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 쇤부르크 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지음, 김인순 옮김 / 필로소픽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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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 2013년 7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가난의 시대'를 의연하고 우아하게 사는 법




<폰 쇤부르크 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지음|김인순 옮김필로소픽 펴냄2013년)



강준만 교수는 갑을관계의 역사가 조선 시대 관존민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고찰하며, 그 역사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슬로건으로 대변된다고 말했다. ‘을’은 군림하는 ‘갑’의 비위를 맞추며 호시탐탐 ‘갑’의 자리를 탐하나, 현실은 녹록치 않다. ‘갑’은 신자유주의의 동력을 돋구며 더욱 야멸찬 승자독식사회를 굳건히 한다. “88만원 세대”라는 조어는 현대를 사는 젊은이들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고 있으며, IMF 이후 중장년들은 언제 물러날지 모를 직장을 조바심 내며 사수해야 할 운명에 처했다. 그런데,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이라니, ‘우아하게 가난을 과시하면서 쿨하게 부자들을 경멸하는 법’이라는 저자의 도발은 자못 불온하고도 생뚱맞다.      

 

쇤부르크는 독일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의 언론인이다. 몰락한 귀족의 후예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부유한 친척의 집에서 가난한 식객으로 지내면서 부끄러운 가난과 뻔뻔한 부의 세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처세의 이치를 익혔다. 이 책은, 언론인으로 일하던 저자가 경제 불황이 휘몰아친 2002년 구조조정으로 실직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의연하게 대처한다. ‘국민의 5분의 4에게 복지를 약속하는’ 나라에서 주는 적지 않은 실업보험금을 받았지만, 그것마저 중도에 포기하고 기꺼이 가난의 숙명을 받아들인다. 무엇보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풍요의 시대는 완전히 지나갔다. 하지만 그 현실을 받아들이되 근거 없는 신화는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가난이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끊임없이 ‘누구나 할 수 있다!’라고 주입시킨 자본주의 신화는 근거 없는 것이다. 출세 의지는 좌절당하고,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며, 패자의 수는 점점 늘어나는 시대를 산다. 무엇보다 가난을 자본주의의 비극적 종말을 예견하는 역사적 차원의 대세로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저자는 자신이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돈 없이도 풍족하게 살 수 있는 법,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방법을 설득력 있게 제안한다. 무엇보다 진짜 가난은 마음의 문제다. 하여 “너희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듯 소유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인용하며, “내가 가진 것을 토대로 부유하게 느끼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 때문에 항상 가난하게 느끼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덧붙인다. 이 책은 현대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바탕으로, 집, 외식, 문화생활, 건강과 몸매 관리, 자동차, 여행, 매스미디어, 자녀 교육 등 실질적인 삶의 다양한 영역에 걸쳐 구체적으로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비결을 소개한다. 저자의 의연함은 돌온한 센스로 발휘되며, 인간 심리 깊은 곳의 두려움과 위선을 파헤친다. 무엇보다 저자의 위트는 발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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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세탁소 - 정미경 소설집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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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7월호에 기고한 서평입니다. 



위태롭다, 그런데 그것이 희망이란다


삶은 위태롭다. 의연하고 돌올했던 명분들과 날선 마음의 결기가 이리 쉽게 무너질지 몰랐다. 몸살을 앓았다. 몸살이란 영혼의 슬픔을 감당하는 육신의 고뇌가 아닐까, 생각했다. 나의 민낯은 대체로 초라하고, 가슴은 대체로 서럽다. 저마다의 울음을 간직한 책(혹은 외면한 채) 살아가다 어느 순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직면하고 나서야, 추락을 경험하고 나서야, 격동에 처하고 나서야 자신의 비루함을 받아들인다. 

정미경의 네 번째 소설집 <프랑스식 세탁소>에 실린 일곱 편의 작품들, 일곱 명의 주인공들은 어떤 사연에 휘말리며 겹겹이 싸두었던 자신의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하나같이 아프고 어둡고 쓸쓸하고 막막하고도 불안하다”(작가의 말, 280쪽). 진실이 위험한 건, 곧 탄로날 위선의 운명 때문이다.

<프랑스식 세탁소>(정미경 지음│창비 펴냄│2013년 5월)

첫 번째 단편 <남쪽 절>의 주인공 ‘김’은 출판사 대표다. 직원이라곤 아내 ‘은애’뿐이다. 만들고 싶은 책만 만들고 싶어서 독립했지만,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기 위해 만들고 싶지 않은 책도 만들어야 한다. ‘은애’는 그가 만들고 싶은 책만 만들었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김’은 그런 ‘은애’를 타박한다.

철없긴. 책임을 진다는 게 무언지, 너는 몰라. 하긴, 그 철없음을 사랑했다만.(<프랑스식 세탁소>, 26쪽)

그 소신은 사실 ‘김’의 것이었지만, 그것은 이제 철없는 한때의 결기로 치부된다. 삶에 대한 책임감은 자못 결연하다. 현실적인 헤아림은, 한때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것들을 조롱한다.
  ‘김’은 베스트셀러 작가를 붙잡기 위해 바둥댄다. 대필작가의 양심선언으로 추락을 경험했던 '작가'는, ‘김’의 출판사를 저울질하며 재기를 탐한다. ‘김’은 용산 남일당을 거쳐 전쟁박물관 옆 23층 빌딩 라운지에서 '작가'와 만난다. 23층에서 내려다 본 화염에 휩싸인 재개발 풍경은 "벙어리들이 저희끼리 수화로 떠드는 것을 볼 때의 고요한 소란과 닮았다". 한밤 중 ‘김’은 ‘은애’에게 그 현장의 철거민을 미친놈들이라 불렀고, ‘은애’는 그들이 “왜 미쳐서 자신을 부숴버리는지 헤아려줄 순 없냐”고 자조하듯 묻는다.
  소설은 서사의 큰 흐름 속에 작은 에피소드를 배치시키며, 아득한 현실과 지극한 현실을 저울질한다. 아득한 현실은 소신대로 살 수 없는 ‘김’과 ‘은애’의 비루한 현실이며,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투쟁하다 죽어간 철거민들의 현실일 것이다. 지극한 현실은 그 비루함에 목매는 처연한 현실이며, 철거민을 ‘미친놈들’로 부르는 무도한 일상일 것이다. 위태롭게 질주하던 ‘김’은 사무실 옆 미술관에서 완고한 어둠을 경험한다. 처음엔 섬뜩한 불안이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완고한 어둠이 흔들릴 즈음, 그는 아득한 그 무언가를 조우한다. 그리고 ‘조금만 더, 여기 머물고 싶다’고 읊조린다.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마지막 단편 <프랑스식 세탁소>는 열망의 추락을 매혹적으로 그려낸다. 이 소설은 복지재단 이사장인 ‘나’와 사보에서 우연히 접한 소설 요리사 ‘르와조’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망할 것 같았던 재단은 젊은 이사장의 열정적이고 탁월한 사업 수완 덕에 되살아난다. 갈등하던 조직은 안정적으로 운영된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가증스런 속물에 가까웠다. 행정실장의 불륜을 덮어주며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던 그는 행정실장의 여자였던 ‘미란’과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재단 비리 의혹에 감사를 받자 그는 ‘미란’을 철저히 무시하고 그녀의 희생을 강요한다. 무력한 ‘미란’은 결국 자살하지만, 그의 위선은 별다른 요동 없이 건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그도 ‘르와조’의 비극을 읽으며 차츰 균열되기 시작한다. 요리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으로 살았으나, 그 자부심이 훼손당하자 ‘르와조’는 끝내 죽음을 선택했다. ‘르와조’의 죽음 앞에 돌연 그의 수치심이 시작된다. 숨겨져 있던 삶의 속내가 홀연히 탄로날 때, 그토록 견고했던 위선은 급격히 허물어진다.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지음│이현주 옮김│한국기독교연구소 펴냄│2007년 2월)

정미경의 소설을 읽으며, 문득 유대인 랍비로서 온 인류를 사랑했던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이 고찰한 ‘인간의 정황’이 생각났다. 헤셸에 의하면, 성경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봄’(vision)이며, ‘인간의 신학(theology)이 아닌 하느님의 인간학(anthropology)’이다. 하느님이 주시한, 성경 속 서사의 주인공들도 대체로 위태롭다. 덧없는 욕망들을 품고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어떤 끝없는 동경’에 취해 살아간다. 하여,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패배뿐이라고, 우리 신앙이 견뎌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뿐이라고 탄식한다.
  ‘하나같이 아프고 어둡고 쓸쓸하고 막막하고도 불안’한 정미경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낯설지 않다. 사연은 개별적이나 그 위태로움은 보편적이다. 굳건한 위선은 있을 수 없다. 지극한 현실에 몰려 아득한 현실의 비루함에 처한 자에게 완고한 어둠은 역설의 희망이다. 열망을 훼손당한 비굴한 인생에게 수치심은 유일한 희망이다. 혜셀은 “인간은 갈망하고 안개 속에서 갸날픈 촛불을 밝히지만, 끝내 무기력하고 가당찮다”고 말하며 이렇게 묻는다. “선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영혼의 상처를, 그 공포와 좌절을 치유할 것인가?” 그리고 그 유일한, 역설의 희망을 이렇게 위로한다.

찢어진 마음만큼 온전한 것은 없다. 뉘우치는 마음은 결코 우리의 영적 능력에 대한 인식, 영원한 책임과 병행하는 영원한 숭고함에 대한 인식을 손상시키지 않는다.(<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305쪽)

위태롭다, 그런데 그것이 희망이란다. 희망은 완고한 어둠처럼 막막하나, 완고한 어둠만이 희망을 잉태한다. 서럽던 가슴은, 다행히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속삭임을 듣고 희망을 움켜쥔다. 그래, 그것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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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연서 - 디트리히 본회퍼와 약혼녀 마리아의 편지
디이트리히 본회퍼 & 마리아 폰 베데마이어 지음, 정현숙 옮김 / 복있는사람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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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를 위한 존재란, 그 자신을 던짐으로 완성된다. 그리하여 오직 의미로만 존재해야 하는 숙명을 기꺼이 수용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통념은, 그 숙명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다. 대한기독교서회에서 출간한 '본회퍼 선집'이 '전집'이 아니어서 아쉬웠고, 특히 연인 마리아와 주고받은 서신집이 빠져서 더욱 아쉬웠던 차에, 이번에 복있는사람에서 이 서신집을 <옥중연서>란 애틋한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두어 달 전에 박종현 대표를 뵈었을 때, 이 책과 에버하르트 베트게의 본회퍼 전기 완연본의 원서를 보여주며 흐뭇해 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정성스런 마음으로 책도 잘 만든 것 같다. 소박한 겉표지를 들어내면 본회퍼가 갇혔던 테겔 형무소 10호실 감방이 드러난다. 애틋함은 처연함으로 추락하지만, 그들의 연서는 돌연 세상이 넘볼 수 없는 낭만에 이른다. 본회퍼의 단단한 신학은 어떤 사랑의 언어를 감행할 것인가,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이제 읽기 시작이다. 아, 너무 빨리 읽지 말아야지, 벌써부터 달려가는 마음을 다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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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눈물
SBS스페셜 제작팀 지음 / 프롬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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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학교'가 있어야 할 자리
[서평] <학교의 눈물>(SBS스페셜 제작팀 지음 | 프롬북스 펴냄 | 2013년 5월)




어머니는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았으나 결연한 말투와 눈빛에는 짙은 고통이 어른거렸다. "우리 아이가 이렇게 될 동안 제가 몰랐었잖아요"로 시작하는 어머니의 고백은 죄책과 회한의 슬픔이 묻어났고, "제가 가톨릭 신자인데 하느님이 저를 이렇게 쓰시려고 제 아들을 보냈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로 끝나는 마지막 문장에선 어떤 숭고한 소명까지 헤아릴 수 있었다.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을 잃은 고통, 죽음 같은 슬픔 그리고 이런 지독한 비극에 맞선 결연한 소명, 인터뷰에 응하던 승민이의 어머니는 마치 '못다 푼 역사의 과제를 남기고 간 열사의 어머니'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2012년 12월 20일, 중학교 2학년 권승민군은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아들의 자살로 고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교직을 떠났고, 중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는 그 고통스러운 공간에 남아 학교폭력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로 하였다. 가족들 모두 지독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

아들이 남긴 두 장짜리 유서엔 자신을 가해한 친구들의 범죄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통장의 돈까지 가져갔고, 심부름과 숙제를 시키고, 무차별적으로 때렸다. 라디오를 들고 벌을 세우고, 선을 뽑아 목에 묶어 땅바닥의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라고 했다. 승민이는 친구들의 보복이 두려워서 교사인 부모에게도 그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견고하고 복잡한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부모는 결코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은밀한 세계


이 책 <학교의 눈물>은 올해 1월에 SBS를 통해 방영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던 동명의 프로그램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방송에선 입체화된 영상이 더 큰 충격과 감동을 선사한다면, 책은 세세하고 치밀하게 아이들의 세계를 분석하고 진단하며 대안을 모색한다. 방문을 걸어 잠근 자녀의 낯선 경계가 두려운 부모들은, 이 책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법정에 선 학교폭력 가해자들은 우리가 짐작하는 비행청소년이 아니었다. 일진이나 '짱'이라고 하는 아이들 중 상당수는 학교에서 반장이나 부반장을 한 번 정도 해 본 아이들이다. 그들의 부모도 대개 평범한 사람들로 자신의 아이가 이런 일을 저지르고 다닐지는 꿈에도 몰랐다.

"처음부터 폭력의 가해자나 피해자로 태어나는 아이는 없다."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은밀한 세계에서 아이들은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 받으며 병들어간다. 성적으로 모든 것을 평가받는 학교 시스템은 그들의 상상력과 꿈을 앗아간다. "어떤 아이들은 숱한 폭력을 견디지 못한 채 영원한 피해자로 살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어떤 아이들은 가슴속에 쌓아둔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또 다른 학교폭력의 가해자가 된다." 가해자의 44%가 피해 경험자이며(대구대 박순지 교수 연구 논문, 2009), 피해자의 31%가 자살을 생각한다(청소년폭력예방재단, 2011년).


승철이는 '담배셔틀'이었다. '셔틀'이란 인터넷게임 스타크래프트에 등장하는 프로토스 종족의 병력 수송선(Shuttle)에서 유래한 것으로, 아이들의 세계에선 일진 그룹에게 매점에서 빵을 사다 주는 빵셔틀, 담배를 사다 바치는 담배셔틀, 숙제를 대신 해주는 숙제셔틀, 친구의 스타킹에 구멍이 났을 때 자신의 스타킹을 벗어주는 스타킹셔틀 등으로 분화된다.

키가 180cm가 훌쩍 넘는 듬직한 체구의 승철이는 외모와 달리 너무 착하고 소심한 성격이 문제였다. 중학교부터 시작된 폭력은 고등학교 1학년이 될 때까지 끈질기게 승철이를 괴롭혔다. 승철이는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날이면, 집에 와서 방의 벽과 집안의 물건을 주먹으로 부쉈다. 친구에게 표현 못 했던 분노를 가족에게 폭발시키는 것은 학교폭력 피해자들의 전형적인 후유증 중 하나다.

피해 아이에 대한 선입견 중 하나는 피해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너도 잘못이 있으니까 피해를 당했겠지" 또는 "네가 나약해서 이겨내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다. 피해자들에게 발견되는 소심함과 우울함은 폭력의 피해 후유증인 경우가 많다. 피해자 대부분은 낮은 자존감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유아기에 안정적인 애착이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부모와의 애착은 타인과 관계를 맺는 최초의 경험이 되는데, 애착이 불안정한 아이는 성장하면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문제가 된다. 단짝 친구를 만들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도 자책하는 경우가 많다. 학교폭력까지 당하면 자존감은 완전히 무너지고 그 자리에 우울감이 싹튼다. 그런데 이런 낮은 자존감은 가해 아이들에게도 대부분 발견된다. 집에서 강한 훈육을 받거나 자기표현을 제대로 못 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자기보다 약한 친구에게 보복한다. 더 놀라운 것은 가해와 피해 아이들의 부모들도 어김없이 자존감이 낮거나 우울감이 높다는 공통점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학교폭력 회복 프로젝트 '소나기학교'

ⓒSBS스페셜


전문가들은 학교폭력이 아이들에게 후유증을 남기지 않으려면 진정한 사과와 용서 그리고 화해로 관계를 회복시켜야 한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른들 사이에서만 용서와 합의가 이루어지고, 가해 아이가 다른 학교로 추방되거나 피해 아이가 보복이 두려워 다른 학교로 옮기는 것으로 대부분 끝난다. 그리고 피해 아이 중 상당수는 다시 가해자가 된다.

하워드 제어는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란 개념을 소개하는데, 어떤 범죄 행위에 대해 처벌을 내리는 것 못지않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그 상처에 대해 공동의 치유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제안한다. 가해자는 자신의 범죄에 대한 용서를 빌며 그 상처를 치유해나가고, 피해자는 치료를 통해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상생하는 공동체로 복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10대의 경우, 그 또래 집단의 특수성과 이미 힘의 균형이 깨져 있는 관계 속에서 2차 피해가 발생할 우려도 있어서 직접적인 학교폭력 당사자 간의 직접적인 용서와 화해는 쉽지 않다. 이에 방송 관계자는 전혀 별개의 학교폭력 사건을 겪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참여하는 학교폭력 회복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이른바 '소나기학교'의 시작이었다.

소나기학교라는 이름에는 아이들이 겪은 학교폭력이란 이 위기가 한여름 소나기처럼 지나가게 해달라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이에 방송 관계자는 14명의 학교폭력 가해 아이와 피해 아이를 모았다. 그리고 폐교를 찾아 감시와 효율을 목적으로 하는 기존 학교 공간이 아닌 자유와 개성과 치유의 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 담임과 부담임, 상담교사, 진로와 음악 등의 특강교사, 아이들과 숙소생활을 함께할 대학생 멘토까지 모두 32명의 선생님께서 함께 했다. 그리고 흥미진진한 8박 9일간의 소나기학교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이들은 각기 개성과 본능을 드러내며 위기를 겪기도 하고 습관적 욕설과 폭력으로 아이들 간의 위계가 표면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위태롭던 소나기학교는 차츰 그 위기를 극복해 나간다. 아이들은 자신을 철저히 존중하고 배려하는 선생님들의 진심이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핸드밸 합주를 통해 '세상에 쓸모없는 소리는 없다'는 것과 사람과 사람 간의 연대를 배운다. 또, 상담을 통해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지연시키는 방법을 터득하고, 심리극을 통해 타인을 배려하고 약자에 대한 동정심을 갖는 정서적 공감 능력을 배웠다. 소나기학교는 이 세상에 없는, 오직 그곳에만 존재하는 학교였다.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소나기학교'


부모와 함께 하룻밤을 보낸 다음 날 감동적인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소나기학교도 끝이 났다. 이 책은 아이들이 카카오톡 채팅방을 만들어 계속 교류하고 있으며, 다들 순조롭게 현실에 적응해 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담담히 전한다. 하지만 그 아이들의 현실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소나기학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아이들의 학교는 예전 그대로일 것이다. 방송이 나간 뒤, 가해 아이를 옹호했다는 비판 여론도 뜨겁게 일었다고 한다. 사회는 여전히 학교폭력의 책임을 가해 학생들에게만 전가하고 그들을 엄벌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과신한다.


이 책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학교폭력은 내 아이와는 상관없다고 '철썩'같이 믿는 당신의 신념을 무너뜨리고, 그것은 학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경고하고 일깨우고자 한다. 학교폭력과 궁극적으로 맞서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소나기학교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부터 그리고 부모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당부한다.

전문가는 조언자일 뿐, 아이를 위해 행동해야 하는 것은 결국 부모다. 어떤 경우에도 먼저 아이를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아이는 제자리로 돌아온다. (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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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털 - 노순택 사진 에세이
노순택 글.사진 / 씨네21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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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하고 위험한 곳에서 자라는 '사진이라는 꽃'
[서평] 노순택의 사진 에세이 <사진의 털>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진이 범람하는 시대다. 좋은 사진기는 어지간한 구도만 확보되면 꽤 매력적인 사진을 보장한다. 실패한 사진도 포토샵 등으로 어느 정도 만지면 매끈한 사진으로 변모한다. 사진은 현실을 보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적극적으로 왜곡함으로써 아름다움을 탐하고 쟁취하려고 한다. 하여 우리는 사진마저 믿을 수 없는 시대를 산다.

하지만 현실을 연민하여 결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어떤 사진가들이 있다. 그들의 사진은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향한 돌온한 발언이 된다. 그들은 연출된 사진을 거부한 채 현실에서 자칫 망각될 위험에 처한 진실을 사수하고 보존한다.

로버트 카파는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했지만, 어떤 사진가는 가까이 다가서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피사체의 세상 속으로 뛰어든다. 대표적인 르포르타주 사진가 노순택도, 사진 찍는 일을 고통스럽게 수행한다. 그것은 마치 죽음 같은 삶처럼 비장하다.

2009년 1월부터 2013년 3월까지, 시대의 절망을 담다

<사진의 털>(노순택 지음|씨네21북스 펴냄|2013년 5월|1만6천원)


사진사(史)의 흥미진진함과 사진적 풍경의 낭만을 희망하며 시작한 연재였으나, 시대를 잘못 만나 노순택의 글은 자못 슬프고 절망스럽다. 이 책 <사진의 털>은 2009년 1월부터 2013년 3월까지 한 잡지에 연재했던 에세이를 묶은 것이다. 마침 그 5년의 세월은 이명박 집권기였으니, 그 슬픔과 절망의 정체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책의 제목이 얄궂다. 개에겐 개털이 있지만 개털에겐 개가 없듯이, 세상에는 사진이 있지만 사진에 세상은 없단다. 그러니까 사진 따위에 진실을 기대하지 말라고 엄포한다. 사진을 과신하지 않은 작가는 사진의 일, 혹은 사진의 길을 담담히 설명한다. 털은 '각별한 지점'에서 자란다. 털은 민감하고 위험한 곳에서 자라 꽃을 피운다. 사진이라는 털은 실체로서의 몸통을 은유한다. 결국 작가의 속내는 이런 것이다.

사진이 보여줄 수 있는 건, 딱 그만큼.
몸통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오롯이 그대의 몫.(18쪽)

사진 한 장에 에세이 한 편씩, 노순택은 이명박 집권 5년의 시간 속에 '각별한 지점'을 위태롭게 거닌다.

용산 재개발 4구역 남일당 빌딩을 삼킨 화염과 거대한 검은 연기, 해군기지 사업단이 세워 놓은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힌 구럼비로 가는 길목, 콜트악기의 불 꺼진 공장, 대추리 황새울 들녘에서 현수막에 목이 감겨 던져진 시인 송경동과 경찰에 끌려나오는 가수 정태춘,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 올라 158일째 농성 중인 김진숙, 광주 금난로 로케트전기에서 해고되어 비좁은 교통감시탑에 올라 68일째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들, 서울 가산동 기륭전자 앞 포클레인을 점거하며 농성하던 노동자들, 아, 노동자들.

작가는 위태로운 현장에 뛰어들어 흔들림 없이 장면 하나하나를 기록한다. 민감하고 위험한 곳에서 자란 '사진이라는 털'은 비극적이고 절망의 몸통을 향해 돌진한다. 간혹 그의 마음도 흔들린다. "그들과 눈맞춤하지 않으려 애쓰며 꾹꾹 눌러댔다." 부조리의 시간 속에서 그는 브레히트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읊조리며, '그들'과 함께 "서정의 우물로 뛰어들지 않고 절망의 현실이 파놓은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한편, 지극한 현실만큼 극적인 드라마도 드물다. 그것은 진실의 실체를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드러낸다는 면에서 그렇고, 현재 우리가 믿고 있는 실체를 뒤흔다는 면에서 그러하다. 작가는 대추리에서의 사진들 속에서 훗날 쌍용차 노동자의 모습을 발견하며 모진 회한에 젖는다.

작가는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이 세상을 떠난 뒤 필름을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던 고인의 사진이, 용산참사 3주기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철거민 가족과 함께 빗속에 앉아있던 김근태를 만난다. 또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에서 현실정치의 주모자로 활약하는 우상호와 22년 전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영정을 들고 있던 청년 우상호의 사진을 대비시킨다.

6월의 그날, 정치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받아들여서도 안 됐던 청년은 8월의 이날, 현실정치의 주모자로 서 있다. 그는 오늘,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까.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그의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까. 이 사진은 22년 2개월 후의 그를 보여주고 있고, 청년은 이한열의 죽음을 온몸으로 품었던 운동권 학생에서, 386대표 국회의원으로, 혹은 새천연 NHK 가라오케 사건의 연루자로, 저작권법 개악의 주도자로, 여당과 야당의 대변인으로 변모해왔다. 그에게서 무엇을 납득해야 하는지 누구는 알 것이나, 누구는 모를 것이다.(98쪽)

희망은, 절망 곁에 있을지 모른다


사진은 어떤 시간, 장소, 사람, 사건에 대한 '존재 증명'이 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때 그곳'과 '지금 그곳', '그 시간의 존재'와 '이 시간의 존재' 간의 다름에 굴복하는 '부재 증명'이 된다. 작가는 "존재를 증거하기 위해 태어났으나 부재를 증거하고야마는 사진의 역설"을 헤아리면서도, 끊임없이 세상의 의미와 타자의 의미를 묻는다.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사진의 길은 과연 무엇인가.

세상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품고, 단지 바라봄이 아니라 사진으로 재현함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란 쉬운 일만은 아니다. 아무도 잘 쓴 글씨를 문학이라고 하지 않는다. 사진이 쉽지 않은 건 마치 문학처럼 타자의 의미를 묻는 일이기 때문이다.(7쪽)

수잔 손택은 "사진은 첫째로, 보는 방식이다. 보는 것 그 자체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사진은 파편일 뿐이며, 파편의 축적은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고도 하였다. 하지만 축적된 파편은 잊혀지지 않는 진실에 근접할 수 있으며, 그것은 사진의 희망이 될 것이다.

사진은 비참한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작가의 슬픔을 담보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지경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유효한 단서가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작가는 미약한 존재를 겁박하는 무도한 세력에 맞서 모든 절망을 또박또박 기록한다. 그리고 사진 밑에 "어쩌면 희망은, 절망 곁에 있을지 모른다"란 문장을 새겨 놓는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가 그 몸통을 향해 돌진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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