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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페스트 (초호화 스카이버 금장 에디션) - 1947년 오리지널 표지디자인 ㅣ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알베르 카뮈 지음, 변광배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도서관 새책 서가에서 책 표지 덕에 발견(!)했다. 갈색 장정에 금색 글씨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도서관 도서는 책 본체와 분리되는 겉장이 있을 경우 제거한 후 소장하기 때문에 표지에 한글이 전무한 경우 외서처럼 보인다. 양피 가죽에 금장의 작은 프랑스어로 제목을 새긴 책을 유심히 보니 카뮈의 페스트였다. 코로나 발발 후 관심이 높아져서 이런 고급 장정의 책이 나왔구나 싶었다. 그런데 아무도 빌려가지 않고 서가에 남아 있다니.
『시지프 신화』를 읽고 나서 카뮈를 더 읽어야할지 고민했다. '프랑스 작가' 콤플렉스 때문인지 이해력의 한계인지 또는 그 책이 유난히 어려웠던 건지 『시지프 신화』는 편두통을 유발했었다. 그러나 카뮈의 명성을 보건대 미처 깨닫지 못한 뭔가 있지 않을까 미심적은 마음도 있었다. 한 번 더 읽어보기로 했다. 한편으론 전염병의 시대의 필독서로 여겨지기도 했으니.
알제리 해변가의 프랑스 도청 소재지 오랑은 "평범하다는 게 첫인상인 도시"다. "일상을 벗어난" "사건이 일어날 만한 곳이 아"님에도 어느 날 그 일이 발생한다. 첫 조짐은 쥐였다. 곳곳에 죽은 쥐 시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서술자'라고 부르는 화자는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발생한 기간 동안의 연대기를 써내려간다. 『페스트』는 전염병의 연대기이자 도시 오랑의 사람들이 겪어낸 한 시기에 대한 기록이다.
병명이 밝혀지고 도시가 봉쇄된다. 사람들은 현실을 부정하다 받아들이고 전염병과 싸우고 굴복한다. 언제 어디서 감염될지 모를 불확실한 상황에서 병마와의 전쟁 최전선에서 싸우는 의사가 있고 종교에 기대는 사람, 탈출하려는 사람, 그 와중에 사익을 챙기는 사람 그리고 묵묵히 옳다고 여기는 삶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술자는 펜데믹의 한가운데를 뚫고 나아가는 인간 군상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의사 베르나르 리외는 초기에 페스트의 정체를 알아챈다. 20년전 파리에서 페스트가 창궐했음을 아는 그는 일의 경과를 어느 정도 예측했을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죽으리라는 걸, 도망치는 것이 더 나으리라는 걸 알았을텐데 미리 계획된대로 병약한 아내만을 요양원으로 보내고 자신은 도시에 남는다. 그리고 이길 수 없는 싸움임을 인정하면서도 굽히지 않고 환자에게 매달린다.
사실 의사 리외는 바로 좀 전에 동료 의사에게 직업 '몇몇 환자들이 도시 곳곳에서 난데없이 페스트로 죽었다'고 인정해 놓고도, 여전히 그 재앙이 현실로 와닿지 않았다. 다만 의사이기에 신체적 고통을 일반인보다 더 잘 상상해서 가늠할 수 있었다. 창밖으로 예전과 똑같이 보이는 도시를 보며, 의사는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살짝 가벼운 구역질이 일었다.
p.53
"아닐 겁니다. 파늘루 신부는 학자예요. 사람이 죽는 것을 많이 못 봤죠. 그래서 자꾸 '진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한지만 교구 내의 종부성사를 집전하고 임종하는 사람의 마자막 숨소리를 들어 온 신부라면, 아무리 촌마을 신부더라도 나처럼 생각할 겁니다. 고통의 장점을 증명하기 전에, 그 고통을 보살피겠죠."
p.160
"어쩌면 당신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게, 세계의 질서는 죽음에 의해 좌우되니까, 어쩌면 신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자기가 침묵하고 앉아 있는 하늘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자기를 믿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죽음과 싸우는 걸 더 좋아하지 않을까요?"
(…)
"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선생님의 승리는 늘 일시적일 뿐이죠. 영원하지 않고."
(…)
"네, 압니다. 그렇다고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할 순 없어요."
"물론 그렇죠. 다만, 이제는 페스트가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겠어요."
"네. 끝없는 패배죠."
p.163
카뮈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로 파악한 작가다. 적어도 『페스트』의 등장인물들을 볼 때는 그렇다. 한없이 고통을 연민하는 리외도 그러하고 그의 주변 인물들도 대부분 선하거나 선한 쪽으로 변화한다. 시청 서기 조제프 그랑은 세심한 정리 능력으로 의료 자원 봉사대를 지원한다. 방문자로 오랑에 머물고 있는 호인 장 타루 역시 특별한 이유없이 리외를 돕기를 자처한다. "마음의 평화를 찾는 일"만이 관심사라는 그는 쉴 새 없는 업무 끝에 감염되어 죽음을 맞는다. 연인을 파리에 두고 온 신문기자 레몽 랑베르는 탈출을 모색하던 중 마음을 바꿔 자원봉사에 투신한다. 감염자 수용소에서 아들을 잃은 예심판사 오통도 마찬가지다. 이타심이 이들을 움직이게 한 것은 아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거대한 의도는 없었다. 잃은 아들을 덜 생각하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즉 자신이 먼저였다. 자신을 명확히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참된 선함이 가능한 일일까.
이 세계에 존재하는 악은 항상 무지에서 생긴다. 아무리 의도가 선했어도 무지하면 악의만큼이나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대체로 사람은 악하다기보다는 선한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해와 몰이해가 미덕과 악덕을 가르는 것이다.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착각하며 자신에게 살해할 권리까지 인정하는 무지다. 살인자의 영혼은 이처럼 맹목적이다. 극도로 명민한 통찰력이 없이는 참된 선의도 진짜 사랑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p.167
그렇다. 만약 인간이 영웅적인 사람을 본보기와 귀감으로 삼는 것을 좋아하는 게 사실이라면,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영웅'이 반드시 한 명 필요하다면, 서술자는 독자들에게 가진 거라곤 약간의 선한 마음과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운 이상뿐인 이 보잘것없고 존재감 없는 영웅을 추천하겠다. 그럼으로써 진리에는 그 본연의 마땅한 의미가, '2+2'에는 '4'라는 답이, 그리고 영웅주의에는 차선의 지위, 즉 행복이라는 고귀한 욕망보다 '절대로 앞서지 않고 그 바로 뒤'라는 부차적 자리가 딱 주어진다. 또한 이 연대기에도 '좋은 기분으로 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두드러지게 불쾌해한다거나 저속한 흥행물처럼 과잉된 감정 없이 하는 진술이라는 특징이 부여된다.
p.175
이야기를 마치면서 타루는 한쪽 다리를 흔들어서 발로 가볍게 테라스를 두드리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의사는 몸을 약간 일으켜 마음의 평화에 도달하기 위해 가야 할 길을 찾은 것 같냐고 물었다.
"네, 그 길은 공감입니다."
p.320
하지만 많이 야윈 오통 씨가 힘없는 손을 들어 올리더니 신중하게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의사는 그에게서 뭔가가 결정적으로 변했다고 느꼈다.
(…)
"그런 게 아닙니다. 수용소로 다시 돌아가려고요."
(…)
"그러면 바쁠 테니까요. 좀 어리석은 말로 들리겠지만, 그러면 아들과 헤어졌다는 느낌이 덜해질 것 같아요."
p.326
예외적인 인물도 있다. 그랑의 이웃 코타르는 자살을 기도하는 등 내내 불안한 모습을 보이다가 도시가 봉쇄되고 나서 평안을 찾는다. 그를 암시하는 말들은 마치 『이방인』의 뫼르소가 살아서 오랑에 등장한 듯 하다.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갇힌 상황을 이용해 사리사욕에 몰두하던 코타르는 페스트가 잠잠해지고 도시의 문이 열린 자 스스로 파멸하고 만다. 욕심을 채우면 행복해지리라 믿었을테지만 마음은 손쓸수 없게 피폐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랑은 여주인의 담배 가게에서도 이상한 장면을 목격했다.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여주인이 알제에서 떠들썩했던 최근의 어떤 체포 건에 대해 말했다. 해변에서 아랍인을 살해한 어느 젊은 직장인의 이야기였다.
p.74
리외는 도시의 고통을 끝까지 직면했다. "직접 겪지 않는 고통은 진정으로 공유할 수 없"기 때문에 고난을 자처했다. 어쩌면 길어진 재앙의 기간이 그를 견딜 수 있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재앙 한 가운데 놓인 사람들에겐 그것이 "한없는 제자리걸음"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 세계의 끝에서부터 수천 킬로미터를 가로질러서 서툴게나마 연대감을 전하려고 애쓰는 생면부지의 우정 어린 음성들이 들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은 직접 겪지 않는 고통은 진정으로 공유할 수 없다는 끔찍한 무력감도 생생하게 밀려왔다.(…) 웅변이 고조될수록 그랑과 이 웅변가 사이의 도저히 건널 수 없는 본질적인 간격만 도드라졌다. (…) '아니. 함께 사랑하거나 함께 죽거나 둘 중 한 가지 방법뿐인데, 당신들은 너무 멀리 있어.'
p.176
사실 재앙만큼 볼거리 없이 밋밋한 것도 없다. 너무 오래 끌기 때문에 큰 불행도 단조롭게 만들어 버린다. 페스트라는 끔찍한 재앙을 겪은 사람들에게, 이날들은 화려하고 잔인하며 거대한 화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여정 위에 놓인 모든 것을 뭉개 버리는 한없는 제자리걸음으로 기억되었다.
p.227
카뮈는 재앙을 통해 "인간에게 경멸해야 할 것보다 칭찬해야 할 것이 더 많"음을 배웠다고 썼다. 소설 『페스트』 속의 한 해동안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2년째 겪고 있는 상황의 재현이었다. 수많은 생명이 사라지고 봉쇄에 가까운 생활이 계속되고 있다. 믿을 수 없는 것에 의지해야 하고 근거가 불확실한 예측 외엔 희망을 걸만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시절의 끝에 카뮈와 같은 배움을 얻길 바란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리외와 같은 누군가가 남긴 담담한 증언을 읽을 수 있길 또한 바란다.
침묵하지 않고 페스트에 스러진 사람들을 위해 증언을 하기로,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의 기억을 남기기로 말이다. 재앙의 한복판에서 배운 것,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 칭찬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것만큼은 말하기 위해서였다.
p.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