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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치 실험 아이슬란드를 구하라
욘 그나르 지음, 김영옥 옮김 / 새로운발견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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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부터 유독 유머감각이 뛰어난 아이가 있었다. 말솜씨가 뛰어났고, 재치있었고, 귀여웠다. 그런 그는 성인이 되어 코미디언이 되었고, 그 이외에도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그의 조국인 아이슬란드가 금융위기에 빠져 허우덕거리기 전까지는.
"경제위기는 정확히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나는 금융붕괴와 연관된 저 모든 관료, 정치인, 기자, 기업주들을 보면서 그 사람들 사이에 공통점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들은 서로 다른 사회적 배경, 다른 취미, 다른 생활방식을 지녔다. 일부는 좌파고 또 다른 일부는 우파다. 언뜻 보기에 특정한 패턴을 발견하기 힘들어 보였다. 공통분모라고는 아이슬란드의 대학뿐이었다." (53p)
아이슬란드에 금융위기가 불어닥치고 모두가 혼란스러웠던 2009년 무렵 그는 광고 회사에 재직중이었는데, 불황과 긴축 정책으로 많은 사람들이 해고되었고 그 역시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책을 통해 '이 모호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정치에 입문하기로 했다'며 정계에 들어서게 된 계기를 밝힌다.
정치와는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젊고 유머러스한 남자, 그가 그 무렵(혹은 지금까지도) 가장 많이 들은 질문 중 하나는 '최고당을 창당한 이유'일 것인데, 그럴 때마다 그의 답은 하나라고 했다. 아이디어를 냈을 뿐.
책 중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챕터는 <정치인의 자격>이라는 챕터로, 어떤 사람이 정치인의 자격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서 공감이 갔다. 흔히들 정치라고 하면 어렵기 때문에 오직 특정한 사람들만이 정치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빨리 생각하고 빨리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원기왕성하고 참을성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슈퍼 히어로 같은 사람들이 정치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이상적인 정치인은 모든 것을 통솔한다 어떤 질문에도 척척 대답하고, 통찰력, 결단력, 실질적인 지식과 경험을 확실히 갖추고 있다. 언론에서 비밀을 캐내려 아무리 주위를 맴돌아도 눈도 꿈쩍 않는다.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한다. 결코 눈물을 흘리는 법도 없으며 의혹의 여지를 남기는 일 따위도 없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인간적인 면모는 거의 없다. 왜 정치인들이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 누가 정치인들을 그렇게 만들었나? 바로 우리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한 것이다." (62p)
"분별력 있는 젊은이가 텔레비전 뉴스에 매료되어 '우와, 굉장한데. 나도 저렇게 하고 싶어! 정치에 한번 진출해 볼까?'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까? 분명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어쨌거나 대부분의 정치인은 특별히 호감 가는 인간상은 아닌 것이다." (64p)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가장 '괜찮은' 정치인상은 무엇일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바로 이어진다.
"우리가 정치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이런 마음 속 프레임 전체를 바꾸고 정치인에게 필요한 자질에 대해 재고해 봐야 한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에 다양한 사람들을 참여시켜야 한다. 우리에게는 과학자가 필요하다.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빨리 생각하기 보다는 천천히 생각하는 아주 평범한 사람도 필요하다. 다 아는 척만 하고 어려움이 있으면 늘 교묘하게 빠져나와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 대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사람, 수줍음을 타는 사람, 과체중인 사람, 말을 더듬는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도 필요하다. 펑크족, 제빵사, 육체노동자도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젊은이들이 필요하다. 모두가 참여하고 싶어지도록 정치를 좀 더 흥미롭고 재미있고 멋있어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65p)
이 얼마나 멋진 사고방식이란 말인가.
우리는 그동안, 아니 세계에서 그 누구도 이렇게 멋진 생각을 한 사람이 있을까? 우리 모두에게 정치는 그저 어렵고 무거운 분야 혹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분야에 속했다. '정치가 썩었다'고 욕하면서도 정작 적극적인 참여 의지가 없었으며, 뒷짐지고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욘 그나르만은 달랐다. 그는 과감하게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솔직히 밝혔다. 자신들의 당에는 그들이 직접 만든 정책이 전혀 없다고. 다시 말해, 최고당의 정책은 다른 모든 정당이 내건 정책 중 가장 훌륭한 부분을 모아서 조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내세운 당의 정책은 이론상으로는 어쩐지 완벽해 보인다. 아이슬란드의 유효한 국가 지위와 경제적, 문화적 독립을 수호하고, 여성의 의견을 귀담아 들으며, 환경보호까지 기여하는 당이라니! 그리고 놀랍게도 그와 최고당이 내세운 여러가지 공약을 기반으로, 2010년 시의회 선거에서 최고당은 가장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와 다르게, 욘과 최고당은 꽤 많은 것들을 훌륭하게 해냈다. 국가의 근본이 되는 가정을 위한 보호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사회의 소외계층을 돌봤다.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평등권 수립, 투명성 향상을 위한 정책도 수립했다. 이 외에도 대학생, 학생, 장애인들에게 시내버스를 무료로 탑승할 수 있게 하였으며, 아이들과 장애인들에게 무료로 치과치료를 진행했으며, 모든 국민에게 수영장 무료입장을 허락했다! (수영에 대한 이야기는 책의 앞부분에도 언급되는데, 그를 비롯한 아이슬란드의 국민들이 얼마나 수영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여전히 아이슬란드의 정치인일까? 대답은 '아니오'다. 그는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당을 해체했다. 그가 당을 해체한 이유는 그가 만든 최고당의 정책이 실패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임기 막바지에 재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컸으나, 그는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 갔다. 그리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런 결정이 쉬웠던 이유는 내가 우리 당으로 끌어들인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정치인이 될 수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뛰어난 몇몇은 밝은미래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었다. (중략) 최고당은 항상 그랬듯이 계속 존재할 것이다. 누구든지 함께 할 수 있다. 저작권은 없다. 누구든지 깜짝파티를 여는 것처럼 최고당을 조직할 수 있다. 최고당은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볼 수 있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면 보일 것이다. 당신에게는 최고당이 보이는가?"
유쾌한 정치인의 손끝에서 탄생한 새로운 시민민주주의가 아이슬란드에서 반짝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