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산문집
이문재 지음, 강운구 사진 / 호미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눌하지도 않고, 방만하지도 않고, 예리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고... 여하튼 어떤 특장에서든 조금은 멀리 떨어져 있는 그의 '...않는' 그의 스타일은 '발효의 시간'을 거쳐, 누구에게 읽혀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완성된 형태로 세상에 나왔다. 25년 동안 자신의 문학과 그것을 아우르는 그 세계를 일관되게 지켜온 그 가슴에서 자라서일까. 긴 세월동안 묵혀두었던 그의 첫 번째 산문집에서는 아주 오래전에 맡아본 것 같은, 그래서 더 희어멀게진 밥 짓는 향기 같은 것이 곰슬거리며 피어올랐다.

 "몸 없는 마음의 질주가 연애다. 몸 없는 마음은 몸이 없어서 오직 상대방의 몸에 집중한다. 상대방의 몸을 광적으로 겨냥할 때, 상대방은 마음 없는 몸이다. (......) 연애와 사랑을 혼동하는 것은 100미터 달리기와 마라톤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강폭이 넓어질수록 유속이 느려지는 섬진강 하류에서 나는 그대에게 뒤늦게 사랑을 말하려 한다. 이십여 년 전, 나의 그 무모한 돌진, 그 무지막지한 에너지의 폭발을 감당해 준 그대에게 나는 이제 사랑을 말하려 한다. 헌신과 희생이 아닌 사랑 말이다. K, 길 위에서 먹은 밥이 그대로 힘이 되고 있다. 섬진강 제방 길이 그대로 내 몸 속으로 들어온다. 나는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니다. 나는, 내 몸은 오늘, 오늘이다(p124)" 이 책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도 나오고,

"녹차 마시기에는 기다림이 있다. 물이 끓는 동안 기다려야 하고, 또 물이 식기를 기다려야 한다. 다관에 물을 넣고 차가 우러나는 동안 또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기다리는 동안 마음은 고요해진다. 향이 그윽하고 맛이 깊은 녹차를 마시는 것은 몸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다. (......) 차와 다기는 수단이나 매개일 뿐이다. (......) 걷기가 그런 것처럼, 휴대 전화 전원을 꺼 넣는 것이 그런 것처럼, 녹차 마시기는 자발적 망명이다.(p280)" 이렇게 생태적인 시선도 나오며,

"원고료 대신 유기농 쌀을 받아들고, 아직도 도시적 삶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십대 중반의 나를 돌아본다. 내 시가 저 쌀 한 줌만큼의 효용이 있을 것인가. 내 시 쓰기는 농약과 비료를 치지 않는 저 농부의 지극한 정성을 흉내라도 내고 있는 것일까. 내 시업은 '하농'이었다. 풀이나 겨우 키우는 하급 농업이었다. 저 온전한 쌀로 지은 밥을 한 그릇 지어 먹으면 시가 한 줄 나올지도 모를텐데, 나는 부끄러워,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p214)" 25년 동안 둥글게 굴린 죽비로 정수리를 얻어맞는 것 같은 이런 구절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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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도 2007-02-25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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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1 2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04 0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