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에 오늘 나간 글.
조직논리, 관료주의, 서열주의의 악마성을 간파했기에 예수는 말구유에 태어나 세상의 가장 높은 자리에 서게해주겠다는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방법으로 왕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리새인도, 본디오 빌라도도 모두 '관료주의적 조직논리' 속에 갇혀 있던 자들이 아니었던가. 예수가 베드로에게 사탄이라 불렀던 것도 그가 예수에게 세상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던 때가 아니던가. 이런 이야기를 K와 나눴지만 여기에 다 쓰진 못했다. K의 '영적 싸움'은 지금부터다.
















조직논리라는 악마 (매일신문 2017년 10월 10일)


대학에 갓 입학한 K는 교회에서 파키스탄 선교사의 선교 보고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의 삶은 남자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고, 한 십 대 소녀가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성폭력 위험에까지 노출되었다는 이야기에 K는 눈물을 흘렸다. 복음의 힘으로 폭력적인 남존여비 문화로 상처받은 이슬람 여성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자신도 선교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지금은 가기 어려운 곳이 되었지만 아프가니스탄 카불, 파키스탄 라호르, 페샤와르 등 또래가 유럽 여행을 갈 때 그녀는 전운이 감돌던 지역으로 향했다. 


누구도 선교사가 되겠다는 K의 열정을 꺾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생활의 벽은 쉽게 넘을 수 없었다. 선교사로 파송받기 위해선 생각보다 많은 자격이 필요했고,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예상보다 많은 돈이 들었다. 하는 수 없었던 K는 학위 후 필요한 돈을 마련코자 취업을 준비했다. 임용 고시에 합격해 학교 상담교사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K는 교사로 부임하고 얼마 있지 않아 신이 자신을 왜 이슬람 세계가 아니라 학교로 인도했는지 알게 되었다. 스무 살 때 선교사에게 들은 이야기보다 더 무서운 일들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며 학교야말로 선교지라고 생각했다. 가정폭력과 우울증, 성추행 등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을 만났다. 


하지만 K의 열정이 냉정이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본격적인 상담이 시작되기도 전에 서류를 꾸미는 일에, 문제아가 말썽을 일으키지 않게 잘 관찰하라는 교장의 말에, 큰일 만들지 말고 적당히 졸업만 시키라는 행정실의 엄포에 불안감이 커져갔다. 소위 ‘사건’이 터져 카프카가 소설 ‘성’에서 말하는 것처럼 “과오가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전혀 계산에 넣지 않는 것이 관청 사무의 원칙”을 어길까 봐 두려웠다. 진급에 노심초사하는 교감은 매일 K를 불러 주의를 줬다. 


며칠 전 K와 만났다. 그녀는 내게 학교 행정 시스템이 ‘악마’인 것을, 복음의 적은 이슬람이 아니라 조직논리인 것을 아느냐고 했다. 그녀다운 물음이었다. K는 작은 행정 실수로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지게 될까 두렵다고 했다. 그래서 윗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아이들을 내담자가 아니라 민원인으로 대했고, 상담가가 아니라 관료로서 만났다고 했다. 정의를 위해 검사가 되었고, 나라를 위해 정치인이 되었고, 사람을 구하고자 의사가 되었고, 영혼을 위해 종교인이 되었지만 우리의 초심은 ‘조직논리’ 앞에선 왜 이리 초라할 정도로 무력한 것일까. 생계 때문일까? 욕망 때문일까? 조직논리에 지배당하지 않고 심지어 변혁시키는 힘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러한 K의 깊은 고뇌에 답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니체의 말대로 자명한 사람들과 고독한 사람들 사이에는 싸우는 투사들이 있다. 고뇌하며 싸우는 것, 거기에 인간의 구원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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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연함, 유연함으로부터 비롯되는 애매함은 정치인의 미덕일 수는 있어도 '지식인'의 미덕이 될 순 없다. 정치인이 현실적 상황에 맞춰 적당한 정도의 유연성을 발휘해, 여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에서는 그 반대로 말하면서 생기는 모순과 애매함은 정치인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란 타협의 기술이니까. 그렇게 보자면 정치인에게 부여되는 권력은 내 의견을 다른 의견과 ‘타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여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의 애매함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인에게 애매함이란 미덕이 될 수 없다. 그가 지식인이라면 일상에서의 다른 경우에서라면 몰라도, 대문자 '비판'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 지식인이 비판을 해야 하는 대상에 대해서 유연한, 혹은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는 없다. 니체에게 붙은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은 그가 비판의 명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니체에게 도대체 어떤 애매함이 있는가. 알만한 사람은 다 알테지만, 데리다의 해체 일반 전략도 비판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번역상 야기되는 문제가 있을지언정) 데리다의 비판은 결코 난해하지 않고, 애매함과도 거리가 멀다. 데리다의 해체전략은 명료하다. 어쩌면 지식인들에게서 가끔 보이는 ‘전회’를 들어 발전하는 지식인이라면 유연성을 가졌다는 말을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식인이라면 사유 자체가 유도하는 자기 전개로 인해 발생하는 사유의 전회는 있을지언정 '현실적' 이유로, '정략적' 이유로, 정치인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유연성을 갖게 되는 경우는 없다. 후기 하이데거의 전회는 사유의 도상에서 일어난 일이다. 발생적 현상학으로의 전회는 후설 자신에게는 발전이었고 사유 자체의 전회가 아니었다.

2. 지식인은 현실을 옹호하거나, 현실 자체의 불가피한 한계 때문에, 부당한 현실 자체를 당위로 삼는 사람이 아니다. 이청준은 <지배와 해방>(1977)이라는 작품에서 작가란 어떤 사람인가 에 대한 물음에 이정훈이라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조금 긴 인용이다.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소설로써 고발하는 것, 의롭지 못한 일을 증언하는 것, 우리의 삶을 부당하게 간섭해 오거나 병들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비인간적인 제도와 억압에 대항하여 싸우고 그것들을 이겨나갈 용기를 모색하는 것,소위 새로운 영혼의 영토를 획득해 나가고 획득된 영토를 수호해 나가려는 데 기여하는 모든 문학적 노력이 종국에는 다 우리의 삶을 보다 더 윤택하고 행복스럽고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려는 삶의 진실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과 관련하여 가장 깊고 큰 진실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삶을 가장 삶다운 삶으로 돌아가 살게 하는 옳은 질서는 무엇입니까? 우리나라의 어떤 평론가 한 사람은 우리의 삶을 삶답지 못하게 하는 모든 비인간적인 풍습과제도와 문물과 사고를 통틀어 우리 삶을 ‘억압’하는 것들이라고 표현한 일이 있습니다만, 우리 삶이 그 억누름으로부터 벗어나서 온전한 삶, 본래의 자유롭고 화창한 삶으로 돌아가게 하는 질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유의 질서입니다. 이 자유의 질서야말로 우리의 가장 크고 깊은 삶의 진실이 아닐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지식인의 역할은 의롭지 못한 현실을 불가피한 것이라며 사람들에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건 정치인의 역할이다. 지식인이 그런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정치인만큼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식인의 역할은 현실을 비판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진리와 현실적 부당성을 적절히 타협해내는 정치인의 유연함과 애매함을 버리고 진리를 거울삼아 현실이라는 무게가 만들어내는 거짓된 당위를 철저히 비판하기로 한 자다. 그러니까, “당신이 현실적으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충분히 이해됩니다”라는 말 다음에 “그건 결론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자는 지식인이 아니다. 그런 듣기 좋은 말, 힐링을 위한 말은 정치인이나 종교인의 말일 수는 있어도 지식인의 말이 아니다. 지식인은 그보다 더 어려운 말을 꺼내는 사람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이 전제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옳은 일은 아니지요”라고 말이다. 이처럼 옳고 그름, 오래된 진리에 매달리는 사람은 보통 재미가 없다. 그래서 인기가 없고 외롭지만 지식인이 옳음, 진리, 진실, 자유의 자리에 서서, 손해를 보고 고립을 자초한다고 해도 권력에 대해 해야 할 말을 할 수 없다면 그는 좁은 전공분야에 자리한 전문가일 뿐이다.


3. 위안부 합의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이런 긴 이야기를 썼다. 현실적으로 일본정부에게 법적 책임을 지게 하기는 힘들다, 현실적으로 이번 합의를 뒤집기는 힘들다, 현실적으로 일본 국민들의 정서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정도의 이야기는 정치인이라면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늘 그런 ‘현실적으로’라는 식의 클리셰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는 지식인이 아니다. 운동을 해오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또 현실적인 이유로 이 문제가 안고 있는 물러설 수 없는 ‘진실’까지 양보했다면 그건 정치일 수는 있어도 결코 ‘비판’이 될 수는 없다.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2017)에서 서경식이 와다 하루키를 비판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그런데 박유하는 와다 하루키에 대한 서경식의 옳지 않은 일을 두고 옳지 않은 일이라고 시종일관 말하는 것을 두고 사고의 경직이라고, 운동 논리라고 한다. 이런 폄훼하는 식의 이야기는 정치인이라면 지식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이겠지만, 지식인이 지식인에게 할 수 있는 비판으로서는 성립될 수 없다. 지식인이 지식인에게 비판하고자 한다면, 그 지식인이 받아들이는 옳음, 진리의 결함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어야지 그 사고의 '시종일관'을 향한 것이어선 안된다. 지식인은 완고하다.



4. 박유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서경식 책의 출간 보도에 맞춰 이렇게 쓴다.

 “냉전붕괴이후 일본의 진보좌파들은, 곧바로 갈등하기 시작했다.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40년전 학생운동시절의 급진/온건파의 싸움이 있다. 90년대 이후에도, 급진파는 오래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일에만 집착해 왔고, 온건파는 눈앞에 놓인 새로운 정황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필요하면 그때까지의 생각을 수정했다. 와다 선생이나 우에노 선생과 서경식 교수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고, 그런 식의 태도의 차이를 만든 건 내가 보기엔 사고의 유연성이다.” 

덧붙여 이런 말도 썼다.

 “와다 교수의 선택이 가장 옳았는지 여부는 얼마든지 검토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와다 교수는 늘 생각이 다른 이들의 말에 귀기울이면서, 위안부할머니와 모두를 위한 최선이 뭔지 늘 고민해 왔다는 점이다. 그런데, 와다 교수를 비난했던 이들은 이질적인 의견에는 귀를 닫았고, 조롱하거나 무시했다. 지금의 북한처럼. ” (강조는 인용자)


학생운동에서라면 온건파와 급진파로 얼마든지 나뉘어 싸울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을 도외시하는 급진파 운동권은 우리 주변에도 많다. 그리고 그런 식의 태도 때문에 언제나 온건파가 현실정치에 더 잘 적응했고, 더 쉽게 뿌리내렸다. 나는 와다 하루키나 우에노 치즈코를 지식인이 아니라 운동권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로만 분류할 수 있다면 새로운 정황을 정확히 이해하면서 유연한 사고를 바탕으로 ‘정치인’과 같은 전략을 갖는 것을 얼마든지 칭찬할 수 있다고도 본다. 그런데 와다 하루키는 '지식인' 중의 '지식인'으로 존경 받는 학자가 아닌가. 지식인 와다는 비판해야 할 것에 대해 현실을 등지고 진리에 입각해 비판하고 있는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도대체 와다 하루키를 비롯한 일본에 있는 리버럴 지식인들이 모두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를 왜 고민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들이 여기서 말하는 '모두'는 누구인가? 거기에는 일본정부도 포함된 것인가? 와다는 위안부할머니와 일본정부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 늘 고민해왔던 것인가? 와다와 박유하는 이 문제 해결의 최선은 위안부할머니들의 시종일관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임을 모르는 것인가? 그것이 피해자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불가역적 합의 혹은 그저 돈이었던 것인가? 위안부할머니들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감을 준 자가 자신의 소송이 서경식, 정영환과 같은 이들이 구조적 폭력을 용인하는 사실 때문이라고 믿는 것을 ‘지적 퇴락’이라는 말 외에 다른 무엇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또 자신에 대한 비판을 자신에 대한 “제거욕망”으로 박유하는 생각한다고 썼는데, 여기에서 5공 시절 안기부가 즐겨 쓰던 방식의 지식인 죽이기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기묘한 도치, 해괴한 이어붙이기의 방식은 정치인의 것이라기보다 공안의 방식이 아니던가. 내가 가져온 인용구의 마지막 문구,
'지금의 북한처럼'이라는 해괴하기 짝이 없는 말은 왜 붙여둔 것일까? 이런 식의 배치를 통해 어떤 의미 효과를 기대했던 것일까? 재일'교포'라는 말과 '북한'을 나란히 위치시켜, 보통의 사람들이 이를 보고 기묘하게 오해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로, 그런 악마적인 방식으로 이어붙이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내가 너무 지나친 것일까? 공안은 우리 상상보다 언제나 더 지나쳤다는 사실도 상기해야 할 것이다. 


5. 오에 겐자부로는 “‘자기’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일본인을 ‘애매한’ 고립된 존재로 만들었고, 그러한 고립상황에서 아시아에 대한 침략이 행해졌다”고 썼다. 이런 말을 오에가 쓴 것을 보니 박유하는 오에에게도 퍽 사고가 유연하지 않다고 할 것 같다. 오에에게도 '지적퇴락'이라고 박유하는 쓸 것인가? 자기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자신의 소송 외에는 어떤 폭력도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참으로 사고가 '유연하신' 존재인지라 '당신은 애매한 존재'라고 밖에 돌려줄 말이 없다.


 "단언컨대, 이들은 서경식교수 정도나 그 주변 인물들에게 이런 식으로 가볍게 다루어져도 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말도 박유하가 같은 글에서 한 말이다. 여기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박유하의 언설과 달리 서경식은 공개서한에서 와다를 가볍게 다루지 않았다. 서경식이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을 비판할 때도 결코 가볍게 다룬 적이 없다. 그건 박유하가 재일조선인 지식인의 습관이라고 했던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며 확인 없이 옮겨 쓰는 P 본인의 오래된 습관'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왜 비판은 사랑과 존경으로 하는 것임을 그는 모르는 것일까?. 지식인이 공화국에 대한 존경이 없었다면 목숨을 걸고 국가와 정부를 비판하겠는가? 와다에 대한 존경이 없다면 비판이 있겠는가? 존경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대꾸할 가치가 없는 법이다. 지금 많은 사람이 박유하에 대해서 대꾸하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나는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그녀에 대한 일말의 존경은 있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지식인이 현실을 이해하지 못해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당위로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현실을 당위로 받아들이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대문자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신성한 공간은 없다. 일본 리버럴을 비판했다고 가볍게 다뤘다고 한다면, 일본 리버럴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는가. 하는 말마다 실수를 하는데, 그녀의 기사단은 그녀 역시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있어서 비판하면 몰아세우기 바쁜가보다.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을 두고 비판을 결의하기까지의 고뇌의 무게와 용기를 생각하기 전에 그 누군가를 ‘가볍게 대한다’고 생각했다면 비판이라는 것이 뭔지를 모르거나, 정치인이 경박스럽게 다른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 외에는 본 적이 없다는 증거다. 참으로 공안적 지식인다운 경박한 왜곡이라고 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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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모 레비가 쓴 <릴리트>에는 "로렌초의 귀환", "체사레의 귀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번에는 신문에 어떤 이야기를 쓸까 하다 로렌초와 체사레의 일화가 떠올랐다. 아우슈비츠 생환자였던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군에서 만났던 두 친구의 모습이 함께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로렌초는 고향으로 귀환 후 '성자'가 되었고, 체사레는 고향으로 가는 열차를 견딜 수 없어서 열차에서 내려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두 사람은 내게 각각 B와 K처럼 보였다. 그리고 무거운 마음으로 민폐를 끼치고 민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 자체가 민폐인 인간의 삶에 대해서 써 내려갔다.  아래의 글이다.


민폐라는 원죄 


K는 나보다 한 기수 아래의 헌병이었다. 신병 시절부터 말이 많았던 K는 선임들로부터 얼차려를 많이 받은 편이었다. K는 소속 부대에서 겪은 일을 말할 때면 말끝마다 “미국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했다. 미국을 기준으로 볼 때 군생활의 부자유가 견딜 수 없었던 K는 좀처럼 부대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관심병사로 지정됐고 이후 군교회의 배려로 군종병이 되었다. 군종병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다른 군종병과 자주 부딪혔고, 결국 병장도 되기 전에 열외 상태가 되었다. 이후 K는 내무실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가끔 K가 피아노를 치며 가스펠을 부를 때면 그 모습이 마치 고난받는 예수처럼 보였다.


B는 나보다 한 기수 위의 보급병이었다. 충청도 출신이던 B는 말수가 적었다. B와는 훈련소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다. 가끔 B를 만나면 내무반 생활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 마음이 너무 약한 것이 문제였다. B는 후임이 동갑이라면 말을 놔라 했고, 후임에게 일을 시키는 경우도, 신병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도 없었다. 그 때문에 선임들에게 자주 얼차려를 당했고 동기들도 B를 좋아하지 않았다. 제대하는 날, 이제 자유라며 수줍게 웃던 B의 얼굴이 선하다.


한참을 잊고 살다 몇 달 전 K의 연락을 받았다. 은행에서 일한다며 내게 신용카드 발급을 부탁했다.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소식이 궁금해 시내 카페에서 만났다. 카드 발급을 위한 서류에 서명을 마치자 고맙다며 상품권 한 장을 건넸다. K는 군생활 중에 했던 영어공부 덕에 일찍 취업할 수 있었다고 했다. K가 군생활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군교회당 피아노 앞에서 노래하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K에 대해 생각했다. 관심병사 K는 결코 군생활 부적응자가 아니었다. K에게 부대는 자유롭게 지내며 마음껏 영어공부를 할 수 있는 자신만의 미국이었다. K를 만나고 돌아오니 B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전화를 하자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B가 두 달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군생활 중 생긴 우울증이 올해 1학년 담임을 맡으며 악화됐다고 했다. 초등교사로 임용된 지 정확히 10년 만이었다.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며 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존재의 숙명 같은 원죄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숙명을 피할 도리는 없다며 더 적극적으로 민폐를 끼치며 살아가고, 누군가는 사소한 민폐조차 끼치는 것도 견딜 수 없어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혐오하며 살아간다. B를 죽음으로 몰고 간 고뇌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무엇이 인간의 삶인 것일까. 작은 민폐 정도는 서로 견뎌주는 사회라면 B도 살아남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진짜 죄는 민폐가 아니라 민폐를 견뎌주지 못함에 있을 것이다. 오늘, B의 죽음으로 K를 견뎌내기로 결심한다.

(매일신문에 쓴 글. 2017.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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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열매도 나무 멀리 떨어진다 


자폐아이를 키우고 있는 한 엄마에게 메일을 받았다. ‘신이 제게 준 자식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는 부분이 유독 눈에 밟혔다. 사람들은 때론 자폐아에 대해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는 천사 같은 아이를 떠올리지만 자폐증은 다른 어떤 장애보다 많은 자식 살해를 유발할 정도로 부모를 미치게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고민하다 앤드루 솔로몬이 쓴 ‘부모와 다른 아이들’을 꺼내 읽었다.


이 책은 자폐증, 신동, 트랜스젠더, 소인증 등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예외적 자녀를 키워낸 가족들의 이야기다. 앤드루는 10년 동안 300가정이 넘는 예외적 자녀를 둔 가족을 만나 기록한 인터뷰를 정리해 총 1천500쪽에 육박하는 분량의 책을 만들었다. 앤드루는 유명 작가지만 사실 그도 부모와 다른 존재였다. 심각한 난독증을 앓고 있고, 성적 소수자였던 탓에 아버지와의 불화가 극심했다. 책에 소개된 대부분의 부모들도 처음에는 자식들과의 차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에게 수화 대신 발화 교육을 시킨 부모, 왜소인인 아이의 키를 늘리는 시술을 감행한 부모까지. 처음에는 아이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는 부모들조차 결국 이렇게 예외적인 아이지만 이 아이는 바로 ‘나의 아이’라는 사실을, 또 우리가 열등한 차이로 구분하는 특질조차도 그저 또 다른 정체성의 차이일 뿐임을 깨닫게 된다. 앤드루는 이런 차이에 대한 인정이 다양성을 만들고, 이런 차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부모 역시 미성숙의 껍질을 벗고 ‘인간’이 된다고 선언한다.


영어 속담에 ‘사과 열매는 나무 멀리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자식은 부모를 닮기 마련이라는 뜻인데, ‘부모와 다른 아이들’의 원제인 ‘Far from the tree’는 이 속담의 의미를 뒤집은 것이다. ‘나무에서 멀리 떨어진’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말은 아이들은 모두 저마다 부모와 조금 혹은 때때로는 아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암시한다. 나무에서 멀리 떨어진 사과라 해서 사과 아닌 것일 수 없고, 심지어 떨어진 열매가 사과가 아니었다고 해도 열매 아닌 것일 수 없다. 부모와 다른 아이라 해서, 자폐아라 해서 내 아이가 아닌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이 다르다고 해도, 믿음이 다르다 해도, 지역도, 성별도, 성적 지향도, 계급이 다르다 해도, 이처럼 나무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라 해도, 모든 열매는 나무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고 저마다의 ‘차이’는 당연한 것이다. 이 단순한 사실에 대한 인정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리라.


“양육은 이들 가족에게 지난한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후회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자녀를 받아들이는 부모의 태도에서 힘든 사랑이 손쉬운 사랑에 못지않다는 확신을 가졌다.”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 아픔을 가진 이웃은 나무가 지키는 것이 아니다. 나와 너의 힘든 사랑이 지키는 것이다. (매일신문에 쓴 글, 20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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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우연히 대학로 이음책방에 들렀다가 거기서 '오렌지가좋아', 엄명환씨를 만났다. 이유를 알기 어렵지만, 꽤나 자주 오렌지가 생각난다. 첫 만남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오해로도 가득한 만남이었다는 것은 그로부터 1년 후 그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난 이후였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한 사람의 시민적 용기의 근원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까지 종합해보면, 오렌지가 보여준 용기는 학교가 아니라 학교 밖에서, 교사가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책이 아니라 현장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오렌지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인권상도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제도, 엘리트, 서열주의의 표상 같은 '어륀지' 대신 자기 자신의 삶과 선호를 그 자체로 긍정하는 '오렌지'를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오렌지인권상에서 격려 받게 되었으면 한다. 사실은 오렌지이며, 오렌지가 좋지만, 어륀지가 되고 싶고, 어륀지에 대한 미련을 못버리는 나를 생각하며 썼다. 지금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이런 거다. 어륀지보다는 오렌지가 좋다.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 그거 하나다.

오렌지가 좋아.(2017.7.25. 매일신문 에세이산책)


2014년 여름, 대학로 이음책방에 들렀다가 사진가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자신을 이름 대신 ‘오렌지가 좋아’라는 별명으로 소개했다. 그냥 ‘오렌지’라 불러도 좋다고 했다. 이명박 정권 출범을 준비하던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이 공청회에서 “미국에서 ‘오렌지’(orange)라고 했더니 아무도 못 알아듣다가 ‘어륀지’라고 하니 알아듣더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륀지보다 오렌지가 더 좋다고 생각했던 그는 그때부터 자신을 ‘오렌지가 좋아’로 소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렌지는 책방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다산인권센터 자원활동가라는 직함이 새겨진 명함을 내게 건넸다. 그는 2009년부터는 반올림(삼성 반도체공장 노동자 인권지킴이) 활동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반올림 집회나 삼성에서 백혈병을 얻어 세상을 뜬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의 1인 시위 현장에 그는 늘 함께했고, 그의 사진들은 영화 ‘또 하나 약속’(2014)에서 엔딩 화면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대개 그렇지만 경제적 대가는 거의 없기 마련이다. 생활은 어떻게 해나가느냐는 비루한 내 물음에 오렌지는 검도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유독 두꺼운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본격적으로 살아갈 방편을 찾아야 하지 않느냐는 꼰대 같은 내 물음엔 사진가로 자리 잡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솔직히 그때 나는 사진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는 오렌지의 미래가 걱정스러웠다.


그날의 질문과 걱정이라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것이었는지는 그로부터 1년 정도 지나 알게 되었다. 2015년 5월 26일, 오렌지가 심정지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알고 보니 그는 만성신부전증 환자로 1급 장애인이었다. 열두 살 때부터 일주일에 세 번씩 혈액 투석을 받아야 했다. 유달리 두꺼웠던 팔목은 투석을 위해 찔러댄 주삿바늘이 남긴 흔적이었다. 그 때문에 중`고등학교도 모두 검정고시로 마쳐야 했다. 장애인 인권과 의료민영화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사진에 뜻을 품었고, 어륀지보다 오렌지를 좋아했던 그는 결국 6월 10일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날,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여름에 그를 만났던 탓일까, 두 해가 지났지만 지금도 이맘때가 되면 명랑했던 오렌지가 생각난다. 황상기 씨는 “그의 사진기는 삼성 경비의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준 방패였다”고 했다. 그 자신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버티기 어려웠을 처지로 어떻게 다른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었을까. 무엇이 이런 시민적 용기를 갖게 만들었을까. 아픔으로 두꺼워진 팔뚝으로 그는 타인의 아픔을 안았다. 자기 아픔으로 세상 아픔을 품었다. 세상 모든 일에 무덤덤한 내가, 내 아이가 어륀지를 행여나 오렌지로 발음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사는 자신이 부끄럽다. ‘오렌지가 좋아.’ 그의 이름은 바로 엄명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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