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 / 김종삼 

 

바닷가에 매어 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 속에서 얻어지는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는 실존적 질문을 평이한 어조로 형상화한 시이다. 삶의 고난을 이야기하면서도 희망의 미래를 잃지 않고 고통의 과거를 수용하어 그것을 다시 고난 극복의 동력으로 삼는 자세가 인상적이다. 

어부: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 존재를 의미. 

바다: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공간. 

고깃배:인간의 생존방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령(死靈) / 김수영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도 저 돌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 

자유와 정의가 활자(책)로만 존재하는 부도덕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반성을 촉구하는 시이다. 즉, 현실의 부도덕성을 누구보다 깊이 통찰하면서도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비판과 저항의 정신이 표출되기를 희망하는 심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하급반 교과서 / 김명수 

 

아이들이 큰 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읽기여 

우리 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 

우리 사회의 획일성과 전체주의적 성격을 풍자하고 있다. 부정한 규범과 권위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문화 속성을 형상화하여 민주와 다양성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악을 비판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비와 광장 / 김규동 

 

현기증 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잊어버리고 

피 묻은 육체의 파편들을 굽어본다. 

 

기계처럼 작열한 심장을 축일 

한 모금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을 차단하는 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뿐이었기에 

 

전공의 해안에서처럼 과묵한 묘지 사이사이 

숨가쁜 Z기의 백선과 이동하는 계절 속 

불길처럼 일어나는 인광의 조수에 밀려 

이제 흰나비는 말없이 이지러진 날개를 파닥거린다. 

 

하얀 미래의 어느 지점에 

아름다운 영토는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푸르른 활주로의 어느 지표에 

화려한 희망은 피고 있는 것일까. 

 

신도 기적도 이미 

승천하여 버린 지 오랜 유역 

그 어느 마지막 종점을 향하여 흰나비는 

또 한 번 스스로의 신화와 더불어 대결하여 본다. 

 

========== 

6.25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전쟁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드러낸다. 

시적 화자는 전쟁의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며 평화의 회복을 바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생(生)의 감각 / 김광섭 

 

여명의 종이 울린다. 

새벽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졌다. 

깨진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른빛은 장마에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서 황야에 가싿.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섰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의 감각을 흔들어 주었다. 

 

---------- 

 

작가가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일주일만에 깨어나 내적 생명의 체험을 노래한 시이다.  

절망, 고통으로 이어진 참담한 투병 생활 끝에 새롭게 피어난 생의 감각과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시어 '채송화'는 생명 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