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령(死靈) / 김수영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도 저 돌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纖細)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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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정의가 활자(책)로만 존재하는 부도덕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반성을 촉구하는 시이다. 즉, 현실의 부도덕성을 누구보다 깊이 통찰하면서도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비판과 저항의 정신이 표출되기를 희망하는 심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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