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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ㅣ 문지 스펙트럼
사무엘 베케트 지음, 전승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5월
평점 :
새롭게 리뉴얼된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인 첫사랑을 선택한 건 작가의 이름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선택은 잘못되었다. 얇고 작은 크기에 짧은 단편이 실려있지만, 상당히 어렵다.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읽어야 했고, 한 문장에 쉼표도 많고 물음표도 많이 쓰여있다.
이해하는데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마지막 문장까지 다 읽었을 때
스스로가 이 책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점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뚜렷한 사건도 없고 내가 흔히 알던 소설 형식도 아니며 문장도 매끄럽지 못하다.
작가는 기존의 익숙한 소설 쓰기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인 창작물을 보여준다.
그로 인해 나는 스스로의 무지함을 깨닫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고
첫사랑이란 몰랑몰랑한 단어가 두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 파괴의 소설을 읽으며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던 기존 소설에서 벗어나 글자 하나, 문장 부호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름의 해석으로 이해하려 애썼다.
이 난해하고 어려운 그의 글을 끝까지 읽은 것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말하고 싶다.
사랑이 당신들을 망친다는 것,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무슨 사랑을 말하는 걸까? 열정적인 사랑?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육감적인 사랑하면 열정적인 사랑이지. 안 그래? 아니면 내가 다른 종류의 사랑과 혼동하고 있나? 사랑에는 정말 여러 종류가 있잖아, 그치? 상대적으로 아주 아름다운 사랑들도 있고 말이야, 안 그래? 예컨대 플라토닉 러브, 이게 방금 생각난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이다.
새벽이 어슴푸레 밝아왔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되도록 빨리 밝은 곳으로 가려고, 어림잡아 해 뜨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나는 바다의 수평선이나, 사막의 지평선을 원했어야 했다. 내가 밖에 있을 때면, 아침에는, 태양을 맞이하러 가고, 저녁에는, 내가 밖에 있을 때면, 태양을 따라, 망자들의 집에까지 간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부지불식간에, 아무리 어설프고 허망하게 존재했더라도,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끼는 일은, 옛날 같았으면 나를 감동시키는 선물이었다. 누구나 미개한 존재로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자신이 제정신인지 가끔씩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말조차도 당신을 저버리면, 그때는 말 다 한 거지. 그 순간은 아마도 연결관들의 연결이 끊기는 순간일 거다, 당신도 알지, 연결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