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新婦) / 서정주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안자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 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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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신라 정신'과 불교에 대한 관심을 거쳐 한국의 토속적 정신 세계에 몰입한 시키에 창작한 시이다. 일부종사의 매운 절개를 신화적 세계관으로 그려 낸 짧은 이야기 형식을 지닌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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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自然) / 박재삼 

 

뉘라 알리, 

어느 가지에서는 연신 피고 

어느 가지에서는 또한 지고들 하는 

움직일 줄 아는 내 마음 꽃나무는 

내 얼굴에 가지 벋은 채 

참말로 참말로 

바람 때문에 

햇살 때문에 

못 이겨 그냥 그 

웃어진다 울어진다 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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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여인의 전형인 춘양을 화자로 설정하여,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사랑을 피었다 지는 꽃나무에 빗대어 표현한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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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목(果木) / 박성룡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뿌리는 박질 붉은 황토에 

가지는 한낱 비바람들 속에 뻗어 출렁거렸으나 

 

모든 것이 멸렬하는 가을을 가려 그는 홀로 

황홀한 빛깔과 무게의 은총을 지니게 되는 

 

과목에 과물들이 무르익어 있는 사태처럼 

나를 경악케 하는 것은 없다. 

 

- 흔히 시를 읽고 저무는 한 해, 그 가을에도 

나는 이 과목의 기적 앞에서 시력을 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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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무르익어 있는 과일 나무의 과일을 보면서 정신적 의미를 이끌어 낸 시. 자연의 섭리에서 느끼는 경이로움 앞에서 화자는 그것을 '사태'라 하고, 또 이를 두고 '경악'하며 삶의 의욕을 회복하고 있다. 투박하면서도 생경한 시어들은 주제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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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靑山道) / 박두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 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 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호낮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 서서 눈물 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티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와 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넘어 뻐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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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과 비리가 가득한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면서, 맑고 깨끗한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나타낸 시이다. 의인화된 제재인 청산과 그것을 둘러싼 자연물을 묘사함으로써, 화자가 기다리는 '볼이 고운 사람'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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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언어 / 문덕수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에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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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의 심리 상태에서 연상 작용에 의해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결합하여 내면 세계를 그리려는 초현실주의적 수법을 사용했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시에서도 '언어'는 무의미한 사물을 의미 있게 하는 명명 수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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