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독서.

오늘은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의 니켈편을 읽었다.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 <주기율표>에 나온 등장인물에 비하자면 바르바리쿠에 가까운 김영선씨는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3장까지 읽고 그 이후 3년동안 책을 읽지 못했다고 한다. 그것은 거짓일까? 분명 아닐 것이다. K씨와 같은 바르바리쿠에 가까운 사람, 자신만의 윤리를 토대로 세상을 거부하고 사는 사람, 의사가 되었지만 온갖 종류의 의무와 일정과 마감을 싫어하고, 미국이 단지 시끄럽기 때문에 미국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것이다. 여하간 K씨에 비할 바 아니지만 프리모 레비의 책은 나 역시도 하루에 많은 분량을 읽어내기 어렵다. 기껏해야 두 편 내지 세 편 정도가 하루에 읽을 수 있는 양의 고작이다. 정말 재밌지만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는다.

니켈편에서 프리모 레비는 대학 졸업 후 석면 광산에서 석면 채굴 후 버려진 암석덩이에서 니켈을 채굴하는 일을 했던 추억을 적고 있다. 암석에서 석면의 양은 고작 2%, 버려지는 양은 98%다. 2%를 위해서 98%는 그저 버릴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일까? 프리모 레비의 역할은 2%의 석면을 위한 일이 아니다. 버려진 98%의 돌에서 다시 쓸모 있는 것들을 골라내야 하는 것.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당시 많은 돈이 될 것이라 예상했던 니켈은 98%의 버려진 돌에서 아주 아주 작은 양에 불과했다. 버려진 것들 중에서 쓸만한 것은 많지 않았지만 버려진 것들 중에서 쓸만한 것을 찾으려는 노력 중에 프리모 레비는 '승리였다'고 느꼈고, '나를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존재라고 선언했던 자들에게 결코 저열하지 않게 복수했다'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버려진 것을 다시 돌아보는 일은 쉽게 버려질 만한 일이, 결코 가치 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납과 수은 이야기가 버려지지 않고 이 책에 실리게 된 것 역시 누군가는 이토록 이질적인, 어쩌면 쓸모 없어보이는 이야기를 다시 되돌아보며 가치 있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코 순수하지 않은 화학 물질의 은유로서 이 책 역시 하나의 화학물로 존재하는 것이리라.



니켈편은 인간을 폐기하는 세상에서 겨우 벗어난 한 인간이 암석을 폐기하는 세상에서 폐기된 돌을 되돌아보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98%의 암석을 버리기도 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또 그것이 못내 아까워 여러 번 돌아보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은유이기도 하다. 나의 친구, 바르바리쿠 K 씨와 다시 쓸모 없어 보이지만 같이 읽으면 꽤나 재밌는 책들을, 버려진 돌에서 니켈을 찾듯이 함께 찾아 읽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내가 당시 썼던 광물 이야기 두 편도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도 내 자신의 운명과 거의 흡사하게 파란 많은 운명을 겪었다. 폭격과 탈출을 겪어낸 것이다. 잃어버린 줄만 알았는데, 최근 수십 년동안 잊고 있었던 문서들을 정리하면서 다시 찾았다. 나는 그것들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주기율표,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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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결정과 결단을 내려야 했다.이런 성숙하고 책임있는 행동은 파시즘이 우리에게 훈련시키지 않은 것일 뿐 아니라 담백하고 깨끗한 좋은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 프리모 레비, 주기율표 중에서

지난 일요일 대구의 팀본색에서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반비)의 출간과 관련해 서경식 선생님을 모시고 말씀을 듣는 기회를 가졌다. 많은 화두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마음에 오래 남았던 질문이 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혁명부터 반-프랑스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나치즘이 대두하기 전까지 보편적 가치가 승리하던 시기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패전 이후 20년 간의 전후민주주의 시대가 열렸다. 서경식 선생은 자신이 전후 민주주의의 유산이 없다면 설명될 수 없는 존재라고 하셨다. 그리고 선생은 "그런데 이런 시기는, 인간의 단편화에 저항하며 인간성의 위대한 가치가 승리하던 시기는 인류 역사에서 어쩌면 예외적이었던 것일까" 하고 청중에게 물으셨다.


답하기 역시 어려운 물음이지만, 우리가 결정과 결단을 내리는 것에 두려움이 있다면, 우리의 결정과 결단보다 더 나은 결정과 결단을 해줄 수 있는 사람 앞에서 우리가 늘-언제나 굴복하고 있다면 이 시기는 예외적이었던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의사'의 대리가 아니라 '결정'의 대리가 된 민주주의는 이런 예외적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는 주범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주기율표'에서 나 개인적으로는 잘 와닿지 않았던 장이 '수소' 였다. 물의 전기분해와 그것으로 분리된 수소와 산소, 수소의 작은 폭발, 엔리코, 프리모 레비의 첫번째 실험은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몇 년 전에 읽었다가 해결되지 않았던 궁금함을 다시 생각해보려 책을 읽었다가 약간의 실마리를 찾았고, 그렇게 '철'까지 다시 읽어나가다 발견해낸 것이 위의 문구다. 결정의 향기. 결정에서 나는 향기는 자유의 향취라는 말... 파시즘은 우리에게 자유를 훈련시키지 않는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무엇보다 내 아이와 학생들에 대해서도 결정을 미루거나 결정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 더 편하다면 우리는 조금씩은 파시즘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결정엔 담백하고 깨끗한 향기가 난다. 그리고 그런 결정이, 결단이 예외를 예외가 아닌 것으로 만든다. 결정에는 좋은 냄새가 난다.


차로 다시 선생님을 모시고 부산으로 가는 길에 선생님께서 내게 조용히 물으셨다. 이념과 종교의 규제 없이, 소위 배운 것이 많지 않아도, 누군가의 일체의 강요 없이도 올바른 것을, 목숨을 걸고서라도 덕스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갖는 '자율적인 윤리'는 어떻게 가능할 것일까? 장애를 가진 유태인 아이를 돌보던 이탈리아인 여성이 그 아이와 함께 아우슈비츠행 열차를 함께 탄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일까? 말 수가 적고, 주변과 관계 맺기 어려워했던 로렌초가 목숨을 걸고 수용소의 유대인들에게 배푼 호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피델리티'(fidelity), 인간이 인간에 대한 충실성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조심을 다해, 선생님께 그것이 철학자들이 설명하기 어려워 하는 '잔여'고, 현대철학이 잔여의 철학, 반-철학이 되는 본질적인 이유라고 말씀을 드렸다. 하지만 도대체 이런 '잔여'로부터 어떻게 자율적인 윤리가 가능한 것인지는 조금도 설명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레비나스에게도, 데리다에게도 그건 '도약'으로밖에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다 오늘 프리모 레비를 읽으며, 어쩌면 이 문제도 향기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의 향기, 결단의 냄새, 그것을 맡아본 사람만이 목숨을 건 결정을 한다. 파시즘은, 관료주의는 결코 우리가 자율적으로 옳음을 결정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법이다. 결정은 힘들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결단은 고되지만 좋은 냄새가 난다. 좋은 냄새가..


그 고기 맛이란 강인함과 자유의 맛, 실수도 할 수 있는,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자유의 맛이다".


다시 프리모 레비의 말이다.

인간의 자율성은 냄새도, 맛도 오직 자기 자신만이 느낄 수 있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일 것이다.

냄새도, 맛도, 기쁨도, 그리고 고통까지도 말이다.








사진은 모두 젊은 포토그램퍼 김도균(moolrin) 작가의 허락을 받아 사용한 것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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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좀' 말려줘


얼마 전 북카페에서 있었던 일이다.

카페에 들어서자 아르헨티나의 국민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호두나무로 만든 두꺼운 탁자 위에는 터키식 램프가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우쿨렐레 연주도 하시나 봐요?” 헤링본 마룻바닥 위에 놓인 걸 보고 묻자 주인이 말했다. “제가 예전에 언니 ‘좀’ 말려줘라는 우쿨렐레 밴드까지 했어요.” 재밌는 이름이었다. 이후 언제나처럼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터키식 램프가 놓인 탁자에서 커피가 나오길 기다렸다. 램프 옆으로 오르한 파묵이 쓴 ‘소설과 소설가’가 보였다. “아, 파묵이 터키 작가라 여기에 둔 거구나.” 책을 펼쳐 읽었다. 이곳의 다른 책들처럼 이 책에도 주인이 그어놓은 밑줄과 그녀의 영혼을 스쳐간 편린들이 한가득 적혀 있었다. 나는 이 카페의 분위기, 책의 선별 등 거의 모든 점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책에 적힌 주인의 깊이 있는 메모를 읽는 것이 좋았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피로가 몰려와 짐을 챙겨 카페를 나섰다. 잠시 후 뒤에서 주인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지만 읽던 책을 어디 꽂아두셨어요?” 그 질문을 받고서야 나도 모르게 내가 그 책을 내 가방에 넣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이 캄캄했다. 내가 좋아하는 북카페에서 좋아하는 책을 훔친 책 도둑이 되다니. 내가 도둑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나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북카페로 향했다. 그 덕에 주인과 처음 대화를 나눴다. 그제야 이곳은 언론인, 문화기획자 등으로 활약했던 세 명의 비혼 여성들이 세상을 ‘달리’ 보고 싶어 만든 ‘달리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카페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도 ‘달리북카페’였다. “책 구성이 너무 좋은 서가예요.” 실수를 만회하겠다는 심정으로 한 말이지만 과장이 아니었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마음 아프지만 이제 여기 책을 팔까 생각 중이에요.” 

(달리도서관 인터뷰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48684)


어떤 이유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걸까. 그 사정을 다 헤아리기 어렵지만 북카페는 카페 중에서도 회전율이 낮고, 단체 손님이 많지 않아 운영이 쉽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세 여성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기세로 의기투합해 자신들의 책을 기증해 여성들을 위한 도서관을 만들었고, 지역과 이웃을 위해 별로 돈은 되지 않는 북카페를 열었다. 비즈니스만 생각한다면 가능한 발상이 아니다. 제주뿐 아니라 우리 동네 구석구석에도 이런 언니들의 비경제적 발상으로 만들어진 공공적인 공간들이 있다.

나는 간곡한 심정으로 책은 ‘좀’ 팔지 말라고 말렸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언니’를 말릴 수 있을까? 나 같은 책 도둑은 할 말 없게 됐지만, 이런 공간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싸우는 노력을 더 많은 이들이 ‘달리’ 알아보고 지지해주는 것 외 다른 어떤 방법은 있을까? 그렇다. 언니를 말리고, 영혼과 사회를 끝없는 사유화로부터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관심과 연대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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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과 추해져버린 신학


대학에 갓 입학했던 K는 교회에서 파키스탄 선교사의 선교보고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의 삶은 남자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성폭력의 위험에까지 노출되어 있다는 이야기에 K는 눈물을 흘렸다. K는 복음의 힘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는 이슬람 세계의 여성들을 구할 수 있다고 믿고 본인도 선교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K는 선교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거금을 들여 선교여행을 떠났다. 경제적으로 어려웠기에 K에게도 이런 결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기 중에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고, 용돈도 아꼈다. 지금은 가기 어려운 곳이 되었지만 아프가니스탄 카불, 파키스탄 라호르, 이슬라마바다, 페샤와르 등 남들이 유럽 여행을 갈 때 그는 전운이 감도는 이슬람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선교사가 되겠다는 K의 열정은 누구도 꺾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신은 K를 다른 길로 인도했다. 이슬람 세계의 폭력적인 남존 여비 문화와 차별로 상처 받은 사람들을 돕고자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상담학 대학원에서 공부도 했다. 하지만 그도 ‘현실의 벽’은 쉽게 넘을 수 없었다. 교단에서 선교사로 파송받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자격이 필요했고, 그런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예상보다 많은 돈이 들었다. 신학대학원을 가야했고, 선교사로 파송될 국가의 언어에 대한 학습이 필요했지만 K에게는 그럴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하는 수 없어 K는 필요한 돈을 마련하겠다는 이유로 취업을 위해 임용고사를 쳤고, 시험에 합격하여 학교 상담교사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K는 결혼을 했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K는 교사로 임용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신이 자신을 왜 이슬람세계가 아니라 학교로 인도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시내의 한 여자고등학교에서 근무하며 K는 스무 살 때 파키스탄 선교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보다 더 무서운 일이 학생들에게 비일비재한 일상임을 알게 되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열 시간이 넘는 비행기를 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K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K의 열정이 냉정이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 K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학생, 우울증으로 손목을 그은 학생, 의붓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학생을 만나는 일이 성가시고 두렵기만 하다. 사고 나지 않게 아이를 잘 관찰하라는 교장, 행여나 진급에 영향을 줄까 노심초사하는 교감, 문제 일으키지 말고 적당히 졸업만 시켜라는 행정실장 덕분이었다고 한다. 잘못된 서류 작성으로 혹시나 소송을 당하게 되지 않을지, 아이들의 극단적 선택으로 자신에게 해가 돌아오지는 않을지, 교장, 교감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나쁜 인사점수를 받게 되지는 않을지 하는 걱정이었다. 그렇다. 이건 위기에 빠진 아이들 때문에 생긴 불안이 아니다.

며칠 전 K와 만났다. 그녀는 내게 학교의 행정시스템이 ‘악마’인 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한 때 선교사를 꿈꿨던 그녀다운 질문이었다. 혹시나 작은 실수로 조직에서 낙오되고,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는 것이 두려웠기에 그녀는 윗사람들이 ‘시키는대로’ 아이들을 인간이 아니라 사물로,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진심이 아니라 업무로, 상담가가 아니라 행정가로 대했다고 한다. K의 고백을 들으며 카프카의 소설 <성>에 나오는 또 다른 K가 떠올랐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지만, 길은 길게 뻗어 있었다. 도로, 즉 마을의 큰 길은 성이 있는 나 있지 않았다. 성이 있는 산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하다가, 마치 일부러 그런 듯 구부러져버렸다. 성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K는 이 길이 결국에는 성으로 접어들 거라는 기대를 계속 버리지 않았다”.

이 소설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한 부류는 ‘성’에 사는 사람들, 다른 한 부류는 그 성의 지배를 받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다. 성 사람들은 주로 관료들이고, 마을 사람은 일반인의 모습이다. 측량기사 K는 베스트베스트 백작의 초청을 받아 성으로 향하고 있는 길이다. 그런데 측량기사 K는 아무리 성에 다가가려 해도 마치 ‘일부러 그런 듯 길이 구버려져’ 성에 다가갈 수 없다. 성 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했을 때는 성의 집사 아들에게 “당신은 허가증을 갖고 있지 않거나, 또는 적어도 그것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상담교사 K가 처한 상황도 측량기사 K가 처한 상황과 같았다. 학교라는 관료 조직은 마치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도 다가갈 수 없고, 들어갔다고 해도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도 아니었던 것이다. K는 이 소설에서 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과오가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전혀 계산에 넣지 않는 것이 관청 사무의 원칙"인 만큼 혹시나 자기 실수로 교장, 교감 인사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봐 늘 노심초사했다.

막스 베버는 이런 관료제의 특징을 ‘계산가능성’이라고 쓴 적이 있다. 개개의 사람을 인격으로 보지 않고 모두 똑같은 행정 처리의 대상으로만 다룬다. 측량기사 K는 성 안의 사람들에게 행정처리 대상이 되었고, 상담교사 K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학생들을 계산가능한 방식으로 서류화시켰다. 규격화된 문서에 개인의 사정도, 개인의 아픔도, 개인의 눈물도 들어갈 여지는 없다는 점에서 상담교사 K가 인간을 인간 아닌 존재로 다루도록 하는 문서행정과 조직논리를 악마로 인식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허가증, 그러니까 문서가 없다면 절박한 개인의 사정은 ‘성’ 안에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열렬한 신앙을 가진 K는 이제야 비로소 예수가 성 안이 아니라 ‘말구유’에서 태어난 이유를, 말이 아니라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했다. 신은 관료의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정의를 위한다고 검사가 되고, 나라를 위한다고 정치인이 되고, 사람을 구한다고 의사가 되고, 영혼을 위한다고 목사가 되고, 아이들을 위한다고 교사가 되지만 우리의 ‘초심’은 조직논리 앞에서만큼은 왜 이리 한 없이 무력하기만 한 것일까. 어쩌면 이것이 검찰 조직을 개혁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검찰 개혁은 성공할 것인가? 국정원 개혁이든, 군 개혁이든 교회 개혁이든 간에 성공하게 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온갖 조직을 개혁한 그 ‘초심’ 조차 다시 힘을 잃게 될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든다.

“혁명이 증발하면 나중에 남는 것은 새로운 관료 정치의 진흙 뿐입니다. 괴로운 인류의 쇠사슬은 관청용지에서 생겨납니다”. 이것은 러시아 혁명에 대해 카프카가 내린 결론이었다. 관료제 조직이라는 거대한 성체는 혁명의 초심까지 무력하게 만들었다. 혁명과 개혁이 ‘조직’은 바꿀 수 있어도 ‘조직논리’ 그 자체를 바꿀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올해 100주년을 맞은 러시아 혁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지젝, 아감벤 등의 수많은 현대 철학자들이 정치신학자를 자처하며 신을 호출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 누구와도 싸워서 이기려면 그것은 신학의 힘을 빌려야 하나, 오늘날 신학은 왜소하고 추해져 들여다보아서는 안된다”.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검찰 조직과 싸워 이기는 것도, K가 학교 조직에 승리하는 것도 어쩌면 왜소하고 추해져버린 신학에 달린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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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가 짜낸 참기름


S는 K대학의 전기전자공학부 학생이었다. S는 명문대에 진학할 만큼 명석했고, 해병대에 자원할 정도로 건강했다. 전역 후 S는 택배물류센터에서 일했다. 일주일도 버티기 힘들다는 곳에서 S는 반장이 인정할 정도로 버티고 또 버텨서 학자금까지 마련했다. 스물두 살 S에게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높았던 자신감이 깊은 좌절이 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S는 복학 후 해병대 정신으로 밤을 새우며 엉덩이에 진물이 날 때까지 공부했지만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계속되는 좌절과 누적된 피로 탓에 ‘수업 듣는다고 되는 것도 아닌데 오늘 하루는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학교에 가는 날보다 가지 않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자주 쉬었지만 S는 피로를 회복하지 못했고, 두 번의 학사경고를 받아 제적되고 말았다. S가 우울증을 얻은 것도 이때였다.

제적된 후 한동안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두문불출하던 S는 공무원 시험 준비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정상궤도로 복귀하려면 이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3년 동안 공부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우울증 탓이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에게 뇌졸중이, 어머니에게 암이 동시에 찾아왔다. S는 이때부터 부모님을 대신해 참기름을 만들어 거래하는 식당으로 배달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S도 30대 중반이 되었다.

두 해 전 미술관에서 ‘마이너리그 서양미술사’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던 적이 있다. 강연목표는 서양미술사에서 빛나는 장면을 연출한 거장들도 알고 보면 중심으로부터 먼 가난하고 지질한 비주류였음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S는 이 강연에 와준 청중의 한 사람이었다. 며칠 전 우연히 S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스마트폰에 저장된 그림 몇 장을 내게 보였다. 세밀한 필치로 정교하게 그려진 초상화였다. 놀랍게도 모두 S 자신의 그림이라고 했다.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 그린 것이라곤 믿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S는 내 강연을 들은 후 비주류인 자신도 그림을 그려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S가 말했다. “늘 주변인이었기에 그저 남들처럼 사는 것이 꿈이었고 그 꿈이 무너진 것이 많이 아팠어요.”

고흐도, 프리다 칼로도 남들처럼 살지 못했다. 고흐는 지독할 정도로 가난해 결혼도 못했다. 프리다 칼로는 큰 사고로 원하던 아이를 갖지 못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도 없었다. 나는 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는 인간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묻게 된다. 꿈이 무너진 삶에서 희망이란 자기 고통을 말하고, 쓰고, 그리는 것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말해지고, 쓰이고, 그려질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란 남들처럼 사는 삶이 아닌 삶이기 때문일 것이다.

참깨를 짜서 기름을 내고, 무너진 꿈을 살펴 그림을 그리는 것, 거기에 인간의 구원이 있다.


2017.11.7 매일신문에 실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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