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트레일스 - 길에서 찾은 생명, 문화, 역사, 과학의 기록
로버트 무어 지음, 전소영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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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유난히 걷는 것을 싫어했다. 하굣길, 끝이 보이지 않게 길게 뻗은 길을 한 걸음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 머리를 써서 마을 버스를 탔지만, 마을버스가 나를 짐짝처럼 내려놓은 그 길부터는 온전히 내 힘으로 걸어야 했다. 지루하지 않으려 길 위에 놓여있는 돌멩이를 친구 삼았다. 돌멩이를 발로 차면서 집까지 왔다. 그래서 내 운동화의 앞 코는 항상 다른 아이들의 그것보다 많이 닳아 있었다.


걷는 게 좋아지고 늘 다니던 길을 돌아보게 된 건 성인이 된 이후다. 힘이 들 때마다 걸었다. 딱히 목적지는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더 많은 길을 걷게 됐다. <온 트레일스>의 서두, 장자(莊子)의 말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온 트레일스>에 담긴 내용을 함축적으로 나타낸 문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길은 그 위를 걸음으로써 만들어진다.


<온 트레일스>는 발간이 된 직후 언론과 독자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런 플래쉬 세례를 받은 까닭은, 저자인 로버트 무어가 단순히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걸어서 모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걷고 또 걸으면서 길의 의미에 대해서 과학, 역사, 철학, 지리학 등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봤다. 젊은 청년의 치기 어린 도전으로 끝날 수 있었던 여행은 그의 통찰력이 더해져, 깊이 있는 '모험''기록'으로 다가왔다.


인간은 지구 최초의 개척자도, 가장 중요한 개척자도 아니다. 우리의 엉성한 흙길에 비하면 개미들의 길은 지극히 훌륭하다. 많은 포유류 종 역시 트레일 만들기에 놀라울 정도로 능숙하다.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동물들조차 지형을 통과해가는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알아내는 데 있어 전문가다. (에필로그 중)

<온 트레일스>에는 로버트 무어가 7년 간의 대장정을 통해 깨달은 길의 진정한 의미와 본질이 담겨 있다. 그는 무려 3200km를 걸으면서, 길 위에 만난 것들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가 만난 것들은 수억 년 전에 살아 숨 쉬었던(그러나 이제는 흔적만 남은) 생명체가 남긴 길부터, 곤충과 동물의 길, 그리고 21세기 고속도로까지 다양하다.


 



로버트 무어는 인간은 새로운 지형에 익숙해지면, 처음에는 자원을 찾고 경로를 익히고 표식을 남기는 등 다른 동물들과 같이 행동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땅은 인간에게 있어서 새로운 의미의 층을 갖게 된다. 단순히 '자원'으로서의 땅이 아니라 이야기, 정령, 성스러운 중심점, 조상들의 뼈를 간직한 곳이 되어가는 곳이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삶이 땅의 산물에 의존한다는 깊은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자라난다. 우리가 흙에서 태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 그는 매우 많은 문화권에서 최초의 인간이 진흙이나 점토로 빚어졌다고 전해지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길이 있다.


우리가 땅에 만드는 트레일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흙과 생각의 혼합에서 탄생한다. 시간이 흐르면 발자국들이 많아지듯, 더 많은 생각이 쌓이고 새로운 의미의 충돌이 형성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트레일은 단순한 이동의 흔적을 뛰어넘는다. 사람과 장소와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 즉 트레일 위를 걷는 사람의 세계를 비록 부서지기 쉬울지언정 일관성 있는 전체와 이어주는 문화적 관통선으로 거듭난다. (280p)

 

로버트 무어가 5개월이라는 긴 시간, 애팔래치아 트레일 하이킹에 이어 대륙을 넘어 모로코까지 이어지는 길을 걷고 또 걸으면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는 길이 단순히 물리적인 트레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의 모든 길. 그 길은 물리적인 길임과 동시에 추상성을 제공한다.

 

추상적인 길. 다시 말해, 이 추상적인 길들은 우리의 행동을 안내함과 동시에 제한한다는 것이다. , 우리가 일련의 단계를 따라 원하는 목표를 향해 전진하도록 이끈다. 그는 만약 이런 길이 없다면 우리들은 각자 생존을 위해 허둥거리고, 똑같은 기본적인 실수를 되풀이하고, 똑같은 해결책을 다시 발명해내면서 인생의 험한 숲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중요한 철학을 깨달았다.

 

책의 서문, 로버트 무어가 장자의 말씀을 적어 놓은 까닭은 그가 걷고 또 걸은 길, 그가 꾹꾹 밟은 발자국 아래, 비로소 새로운 길이 생겨났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존재론적 길잡이다. 우리는 인생이 허용하는 길들 중에서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길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필요에 따라 고치고 개량한다. 여기서 기묘한 점은 우리가 길을 고치고 있을 때, 그 길 역시 우리를 고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4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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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음도 괜찮아질까요? - 나의 첫 번째 심리상담
강현식(누다심) 지음, 서늘한여름밤 그림 / 와이즈베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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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야 인식이 많이 변화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심리상담'을 받거나 '정신과 상담'을 받으면 개인의 병력에 기록이 남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심리 상담이 개인의 마음을 다독여주고 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리 상담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심리 상담을 받기 위해서는 어디를 찾아가야 하며, 비용은 어느 정도 수반되며, 전반적인 프로세스는 어떤 것인지 등, 아직도 우리에게 심리 상담은 미지의 영역이다. 


한 번쯤은 심리 상담을 받아 보고 싶지만, 두려움이 앞서는 사람들을 위해 심리 상담 가이드가 출간됐다. <제 마음도 괜찮아 질까요?>라는 제목의 책인데, 심리학 전문가 두 명이 마음을 모아 글과 그림으로 엮었다. 삽화를 그리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 전공을 한 지은이가 직접 삽화를 그렸다. 


책의 첫 부분, 심리 상담을 시작하는 방법에 대한 안내가 나온다. 저자는 '돈, 시간, 의지'만 있다면 심리 상담을 받을 준비가 된 것이라고 말한다. 심리상담은 보통 1회에 6~12만원 가량이며, 보통 10~20회를 받게 되지만 정해진 횟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문제의 성격에 따라 그리고 돈과 시간이 허락하는 정도에 따라 심리 상담의 횟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심리 상담의 비용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는데 1회에 6~12만원 사이라면 헬스장 PT 가격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니, 투자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심리 상담 시간은 보통 일주일에 1회, 한 시간 가량이다. 하지만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왕복 1시간일 경우) 하루에 3시간은 빼놓아야 하니 심리 상담을 받는 날에는 가급적 다른 스케줄을 잡지 않아야 한다. 


저자는 무엇보다 심리 상담을 위해서는 '개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개인의 의지를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것. 심리 상담을 받으려고 결심한 것은, 헬스장에 등록한 것과 마찬가지로 '시작' 단계라는 것이다. 즉, 꾸준한 상담을 통해 개선이 되는 문제이므로 의지를 갖고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헷갈려하는 사항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내린 부분이었다. 정신건강 분야에는 정신과 의사, 심리상담사, 정신건강 사회복지사, 음악&미술&놀이 치료사, 임상심리 전문가 등 다양한 전문가가 종사하고 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누구를 찾아가서 상담을 받아야 할지 종종 헷갈린다. 


저자는 일단 약물 처방은 정신과에서만 받을 수 있다고 알려 준다. 따라서 약물 치료가 필요한 경우 반드시 정신과에 가야 한다. 약물 치료의 경우 저렴한 비용으로 비교적 빠르게 증상을 조절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울증이나 환각, 망상, 수면 장애, 불안 증상 등이 나타났을 경우 정신과에 가서 약물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다만 심리상담을 기대하고 정신과에 간다면 기대와 달리 실망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위와 같은 도식에서 볼 수 있듯이 개인의 증상이나 상황에 따라 찾아가야 할 전문가가 조금씩 달라진다. 







"많은 분이 심리상담을 받으러 오면 말하지 않아도 상담자가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답을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마치 마법의 알약을 먹고 갑자기 인생이 변할 것을 기대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상담자는 내담자와 함께 팀을 이뤄 마음 여행을 떠나는 탐험가이지, 독심술가나 점쟁이가 아닙니다."(216p) 


저자는 심리 상담을 받을 때, 상담자를 믿고 그에게 숨기지 않고 최대한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심리상담에서 내담자가 솔직하게 드러내야 할 마음은 과거의 사건이나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감정뿐만이 아니라는 것도 덧붙인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담자에 대한 감정과 느낌이라는 것. 즉, 심리 상담에서 상담자와 내담자가 어떤 부정적인 이야기를 솔직하게 할 정도로 서로를 신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사람을 돕고 싶다'는 이유로 심리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공부를 마친 후에 심리학의 영역에서 각자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심리 상담에 대한 오해를 갖고 있으며 아직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워 <제 마음도 괜찮아 질까요?>를 집필했다. 심리 상담을 받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마음을 다친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저자들의 말처럼 심리 상담은 당신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해주는 예방 주사가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도, 괜찮아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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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수업 - 화를 안고 살아가는 당신에게
아룬 간디 지음, 이경식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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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분노했다. 돌이켜보니 이유는 단순했다. 한 주의 시작을 알리는 월요일부터 회식을 했고, 상사는 내게 술을 권했다. 나는 삼 년 넘게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그에게 말하고 있다. 상사의 레파토리는 항상 똑같다. '내가 대리일 때는 위에 구멍이 나도록 마셨어'라고 말하며 내게 '한 잔'을 권했다. 직장인의 90%가 화병에 걸렸다고 하니, 아마 그들은 이 남자와 같은 부류의 사람을 상사로 두고 있나 보다. 


분노의 이유는 저마다 다를 테지만,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분노의 감정을 느낀다. 장담컨대 직장인이라면 하루에 열 번은 족히 욱하는 마음이 들 것이다. 사실 '분노'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즐거움', '슬픔', '기쁨' 처럼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감정이다. 하지만 문제는 '분노'의 경우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부정적인 감정이나 다툼, 우울증 등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분노를 잘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분노수업>의 저자 아룬 간디는 우리가 아는 성자 '간디'의 다섯 번째 손자다. 그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면서 분노를 조절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분노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바꿔서 삶의 원동력으로 삶을 방법 또한 배웠다.


성인 군자가 아닌 이상 누구나 분노한다. 할아버지 간디에게서 분노를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자란 손자 아룬은 말한다. 분노는 나쁜 감정이 아니며, 분노를 통해 우리는 내적으로 더욱 성장해야 한다고. 


"'나는 네가 분노할 줄 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분노는 좋은 것이란다. 사실은 나도 늘 화가 나 있거든.' 하지만 나는 내가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화내시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요?' '그건 말이지, 내 안의 분노를 선한 목적에 사용하는 법을 배워서 알고 있거든. 사람에게 분노는 자동차에게 기름과 같은 것이란다. 사람은 분노를 연료로 삼아서 앞으로 나아가고 또 더 나은 인간이 되지. 그런데 만일 사람들에게 분노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어떤 일에 도전하고 싶은 의지도 생기지 않을 거야. 분노는 무엇이 정당하고 무엇이 정당하지 않은지 딱딱 선을 긋고 정의를 내리도록 우리의 등을 떠미는 연료란다.'" 


간디는 손자 아룬에게 모욕감, 증오, 우울, 무력감 등의 감정을 극복하는 방법과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는 지혜를 알려준다. 우리는 손자 아룬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간디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책에서는 손자와 할아버지의 대화를 통해 지혜롭게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 배울 수 있다. 


"할아버지의 눈에서 흘러나오던 부드러운 두 줄기의 빛은 진정한 사람과 호의 그리고 자신이 하던 모든 일에 쏟았던 긍정적인 정신이 반영된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자신의 비폭력 운동을 묘사할 때 쓴 '사티아그라하'라는 단어가 '영혼의 힘'으로 해석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기 바란다. 이렇게만 하면 누구든 자기가 하고자 하는 행동에 동반하는 긍정적이고 사랑으로 충만한 정신에서 실천적인 힘을 얻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하는 운동을 엄격한 공리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영국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입장을 바꾸도록 설득하려고 했지만, 이와 동시에 더 깊고 큰 이해심과 긍정적인 빛이 세상에 퍼지기를 원했다."


<분노수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인데, 손자 아룬이 할아버지가 말한 '영혼의 힘'에 대해서 설명하는 장면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영혼이 있고, 그 영혼에는 고유의 힘이 있다. 분노가 아닌 긍정적이고 사랑으로 충만한 정신을 갖는 다면, 영혼이 긍정적인 힘을 얻는다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간디였다면 테러에 어떻게 대응했을까?'라는 질문을 자주 한다. 할아버지는 탐욕보다는 연민을 바탕에 둔 외교정책을 촉구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할아버지는 미국이 전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맺고 있는 관계는 상호 존중과 이해 그리고 수용 속에 형성되어 있다고 설명했을 것이다. 9.11 사건 직후에는 미국인에게, 사람들로 하여금 미국인을 가장 파괴적인 방식으로 공격하도록 만들었던 증오와 갈등의 뿌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설파했을 것이다." 


아룬은 이 시대 우리가 직면한 과제, 예를 들면 테러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도 할아버지를 빗대어 자신의 논리를 정연하게 펼쳐낸다. 세상의 어느 한 곳에서 증오가 싹트고 있다면, 증오의 확산을 멈추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아룬의 할아버지인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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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 - 여덟 가지 테마로 읽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앙투안 콩파뇽 외 지음, 길혜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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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의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부에서 7부로 이루어진 방대한 분량의 현대문학 작품이다. 프루스트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도 꽤 어려운 일에 속한다. 독자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다. 4천 쪽에 달하는 대하소설을 선뜻 읽기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문장은 또 어떤가. 우아하지만 꽤 어려운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이라, 책장이 쉬이 넘어가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의 그의 문학을 회피하지만, 이렇게 포기하기엔 프루스트의 세계관과 철학이 너무 깊고 예술적이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싶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 독자들을 위해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이 발간됐다. 현재 프랑스에서 내로라하는 프루스트 전문가 여덟 명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양한 각도로 분석한다. 무엇보다 중간 중간 책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프루스트의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한다.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은 총 여덟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마다 소설의 기반을 이루는 테마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여덟 개의 테마는 '시간', '등장인물', '프루스트와 사교계', '사랑', '상상의 세계', '장소들'. '프루스트와 철학자들', '예술' 이다. 내가 이 여덟 개의 장 중에서 가장 눈 여겨 본 부분은 니콜라 그리말디가 집필한 제4장 '사랑'이다. 니콜라 그리말디는 철학자이자 파리 소르본 대학 명예교수로 이미 29여 건에 이르는 저서를 집필했다. 그는 프루스트의 상상력, 시간, 욕망의 개념에 관심을 가지며 <프루스트의 지옥, 질투에 관한 시론>, <프루스트, 사랑의 참상>도 저술했다. 프루스트 전문가로 알려진 그가 말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의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그럼에도 사랑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어휘적 관점에서 엄격하게 본다면, 사랑이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사랑만큼이나 절망에 대해서도 빈번하게 논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면 이 말은 곧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사랑은 상호간의 고문이다"라고 프루스트는 말했다. 그러니까 사랑이란 한 사람이 끊임없이 불러일으키는 감탄이라고 이해한다면 그만큼 우리는 그의 삶을 열광시키기 위해 우리의 삶까지 바치고 싶겠지만, 그런 예는 이 책에서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133p) 


"때로 욕망은 우리에게 인생의 모든 맛을 보고, 그 모든 색조를 느끼며, 가능한 것을 남김없이 파헤치기를 열망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프루스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전적으로 사랑에 의지해 완전히 다른 세계로 입문하여 더욱 강렬한 지각 방식으로 그곳을 탐색했다. 사랑은 그들에게 이러한 탐사의 기회였다."(141p) 


니콜라 그리말디는 프루스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랑'과 '욕망', '질투'와 '환상'에 대해서 말한다. 프루스트의 작품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지만, 그 사랑은 세 가지 환상의 결과임을 깨닫게 된다고 이야기 한다. 고통의 끝을 행복의 시작과 혼동하거나, 현실 속에서 한사람의 구체적인 현존 속에서 그 사람의 부재가 우리에게 상상케 하는 모든 것을 파악하기를 희망하거나, 우리가 상상력을 통해 현혹된 모든 것, 우리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만든 모든 것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그는 프루스트 또한 "한 사람에 대한 가장 독점적인 사랑은 항상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말했다고 밝히며, 모든 사랑의 시초에는 일종의 환상과 착각 또는 오인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마치 꿈처럼 말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책장을 선뜻 넘기기가 두려운 독자들에게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의 일독을 먼저 권하고 싶다. 방대한 분량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 있고,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프루스트의 문체 또한 먼저 살펴볼 수 있다. 여덟 명의 프루스트 전문가들이 각기 다른 주제에 대해서 프루스트를 분석하고 있는 것 또한 눈 여겨 볼 만 하다. <프루스트와 함께하는 여름>이 당신을 프루스트 곁으로 데려다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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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파이트 클럽 - 여성들의 오피스 서바이벌 매뉴얼
제시카 베넷 지음, 노지양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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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 6년차. 익숙해질 만도 한데 종종 부딪히게 되는 상황들 앞에서 무기력한 내 모습을 종종 발견한다. 이 모든 문제는 대부분 빌어먹을 상사로부터 오지만, 그 문제들 중에는 내가 '여성'이기에 겪게 되는 것도 있다. 다시 말해, 남성이 아닌 여성이기 때문에 부당하게 겪는 일들이라는 것. 난 페미니즘에 대해서 이렇다 할 주장을 할 수 있을 만큼 지식이 없는 상태인데, <페미니스트 파이트 클럽>은 여성들이 직장에서 겪을 수 있는 불편한 상황들을 '여성'의 관점에서 명쾌하게 풀어냈다. 물론 이 책을 읽음으로써 기존에 없었던 페미니즘이 마음에서 솟구칠리 없지만, 적어도 내가 여성이기에 당했던 상황들에 대해서, 앞으로 그런 일들이 다시 벌어졌을 때 대처하는 방법은 확실히 배울 수 있다. 


거두절미하고 이 책, 재미있다. 책의 저자 제시카 베넷은 젠더, 성차별,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주로 쓰는 인기있는 저널리스트라고 하는데, 왜 인기가 있는지 앞부분 몇 장만 읽어봐도 알 수 있을 정도. 이미 미국에서는 그녀의 책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그녀가 쓴 기사가 책으로 집필되고 드라마로까지 제작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직장 내에서 여성을 공격하는 남성들의 유형을 분류하면서 그들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회의 시간에 여성이 말을 하고 있을 때 꼭 끼어드는 남성을 '맨터럽터(Manterrupter)'라고 칭하며 그들을 대처하는 여성의 행동을 알려준다. 남성이 여성이 발언하는 도중 끼어들 때, 자신이 하던 말을 계속 이어서 하라는 것. 쉬운 것 같지만 막상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끊었을 때, 이야기를 다시 이어나가기는 충분한 내공 없이는 힘들다. "내가 말하고 있는데 끼어들면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라는 것이 작가의 조언. 또 사무실에서 함께 근무하는 동료 여성을 마치 비서처럼 여기며 행동하는 남자를 '비서취급남'이라고 칭하며 그들을 위해 '형편없는 바리스타'가 되라고 조언한다. 


"남자 직원이 커피를 가져다달라고 하면 그녀는 얼마든지 그렇게 하고 싶다고 예의 바르게 말한다. 단, 커피를 탈 수만 있다면 말이다. 커피 타는 법은 절대 배우지 말라고 했던 엄마 덕분에 그녀는 한 번도 그 일을 해본 적이 없다. 동화책 작가이자 작사가인 셸 실버스타인의 <접시를 닦지 않아도 되는 법>에 나오는 다음의 문구를 우리 모두의 팔에 새기는 것도 고려해보자. '접시를 닦아야 한다면 / 바닥에 떨어뜨려버려 / 그다음부터는 안 시킬 거야 / 접시 닦기는 이제 그만'" (58p) 







<페미니스트 파이트 클럽>은 재미있게 깔깔거리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데에는 일러스트도 한몫 한다. 작가가 누구나 쉽게, 그러니까 페미니즘에 대해 조금이라도 여성들이(남성들도!)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의도였다면, 작가는 꽤 성공한 셈이다. 즐겁게 책장은 넘어가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다. 특히 5장 '시끄럽고요, 돈이나 주세요'는 연봉 협상을 앞둔 직장인 여성이라면 반드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많은 여성들이 직장에서 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꺼려한다. 이유는 하나다. 속물처럼 느껴져서. 자신의 노동에 대해 정당한 가치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유독 돈 앞에서는 작아진다. 연봉 협상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유독 연봉 협상 앞에서 여성들이 작아진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거나 타협한다. 타협하는, 그러니까 마음을 접으면서 여자들이 하는 핑계는 대개 다음과 같다. '평생 이 회사에 있을 것도 아닌걸.', '지금은 때가 아니야', '난 협상에 약해',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 등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핑계로는 결코 연봉 협상에 성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저건 핑계일뿐 연봉 협상을 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은 거니까. 성공적인 협상을 위해서 제시카 베넷이 알려주는 방법은 꽤 상세하다. 첫 번째는 목록을 기록하는 것이다. 당신이 회사의 이익이나 이미지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구체적인 예시를 기록하고,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첨부한다. 두 번째는 동료 지원군을 찾는 것이다. 세 번째는 동종 업계의 연봉 수준을 파악하는 것인데, 적절한 기준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협상에서 성공한다고 한다. 네 번째는 연봉 인상을 요구하는 시기도 현명하게 정하라는 것이다. 상사 입장에서 이상적이라고 느껴질 상황은 어떤 것인지 시간을 갖고 고민하라는 것. 마지막은 구체적은 요구 사항을 정리하는 것이 성공적인 협상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이다. 협상에 들어가기 전에 연봉, 직책, 수당이나 혜택 등 '요구사항'을 구체적으로 마음에 새겨두어야 한다. 


"여자들은 보다 빨리 절충하고 타협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면 안 된다. 테이블 위에 놓인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지 말고 가끔은 한 번의 논의만으론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얼른 해치워버리고 싶은 그 마음은 나도 잘 알지만, 자기 앞에 놓인 단 한 가지 선택지를 받아들이는 것은 협상이라고 할 수 없다. 일단은 당신과의 협상 자리에 나온 모든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고 하루 정도 더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다음에 취할 전략을 세우자." (283p) 


우리는 직장에서 수많은 문제적 상황들과 만나게 된다. 나의 경우 대부분 무능한 상사(+진상짓을 일삼는 상사)로부터 비롯되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겪는 부당한 대우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여자라는 이유로 항상 웃어야 함을 강요받거나, 같은 능력을 가졌음에도 무시를 당하거나, 성희롱을 당하는 등의 부당함 말이다. 지금부터 당장 페미니스트가 되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당하고 있는 성차별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해 봐야 한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고민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첫걸음을 떼고자 하는 여성 직장인들에게<페미니스트 파이트 클럽>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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