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 페이지의 벽돌책을 읽기 위해선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수많은 추천사에서 훌륭한 소설이라는 극찬이 이어지는 이 소설은 작가 스스로도 사악한 책이라 말할 정도로 엄청난 분량과 고래에 대한 지식을 담고 있다.
특히 「모비 딕」의 첫 문장, "Call me Ishmael."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첫 문장으로 꼽힐 만큼 유명한 데, 이 문장을 어떻게 번역하느냐 또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소설의 화자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단순한 문장이 어떻게 표현될지 궁금했다. 번역가의 혼이 담겼다는 말처럼 예상치 못한 표현은 이 책에 대한 두려움을 희석시켰으며 기꺼이 거대한 고래와의 싸움을 보고 말겠다는 의지를 심어주었다.
사실 이 책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포경선 피쿼드 호의 선장 에이해브가 과거 흰 향유고래 모비 딕에게 한쪽 다리를 잃고 난 후 모비 딕에 대한 원한과 복수심으로 추적에 나선다는 이야기이다. 이 과정을 초보 선원 이슈메일이 전지적 시점에서 서술하는 것이 모비 딕의 큰 줄거리이다.
고래로 비유되는 자연과 인간의 투쟁이 어떻게 광대한 분량에서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했는데, 정작 고래와의 싸움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의 대부분은 고래 백과사전이라 할 만큼 고래잡이, 고래학, 작살 등을 서술하고 있다.
큰 줄거리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고래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담겨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정보가 소설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가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비극적인 서사시의 정점을 향해가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작가의 집념과 정성에 감탄이 이어진다.
결국 피쿼드 호는 바다 한가운데서 벌어진 모비 딕과의 대결에서 처참히 무너지고 파선된다. 이때 에이해브 선장을 포함하여 이슈메일을 제외한 모든 선원이 사망하게 된다. 소설에서는 인간과 자연, 개인적 복수심에 사로잡힌 인간과 목표 지향적인 인간의 극명한 대립각을 보여준다. 특히 에이해브 선장과 1등 항해사 스타벅의 대립을 통해 리더십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모비 딕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감내해야 할 문제를 상징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시련에 부딪힐 때가 있다. 그때마다 피하고 주저앉는다면 인생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비록 시련에 상처 입고 아파할지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원망과 분노에 사로잡힌 에이해브 선장의 삶이 바다에 침몰한 결말은 삶을 대하는 자세를 생각해 본다.
처음 「모비 딕」을 마주했을 때 가졌던 두려움은 소설을 읽고 정보를 찾아보면서 흥미를 갖게 만들었다. 오늘날 미국 최고 걸작으로 꼽혔던 소설이 출간 당시에는 독자들의 외면받았다는 점, 그리고 대중적인 커피 체인점의 이름이 이 소설의 등장인물에서 비롯된다는 점 등은 소설의 유명세만큼이나 흥미로운 사실이다.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지나간 시련은 앞으로 닥쳐올 시련을 대비할 소중한 경험이 된다. 언젠가 거대한 고래와 맞닥뜨리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리석은 에이해브 선장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완독이라는 첫 번째 목표를 이뤘으니 의미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읽겠다는 두 번째 목표를 세우려 한다. 삶의 비극을 헤쳐나가는 지혜를 다시 한번 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