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갯길 / 김종길

시골 옛집 앞을 지나
뒷산 등성이를

오늘은 상여(喪輿)로 넘으시는 아버지.

낯익은 고갯길엔
마른풀 희게 우거졌고

이른 봄 찬 날씨에
허허로운 솔바람 소리.

―아버지,
생전(生前)에 이 고갯길을 몇 번이나
숨차시게, 숨차시게 넘으셨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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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별곡(華山別曲) / 변계량 

  

  제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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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 떼 / 나희덕 

羊이 큰 것을 美라 하지만
저는 새가 너무나 많은 것을 슬픔이라 부르겠습니다

철원 들판을 건너는 기러기 떼는
끝도 없이 밀려오는 잔물결 같고
그 물결 거슬러 떠나는 나룻배들 같습니다
바위 끝에 하염없이 앉아 있으면
삐걱삐걱, 낡은 노를 젓는 날갯소리 들립니다
어찌 들어 보면 퍼걱퍼걱, 무언가
헛것을 퍼내는 삽질 소리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퍼내도
내 몸속의 찬 강물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흘려보내도 흘려보내도 다시 밀려오는
저 아스라한 새들은
작은 밥상에 놓인 너무 많은 젓가락들 같고
삐걱삐걱 노 젓는 날갯소리는
한 접시 위에서 젓가락들이 맞부비는 소리 같습니다
그 서러운 젓가락들이
한쪽 모서리가 부서진 밥상을 끌고
오늘 저녁 어느 하늘을 지나고 있는지

새가 너무 많은 것을 슬픔이라 부르고 나니
새들이 자꾸 날아와 저문 하늘을 가득 채워 버렸습니다
이제 노 젓는 소리 들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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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 정호승 

길을 가다가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누가 낮달을 초승달로 던져 놓았다
길을 가다가 다시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쑥떡이 든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홀로 기차를 타시는 어머니가 보였다
다시 길을 떠났다가 돌아와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평화 시장의 흐린 형광등 불빛 아래
미싱을 돌리다 말고
물끄러미 네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너를 만나러 우물에 뛰어들었다
어머니가 보따리를 풀어
쑥떡 몇 개를 건네주셨다
너는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미싱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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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원(八院)-서행 시초(西行時抄) 3 / 백석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妙香山行)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 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 리 묘향산 백오십 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主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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