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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사소한 것들의 자리 - 그곳에 살아 있는 감각과 기억에 대하여
아키코 부시 지음, 박지영 옮김 / 멜라이트 / 2026년 5월
평점 :

우리 집 거실의 큰 창이 남향이라 햇빛이 정말 잘 들어왔고, 그 앞에는 이케아 포엥 의자가 놓여 있었다. 독서를 위한 공간이었기에 그 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가만히 시간을 보내곤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의자에 앉아 있던 시간이 가장 마음 편했던 시간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의자는 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지만 어느 순간 내 방 한구석으로 밀려났고, 결국 버려졌다. 물건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고여 있던 빛과 감각은 이상하게도 아직 남아 있다.
이 책은 그런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거창한 사건보다 집 안의 사물과 장소에 스며든 작고 사적인 감각에 주목한다. 할아버지의 의자, 아들이 만든 책상, 오래된 창문에 남은 스티커처럼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한 시절을 붙잡고 있는 표지가 된다. 우리는 물건을 그저 쓰고 버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떤 물건은 우리가 지나온 시간과 감정을 조용히 품고 있다.
뭔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꼭 선명한 장면을 떠올리는 일만이 아니다. 어느 계절의 빛, 오래 앉아 있던 의자의 감촉, 특정한 공간에서 느꼈던 공기처럼 말로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도 기억으로 남는다. 이 책은 바로 그런 희미하고 사소한 감각들을 천천히 들여다본다. 그래서 읽다 보면 내가 잊고 지냈던 물건과 장소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버려진 의자, 오래된 책상, 한때 자주 앉던 창가처럼 사라졌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은 것들 말이다.
얇고 작은 이 책은 조용하지만 쉽게 흘려보내기 어려운 여운으로 가득하다. 사물은 낡고 장소는 바뀌며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나지만, 어떤 감각은 오래 남는다. 저자는 우리가 무심히 지나친 사물들 안에도 삶의 조각들이 깃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기억이란 거창한 사건보다, 한때 나를 편안하게 해주었던 자리와 그곳에 머물던 시간 속에 더 오래 남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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