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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 - 개정판
셔윈 B. 뉴랜드 지음, 명희진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문득문득 죽음을 생각한다. 내가 맞은 첫 죽음은 이렇다. 12살의 한 소녀가 아버지의 고통스런 소리를 듣고 있었다. 소녀의 아버지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소녀를 마지막으로 불렀고, 아무 영문도 모른채 소녀는 수업중에 달려와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소녀는 아버지가 지르는 소리를 많이 아프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그것이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죽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입을 벌리고 두눈을 부릅뜬 채 더 이상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눈을 옆에 앉아 계시던 동네 아저씨가 감겨 주었다. 동네 아저씨는 아버지의 삼베옷을 지붕에 올려 놓았다. 이틀 뒤 꽃상여가 마을 공터에 놓였다. 예뻤다. 다들 아버지가 죽었다고 울었다. 그러나 소녀는 죽는 것이 정확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오월이었다. 소녀는 앵두나무에 올라가 아직 설 익은 앵두를 따며 웃었다. 상여가 마을을 떠나갔다. 상여는 정말 예뻤다. 계집은 묘자리에 올 것이 못 된다며 동네 아저씨는 소녀를 집으로 돌려 보냈다. 집에 돌아온 소녀는 평소 보다 훨씬 좋은 음식을 보며, 오늘이 무슨 잔칫날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 후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는 홀애비 자식이라면 수군 거렸고, “쟈가 애비없는 자식인가 보네”라고 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기다려도 멀리 갔는지 오지 않았다.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볼 수 없는 시간이 길어지자 아버지와 함께 했던 행복한 추억들만 머릿속에 둥둥 떠 다녔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소녀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밤이면 장독대에 몰래 앉아서 울고는 했다. 꼭, 있는 힘을 다해 죽음까지 달려 갈테니, 아버지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이것이 내가 겪은 첫 번째 죽음이다.
누구든 태어나자 마자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저자인 셔윈 B. 눌랜드는 직업이 의사이니 수많은 죽음과 함께 했을 것이다. 죽음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그 중 심장질환에 의한 죽음, 알츠하이머에 의한 죽음, 살인에 의한 죽음, 사고나 자살에 의한 죽음, 에이즈에 의한 죽음, 그리고 암에 의한 죽음에 대해 이 책에 실려있다. 또한 이 책은 하나하나의 죽음에 이르렀을 때 환자의 상황과 심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대로 알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사실대로 알아야 환자든 가족이든 서로 소중한 시간을 끝까지 의미있고 쓸쓸하지 않게 보낼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가 말하는 의사들에 대해 적어본다. “환자에게서 나머지 생을 훔쳐가는 범인들을 일제히 소탕하기 위해, 심장박동이 남아 있을 때 그들은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시곗바늘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 헤맨다.”(106쪽)
“치매 환자들은 대부분 주변의 물건을 잘 집어던지거나 사람을 때린다......”(151쪽) “가족이 겪는 고통과 슬픔도, 스위치가 나간 자신의 정신 상태도 느낄 수 없었다.”(154쪽)라는 부분을 읽을 때는 놀라지 말고 환자를 보는 눈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를 아니 자기 자신 조차도 망각하게 되는 치매는 슬프다.
로마의 대 웅변가 세네카의 말이 인상 깊어 아래에 옮겨 적었다.
“건강을, 내 최상의 모습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나는 결코 노령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노령이 내 정신을 흔들어 혼돈시키고, 육체를 조금씩 갉아먹어 ‘살아 있음’이 아닌 ‘호흡’만을 남겨놓게 된다면, 나는 휘청거리고 부패한 껍데기로부터 미련없이 떠날 생각이다.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라면, 또 내 영혼을 절름발이로 만들지 않는 질병이라면 그것으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되더라도 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내 몸을 스스로 해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 희망도 없이 고통만 겪어야 한다면 나는 스스로 떠날 생각이다. 그것은 고통 자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더럽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226쪽~227쪽)
대부분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을 방관이라도 하듯 우리는 지켜 보아야 한다. 사실 지켜보는 사람이건 병든 사람이건 모두 죽음에 대한 폭군 앞에서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그러므로 표현하자면 어떤 죽어가는 사람에게 우리는 비극적인 연극을 지켜보는 관객이다. 하지만 결코 톨스토이의 작품[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그려지는 그런 마지막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지는 말아야겠다. 356쪽에 나오는 이반 일리치의 철저한 고독이 어떤 것인지 “사람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가”를 읽어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