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 - 후쿠시마와 식민주의, 후쿠시마와 연대, 후쿠시마와 예술
서경식.정주하 외 지음, 형진의 옮김 / 반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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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교통방송에서는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 한다는 것>을 소개했다. 지난 주에는 대구에서 상화문학제가 있었고, 그 때문에 이 책을 소개했다. 이 책은 정주하 작가의 사진전을 중심으로 이뤄진 대담을 모은 것인데, 정작가의 사진전 제목이 바로 이상화의 시 제목이기도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기 때문이다. 최근 평화박물관 사태로 말이 많은데 이 제목을 제안한 이는 한홍구 선생이었다고 한다. 최근 사태의 진실은 잘 모르겠지만 깊은 생각을 길러내는 제목이었다고 책을 보며 새삼 느낀다. 그리고 나 역시 마루키미술관에서 이 전시를 본 적이 있는데, 사진전에 직접 갔을 때보다 이 책을 읽은 것이 사진을 두고 생각하기에는 더 좋았던 것 같다. 좋은 책인데 더 많은 분들이 읽으시면 한다.


아마 정주하 작가나 서경식 선생님은 불편하실 수도 있었겠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은 역시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에서 있었던 대담을 담은 부분이었다. 거기서 히가 도요미쓰는 오키나와 출신의 사진작가인데, 정주하 작가의 사진에 뼈와 피가 없는 것에 대해서 묻는다. 왜 그런 건 찍지 않는가. 서경식 선생이 오키나와와 후쿠시마가 연대할 수 있다고 하자 오키나와는 침탈된 것이고, 후쿠시마는 자기 욕심에 스스로 그런 피해를 입은 것인데 이제와 원전 피해를 입었으니 연대하자는 건가 하고 되묻는다. 그리고 이런 질문이 이어진다. 모두가 원전 피해를 입어야 연대할 수 있다는 건가? 아마 책 전체에서 정주하 작가의 사진전 제목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어두운 대답이 아니었나 한다. 정희진 선생은 히가 도요미쓰의 마지막 질문에 대해 무어라고 대답할까. 아마 정희진의 <피해를 공유하는 방법>에서 쓰고 있는 이 말이 아닐지.


"원전 자체를 없애야 하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므로 일시적인 ‘해결’은 피해를 보편화하는 것이다. 행하는 사람(주체)과 당하는 사람(대상)의 구분을 없애고 타자(他者)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실험이다."

후쿠시마라면 이런 방법도 있겠지만, 오키나와의 피해는 어떻게 보편화할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결국은 빼앗긴 들에 대한 기억으로 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

  • 서경식 정주하 외


  1. 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이번 주에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반비에서 만들고, 서경식과 정주하 외 여러분들이 함께 나눈 대화를 정리한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이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정주하 선생은 사진작가인데요,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후쿠시마 지역에 있던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되는 중대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정주하 작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2011년 11월에 후쿠시마를 방문해 후쿠시마와 피해가 컸던 미나미소마를 촬영하여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 만들어진 작품을 2012년 3월에 한달간 서울의 평화박물관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고, 2013년 3월부터 2014년 5월까지 일본 전역을 도는 순회전시가 열리게 됩니다. 후쿠시마 미나미소마 중앙도서관을 시작으로, 사이타마의 마루키미술관, 도쿄의 신주쿠 어느 갤러리,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 나가노의 우에다 시나노데생관, 교토의 리츠메이칸대학 뮤지엄까지 모두 여섯 곳에서 전시가 있었는데요, 그 때마다 진행되었던 정주하 선생과 여러 학자, 청중들의 대담을 엮어서 만든 책이 바로 오늘 소개해드릴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이라는 책입니다.


2. 그러면 이 책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정주하 작가의 사진에 관한 대담집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서는 일본인 사진작가들도 얼마든지 기록할 수 있었을텐데요, 한국의 정주하 작가가 일본에까지 가서 일본의 사고 현장을 촬영한다는 것이 언뜻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네, 아마 그렇게 여기시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 한국 작가가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대한 기록을 하는가? 일본인들도 얼마든지 기록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 책을 읽어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제목의 시 아시나요?


3. 그럼요. 이상화 시인의 시죠.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하고 시작되는.. 게다가 이상화 시인은 대구 출신이라 대구 시민분들에게는 익숙한 시인이죠.


네, 아마 우리 청취자분들께서도 이상화 시인을 많이 아실텐데요, 제가 이 시를 말씀드린 이유는 정주하 작가가 후쿠시마를 촬영해 만든 이번 사진 전시의 제목이 바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였습니다. 이상화 시인의 시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거에요. 


4. 아 그래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는 일제 식민지 치하의 우리나라의 현실을 노래한 내용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것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이 책 전체는 방금 말씀하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과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의 내용을 후쿠시마에 대해서도 읽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일텐데요, 원전 사고 이후에 후쿠시마라는 지역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방사능에 땅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고, 거기서 목축을 하거나 감나무를 재배하거나 농사를 짓고 어업을 하던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의 고향에 살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들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일본 제국에 의해 우리 고향을 빼앗겨 버린 것과 비슷합니다. 일제의 수탈과 징용으로 더 이상 고향의 들에서 살 수 없게 되어 버린 조선 사람의 처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어제까지는 내 고향이었지만 지금은 “남의 땅”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죠. 정주하 작가는 사진전의 제목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붙여 후쿠시마를 빼앗겨 버린 후쿠시마 지역의 사람들과 조국을 빼앗겼던 한국 사람들의 고통과 기억을 연대하려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사진전의 제목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제목을 붙여 일본인들이 후쿠시마 사고로 인해 생긴 고통으로  식민지 통치를 기억하도록 하고, 한국인들에게는 일제 때의 수모와 고통을 기억하게 해서 후쿠시마 사고로 들을 잃은 자들의 고통을 상상하도록 하고 싶다는 것이죠.


5. 제가 방송 전에 잠깐 책을 봤는데요, 책 표지를 열자마자 정주하 작가가 전시한 사진이 컬러로 실려 있더라구요. 마치 사진집처럼요. 그런데 사진을 봤을 때는 이게 원전사고가 난 지역을 찍은 것인지 바로 알아채기 어려웠어요. 그냥 일상적인 풍경 사진처럼 보였거든요. 


 저는 이상화 시인이 대구의 시인이라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운데요, 제가 왜 이상화 시인 말씀을 드리냐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 시에서 한 사람은 빼앗긴 들을 걸으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 가구요,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고 웃습니다. “혼자라도 기쁘게 가자 /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그러니까 이 시를 언뜻 보면 조금도 슬프지 않습니다. 식민지 현실의 고통을 바로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인이 돌아와 걷고 있는 이 땅은 이렇게나 아름다운 내 고향이지만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내가 땀을 흘려 일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 없고, 아주까리 기름을 바르고 지심 매던 사람들도 보고 싶어도 다 흩어져 더 이상 볼 수 없는 땅입니다.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 이 들판은 이제는 빼앗겨 버려 더 이상 우리 땅이 아닌거지요. 

 방사능 유출 사고가 후쿠시마에서 있었는데요, 방사능 사고가 났다고 해서 눈으로 봤을 때 달라지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방사능은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방사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살인마이기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위험하지만 곧장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요, 후쿠시마는 청도처럼 일본에서는 가장 유명한 감 산지입니다. 그래서 곶감 생산이 후쿠시마 지역 사람들의 수입원 중 하나였는데요, 정주하 작가의 사진을 보면 감나무에 주렁주렁 감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을 따지 않아서 감이 나무에 매달린 채 홍시가 되어 축 늘어져 있습니다. 그냥 감을 따도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감 수확을 할 수 없는 이유가 많은 과일 중에서도 유독 감이 방사능에 취약하다고 해요. 보통 1킬로그램 당 100베크렐 이상의 방사성 물질이 들어 있는 식품은 출하할 수 없는데, 일단 감에서 그 이하로 검출되었다고 해도 이걸 곶감으로 만들면 수분은 빠져 나가고 방사성 물질은 남기 때문에 방사성 물질이 수백배로 농축된 제품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곶감을 만들어도 출하할 수 없는 거죠. 어제의 곶감이 더 이상 그 곶감이 아닌 겁니다. 


6. 아무리 식민지가 되었다고 해도 어제나 오늘이나 산과 들은 그대로인 것처럼 보여도 같은 들일 수가 없는 거네요. 


 후쿠시마에는 료젠이라는 아주 아름다운 산이 있는데요, 정주하 작가가 후쿠시마를 찾아간 11월에는 단풍이 곱게 들어 마치 우리나라 설악산처럼 장관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그걸 보면 그저 아름답다는 느낌을 일단 받게 되는데요, 후쿠시마의 미나미소마 중앙도서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이 작품들을 본 후쿠시마 지역민들은 우리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감나무가 열린 아름다운 고향, 단풍이 아름다운 내 고향, 밤바다 위 하늘에서 빛나는 별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내 고향, 저 고향에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느낌에 큰 슬픔을 느낀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방사능의 위험은 10년 20년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수백년에서 수만년에 이릅니다. 그러니까 한 인간이 80년을 산다고 할 때 인간의 척도로는 측정 자체가 불가능한 엄청난 피해지요. 이제는 내 고향의 아름다운 들을 이렇게 측정 불가능할 정도로 강력한 방사능에게 빼앗겨 버린 겁니다.


7. 그러고보니 정주하 작가의 사진에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어요. 풍경사진을 찍으려 사람을 일부러 찍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고향과 들을 떠나버려 아무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없었던 것이라 봐야겠군요.


 네, 맞습니다. 본래 예술은 뭐든지 직접적으로 잘 표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정주하 작가가 찍은 사진을 보면 돌인형인 귀여운 곰 한 마리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게 있습니다. 이 사진에서 무엇이 찍혀 있냐라는 물음에 대해 ‘바다입니다’, ‘곰입니다’는 제대로 된 답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여기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의 바다를 생각하고, 어떤 분은 작은 희망이라도 볼려고 하는거죠. 

 이 책에서 대담자 중 한 사람으로 사사키 다카시라는 분이 나옵니다. 사사키 선생은 현재 치매를 앓고 있는 자신의 아내와 함께 원전 사고 이후에도 후쿠시마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사사키 선생은 스페인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는데 사고 이후에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간 후쿠시마의 모습을 기록해 그것을 책으로 내기도 했어요.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는 책인데요, 사사키 선생은 정주하 작가의 사진과 이상화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해요. 자신이 어릴 적 살던 미나미소마에 200미터에 이르는 아주 높은 탑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딘가에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 기차 창 밖으로 이 탑이 보이면 안심하기도 했다고 하고, 일본에서도 가장 높은 탑이라 자랑스럽기도 했다고 합니다. 마치 일본 도쿄에 있는 스카이트리처럼 콘크리트로 만든 이 탑도 일본의 국위를 드러내기 위한 용도였던 거죠. 그런데요, 이 탑이 언제 만들어졌냐면요, 1923년, 관동대지진이 있기 2년 전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육중한 탑을 만들기 위해 사형수와 조선인들이 위험한 작업에 동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 사진전을 보면서 관동대지진 때 있었던 조선인 학살, 우리의 자랑이라고만 생각했던 200미터 탑의 역사,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원전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일본 정부의 이야기가 얼마나 허구에 가득찬 이야기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주하 작가의 의도대로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 고통 받았던 기억에 의한 연대가 이뤄지게 되는 것이지요.


8. 우리나라에도 여러 곳에 원전이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 지역에도 멀지 않은 곳에 원전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우리 청취자들께 마지막으로 이 책을 추천해주시는 이유 정리해 주시죠.


 지금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 시설과 위험은 정부의 통제 하에 완벽히 컨트롤 되고 있다고 하고, 결국 도쿄 올림픽까지 유치했습니다. 일본 정부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구요, 문제는 일본 정부의 이런 말이 명백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본 시민들도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원전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고, 이 사고로 경기가 더 나빠지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에요. 정부와 기업과 일반 시민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후쿠시마 원전 문제는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후쿠시마 지역 사람들의 고통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 책을 소개하고 추천드리고 싶었던 이유는요, 우리나라에도 원전이 많고 그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도 있지만 사실 가습기 살균제 사고 때문입니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우리 집 앞 원전의 노심이 녹아내려 내가 살던 고향을 빼앗아 가 버린 것처럼 정부와 대학의 교수와 글로벌 기업과 대형마트가 안전하다고 했던 가습기 살균제가 많은 이들, 특히나 어린 아이들의 목숨을 수도 없이 앗아가버렸습니다. 가습기 살균제의 피해는 방사능 물질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집계도 되지 않습니다. 가까운 분들 중에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직접 입은 분들이 없다고 해도 내가 가는 식당이나 회사 사무실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는지 일일이 확인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나도 그로 인해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후쿠시마 사고 이후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진 적이 없다는 것 아시나요? 우리나라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대해서도 기업들은 모두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그것을 감독할 책임이 있던 정부도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사람들은 이제 자주 가는 식당과 커피샵도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여러분들에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질문을 드리면서 이 책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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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자 한국일보에 실리는 글. <다시 살충제를 뿌리며>.
며칠 전에 에프킬러를 뿌리면서 문득 든 생각을 글로 썼다. 일상은 평온한 듯 보일 뿐 사실은 조금씩은 불안하다. 

이런 호들갑과 유난스러움이 "연대의 조건"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나저나 우리나라에서 육아하는 것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정말로.


다시 살충제를 뿌리며


 아이 엄마가 유난을 떠는게 싫었다. 몇 달 전에는 샴푸 성분이 체내로 흡수된다는 신문 기사를 읽더니 아직 반이나 남아 있던 샴푸를 버리고 친환경 샴푸로 바꿨다. 대형마트에서 파는 샴푸보다 족히 세 배나 되는 가격이었다. 며칠 전에는 작은 다툼도 있었다. 날씨가 더워지니 날벌레가 많아져 집안 곳곳에 살충제를 뿌려 뒀더니 모기보다 더 위험한 것이 살충제라며 구박을 하기에 그만 참지 못하고 “유난 좀 그만 떨어”라고 했던 것이 빌미였다. 별 해가 없으니까 이렇게 팔고 있는 것일텐데, 전문가들이 검증했다고 해도 믿지 않는 아내가 솔직히 가끔은 피곤했다.


 아내의 호들갑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난 연말에는 방사선량을 측정하는 선량계까지 구해왔다. 그리고는 일본에서 온 것으로 생각되는 집안 살림 하나 하나에 선량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우리 정부가 괜찮다고 했기 때문에 통관이 된 것이라고 해도 아내의 호들갑을 돌려 세울 수는 없었다. 일본산 피아노부터 측정을 시작해 일본에서 가져온 내 책까지 모두 검사대상이었다. 물론 기준치 이상은커녕 조금의 방사선도 검출해낼 수 없었다. 


 얼마 전부터는 식탁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어묵 볶음도 사라졌다. 어묵 제조 과정에서 사용되는 전분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만들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마트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어묵 한봉지를 그대로 버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아까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이 엄마가 불필요하고 비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것 같았다. 전분생산 공장이 그렇게 비위생적이라면 벌써 문을 닫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의심하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하나도 없지 않을까?   


 위험한 물질을 생산하고 판매해도 공장과 마트는 문닫지 않는다는 것을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사망한 사람이 200명이 훨씬 넘고, 피해자도 1500명이 넘는다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다. 아마 집계가 되지 않은 피해 규모도 상당할 것이다. 내가 일하는 회사에서, 자주 가는 식당은 물론, 아이와 자주 가는 소아과, 아이가 다녔던 어린이집, 지금 다니는 유치원, 아파트 실내 놀이터와 트렘폴린이 있어 아이가 좋아했던 키즈 카페에도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을지 모른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보도가 한창이던 어느 날에는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 전화를 해볼까 하다 말았다. “그동안 유치원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쓴 적 있나요?”. 유난스럽다고, 호들갑 떤다고 비웃을까봐 그만 두기로 했다.


 서경식과 정주하 외 여러 사람이 참여한 대담을 엮은 책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을 보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서 그 누구도 책임 지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후쿠시마는 정부의 주도 하에 완벽하게 컨트롤되고 있다’는 정부의 공공연한 거짓말에 보통의 시민들까지 호응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이 중대사고가 경제 상황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어른들의 이기심’이 작동하고 있다. 나라와 전문가와 기업은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기는커녕 사실상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렇게 일상은 계속되고, 아무 일 없는 듯, 유난스럽지 않게, 호들갑 떨지 않고 사람들은 살아가지만 태연한 표정 뒤에는 ‘두려움’이 생겨났다. 


 다시 살충제를 뿌리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와 샤워를 하고, 로션을 발라 주고, 함께 사과를 먹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살충제를 뿌렸지만 예전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다. 설거지를 하는 중에 뒤편의 성분표시를 꼼꼼하게 읽어봤고 아이 입으로 들어가는 사과를 보며 미처 씻겨 내려가지 않은 농약에 대해 생각했다. 늘 하던대로 아이 몸에 로션을 바르며 TV에서는 내일 미세먼지농도가 높다는 뉴스를 듣는다. 울리히 벡이 현대사회를 “위험 사회”로 부른 것도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유난스러워진 것일까.

아내는 오랜 투병 생활을 하던 아버지를 간호하며 정부도, 의사도, 회사도 우리를 지켜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안전을 위해 국가와 사회계약을 맺는다는 말이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도. 가습기 살균제로 피해를 입은 가족의 인터뷰를 보며 아내는 몸을 떨며 울었다. 때로는 유난과 호들갑도 피해자들의 고통과 연대하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지 않을까.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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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연인
김현경 지음 / 책읽는오두막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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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목요일은 일이 많아 10시만 되면 이미 아주 지친 상태가 된다. 다음 날 오전에 있을 라디오 방송 대본을 준비해야 하는데 어제는 너무 피곤해져 일을 마친 후 곧장 잠에 들었다. 그리곤 오늘 새벽 4시에 깼다. 2시간동안 대략의 원고를 쓰고 쇼파에 드러누워 페이스북에 들어가니 1년 전 내가 쓴 글이라는 포스팅이 먼저 보였다. 오늘 라디오에서 소개한 책이 <김수영의 연인>이었는데, 지난 해 같은 날에도 김수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마음의 단단함’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지난 해 본색소사이어티에서 내가 옹졸하게 굴었던 일 때문이었을까) 아무튼 신용준이 내게 김수영이 썼다는 문장 하나를 적어 보냈고 그게 퍽 위로가 되었다. 용준이 보낸 글은 김수영이 쓴 박인환 부고사였다. 


"나는 인환을 가장 경멸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 그처럼 재주가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의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고사치곤 야속하다는 느낌이 드는 문장이었는데, 그 옳음에 대한 강박적이라 할만큼의 태도가 좋았다. 그리고 1년만에 그 부고사를 다시 읽으니 다른 문장이 눈에 더 들어왔다. 


" "아아 수영아, 훌륭한 시 많이 써서 부지런히 성공해라!" 하고 빙긋 웃으면서, 그 기다란 상아 파이프를 커크 더글러스처럼 피워 물 것이다“


나는 김수영과 박인환이 어떤 사이인지는 잘 모르지만 <김수영의 연인>에서 김현경 선생은 김수영이 박인환을 무시하게 된 계기가 마리서사에서 있었던 낭독회에서 박인환이 어떤 일본 작가의 글을 읽는 솜씨가 형편이 없다는 걸 본 후로부터라고 한다. 그러니까 일본어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다는 건데 물론 단지 그 때문일리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김현경이 쓴 이 책은 이렇듯 김수영의 내밀한 마음의 움직임까지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저 그 김수영과 김현경이 가난과 어떻게 싸웠는지, 김수영이라는 한 인간이 사랑한 여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볼 수 있다는 정도이지 사실 이 책에서 문학장에서 김수영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누구와 대립했는지, 왜 그런 대립을 감내했는지 식구에게서는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비화들도 거의 소개되지 않는다. 


솔직한 내 느낌은 김수영은 아마 외로웠을 것이고, 이 부부는 경제공동체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는 거다.(모든 부부가 경제 공동체적이라는 걸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는 내내 아내인 김현경도 김수영을 잘 모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부정적인 평을 해보면, 김현경 선생은 ‘시인 김수영’의 아내라는 것을 인정 받기 위해 글을 쓰고 있다고 느껴졌다. 김수영에게 여러 여자들이 있었지만 내가 그의 아내이고, 그간 저작권자로 행사하지 않아 인세도 받지 못했지만 자신이 진정한 저작권자이고, 김수영이 문학적 성취를 이루는데 필요한 생활 기반을 제공해준 것도 다름 아닌 자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쓰여진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구성 면에서도 아쉽다. 사실 이 책의 1부와 3부는 거의 같은 내용이다. 1부는 3부를 조금 고쳐쓰면서 상세한 내용을 붙이고 3부에서 가명으로 처리되었던 인물명을 모두 실명으로 공개했다. 3부는 90년대 중반인가 어느 여성지에 나간 글인데 그 때는 당사자들의 실명을 공개하기 어려운 맥락이 있었나 보다.



그렇다고 이 책의 가치를 폄하하는 건 아니다. 생활인 김수영의 민낯을 보고 나니 그의 시가 달리 읽히는 맛이 있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김수영이 반성적으로, 무겁게 써내려간 것이 아니라 광적으로 흥분하면서, 아내를 괴롭게 만들정도로 신경질적으로 써내려갔다고 생각하고 시를 읽어보니 느낌이 새삼스럽다. <만용에게>도 양계일로 쩔쩔매며 써내려간 글이라고는 이전에 그다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어째서 김수영이라면 밥벌이와 문학은 간단히, 깔끔하게 분리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여하간 이 책은 그런 점에서 가치가 있다. 방송에서는 흥미 위주로 소개했다. 두 사람의 연애 스토리를 위주로^^. 




김수영의 연인

김현경


1.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이번 주에 제가 소개해드릴 책은 출판사 책읽는 오두막에서 만들고, 김현경이 쓴 <김수영의 연인>이라는 책입니다. 시인 김수영을 많은 분들이 아실텐데요, 이 책의 저자인 김현경 선생님은 시인 김수영의 아내입니다. 이 책에는 김수영의 생애, 김수영의 문학 세계에 대한 소개도 있지만 무엇보다 시인의 아내로 살아온 김현경 선생의 곡절 많은 삶이 마치 드라마와 같이 펼쳐져 있습니다. <김수영의 연인>이라는 제목 그대로입니다. 시인 김수영에 대해서, 그리고 김수영과 김현경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서 쓴 책입니다. 얼마 전에 윤동주 시인을 다룬 영화 <동주>가 개봉했었죠?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영화로 만들기에 손색이 없다, 오히려 <동주>보다도 더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2. 김수영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시죠. 혹시 김수영 시인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소개해주시지요.


네, 김수영 시인은 1921년에 태어나 우리나라 현대사의 가장 아픈 시기를 살았던 한국 문학계의 대표 시인 중 한 사람입니다. 도쿄상대에 입학했고 성공적으로 살 수 있었지만.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가족들과 함께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하게 되어 학교를 마치지 못합니다. 광복 이후에 연희대 그러니까 지금의 연세대 영문과로 편입했지만 중퇴하고 맙니다. 6.25 전쟁 때는 의용군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52년에 겨우 살아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후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거나 신문사에서 일하며 시를 쓰고 번역일을 했는데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는 도시 생활을 비판하는 시를 주로 썼지만 4.19 혁명 이후부터는 현실 비판과 저항 정신을 바탕으로 한 참여시를 집중적으로 쓰게 됩니다. ‘풀’, ‘폭포’,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와 같은 시가 김수영의 대표적인 시인데요, 모두 이 시기동안에 쓰여진 시이죠. 저 개인적으로는 김수영 시인의 시를 볼 때 반 고흐가 떠오릅니다. 연인을, 동생을, 자연을 그 누구보다 강렬하게 사랑하며 그림을 그렸던 반 고흐처럼 김수영 시인도 한 여인을, 인간을, 우리 사회를 정말 뜨겁게 사랑하며 시 쓰기에 매진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오래 살지 못했다는 것도 닮았습니다. 가난과 싸우다가 반 고흐는 3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는데요, 김수영 시인도 엄혹한 한국 사회의 격변기에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가난과 싸우다가 48세의 일기로 세상을 뜹니다.


3. 그렇다면, 이 책의 작가인 김현경 선생님께서도 김수영의 아내로 살면서 김수영과 그 모든 것을 함께 겪은 것이 되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이 책을 보면요, 김현경 선생이 김수영을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5월이었다고 해요. 김현경 선생이 아직 여고생이던 15살 때 당시 22살이던 김수영을 처음 만나거지요. 물론 그 때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구요, 해방 후 다시 김수영을 우연히 명동 거리에서 만나게 되면서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 때의 과정이 이 책에 정말 재밌게 소개되는데요, 오늘은 김수영 시인의 문학 세계보다는 김현경 선생과 김수영 시인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책의 내용을 좀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김현경 선생님은 그 당시 이화여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시인 배인철과 사귀고 있었다고 해요.  배인철 교수와 김현경 선생이 명동에서 데이트를 한 것을 본 김수영이 그 다음 날 새벽 느닷없이 구둣발로 김현경 선생의 방으로 뛰어들어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고 해요. “어떻게 넌 말 뼈다귀 같은, 정체불명의 엉터리 같은 놈과 사귀어? 넌 어찌 그렇게 우둔해? 응? 내가 꼭 말로 사랑해야 한다고 해야 돼? 그래야 꼭 알겠어?” 하더라는 겁니다. 

 사실 배인철 시인은 그렇게 말 뼈다귀 같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니혼대학 영문과를 나와서 해양대 교수를 하고 있었고, 당시 사람들이 한복 아니면 군복을 염색해서 입고 다닐 때 영국 신사처럼 수트를 입고 다닐 정도로 기품이 있고 멋졌다고 해요.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는데요, 두 사람 사이에 김수영이 끼어들어서라고 보기는 좀 어렵습니다. 1947년 5월 두 사람이 장충단 공원을 걷고 있을 때 괴한이 나타나 두 발의 총을 쏩니다. 한 발은 김현경 선생의 옆구리를 관통하고, 다른 한 발은 배인철의 두개골을 관통하면서 결국 배인철은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리고 맙니다.


4. 아, 벌써 드라마가 시작되는 것 같은데요, 배인철의 죽음으로 두 사람의 사랑이 끝나고 만거네요. 어떻게 그런 일이 다 있었을까요?


 그렇죠? 김현경 선생님도 배인철이 죽고 나서야 알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배인철은 남로당의 주요멤버였다고 해요. 배인철은 부친께서 인천에서 통운회사를 운영할 만큼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 그가 남로당 멤버일 거라고는 아예 처음부터 생각을 못했던 거죠. 당시 경찰은 오직 치정 관계에 의한 살인으로 보고 김현경 선생의 주변 남자들을 불러 들여 고문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고초를 당한 것이 김수영 시인이었다고 해요. 

 아마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확인된 것이겠죠. 이 일이 있고나서 김현경 선생님은 이화여대에서 제적이 됩니다. 연애금지 규정을 어겼기 때문이죠. 김현경 선생이 가택구금을 당하고 있을 때 김수영은 태연히 찾아와 김현경 선생에게 시를 쓰고 문학을 하라고 열변을 토하고는 돌아가고는 했다고 합니다. 


5. 두 사람의 사랑이 그렇게 시작된 거군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해요. 이 두 사람이 노량진 종점에서 백사장을 따라 여의도 쪽으로 걸어가다 여의도 섬 한 가운데 얕고 넓은 웅덩이를 보게 되었다고 해요. 숨이 막힐 만큼 더운데 맑은 웅덩이를 보더니 김현경 선생이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원피스와 속옷 마저 벗고 알몸으로 물 속에 뛰어 들었다고 합니다. 김수영도 처음에는 난처한 표정을 하다가 결국 옷을 벗고 뛰어들어 갔는데요, 아무도 없는 여의도 섬 한복판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함께 보내며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는 두 사람 다 제 정신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한밤 중에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찾아가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고문을 당해도 태연히  찾아가서 데이트를 즐긴 김수영도 보통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김현경 선생님도 보통이 아닙니다. 학칙을 어기고 연애를 해서 퇴학을 당하고, 옷을 벗고 웅덩이에 뛰어 들어가고.. 

 그런데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문학을 하려면, 혹은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자유로운 정신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어요.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마음껏 표현하는 태도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었기 때문에 한국 문학의 가장 높은 곳까지 김수영이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6. 여의도에 인적이 없는 웅덩이에서 옷을 벗고 헤엄을 치다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인데요, 지금처럼 복잡하고 사람이 많은 여의도를 생각해보니 더 꿈 같은 이야기처럼 들려요. 그런데 이 때가 1948년이라고 하셨잖아요? 6.25가 터지고, 김수영 시인이 포로가 되면서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계속되기는 정말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사실 6.25가 터지기 전에 이미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이뤄지기 어려운 점이 많았어요. 먼저 두 사람의 집안 배경 자체에 차이가 많이 났어요. 김현경 선생의 아버지는 경기고 출신의 사업가였고 일제 시대에 훗카이도에 골프를 치러 다닐 정도로 부유했다고 합니다. 총독부가 진행한 만국박람회의 기획자이기도 했구요, 광산도 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김수영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김수영의 어머니는 유명옥이라는 설렁탕집을 했구요, 그래서 가난했지요. 저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는데, 김수영은 치질이 아주 심했다고 해요. 항문에서 터져 나오는 고름을 김현경 선생이 짜내기도 했다고 하는데요, 만약 이 책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웃음) 치질 치료 때문에 병원비가 필요한데 돈이 없으니까 김현경 선생이 집에 있는 비단을 몰래 팔다가 잡혀서 아버지가 방에 대못을 박고 다시는 만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해요. 그래도 항문에 고름까지 짜주는 사이를 어느 누가 가를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은 결혼식도 하지 않고 살림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그렇게 시작했다고 해요. 


7. 그렇네요. 아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가 흥미진진하네요. 


 이후에도 어려움은 많았습니다. 김수영이 길거리에서 인민군에게 징집되고, 여차저차해서 거제도 포로수용소까지 가게 되는데요, 그 때는 이미 첫 아들을 낳은 이후라고 해요. 죽은 줄만 았던 김수영이 1952년에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지만 전쟁통에 모두들 너무 가난해서 살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김수영은 부산과 대구를 오가며 통역이나 번역일을 했지만 그걸로 밥벌이는 어림도 없었고, 자식은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김현경 선생은 자신에게 김수영을 소개시켜 준 이종구라는 사람을 찾아가서 취직을 부탁합니다.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던 이종구가 일자리를 알아봐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이종구는 일자리는 알아봐 주지 않고 김현경 선생을 자기 집에 잡아두고 보내주지를 않습니다. 탈출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감시하며 1년이 넘는 기간동안 그렇게 김현경 선생은 이종구와 함께 살게 됩니다. 


8. 아, 그러면 두 사람 간의 진짜 시련은 전쟁도, 가정도 아니고 가난이었던 것이네요. 


 그렇죠. 결국 가난 때문에 이종구에게 붙잡혀 있었던 거니까요. 이종구는 집요하게 김현경 선생에게 자신과 혼인할 것을 요구하고 김수영과 이혼하라고 압박했다고 합니다. 결국 김현경 선생도 김수영에게 찾아가 이혼도장을 달라고 했더니 김수영이 도장을 줬다고 해요. 그런데 막상 도장을 이종구에게 주려고 하니 도저히 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도피에 도피를 거듭해서 이종구를 탈출하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죠? 

 전쟁이 끝나고도 가난한 삶은 계속되었다고 해요. 혹시 김수영이 양계장을 운영했다는 말 들어보셨어요? 이 때 쓴 시가 <만용에게>라는 시입니다. 제가 조금만 읽어보겠습니다.


수입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너나 나나 매일반이지

모이 한 가마니에 사백삼십원이니

한달에 십이, 삼만원이 소리없이 들어가고

알은 하루 육십개 밖에 안나오니 

묵은 닭까지 합한 닭모이 값이 

일주일에 육일을 먹고

사람은 하루를 먹는 편이다


모르는 사람은 봄에 알을 많이 받을 것이니

마찬가지라 하지만

봄에는 알값이 떨어진다

여편네의 계산에 의하면 칠할을 낳아도

만용이의 학비를 빼면 

아무 것도 안 남는다고 한다. (이하 생략)


시 내용 중 일부인데요, 김수영이 번역일을 해서 벌어들인 작은 돈을 양계장 하면서 모두 닭이 먹었다고 해요. 주로 생활은 김현경 선생이 책임을 진 것 같아요. 양장점을 운영했는데, 꽤나 유명했다고 해요. 그런 생활 끝에 김수영은 1968년 6월 15일, 술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에 치여 죽고 맙니다. 사실 이것도 가난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돈이 급해 김현경 선생이 김수영에게 번역한 원고료를 선불로 받아오라고 채근했었다고 해요. 그걸 받아오다가 변고를 당하게 된겁니다.


9. 김수영 시인이 마지막으로 쓴 시가 ‘풀’로 알고 있는데요, 두 사람의 사랑, 김수영 시인의 불꽃 같은 생애를 더 듣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끝으로 이 책을 우리 청취자들에게 추천해주시는 이유 정리해주시죠.


 최근 김수영 시인이 한국 문학에서 이렇게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작가냐를 두고 작은 소동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런 소동은 대부분 김수영의 문학보다는 정치적인 입장에 따른 겁니다. 김수영이 생전에 보였던 정치적 입장과 다른 사람들이 김수영의 문학까지 폄하하는 건데요, 이 책을 한번 읽어보시면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김수영의 깊고 넓은 시 세계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시라는 것은 정치적 의미, 종교적 의미를 따지며 읽는 것이 아닙니다. 알사탕을 입에 넣고 굴리듯 시를 입 속에서 천천히 굴리며 시적 언어를 경험하는 거죠. 이 책에는 김현경과 김수영의 러브 스토리 뿐 아니라, 근대를 살아오면서 여자로서 자신의 문학적 꿈은 포기하고 남편의 문학적 성취를 지원했던 한 여성의 삶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현경 선생이 뽑은 김수영의 시와 그 시에 얽힌 뒷이야기들이 있어 김수영의 시를 알사탕처럼 입에 굴리는 맛을 더해줍니다. 요즘 시를 읽는 독자들이 너무 적어졌다고 해요. 입에서 알사탕을 굴릴 여유조차 없기 때문일까요? 부디 이 책을 통해 시를 읽는 5월이 되셨으면 하는 바램에 소개드리게 되었습니다. 

교통방송, 김수영, 김현경, 김수영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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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의 아이가 좀 처진대요

어머니는 내가 일곱 살 때 나를 학교에 보내셨다. 덩치는 컸지만 용기는 부족했던 나를 학교에 보내놓고 어머니는 마음이 편치 않으셨던 것 같다. 그 때는 몰랐는데 학교에 자주 드나 드신 것을 못마땅해 하셨던 아버지와 다툼도 많았다고 한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의 공터에는 늘 아이들이 모여 딱지를 치고 있었다. 어머니는 다른 아이들보다 한 살 어린 내가 행여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봐 집에 있는 가장 좋은 질의 종이를 접어 딱지를 만들어주셨다. 은행에서 나눠주는 빳빳한 달력 종이는 힘도 좋고, 쉽게 터지지 않아 딱지판에서 귀한 몸이었다. 달력을 모두 딱지로 만들어 신발가방에 챙겨 넣은 후 어머니 손에 끌려가다시피 딱지치기를 하러 나갔다. 동네 아이들은 딱지치기에 한창이었다. 어머니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덩치가 나보다 작았던 한 아이를 데려오셨다. 그게 내 딱지판 데뷔전이었다. 첫 번째 딱지는 단 두 번 만에 넘어갔다. 두 번째 딱지도. 세 번째, 네 번째, 그 이후에도 딱지를 연달아 잃었고 쉽게 달력딱지를 딴 녀석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그 아이 곁으로 가 1,000원짜리를 건넸다. 한번 져주라는 뜻이었다. 어머니께 ‘매수 당한’ 아이는 이제 내 딱지를 넘길 마음이 없다는 양 딱지가 아닌 바닥을 향해 딱지를 내리쳤지만 딱지판 새내기인 나는 아무리 힘껏 내리쳐도 그 녀석의 딱지를 넘길 수 없었다. 이미 닳고 닳은 그 아이의 딱지는 달력으로 갓 만든 내 딱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바닥과의 접착력이 좋아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넘기지 못하자 그 친구는 재미없다며 자기 딱지를 챙겨 들고 자리를 옮겨갔다.

그 이후로 다시는 딱지치기를 하러 가지 않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는 오락실도 다니지 않고, 카드놀이도 하지 않고, 자라서는 그 흔한 스타크래프트도 하지 않았는데 착실한 아이여서 라기보다 안 될 싸움은 처음부터 하지 말자는 심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끝까지’ 놀아본 경험이 없다. 쉽게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면 싸우지 않으려 했다. 질 수도 있는 싸움은 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질 수밖에 없더라도 해야 하는 싸움을 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만사에 끝을 보지 못하는 성급함은 끝까지, 끝을 볼 때까지, 울면서 매달리고, 힘겹게 어떤 지점까지 도달해 보려는 경험, ‘딱지치기의 끝’을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새로운 유치원을 가기 전날 밤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림도 잘못 그리고, 영어도 못하고, 축구도 잘 못해.” 아이 유치원에 가보니 아이의 그림은 옆에 걸려있는 다른 아이 그림보다 못하다. 공차기도 뭔가 어설프다.

“댁의 아이가 반에서 좀 처진대요.” 얼마 전 학부모 모임에 갔다가 들은 말이다. 순간 어질했다. 집에 돌아와 일곱 살 아이를 영어학원에 보내야 할까, 이제는 축구 교실에라도 보내고, 노는 것도 ‘뒤처지지 않도록’ 놀이교실을 보내야 하는 건 아닐까. 영어도, 수학도 안 가르쳤으니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축구교실 대신 친구들과 축구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이가 뒤처진다고 하니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 어머니는 딱지치기에서 이기게 도와줄 수 있는 ‘딱지치기 학원’이 없었기 때문에 1,000원을 건네서라도 이기게 해주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아빠가 되고 나서야 어머니가 왜 그러셨던 것인지 이해가 된다. 나 역시 내 아이가 지는 것을, 져서 속상해 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아이에게 새로운 유치원이 어떤지 물었다. 재미있단다. 축구도, 영어도 잘 안 되기 때문에 더 재미있다고 한다. 내일도 또 할 거라고 했다. 아이에게 이기는 경험을 줄까, 지더라도 다시 도전하는 경험을 줄까. 이럴 때 육아가 힘들다. 시행착오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는 사회, ‘이기는 것’이 ‘지는 것이 확실해 보이는 싸움에 도전하는 것’보다 더 고귀하다고 믿는 세상에서 아이에게 시간을 주고, 꼭 이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육아를 위해 매수금 1,000원이 필요하지도, 너무 많은 용기도 필요하지 않은 사회였으면 좋겠다.

2016. 4.28 한국일보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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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의 딥마인드


 페이스북 친구의 일곱 살 아이는 수학 퀴즈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 아이는 자동차 번호판의 네 자리 숫자 각각에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를 해서 아빠가 정해준 숫자를 만드는 게임을 즐긴단다. 예를 들면, 아빠가 정해준 숫자가 50이라고 하자. 아이는 지나가는 자동차의 번호판이 ‘5796’이었다면 아이는 (5×7)+9+6이라고 답하면 된다. 먼 길을 갈 때도 아이는 자동차 번호판으로 숫자와 씨름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단다. 다만 걱정도 있다고 하셨다. 번호판이 ‘9083’인 경우에 (90÷2)+8-3이라도 50이 될 수 있는데 아이는 9와 0을 조합해서 90이 될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 나누기는 왠만하면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걱정이라면 걱정이라고 했다.


 글을 읽고난 후 번호판을 가지고 그런 놀이를 만들어 낸 친구도 기발하고, 그런 놀이를 즐겨한다는 아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자 그런 생각도 금방 지나가 버렸다. 동네 도서관에 보드게임을 하러 가자고 아이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 앞 도서관에 가면 수십 종의 보드게임을 무료로 할 수 있다. 아이가 먼저 선택한 게임은 ‘쿼리도’였다. 우리 모두 처음 접하는 게임이었지만 규칙은 어렵지 않았다. 먼저 가로 9칸, 세로 9칸으로 된 게임판의 반대편 양 끝 줄에 각자의 말을 서로 마주 보게 세워둔다. 그리고 게임판에 세울 수 있는 9개의 나무 조각을 이용해 상대 말이 내 말이 처음에 서 있던 반대편 줄까지 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누구든 먼저 상대 말이 서 있던 줄까지 도착하면 이기는 거다. 나는 아이가 움직이는 말을 막으려 나무 조각을 무리해서 세우다가 번번이 게임에서 졌다. 일부러 져준 게 아니다. 정말 내 꾀에 빠져, 그리고 아이의 수를 간파하지 못하여 진 것이다. 




 아이가 다음으로 가져온 건 ‘숫자의 강’이라는 게임이었다. 게임판에는 숫자가 1부터 100까지 적혀 있고, 우리 각각은 6개씩의 집을 나눠 갖는다. 그리고 카드를 두 번 뽑게 되는데, 처음 뽑은 카드에 적힌 숫자에 그 다음 뽑은 카드에 적힌 숫자를 더하거나 빼서 나온 숫자에 자기 집을 세운다. 예를 들면 처음 뽑은 카드에는 ‘10’이 적혀 있고, 다음으로 뽑은 카드에는 ‘-7’이 적혀 있다. 그러면 게임판에 ‘3’이라고 적힌 곳에 집을 세우면 된다. 두 사람 중 먼저 여섯 개의 집을 세우는 사람이 이기게 된다. 먼저 아이가 카드를 뽑았다. 처음 뽑은 카드에는 ‘93’, 다음 카드에는 ‘-17’이 적혀 있다. 아이는 엉뚱한 답을 냈다. “85? 86이야? 몰라. 하기 싫어. 다른 것 할래”. 그때 갑자기 페친의 아이가 떠올랐다. 곱하기, 나누기도 한다는데.. 뭔가 모를 오기가 생겼다. “안돼. 다시 해 봐”. 아이는 다시 골똘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겨우 답을 냈다. 다시 아이의 차례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53’이 적힌 카드와 ‘-10’이 적힌 카드다. “이번에는 쉽지? 53에서 10을 빼면 얼마일까?”. 아이는 한참을 생각했다. “아빠, 44야?”. “아니”. “45?, 46?”. “야! 53에서 10을 빼는데 어떻게 45야? 정신 안 차릴래?”. 아이는 갑자기 화를 내는 아빠를 보고 얼어 붙었다. 눈물이 맺혔다. “아빠, 43 맞아?”.


 대관절 큰 소리가 나자 사서가 들어왔다 나갔다. 안 배웠으면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하면 아이가 수학과 결국 멀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날은 참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10을 못 뺄까. 10을 빼는 건 1을 빼는 것만큼이나 단순한 것 아닌가? 내 아이는 수학머리가 없는 걸까? 집에 돌아와 아이에게 하루 종일 수학 문제를 풀게 만들었다. 노트에 두 자리 숫자를 적어주고, 내가 어릴 적 내 어머니께 배운대로 계산법을 가르쳤다. 아이는 금방 요령을 익혔다. “37에서 46을 더하려면 먼저 7과 6을 더한 13을 적어. 그런 다음에 3과 4를 더해 나온 7을 앞의 자리 1과 더해줘. 그러면 83이 되지? 쉽지?”. 그리고 그날부터 구구단도 외기 시작했다. 하루만에 5단까지 외웠다. 집에 쌓아둔 수학 문제집도 모두 풀었다. 집에 돌아온 엄마에게 아이는 이제 구구단을 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나도 아이가 수학 머리가 영 없진 않구나 안도하는 사이 엄마가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4에서 8을 곱하면 왜 32인거야? 곱한다는 게 뭐야?”. 아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엄마는 다시 물었다. “7하고 6을 더해서 나온 13에서 앞자리 1과 3에서 4를 더한 7은 왜 더해주는 거야?”. “몰라. 그냥 아빠가 그렇게 하면 된다고 했어”. 




 아이를 재우고 나자 자책감이 몰려왔다. 오늘 나는 교육이 아니라 고문을 한 것이리라. 돌이켜 보니 아이가 53에서 10을 빼는 것이 8을 빼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이 당연했다. 아직 손가락 계산기가 필요한 아이에게 10을 빼는 것은 앞자리 5를 4로 바꾸면 되는 간단한 계산이 아니다. 53부터 52, 51, 50... 44, 43. 그렇게 하나씩 열 번을 빼는 과정을 거쳐야 하니 8을 빼는 것보다 복잡한 계산이 되는 것이다. 수학 문제집도 아이 혼자라면 결코 다 풀지 못했을 것이다. 어른들의 관점에서야 아이들이 푸는 수학 문제는 너무 단순하지만 아이에게는 그렇지 않다. 아이 스스로 문제를 읽고서 거기에 제시된 방식에서 패턴을 찾아 답을 하기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나는 아이가 문제를 읽고 패턴을 찾는데는 관심이 없었다. 답을 찾는지에만 모든 관심을 집중했다. 원리를 찾을 시간도 주지 않았고 유치한 시기심에 요령부터 가르쳤으니, 내 아이를 알파고만도 못하게 취급한 것이다. 구글에서도 알파고가 ‘경험’을 통해 알고리듬을 찾을 수 있도록 학습의 기회를 줬다고 하는데 나는 아이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다. 


한낱 계산 능력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사고가 필요한 쿼리도도 아이에게 못이기는 아빠인데, 아침에 일어나더니 그래도 “아빠가 최고”란다. 잠깐 페친의 아이가 최고라 생각한 아빠부터 정신을 차려야겠다.


-2016.5 키자니아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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