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향기
송기원 지음 / 창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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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빠른 변화가 무섭다는 말이 이제는 응당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도 진부한 표현이 되었다. 전쟁, 산업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붕괴, 과학으로서의 세계 인식, 가상 현실... 그리고 현재 50대 이상의 사람들은 그 급속한 변화를 고스란히 겪었으며, 또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은 변화의 중심에서 최후이자 또한 최초다. 바꾸어말하면 그들은 개인화되지 못한 사회의 피해자들이라는 것.

그런 그들을 개인화시켜놓은 소설을 읽었다. 바로 이 책 '사람의 향기'.

유목에 가까운 삶을 견디며-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 여기에 우리 민족 특유의 '한'의 정서가 내재되어 있다- 도대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어찌하지 못하고 부유하던 사람들, 일가로 구성되어 있지만 가족사 안에서도 철저하게 개인이었던 그들. 송기원은 그들의 삶을 수채물감으로 채색했다. 너무나 투명해 고통과 쾌락이 여과없이 투영되는 한 폭의 그림처럼.

소설은 연작이다. 지면에 연재했거나 따로 써 놓은 단편들을 한 데 모아서 묶은 셈. 각 편은 화자인 '나'를 통해 서술되어지는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제목이 붙어 있다. '폰개 성', '물총새 성관이', '정애 이야기' 하는 식. 그리고 각 주인공들의 개인사적 이야기들이 사회사 안에 집어넣어진 플롯으로 구성되어졌다. '오만과 편견'이나 '안나 까레리나'를 떠올리면 정확할 듯. 그러나 이 소설이 가지는 장점은 그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먼저 서술자인 '나'가 등장해 사회사가 아닌 개인적인 정황에 주인공들의 초점을 맞춘다는 것. 이것은 보다 연대의식이 강한 우리나라의 특질을 잘 보여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두 번째로는-이것이 중요하다!- 그 개별적 주인공들이 하나의 공통된 연대감을 형성한다는 것.

"자, 아무 말 말고 작은어머님을 만나세.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 살아 계신 피붙이로는 자네에게 유일한 어른인 셈이네." -폰개 성

"오매, 용반떡이 말을 다 하네. 시상에, 자석이 왔다고, 시방까장 닫았던 입이 열려뿐구만잉. 이녁 배를 앓음시롱 낳은 자석은 아니라제만 그래도 자석은 자석인 모냥이네."

"오냐, 떼레쥑에라. 나가 이녁 손에 죽으먼 죽었제, 한나밖에 없는 내 새끼를 근본도 모르는 장갓 쌍것으로 맨들 수는 없어야." -주인공 '나'의 어머니

"근디 말다, 나가 여그 온 그러께부터 해마둥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 때먼, 누군 중 몰르제만, 가게문 앞에다가 새벡같이 조구랑 서대랑 육괴기를 살모시 나놓고 간단 말다아." - 끝순이 누님

부분을 인용해서 내용 전달은 힘들지만, 내포작가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이 발화에 드러나 있다. 그렇다. 그것은 '핏줄'이다. 한 명 한 명의 개별적인 이야기가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야 비로서 아우라로 형성되는 것을 느끼며, 연작소설이 가져야 하는 미덕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절규하듯 주장하는 그 '핏줄'의 한국적 계승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성찰이라도 하고 있는가를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현재'를 개선해야 하는 문학적 과업을 지닌 것이 작가의 제 1 덕목이라고 한다면 이 책 '사람의 향기'는 그것에 아주 충실하다. 또한 지금까지 아무도 이러한 소설을 써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이 책에 기꺼이 별 다섯 개를 주겠다. 사회가 급속하게 도시화, 산업화로 이행되면서 우리가 간과해 마지 않았던 바로 그 것. 한국적인 것을 유지하고 지켜나가려고 하는 50대 이상, 아니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핏줄'에 대한 한국적인 연대의식을 우리는 찾아볼 수 없다. 이번 설 연휴에도 나 역시 고향 집에 내려가는 것이 마냥 귀찮기만 했다. 그리고 올라오는 길에 이 책을 정독했다. 읽으면서 콧등이 시렸다. 대가리가 커버린 자식에게 미처 내색하진 않았지만,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가족이 같이 내려가서 맞는 설이 얼마나 큰 연례행사인가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바쁘지도 않으면서 바쁜 척 서울로 올라와버린 나의 차가운 등허리를 애타게 보았을 부모님의 눈동자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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