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좀' 말려줘


얼마 전 북카페에서 있었던 일이다.

카페에 들어서자 아르헨티나의 국민가수 메르세데스 소사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호두나무로 만든 두꺼운 탁자 위에는 터키식 램프가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우쿨렐레 연주도 하시나 봐요?” 헤링본 마룻바닥 위에 놓인 걸 보고 묻자 주인이 말했다. “제가 예전에 언니 ‘좀’ 말려줘라는 우쿨렐레 밴드까지 했어요.” 재밌는 이름이었다. 이후 언제나처럼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터키식 램프가 놓인 탁자에서 커피가 나오길 기다렸다. 램프 옆으로 오르한 파묵이 쓴 ‘소설과 소설가’가 보였다. “아, 파묵이 터키 작가라 여기에 둔 거구나.” 책을 펼쳐 읽었다. 이곳의 다른 책들처럼 이 책에도 주인이 그어놓은 밑줄과 그녀의 영혼을 스쳐간 편린들이 한가득 적혀 있었다. 나는 이 카페의 분위기, 책의 선별 등 거의 모든 점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책에 적힌 주인의 깊이 있는 메모를 읽는 것이 좋았다.


                                   



두어 시간이 지났을까. 피로가 몰려와 짐을 챙겨 카페를 나섰다. 잠시 후 뒤에서 주인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지만 읽던 책을 어디 꽂아두셨어요?” 그 질문을 받고서야 나도 모르게 내가 그 책을 내 가방에 넣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앞이 캄캄했다. 내가 좋아하는 북카페에서 좋아하는 책을 훔친 책 도둑이 되다니. 내가 도둑이 아님을 증명하려면 나에 대해 긴 이야기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시 북카페로 향했다. 그 덕에 주인과 처음 대화를 나눴다. 그제야 이곳은 언론인, 문화기획자 등으로 활약했던 세 명의 비혼 여성들이 세상을 ‘달리’ 보고 싶어 만든 ‘달리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카페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도 ‘달리북카페’였다. “책 구성이 너무 좋은 서가예요.” 실수를 만회하겠다는 심정으로 한 말이지만 과장이 아니었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마음 아프지만 이제 여기 책을 팔까 생각 중이에요.” 

(달리도서관 인터뷰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48684)


어떤 이유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걸까. 그 사정을 다 헤아리기 어렵지만 북카페는 카페 중에서도 회전율이 낮고, 단체 손님이 많지 않아 운영이 쉽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세 여성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기세로 의기투합해 자신들의 책을 기증해 여성들을 위한 도서관을 만들었고, 지역과 이웃을 위해 별로 돈은 되지 않는 북카페를 열었다. 비즈니스만 생각한다면 가능한 발상이 아니다. 제주뿐 아니라 우리 동네 구석구석에도 이런 언니들의 비경제적 발상으로 만들어진 공공적인 공간들이 있다.

나는 간곡한 심정으로 책은 ‘좀’ 팔지 말라고 말렸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언니’를 말릴 수 있을까? 나 같은 책 도둑은 할 말 없게 됐지만, 이런 공간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싸우는 노력을 더 많은 이들이 ‘달리’ 알아보고 지지해주는 것 외 다른 어떤 방법은 있을까? 그렇다. 언니를 말리고, 영혼과 사회를 끝없는 사유화로부터 지키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관심과 연대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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