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남자의 일생을 따라가는 『레슨』은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광대한 역사의 흐름을 담고 있다. 전쟁, 냉전, 테러, 그리고 팬데믹이라는 역사 속에서 한 개인의 인생은 작은 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작은 점 안에는 무수한 개인의 역사와 시간이 담겨 있다. 허구와 현실이 뒤섞인 작가의 자전적 소설은 한 남자의 인생을 촘촘하게 그려낸다. 

육중한 뚜껑처럼 과거의 죽음을 슬그머니 덮었다. 우리는 삶에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잊는다. 그러니 일기를 써야 한다. 이제부터 일기를 쓰자. 과거는 빈칸으로 남고, 현재는, 이 감촉과 향기, 이 순간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곧 소멸할 것이다.

P. 458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롤런드 베인스로, 영국군 장교인 아버지를 따라 리비아에서 살다가 11살에 영국 기숙학교로 혼자 보내진다. 그곳에서 피아노 교사인 미리엄 코넬을 만나게 되고 그녀와의 만남은 소년의 인생을 통째로 흔들어 버린다. 


롤런드는 '미리엄이 자신을 이해해 주는 유일한 존재'라 믿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을 빙자한 성적 학대였을 뿐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관계는 사랑과 폭력, 선택과 학대 사이에서 모호하게 이어진다. 이 관계는 롤런드의 인생 전체를 비틀어 놓은 최초의 '레슨'이다. 


어른이 된 롤런드는 아내 알리사로 인해 또 한 번 삶이 흔들리게 된다. 그녀는 글을 쓰기 위해 남편과 어린아이를 두고 떠난다. 롤런드는 그녀를 원망하면서도 끝내 놓지 못하고 사랑과 상처 사이에서 인생을 뒤흔든 두 번째 '레슨'을 마주한다.


거듭되는 실패 속에 조금씩 늙어가는 롤런드의 삶은 시종일관 답답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인생에 조금 더 능동적으로 대처했으면 한다는 안타까움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롤런드의 삶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건 그가 아버지로서 살아가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롤런드의 인생에는 극적인 결말도 화려한 성취도 없다. 끝까지 버티며 하루하루 살아낸 한 인간의 궤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실패와 후회로 가득할지라도 그만의 선택과 책임, 그리고 사랑이 있다. 이처럼 인생의 의미는 버티며 살아낸 날들에 더 가까이 있다. 

사랑이 과거로 사라질 때 모두가 잊어버리는 본질이 있었다. 함께했던 순간, 시간, 나날 속에서 느끼고 맛보았던 것. 당연시되었던 모든 것이 버려지고, 그것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덮이고, 그후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불완전한 기억에 의해 다시 덮이기 전의 그 모든 것. 천국이든 지옥이든, 많은 기억이 남진 않는다. 오래전에 끝난 연애와 결혼은 과거에서 온 엽서와도 같다.

P. 650 

인생의 무게는 화려한 순간이 아니라 잊혀진 시간들 속에 있다. 『레슨』은 그 시간들이 모여 한 인간을 만들어가는 역사를 잔잔하게 보여주는 소설이다.

#도서제공 #도서리뷰 #서평 #레슨 #이언매큐언 #문학동네 #해외문학 #소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