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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사
예브게니 보돌라스킨 지음, 승주연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3월
평점 :
독특한 형식의 러시아 소설이다.
한 세기를 뛰어넘는 이야기가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어느 날 병원에서 눈을 뜬 '플라토노프'는 자신의 이름도 직업도 기억하지 못했다.
주치의 '가이거'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되었을 뿐 왜 병원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가이거는 그에게 스스로 기억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하며 매일 일기를 쓰라고 권한다.
소설의 1부에서는 플라토노프의 일기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2부에서는 플라토노프, 가이거, 그리고 플라토노프가 사랑했던 여인의 손녀인 '나스챠'가
쓴 일기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플라토노프는 떠오르는 기억을 하나씩 적으며 자신이 1900년에서 1999년으로
한 세기를 건너뛰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려 100년의 시간 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기 위해 기억을 쓰며 사적 역사를 기록해 나간다.
플라토노프가 잃어버린 시간은 러시아의 격동과 혁명의 시기였다.
러시아 제국의 붕괴와 스탈린 정권을 아우르는 빅 히스토리와
비행사를 꿈꿨지만 끔찍한 강제 수용소를 경험해야 했던 한 개인의 스몰 히스토리가 교차하면서
인간은 사건의 일부가 되고 개인의 삶은 역사의 한 조각을 이루며
이러한 조각이 모여 빅 히스토리로 기록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플라토노프의 기억 속에서 떠오른 누군가의 죽음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
즉 두 역사를 독립적인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 관계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또한 각자의 시선에서 플라토노프와 그를 둘러싼 상황을 그려낸 점도 흥미로웠다.
독일인 특유의 이성적 사고방식을 지닌 가이거가 그의 환자에게 보이는 특별한 애정이
인간적으로 다가왔고 100년 전 사랑했던 여인의 손녀는 낯선 세계에 떨어진 그에게
포근한 안식처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줄 것만 같았다.
역사는 반복된다. 커다란 틀 속에서 개인의 삶은 한없이 작아 보인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이끌어가려는 의지는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100년을 뛰어넘은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삶을 마주하는 태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