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트레일스 - 길에서 찾은 생명, 문화, 역사, 과학의 기록
로버트 무어 지음, 전소영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 유난히 걷는 것을 싫어했다. 하굣길, 끝이 보이지 않게 길게 뻗은 길을 한 걸음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 머리를 써서 마을 버스를 탔지만, 마을버스가 나를 짐짝처럼 내려놓은 그 길부터는 온전히 내 힘으로 걸어야 했다. 지루하지 않으려 길 위에 놓여있는 돌멩이를 친구 삼았다. 돌멩이를 발로 차면서 집까지 왔다. 그래서 내 운동화의 앞 코는 항상 다른 아이들의 그것보다 많이 닳아 있었다.


걷는 게 좋아지고 늘 다니던 길을 돌아보게 된 건 성인이 된 이후다. 힘이 들 때마다 걸었다. 딱히 목적지는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더 많은 길을 걷게 됐다. <온 트레일스>의 서두, 장자(莊子)의 말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온 트레일스>에 담긴 내용을 함축적으로 나타낸 문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길은 그 위를 걸음으로써 만들어진다.


<온 트레일스>는 발간이 된 직후 언론과 독자들의 큰 주목을 받았다. 이런 플래쉬 세례를 받은 까닭은, 저자인 로버트 무어가 단순히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를 걸어서 모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걷고 또 걸으면서 길의 의미에 대해서 과학, 역사, 철학, 지리학 등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봤다. 젊은 청년의 치기 어린 도전으로 끝날 수 있었던 여행은 그의 통찰력이 더해져, 깊이 있는 '모험''기록'으로 다가왔다.


인간은 지구 최초의 개척자도, 가장 중요한 개척자도 아니다. 우리의 엉성한 흙길에 비하면 개미들의 길은 지극히 훌륭하다. 많은 포유류 종 역시 트레일 만들기에 놀라울 정도로 능숙하다.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동물들조차 지형을 통과해가는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알아내는 데 있어 전문가다. (에필로그 중)

<온 트레일스>에는 로버트 무어가 7년 간의 대장정을 통해 깨달은 길의 진정한 의미와 본질이 담겨 있다. 그는 무려 3200km를 걸으면서, 길 위에 만난 것들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가 만난 것들은 수억 년 전에 살아 숨 쉬었던(그러나 이제는 흔적만 남은) 생명체가 남긴 길부터, 곤충과 동물의 길, 그리고 21세기 고속도로까지 다양하다.


 



로버트 무어는 인간은 새로운 지형에 익숙해지면, 처음에는 자원을 찾고 경로를 익히고 표식을 남기는 등 다른 동물들과 같이 행동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땅은 인간에게 있어서 새로운 의미의 층을 갖게 된다. 단순히 '자원'으로서의 땅이 아니라 이야기, 정령, 성스러운 중심점, 조상들의 뼈를 간직한 곳이 되어가는 곳이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삶이 땅의 산물에 의존한다는 깊은 인식이 사람들 사이에 자라난다. 우리가 흙에서 태어나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 그는 매우 많은 문화권에서 최초의 인간이 진흙이나 점토로 빚어졌다고 전해지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길이 있다.


우리가 땅에 만드는 트레일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흙과 생각의 혼합에서 탄생한다. 시간이 흐르면 발자국들이 많아지듯, 더 많은 생각이 쌓이고 새로운 의미의 충돌이 형성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트레일은 단순한 이동의 흔적을 뛰어넘는다. 사람과 장소와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 즉 트레일 위를 걷는 사람의 세계를 비록 부서지기 쉬울지언정 일관성 있는 전체와 이어주는 문화적 관통선으로 거듭난다. (280p)

 

로버트 무어가 5개월이라는 긴 시간, 애팔래치아 트레일 하이킹에 이어 대륙을 넘어 모로코까지 이어지는 길을 걷고 또 걸으면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는 길이 단순히 물리적인 트레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의 모든 길. 그 길은 물리적인 길임과 동시에 추상성을 제공한다.

 

추상적인 길. 다시 말해, 이 추상적인 길들은 우리의 행동을 안내함과 동시에 제한한다는 것이다. , 우리가 일련의 단계를 따라 원하는 목표를 향해 전진하도록 이끈다. 그는 만약 이런 길이 없다면 우리들은 각자 생존을 위해 허둥거리고, 똑같은 기본적인 실수를 되풀이하고, 똑같은 해결책을 다시 발명해내면서 인생의 험한 숲 속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중요한 철학을 깨달았다.

 

책의 서문, 로버트 무어가 장자의 말씀을 적어 놓은 까닭은 그가 걷고 또 걸은 길, 그가 꾹꾹 밟은 발자국 아래, 비로소 새로운 길이 생겨났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존재론적 길잡이다. 우리는 인생이 허용하는 길들 중에서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그 길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필요에 따라 고치고 개량한다. 여기서 기묘한 점은 우리가 길을 고치고 있을 때, 그 길 역시 우리를 고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4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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