공리4에 의해) 서로 다른 것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이것이 증명되어야 할 점이었다. Q.E.D.

 

정리4 서로 구별되는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재들은 실체들의 속성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든가 아니면 그 실체들의 변용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는 다수의 사물들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다수의 사물들이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다수의 사물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거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1) 속성의 차이에 의해서 2) 변용의 차이에 의해서. , 사물들은 속성에 의해서 달라지든가 변용에 의해서 달라지든가.

증명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 안에 존재하든가 다른 것 안에 존재한다(공리1에 의해). (정의3과 정의5에 의해) 지성 바깥에는 실체들과 그 변용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지성 바깥에는 실체들 또는 같은 것이지만 (정의4에 의해) 그 속성들과 그 변용들 말고는, 다수의 실재들이 서로 구별될 수 있게 해주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Q.E.D.

*** 지성 바깥에는= 자연 안에는, 실제로는

*** 지성 바깥에는 실체들 또는 같은 것이지만 그 속성들 -> 스피노자는 실체들과 속성들을 같은 걸로 제시하고 있다 by 정의4 “나는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이해한다.” 러니까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니까 속성은 실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초기 편지를 보면 실체에 대한 정의와 속성에 대한 정의가 사실 똑같다. <에티카>에 와서 스피노자가 속성에 대한 정의를 정의4로 이야기했지만 편지에서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라고, <에티카>에서의 실체의 정의와 같은 걸로 말했다.

 

*** 질문: 보통 우리가 실체라고 말하면 속성을 담지하고 있는 담지자지 속성과 교환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잖아요?

: 그것은 우리가 보통 실체나 속성에 대해 이해하는 방식이자, 스피노자 당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실체라는 것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고, “속성이라는 것은 실체에 깃들어 있는, 실체에 의존하는 성질이고. 그래서 다들 어떻게 실체와 속성이 같냐는 의문을 가졌었고 더 이해하기 힘들어했던 것은 왜 실체가 하나냐.

질문: (다른 사람이 깜짝 놀라면서) 실체가 하나라구요?!

: (모두 웃음) 아까 논증구조에서 이야기했듯이 정리8까지는 실체가 하나라는 이야기는 아직 안 나오죠. 정리8까지는 실체는 정의상 다수가 존재한다는 가정이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 질문: 그럼 정신이랑 물체가 같은 건가요? 실체라는 점에서.

: 질문에 이미 문제가 있는데, 일단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체를 모두 실체라고 봤습니다(- 무한실체, 정신/물체- 유한 실체). 하지만 스피노자에게 정신과 물체는 실체가 아니라 양태입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그런 말을 안 하고 있죠. 그래서 이 시점에서는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어요. 아직까지 스피노자는 실체가 뭐다, 양태가 뭐다라고 그 사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고 있지요. 그저 정의3과 정의5만 이야기했을 뿐. 왜냐면 지금 스피노자의 논증의 목표는 과연 실체라는 것이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든 간에) 과연 유한할 수 있느냐 아니면 실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무한하냐.”, 바로 이걸 논증하는 과정이거든요. 만약 실체가 무한하다는 것이 입증이 되면 정신이나 물체 같은 것이 실체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게 입증이 됩니다. 정신이나 물체는 유한하니까. 그럼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것이 증명이 됩니다. , 일단 여기서 논증의 목표는 실체라는 것을 정의3 이라고 내린다면 그 실체에 유한한 실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느냐그것입니다.

 

*** 다시 증명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문장을 봅시다. 따라서 지성 바깥에는 실체들 또는 같은 것이지만 (정의4에 의해) 그 속성들과 그 변용들 말고는, 다수의 실재들이 서로 구별될 수 있게 해주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 다수의 실재들이 서로 구별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속성들과 변용들 뿐이다. , 사물A, 사물B, 사물C를 구별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실체냐! 양태냐! = 이것이 어떤 속성에 속하는 실체인지, 어떤 변용에 따라 구별되는 양태인지. 이것이 사물들을 구별하는 두 가지 기본적인 방식이다. 이것 외에 우리가 사물을 구별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은 없다.

 

정리5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들이 존재할 수 없다.

*** = , 같은 본성 또는 속성을 지닌 실체는 하나뿐이다. 어떤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연장 속성에는 연장 속성에 속하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 사유 속성에는 사유속성에 속하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

*** 데카르트의 유한실체가 가능하려면, 같은 속성을 지닌 다수의 실체가 존재해야 한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의 유한실체에서처럼 물체가 실체라면-> 물체는 연장속성을 가질 테고-> “연장속성이라는 동일한 속성을 가진 물체라는 것은 다수이기 때문에 -> “같은 본성을 지닌 실체는 다수다라는 결론. 그런데 정리5에서 스피노자는 이와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같은 본성을 지닌 실체는 하나다라고.

*** 정리5에서 일단 논증의 한 마디가 끊어진다. 정리8까지에서 펼쳐질 스피노자 논증의 한 부분(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 데카르트 비판의 한 측면이 여기서 증명이 되는 것이다.

증명 만약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구별되는 실체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속성들의 차이나 변용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어야 한다(앞의 정리에 의해). 만약 속성들의 차이에 의해서만 구별된다면, 오직 동일한 속성을 지닌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는 점이 인정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변용들의 차이에 의해 구별된다면, 실체가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서기 때문에(정리 1에 의해), 일단 변용들은 제쳐두고 실체를 그 자체로 고려한다면, (정의3과 정의6에 의해) 참되게 고려한다면, 한 실체는 다른 것(실체)과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위의 정리에 의해) 다수의 실체가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할 것이다. Q.E.D.

*** 두 개 이상의 실체를 구별하는 두 가지 방식은 속성/ 변용이다.

1) 실체가 속성에 의해서만 구별된다면, 이 말은 한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속성이 다 다르니까 실체가 속성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가능하니까. 만약에 한 속성에 여러 개의 실체가 있다면, 그건 속성에 의해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속성 내에서 다른 것, , 변용에 의해 구별되는 거겠죠. 하지만 속성의 차이에 의해서만 실체들이 구별된다= 속성이 다 다르다=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

2) 실체가 변용에 의해서 구별된다면, 그런데 이것은 이 문장 자체가 벌써 불가능하다. 왜냐면, 변용은 실체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으니까! 실체가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서기 때문에(정리 1에 의해), 일단 변용들은 제쳐두고 실체를 그 자체로 고려한다면, (정의3과 정의6에 의해) 참되게 고려한다면, 한 실체는 다른 것(실체)과 구별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 스피노자의 키포인트는 정리1이다. “실체는 본성상 그 변용들에 앞선다.”= 변용은 실체를 구별짓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변용이라는 것은 실체에 의해 성립되고, 실체에 의해 근거를 부여받는 건데 우리가 거꾸로 어떻게 변용을 가지고 실체를 구별할 수 있고, 실체를 구별하는 근거를 삼을 수가 있는가. 전제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우리가 변용에 의해서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변용뿐이다 ex) 예를 들면 컵A와 컵B를 구별할 때 (스피노자 표현으로 말하면) 변용을 가지고 구별한다. 검은색이라는 양태, 하얀색이라는 양태로. 우리가 이 두 개의 컵을 구별할 수 있다는 것은 변용의 차이로 구별하는 것이다. 변용의 차이로 구별하는 것은 실체 그 자체를 구별하는 것은 아니다.

요약: 우리가 실체를 구별하는 방식은 저 두 가지 밖에 없으니 증명 끝!

*** 여기까지해서 정리5까지 해서 데카르트 비판의 한 측면이 끝났다. 하나의 속성에는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 하나의 속성을 갖는 두 개 이상의 실체는 없다!가 증명된 것. 근데 그 실체가 유한한지 무한한지는 아직 증명이 안 됐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정리6- 정리8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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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록2 3p. 올덴부르그의 3번째 편지. 1661927일 런던에서 스피노자에게 보낸 편지

당대의 사람들이 스피노자를 잘 이해 못했던 이유는 아마 칸트/데카르트적인 생각에 그동안 철저히 매몰되어서 일 것 같다. 그만큼 스피노자가 새로웠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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