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 드릴 꽃을 사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웃으셨다. 직계 가족도 아닌데 유난이라며.

 

글 쓰는 사람으로 살고자 결심했을 때 (그게 드라마 작가든 소설을 쓰는 사람이든, 하물며 지금처럼 사보를 만드는 직업일지라도) 나는 선생님의 책들을 다시 한 번 찾아 읽었다. 책장 한 구석에서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있는 선생님의 책들.

 

선생님의 글을 처음 접했던 건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여자네 집가볍게 읽을 수 있는 로맨스 소설쯤으로 생각했던 건 순전히 제목 탓이었다. 또 선생님이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알지 못했던 까닭도 있었다.

 

이후로도 선생님의 글은 문학 교과서를 비롯해 종종 모의고사나 수능 문제의 지문으로 나왔다. ‘밑줄 친 부분과 같은 뜻으로 사용된 단어를 고르시오따위의 폭력적인 문학시험 문제를 경쟁하며 치열하게 풀어대는 동안, 선생님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와 그의 삶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렇게 대학을 갔다. 곱단이와 만득이가 끝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처럼, 선생님이 그린 개인의 상흔, 민족의 비극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았던 대학 시절, 선생님의 책을 다시 집어든 것은 내가 살면서 해온 일 중 몇 안 되는 잘 한 일이다. 좋은 글을 쓰고 싶어졌고, 감히 선생님을 존경했고, 동경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벌써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글을 읽을 때마다 곁에 계시는 것처럼 이렇게 생생한데, 5년이나 흘렀다니.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은 선생님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그리워하고 있으며, 추억하고 있다고 전하는 책이다. 선생님의 맏딸인 호원숙 작가의 글을 시작으로, 9개의 대담이 모아져있다. 9명의 각기 다른 사람들이 박완서 선생님을 만났다.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글을 썼는지, 이야기는 어디에서 왔는지 등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묻는다. 선생님은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답한다.

 

 

그의 문학은 곳곳에서 온갖 바스러진 것들 짓눌린 것들 뒤틀려버린 것들에 대한 짙은 연민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문학에 도저하게 깔려 있는 비극성은 그의 파란 가득한 가족사에도 닿아 있고 그것은 바로 우리 현대사가 그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산맥에 깃들인 개인들의 삶에 떨구어놓은 치명적인 앙금이기도 하다.”

 

“‘아직 계속되고 있지만, 작가로서 지난 삶을 돌이켜보시면 행복하십니까?’

쓰기를 잘했다 싶어요. 그렇죠. 쓰고 싶은 걸 못 쓰는 건 싫지만, 의욕이 과해도 안 좋아요. 체력에 맞게 써야죠. 체력과 비슷하게, 예쁘게 소멸했으면 좋겠어요. 쓰는 게 고통스럽지만, 쾌감도 있습니다. 또 그래야죠. 즐길 만큼만 쓰고 싶어요.’”

 

유난히 웃는 사진이 많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잘 웃진 않아요. 여러 장 찍으면 개중 웃는 게 실려서 그래요. 결심을 하고 안 웃은 적도 있어요라며 또 웃으셨죠. 하지만 다시 찾아본 그날의 사진들 속에서 선생님은 역시 온통 웃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오늘은 선생님의 뒷모습을 골랐습니다. 저는 이 사진이 좋습니다. 선생님의 등을 살짝 내리누른 세월의 무게가 좋고, 아끼며 돌보셨던 서재와 정원이 잇닿아 있는 풍경이 좋고, 저와 선생님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서 좋습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당신 마음에는 계획을 세워두지 않았던 이별이어서 저의 뒤끝은 거뜬하지 않지만 당신을 알면서 지내는 동안 나에게 내내 드리워졌던 그 이상한 기둥 같기도 하며 검부러기 같기도 하며, 그물 같기도 한 그걸, 잘 붙들고 잘 덮고 살아갈게요. 꽃은 몇 번 사드린 적 있지만 이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어서, 그래서 이제야 합니다.

당신은 여전히 참 예뻐요.”

그럼 우리 언제 만날까요. 여행 중에 산 선물을 드리고 싶어요. 선생님, 그날은 꼭 좋은 얼굴로 나오셔야 합니다.”

 

 

아주 오랜만에 선생님을 만났다. 단 한 번도 선생님을 만나본 적 없었고 선생님은 늘 책 속에만 계셨지만, 오늘에서야 진짜 선생님을 볼 수 있었다. 수많은 문학인들이 너무나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 존재만으로도 공간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사람. 문장 하나로도 당신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사람.

 

선생님.

그곳에서도 글을 쓰고 계시는지요.

보고싶습니다. 많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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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16-03-21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벌써 그렇게 지났네요.

저는 이렇게 소녀같았던 모습을 뵌적이 한번 있어요.
원주 박경리 문학공원에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