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21세기의 한국소설이다. <고래>를 읽어 본 사람 중에 많은 이들이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장진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천명관이 소설을 쓰지 않길 바라고 있다고 했다. 그만큼 <고래>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이(!) 우리는 6년 만에 천명관의 차기작을 보게 되었다. 이미 가슴에 커다란 실망감을 품은 채.(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세희 작가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쓰고 절필한 것처럼, 기형도 작가가 <입 속의 검은 잎>을 펴내고 아깝게 타계한 것처럼, 천재를 떠올리는 우리의 이미지란 그런 것을 기대하게도 하니까) 

처음 50페이지를 읽을 땐 아쉬웠고, 중간의 200여 페이지를 읽을 땐 피식거렸으며, 마지막 100페이지를 읽을 땐 찡하게 저렸다. 아쉬웠던 것은 엄청난 스케일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 여기의 현실을 얘기하기 때문이었고, 피식거린 것은 특유의 신랄한 유머가 곳곳에 숨어 있다 스프링을 단 것처럼 때때로 튀어나왔기 때문이었고, 찡했던 것은(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것일 텐데) 천명관 작가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감동의 코드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춘희의 바다에서 고래가 물을 뿜듯이)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천명관 작가는 이제 전업으로 소설을 쓸 계획이라고 한다. '작가의 말'까지 읽고 나면 그런 그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고래>의 어이없을 정도로 커다랗게 축조된 세계와 <고령화 가족>의 애잔하고 뭉클한 것이 만나는 지점, 그 곳에서 생겨날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독자는 행복하고 애가 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딸에게 보내는 편지
마야 안젤루 지음, 이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이라면 무조건 존중해주고, 작가라면 무조건 박수쳐주는 나 같은 사람도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책의 종류가,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류의 교조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글이다. 그런 말은 지당도사들이 하는 말이다. 지당한 말씀이라는 거다. 누가 그걸 몰라서 안 하나. 

하지만 책을 통해서 배움을 얻고자 하는 갈망은 아주 오래되고, 아주 절실한 것이다. 나는 그런 배움을 직접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작가의 문장에서 배운다. 문장이 겸손한 것이 좋다. 자기 자랑을 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반드시 정답이라고 생각지 아니하고, 오히려 글을 쓰면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사람에게서 나는 배운다. 신영복 선생이 그러하고, 김훈 선생이 그러하다. 

마야 안젤루는 (적어도 미국에서는)대단한 사람이다. 그냥 대단한 것이 아니라 오바마 대통령이 존경하고, 오프라 윈프리가 멘토로 삼는 할머니다. 그런데 자기가 대단하다는 것을 한 번도 얘기하지 않는다. (혹시 독자가 다 알고 있을거란 생각일 수도 있지만)그녀가 얘기하는 것들은 자신의 성공담이 아니다. 그녀가 얘기하는 것은 자신의 실패담이고, 한 인간으로서 느꼈던 삶의 굴곡이다. 장황한 서문에서 나는 이 책을 싫어하게 될 거라 예감했지만, 글을 읽을 수록 이 겸손한 사람의 얘기가 깊은 지혜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현자가 있었다. 현자는 대개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지식이 보급될 수 없는 시대에는 경험이 곧 지식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나이가 많은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지혜의 증거가 바로 여기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요일 오전이었는데, 문득 헌책방엘 가고 싶어졌다.  

생전 헌책방이라곤 가본 적도 없건만, 어째서인지 헌책방이라는 그 작고 허름한 이미지가 구름처럼 뭉게뭉게 퍼지더니, 작은 골목과, 팬을 갈지 않아 덜덜거리는 회전식 3단 선풍기와, 금테 안경을 쓴 사장님과, 그나마 먼지가 앉지 않아 구입을 고려하게 되는 덜 오래된 책들과, 그 덜 오래된 책의 받침으로 사용되는 아주 오래된 책들과, 시큼텁텁한 지하의 책곰팡내와, 출입문 입구에서 마시는 자판기 커피 같은 것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면서 내 머릿속의 공간들을 가득 메워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어느 평범한 날 헌책방을 찾아간 것과, 그곳에서 다행히 '덜 오래된 책'으로 남아주었던 한 권의 <상실의 시대>와 10여 년 만에 다시 조우하게 된 건, 어쩌면 운명적이라고 불러도 되는 그런 멋진 일이 아닐까. 

사실 <상실의 시대>는 그리 운명적이지도, 꺼내어 놓고 자주 읽어보지도 않는 책이다. 읽은 지 10여 년이나 지나서 줄거리나 주인공이 기억도 나지 않는다. 무턱대고 아무 장이나 열어 읽어본 들 모든 것이 생소할 뿐이다. 낯익은 부분도, 깊은 감동을 주는 부분도 찾을 수 없다. 가끔 누군가가 인용해 놓은 '봄날의 아기곰처럼 네가 좋아' 같은 구절을 볼 때면, 그게 그 책에서 봤던 건가,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낯설기만 하다. 

그럼에도 이 책이 운명적으로 느껴지는 건, 이를테면 사춘기와도 비슷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무언가 지독한 성장통을 겪고 난 후, 문득 그 이전의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처럼 아련해진다. 뭐랄까, 나와, 세상 사이에 큰 간격이 있고, 내가 그것을 못견뎌할 때마다 체념과 유머를 섞어서 가르치는 불량한 과외선생 같다고나 할까.  

우리가 하루키로부터 받은 것은 어쩌면 그의 포즈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세상을 대하는 어른의 방식이라고, 어릴 때의 나는 믿고 싶었었나 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썩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지만, 도리가 없는 것보다야 그런 쿨함과 함께 성장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가끔 책장을 훑어보다 <상실의 시대>를 만나면, 어른의 세계로 가기 위해 내가 받아들인 것이 고요하고 낡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만 같아, 훌쩍 커버린 내가 민망해지곤 한다. 그럴 때는 그 옛날의 순정한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득 세상이 낯설게 느껴질 때면, 이 소설이 생각나곤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야기보다, 문장이 너무 아름다운 보기 드문 소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