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오십촉의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여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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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화자는 좁은 방의 흰 바람벽(자기 내면의 스크린이라고 할 수 있음)을 쳐다보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떠올려 보고 있다. 어렵게 살아가는 늙은 어머니와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삶이 힘들지라도 좌절하기보다는, 가장 귀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하늘이 낸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삶을 수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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