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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실로의 여행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우리가 수많은 일들을 겪고 그것을 기억의 창고에 저장한다. 그러나 우리의 창고는 그 모든 것들을 저장할 만큼의 능력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억들 가운데 일부를 상실이라는 이름으로 버린다. 그 때 버려지는 것들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가한 언어적이거나 신체적인 폭력과 같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서의 기억들을 버린다. 그러나 이 때 상실된 기억들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창고, 즉 기억 상실의 창고에 저장된다. 그리고 남은 삶 가운데에서 예기치 못한 자극들로 상실의 창고 문이 열리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쏟아지게 된다.
미스터 블랭크는 기억상실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은폐시켰으며, 은폐된 곳은 현재 그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비유된다. 출구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자신의 기억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을 의미하며, 끊임없이 외적 자극을 받지 않으면 기억조차 하지않으려고 스스로를 상실의 늪에 몰아넣게 되는 것이다. 가끔 그 죄의식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예를 들어 창문을 열어 보려고 노력한다든가 출구나 옷장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는가 하지만, 모든 노력을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용서에도 불구하고 결코 자신 스스로 느끼게 되는 죄의식은 벗어날 수 없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오스터는 [기록실로의 여행]을 통해, 그간 자신이 발표했던 수많은 소설들의 주인공들을 나열함으로써 창작을 통해 세상에 가해자가 되어 버린 자신의 존재를 찾으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존재를 찾기 위한 그의 노력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가 아니라 그 작품을 읽고 있을 독자들의 몫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난 오스터의 상실된 존재의식을 내 기억 상실의 창고로부터, 혹은 그의 기억 상실의 창고로부터 찾아낼 수 있을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오히려 더 깊은 심연으로 추락하며 방황하는 오스터의 존재를, 그리고 내 존재를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