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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ㅣ 소설, 향
김이설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0월
평점 :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가족이란 무엇인지 이 울타리가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현실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의 화자인 '나'는 오래된 목련빌라에서 부모님, 여동생 그리고 어린 조카 둘과 살고 있다.
시를 쓰고 싶은 '나'는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대신 모든 집안일을
맡아 하게 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어느새 이런 삶에 익숙해졌다.
그녀가 자처한 삶이기에 그 누구도 탓할 순 없지만 무기력해 보이는 그녀의 삶에
화가 났다. 읽는 내내 속에서는 천불이 났다. 욕이 쉴 새 없이 새어 나왔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
버릴 수도 버려질 수도 없는 이들의 관계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나'가 원하는 건 시를 쓰는 거였다. 시집과 필사 노트, 종이와 연필 한 자루.
온전히 나로 있을 수 있는 시간마저도 단 한 줄의 시도 쓸 수가 없었다.
어린 두 조카를 키우고 세 끼를 차리고 치우고 제철에 나는 마늘과 고추를 다듬고 청소가 끝나면
빨래를 하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집안일에 고된 하루가 어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다.
그녀의 삶을 따라가며 '나'에게 그만 모든 짐을 던져버리고 밖으로 나가라는 말을 수없이 외쳤다.
이제 그만 당신의 인생을 살라고. 사랑을 찾아 시를 찾아 떠나라고.
결코 빛이 보일 것 같지 않은 '나'에게 뜻밖의 계기가 생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상실의 순간은 지독한 현실을 탈출할 수 있는 자극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녀가 자아를 찾아 떠나는 순간 내 안에 있던 분노가 사라졌다.
그녀와 내 삶은 다른 듯 비슷했다. 나는 맡아서 키워야 하는 조카도 없고
나름의 만족할만한 경제활동도 하고 있다. 집안일을 도맡아 하지도 않고 하고 싶은 일은 하고
갖고 싶은 것은 가지면서 살아가고 있다.
다만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스스로를 가둔 점은 닮았다 말할 수 있겠다.
어쩌면 나는 그녀에게서 내 모습을 찾은 걸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그녀를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
기대어 쉴 수 있는 그와 오래도록 행복한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의 시가 세상에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p. 108-109
나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때려치워도 나갈 곳이 없었다. 어떻게든 돈을 벌고 있는 동생이 부러웠다. 벌이가 있으니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엄마와 아버지가 부러웠다. 부러울수록 스스로가 추레해졌다. 부럽다는 감정조차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나는 내 감정을 자꾸 외면했다.
p. 171
필사 노트는 계속 늘어났다. 혼자 지내게 되었다고 곧바로 시가 써질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 있는 동안 온전히 나에게 몰입할 수 있었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밤새 언어에 대해서, 시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이런 생활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으므로 하루하루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시집을 읽거나, 몽상을 하거나, 끊임없이 단어를 열거하거나, 심지어 잠을 자는 것마저도 최선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