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8번 버스의 기적
프레야 샘슨 지음, 윤선미 옮김 / 모모 / 2023년 7월
평점 :
런던의 88번 버스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한 남자의 기막힌 사연이 있다. 이별의 아픔을 안고 런던에 온 '리비'는 88번 버스에서 '프랭크'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그의 첫사랑 찾아주기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60년 전 첫눈에 반한 붉은 머리의 여성을 찾으려는 여정에 프랭크의 요양 보호사 딜런이 함께하면서 이들의 인생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과연 두 사람은 그녀를 찾을 수 있을까.
책 표지부터 따뜻한 이야기일 거란 분위기를 예상할 수 있는 데 예상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읽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모습과 사랑스러운 캐릭터, 유쾌하게 전개되는 이야기까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소설이다. 푹푹 찌는 날씨에 특별히 좋을 일도 없는 지금의 내가 딱 원하는 행복한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어서 단숨에 읽었다. 신나면서도 마음 한편이 간질간질하고 감동적이면서도 신파적이지 않은 기적 같은 이야기가 참 좋았다.
미대에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기대에 원치 않은 의대에 입학하면서 꿈을 포기했던 리비는 프러포즈를 기대했던 8년 사귄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았고 집도 직장도 잃은 채 언니 집에 잠시 머물게 된다. 현실에 저항하지 못하는 리비의 상황부터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그녀의 모습에서 평범한 청춘들의 현실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리비의 첫사랑 찾기 프로젝트가 꼭 성공하길 기대했다. 그 일을 계기로 리비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길 기대하게 되었다.
여기에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이 있다. 프랭크의 요양 보호사인 딜런은 60년 전의 추억이기에 첫사랑이 런던에 살고 있다는 확신부터 할 수 없는 상황인지라 첫사랑을 찾지 못했을 때 프랭크가 받을 충격에 걱정하며 리비의 계획에 반대했다. 자유분방해 보이는 딜런과 계획형 인간 리비는 그렇게 티격태격하면서 조금씩 서로에게 스며들게 된다. 하지만 프랭크의 병세는 점점 더 나빠지고 첫사랑을 찾는 일에도 진척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리비는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이 더 좋았던 건 마냥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족 간의 다툼, 연인 간의 오해, 임신과 결혼 등 우리가 현실에서 겪을 수 있는 상황들이 적절하게 등장한다. 이들은 서로 실망하고 다투고 상처받지만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기꺼이 도움을 건넨다. 이런 감동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던가. 강력 범죄 뉴스가 끊이지 않고 대형 참사에도 서로 나 몰라라 하는 현실에서 이 책을 만나 잠시나마 세상의 따뜻함과 진정한 우정을 떠올릴 수 있었다. 88번 버스의 기적이 오래도록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p. 458-459
프랭크가 손을 뻗어 리비의 손을 놓칠세라 꼭 잡았다.
"이렇게 다시 보게 돼서 얼마나 좋은지, 말로 다 할 수가 없네요."
프랭크의 떨리는 손을 리비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주름이 모자이크처럼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리비도 프랭크의 손을 꼭 잡았다.
"저도 다시 만나게 돼서 너무 좋은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