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카툰책이 참 많이 나오는 것 같다. 대형서점에 가면, 아예 한쪽 코너를 카툰이나 카툰에세이책으로 전체를 진열해놓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책들 중에서도 꽤 읽을 만한 책들이 있다. 이 책은 제외하겠다. 충분히 서점 진열대 앞에서 읽고 돌아와도 좋을 것 같다. 책이라 하면, 뭔가 가슴이나 머리에 쌓아주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냥 피식.. 웃는 것이 전부인듯 하다. 어쩌면 내가 지은이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재미있었던 부분은 테스트였다. 혼자 놀기를 얼마나 잘하는가에 대한 테스트였다. 나의 결과는 '당신은 반드시 혼자 놀아야 합니다.' 이미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사실 그런 것 같다. 사람들 중에는 혼자 있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전혀 그러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혼자라는 것은 그만큼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고, 충분한 피로를 풀 수도 있는 유익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숙지해야 할 것 같다. 스노우캣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열심히 각인시키고자 박스를 얼굴에 뒤집어 쓴 채 열변을 토하고 있는 듯 하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출판이 되었던 책.. 아마도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때에 처음으로 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제제는 단색의 그림 속에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였다. 커다란 나무 위에 맨발로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아이.. 장난기 섞인 웃음으로 햇빛을 받고 있는 그 모습이 다였다. 그로부터 14년 후.. 다시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나는 한없이 울었다. 슬픔에 휩싸여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가득 눈에 머금은 채 책을 읽었다.'나는 태어나지 않았어야 해요.' 라는 말을 하는 제제를 보며 가슴이 저며와 도저히 글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가슴 속에 살고 있다는 작은 새.. 그 새를 날려보내는 제제.. 상상을 초월하는 다섯살배기 아이.. 다섯살이라는 나이에 너무나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하면서도 제제는 앞으로 걸어간다. 마음의 안정을 뽀르뚜가에게서 느끼게 되면서 제제는 보다 큰 발걸음을 가지게 되지만, 뽀르뚜가의 죽음으로 인해 제제는 죽음만큼이나 고통스런 시간을 보낸다. 만약, 제제가 뽀르뚜가에게 말했듯 그의 양아들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뽀르뚜가는 그렇게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서로를 더욱 사랑하며 제제는 행복한 시간들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제.. 나의 가슴을 뚫어버린 아이..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악마와 천사, 이 두 개의 존재가 늘 싸움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상황이나 성향에 따라 어느 쪽의 말에 쉽게 넘어가느냐가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이리라. 가끔은 나도 모르게 선명하게 들리는 악마의 외침에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다. 그리고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서의 제제처럼 내 속에는 악마가 살고 있다고 그 존재를 느낀다고 혼자 중얼거리곤 한다.이 책 속에서는 악마의 존재가 모든 사람에게 있음을 보여준다. 작은 사건이 발생하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악마의 존재를 여실없이 보여준다. 낯선 이방인과 샹탈프랭.. 그리고 노파인 베르타를 죽이고자 작당하는 마을 사람들.. 그들은 누가 더 잘못하고 있는지, 누가 더 그른지를 분별할 능력을 잃은 듯 하다. 선하다는 것과 악하다는 것의 차이를 아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이 세상을 만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이미 망각한 나약한 인간일 뿐인 것이다. 최후의 만찬의 그림 속에 유다와 같이 선한 것과 악한 것은 어쩌면 동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보다 선한 것에 존경을 표하고, 보다 악한 것에 침을 뱉고 혀를 차는 것일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을 직감하고 있었던 노파는 마지막까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로지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 그 주민들이 안쓰럽다는 생각?어쩌면 베르타는 정말 마녀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민한 감각으로 마을에 주둔해 있는 어리석은 신부를 물리치고 선한 마음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진다.
나는 지은이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사실 눈여겨 보지도 않는다. 이 책을 우연히 읽고나서, 내가 나의 홈페이지에 올렸던 시를 다시 보게 되었다. 지은이 '안도현'.. 연탄 한 장 이라는 시였다. 다른 사람을 위해 연탄이 되자는 내용으로 주변을 향한 사랑을 이야기 한 시였다. 그의 필체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증기기관차 미카'..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을 느낄 수 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것을 원하는지 대략적인 것을 알 수가 있게 된다. 아마도 그는 소외되어 있거나 외로워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달리고 싶은 열망이나 따뜻해지고 싶은 소망이 그의 시와 글 속에 묻혀 나오리라.. 그런 생각을 했다.미카는 철도박물관에 갇힌 채, 자신의 과거를 뒤씹으며 흘러가는 시간 속에 답답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고, 미카를 운전했던 운전사는 노인이 되어 시간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재회하고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돌이켜 본다. 그리고 자신들의 열망을 향해 소리친다. 마지막은 그들의 희망을 저 먼 곳에서 이루어 내는 일이었다. 무엇인가 그토록 열심히 달려본 적이 있었을까? 빠르게 달리기 위해 내가 그토록 힘을 들인 적이 있었을까? 그 흐름 속에서 내가 얻을 것과 잃을 것을 생각한다면 나는 그렇게 달릴 것인가? 이런 질문들 속에서 나는 책장을 덮었다.
처음 책을 들었을 때에는 조금 더 깊은 내용을 기대했었다. 천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으로서 이미 배운 내용들이 아니라, 배운 것에 심도가 있는 내용을 읽고 싶었다. 하지만 내 기대는 불필요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책은 아주 간단한 사실들을 기초로 했고, 그 사실들에 불교의 이념들도 간간히 양념되어 쓰여져 있다. 사실 나는 무교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불교에 대한 호감도나 관심이 올라간 것이 사실이다. 책에서는 간혹 불교의 내용이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는 어감의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그것은 불필요한 내용이라 생각한다.과학과 종교는 엄연히 다르다. 외국에서도 많은 과학자들이 열심히 자신의 업무를 해결하면서도 주말이 되면 교회에 찾아가 기도를 드린다. 우주가 누구의 손으로 만들었다던지, 인류가 진화를 했나 창조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필요한 이야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과학과 종교를 함께 보려는 시도는 잘못이다.그러기에 나는 이 책의 시도를 더 높이고 싶다. 앞에서 그런 부분이 잠시 있었다고 했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그런 흐름이 아니다. 큰 흐름에서 천문학자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 불교를 접하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함께 적어둔 것일 뿐이니 그 정도는 대략 눈감아 줄 수 있을 것이다.언제나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탄생과 죽음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것은 나의 몸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해 우주적인 차원으로 진화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천문학이라는 학문이 우리의 의문을 풀어줄 해결책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그 의문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집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