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과 추해져버린 신학


대학에 갓 입학했던 K는 교회에서 파키스탄 선교사의 선교보고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의 삶은 남자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성폭력의 위험에까지 노출되어 있다는 이야기에 K는 눈물을 흘렸다. K는 복음의 힘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는 이슬람 세계의 여성들을 구할 수 있다고 믿고 본인도 선교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K는 선교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거금을 들여 선교여행을 떠났다. 경제적으로 어려웠기에 K에게도 이런 결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기 중에도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했고, 용돈도 아꼈다. 지금은 가기 어려운 곳이 되었지만 아프가니스탄 카불, 파키스탄 라호르, 이슬라마바다, 페샤와르 등 남들이 유럽 여행을 갈 때 그는 전운이 감도는 이슬람 세계로 여행을 떠났다.

선교사가 되겠다는 K의 열정은 누구도 꺾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신은 K를 다른 길로 인도했다. 이슬람 세계의 폭력적인 남존 여비 문화와 차별로 상처 받은 사람들을 돕고자 심리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상담학 대학원에서 공부도 했다. 하지만 그도 ‘현실의 벽’은 쉽게 넘을 수 없었다. 교단에서 선교사로 파송받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자격이 필요했고, 그런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예상보다 많은 돈이 들었다. 신학대학원을 가야했고, 선교사로 파송될 국가의 언어에 대한 학습이 필요했지만 K에게는 그럴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하는 수 없어 K는 필요한 돈을 마련하겠다는 이유로 취업을 위해 임용고사를 쳤고, 시험에 합격하여 학교 상담교사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K는 결혼을 했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K는 교사로 임용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신이 자신을 왜 이슬람세계가 아니라 학교로 인도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시내의 한 여자고등학교에서 근무하며 K는 스무 살 때 파키스탄 선교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보다 더 무서운 일이 학생들에게 비일비재한 일상임을 알게 되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열 시간이 넘는 비행기를 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K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K의 열정이 냉정이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금 K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학생, 우울증으로 손목을 그은 학생, 의붓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학생을 만나는 일이 성가시고 두렵기만 하다. 사고 나지 않게 아이를 잘 관찰하라는 교장, 행여나 진급에 영향을 줄까 노심초사하는 교감, 문제 일으키지 말고 적당히 졸업만 시켜라는 행정실장 덕분이었다고 한다. 잘못된 서류 작성으로 혹시나 소송을 당하게 되지 않을지, 아이들의 극단적 선택으로 자신에게 해가 돌아오지는 않을지, 교장, 교감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나쁜 인사점수를 받게 되지는 않을지 하는 걱정이었다. 그렇다. 이건 위기에 빠진 아이들 때문에 생긴 불안이 아니다.

며칠 전 K와 만났다. 그녀는 내게 학교의 행정시스템이 ‘악마’인 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한 때 선교사를 꿈꿨던 그녀다운 질문이었다. 혹시나 작은 실수로 조직에서 낙오되고,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는 것이 두려웠기에 그녀는 윗사람들이 ‘시키는대로’ 아이들을 인간이 아니라 사물로,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진심이 아니라 업무로, 상담가가 아니라 행정가로 대했다고 한다. K의 고백을 들으며 카프카의 소설 <성>에 나오는 또 다른 K가 떠올랐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지만, 길은 길게 뻗어 있었다. 도로, 즉 마을의 큰 길은 성이 있는 나 있지 않았다. 성이 있는 산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하다가, 마치 일부러 그런 듯 구부러져버렸다. 성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가까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K는 이 길이 결국에는 성으로 접어들 거라는 기대를 계속 버리지 않았다”.

이 소설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한 부류는 ‘성’에 사는 사람들, 다른 한 부류는 그 성의 지배를 받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다. 성 사람들은 주로 관료들이고, 마을 사람은 일반인의 모습이다. 측량기사 K는 베스트베스트 백작의 초청을 받아 성으로 향하고 있는 길이다. 그런데 측량기사 K는 아무리 성에 다가가려 해도 마치 ‘일부러 그런 듯 길이 구버려져’ 성에 다가갈 수 없다. 성 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했을 때는 성의 집사 아들에게 “당신은 허가증을 갖고 있지 않거나, 또는 적어도 그것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상담교사 K가 처한 상황도 측량기사 K가 처한 상황과 같았다. 학교라는 관료 조직은 마치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도 다가갈 수 없고, 들어갔다고 해도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도 아니었던 것이다. K는 이 소설에서 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과오가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전혀 계산에 넣지 않는 것이 관청 사무의 원칙"인 만큼 혹시나 자기 실수로 교장, 교감 인사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까봐 늘 노심초사했다.

막스 베버는 이런 관료제의 특징을 ‘계산가능성’이라고 쓴 적이 있다. 개개의 사람을 인격으로 보지 않고 모두 똑같은 행정 처리의 대상으로만 다룬다. 측량기사 K는 성 안의 사람들에게 행정처리 대상이 되었고, 상담교사 K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학생들을 계산가능한 방식으로 서류화시켰다. 규격화된 문서에 개인의 사정도, 개인의 아픔도, 개인의 눈물도 들어갈 여지는 없다는 점에서 상담교사 K가 인간을 인간 아닌 존재로 다루도록 하는 문서행정과 조직논리를 악마로 인식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허가증, 그러니까 문서가 없다면 절박한 개인의 사정은 ‘성’ 안에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열렬한 신앙을 가진 K는 이제야 비로소 예수가 성 안이 아니라 ‘말구유’에서 태어난 이유를, 말이 아니라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했다. 신은 관료의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정의를 위한다고 검사가 되고, 나라를 위한다고 정치인이 되고, 사람을 구한다고 의사가 되고, 영혼을 위한다고 목사가 되고, 아이들을 위한다고 교사가 되지만 우리의 ‘초심’은 조직논리 앞에서만큼은 왜 이리 한 없이 무력하기만 한 것일까. 어쩌면 이것이 검찰 조직을 개혁해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검찰 개혁은 성공할 것인가? 국정원 개혁이든, 군 개혁이든 교회 개혁이든 간에 성공하게 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온갖 조직을 개혁한 그 ‘초심’ 조차 다시 힘을 잃게 될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든다.

“혁명이 증발하면 나중에 남는 것은 새로운 관료 정치의 진흙 뿐입니다. 괴로운 인류의 쇠사슬은 관청용지에서 생겨납니다”. 이것은 러시아 혁명에 대해 카프카가 내린 결론이었다. 관료제 조직이라는 거대한 성체는 혁명의 초심까지 무력하게 만들었다. 혁명과 개혁이 ‘조직’은 바꿀 수 있어도 ‘조직논리’ 그 자체를 바꿀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올해 100주년을 맞은 러시아 혁명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지젝, 아감벤 등의 수많은 현대 철학자들이 정치신학자를 자처하며 신을 호출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 누구와도 싸워서 이기려면 그것은 신학의 힘을 빌려야 하나, 오늘날 신학은 왜소하고 추해져 들여다보아서는 안된다”.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검찰 조직과 싸워 이기는 것도, K가 학교 조직에 승리하는 것도 어쩌면 왜소하고 추해져버린 신학에 달린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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