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다. 그 외로움의 끝에 또다른 외로움을 만났다. 그리고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영화를 두 번 봤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 강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다시 본 것은 아니지만, 두 번째 느낌은 사뭇 달랐다.
처음은 혼자 봤고, 두 번째는 누군가와 함께 보았지. 함께 봤지만 나도 사무치게 외로웠다. 오스칼처럼 이엘리처럼..

 영화 속 이엘리는 약하고 외로운 오스칼의 유일한 친구이면서 오스칼이 욕망하는 강인한 자아다. 동전의 양면 이론처럼 괴롭힘을 당하는 나약한 오스칼의 내면에는 엄청난 폭력성이 잠재되어 있다. 오스칼은 어딘지 모르게 강인함이 느껴지는 이엘리에게 그런 자신의 욕구를 투사하며 점점 가까워진다. 즉, 이엘리는 오스칼의 외로움을 채워주면서 오스칼의 억눌린 욕망을 투영하는 또다른 자아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엘리가 뱀파이어라는 느낌보다는 연약한 소녀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뱀파이어라는 것만 제외하면 그녀의 행색이나 생활은 보호받지 못하고 방치된 소녀에 가깝다. 그녀의 집, 그녀의 옷차림, 참을 수 없는 굶주림은 기초생활수급자의 모습과 겹쳐지게 한다. 외롭고 추워 보였다.

처음 봤을 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엘리를 돌봐주던 남자의 죽음이었다. 남자는 어린 뱀파이어인 이엘리를 대신해 피를 구해준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이엘리가 직접 살인을 저지른 후 시체를 수습하는 것도 그의 일이다. 하지만 너무나 어설프다. 그리고 그 역시 외로워보였다. 내가 주목한 것은 그와 이엘리의 관계였다. 그가 피를 구해오지 못하자 이엘리는 그에게 화를 낸다. 아버지 나이 뻘로 보이지만 그 둘의 관계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라고 하기엔 미심쩍다. 화를 내는 이엘리를 대하는 남자의 눈빛은 아버지로서 보내는 안쓰러움이나 안타까움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사랑이 식어버린 연인에게 용서를 구하는 애절한 눈빛이었다. 그가 뱉은 말은 "미안하구나."였지만 그건 번역일 뿐 아마 실제 의미는 달랐으리라.

이엘리를 보호하기 위해 연쇄살인범으로 붙잡히면서 얼굴에 염산을 끼얹은 그는 끝까지 이엘리를 위해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내어 준다. 이엘리가 그의 병실 창문을 두드릴 때 그는 창문을 열고 목을 내민다. 마지막 그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엘리의 텅 빈 눈빛. 그는 그렇게 될 것은 알고 있었을까. 그는 마지막까지 행복했을까.   

혼자 된 이엘리에게 유일한 친구이자 연인은 오스칼이다. 그녀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알고 다소 혼란스럽긴 했지만 그는 곧 이엘리에게 돌아온다. 그녀에게도 그에게도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존재가 그들 뿐이라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으니까. 외로움과 절실함은 서로 통한다. 오스칼을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가하는 처참한 복수 역시 실제 이엘리의 행위일 수도 있고, 오스칼의 억눌린 폭력성이 폭발한 것일 수도 있다. 환상일 수도 있고 실제일 수도 있다. 누가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둘이 간절히 원하던 것을 현실로 만든 첫 번째 단계라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오스칼은 기차를 타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큰 트렁크를 긁어 모스 부호를 보낸다. 그리고 트렁크 안에서 그에 화답하는 모스 부호가 돌아온다. 그들이 벽을 두고 신호를 보냈던 것처럼..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마지막 오스칼의 미소가 너무나 슬프게 느껴졌다. 잊혀지지 않았던 남자의 죽음이 오스칼과 겹쳐 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남자 역시 오스칼처럼 외롭고 움추린 아이였겠지. 짧은 장면이었지만 그가 레스토랑에서 말을 거는 이웃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것은 이엘리를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감춘 것일 수도 있지만 이미 익숙해진 외로움과 단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엘리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애초부터 사람들이 모이는 레스토랑 따위는 오지 않았을테니.

나에겐 이엘리 뿐이고, 이엘리에겐 나뿐이라는 오스칼의 현재의 행복은 계속될까. 오스칼의 존재가 이엘리의 생존을 유지시키는 수단이 되고, 그도 늙은 남자처럼 어설퍼지면 그 때도 이엘리는 그를 처음처럼 사랑할까. 그래서일까. 나는 그 소년의 긴 여행이 슬픔의 서막인 듯 해서 안타까웠다.

하지만 두 번째 봤을 때는 '죽은 남자도, 오스칼도 행복하겠구나'라고 인정했다. 그들이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나의 관점일 뿐이었다. 어쩌면 늙은 남자 역시 마지막을 생각해 두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엘리에게 기꺼이 그를 주었다. 오스칼 역시 기꺼이 그를 이엘리에게 줄 것이다. 이엘리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녀 역시 그녀를 포기한 순간이 있었으니까. 오스칼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사탕을 먹는다던가, 초대 받지 않고 오스칼의 집에 들어와 온 몸에서 피를 쏟는 것은 연인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는 사람의 모습과 같다.

그래, 그들은 행복할 것이다. 철저하게 고립되고 타인에게서는 배제되겠지만 그들 안에서는 행복할 것이다. 다만 변화를 인정하면 된다.

모든 것은 변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다만 오스칼과 늙은 남자가 믿은 건 그의 외로움을 채워주는 이엘리라는 존재 자체의 불변성과 영원성일 뿐이다. 관계의 불변성과 영원성을 믿은 건 아니다. 어쩌면 그래서 그들은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날 아이러니하게도 두 번째 렛미인을 본 그와 나의 관계도 정리가 되었다. 오스칼과 이엘리가 설렘 가득한 시작을 할 때 나는 그와의 불분명한 관계의 매듭을 지었다. 이엘리가 오스칼이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 대한 진정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의 진정성을 느낄 수 없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관계가 변하듯 마음도 변한다. 하지만 변하는 마음을 떠나서 과연 그에게 진정성이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여전히 마음을 무겁게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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