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털 - 노순택 사진 에세이
노순택 글.사진 / 씨네21북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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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하고 위험한 곳에서 자라는 '사진이라는 꽃'
[서평] 노순택의 사진 에세이 <사진의 털>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진이 범람하는 시대다. 좋은 사진기는 어지간한 구도만 확보되면 꽤 매력적인 사진을 보장한다. 실패한 사진도 포토샵 등으로 어느 정도 만지면 매끈한 사진으로 변모한다. 사진은 현실을 보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적극적으로 왜곡함으로써 아름다움을 탐하고 쟁취하려고 한다. 하여 우리는 사진마저 믿을 수 없는 시대를 산다.

하지만 현실을 연민하여 결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어떤 사진가들이 있다. 그들의 사진은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향한 돌온한 발언이 된다. 그들은 연출된 사진을 거부한 채 현실에서 자칫 망각될 위험에 처한 진실을 사수하고 보존한다.

로버트 카파는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했지만, 어떤 사진가는 가까이 다가서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피사체의 세상 속으로 뛰어든다. 대표적인 르포르타주 사진가 노순택도, 사진 찍는 일을 고통스럽게 수행한다. 그것은 마치 죽음 같은 삶처럼 비장하다.

2009년 1월부터 2013년 3월까지, 시대의 절망을 담다

<사진의 털>(노순택 지음|씨네21북스 펴냄|2013년 5월|1만6천원)


사진사(史)의 흥미진진함과 사진적 풍경의 낭만을 희망하며 시작한 연재였으나, 시대를 잘못 만나 노순택의 글은 자못 슬프고 절망스럽다. 이 책 <사진의 털>은 2009년 1월부터 2013년 3월까지 한 잡지에 연재했던 에세이를 묶은 것이다. 마침 그 5년의 세월은 이명박 집권기였으니, 그 슬픔과 절망의 정체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책의 제목이 얄궂다. 개에겐 개털이 있지만 개털에겐 개가 없듯이, 세상에는 사진이 있지만 사진에 세상은 없단다. 그러니까 사진 따위에 진실을 기대하지 말라고 엄포한다. 사진을 과신하지 않은 작가는 사진의 일, 혹은 사진의 길을 담담히 설명한다. 털은 '각별한 지점'에서 자란다. 털은 민감하고 위험한 곳에서 자라 꽃을 피운다. 사진이라는 털은 실체로서의 몸통을 은유한다. 결국 작가의 속내는 이런 것이다.

사진이 보여줄 수 있는 건, 딱 그만큼.
몸통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오롯이 그대의 몫.(18쪽)

사진 한 장에 에세이 한 편씩, 노순택은 이명박 집권 5년의 시간 속에 '각별한 지점'을 위태롭게 거닌다.

용산 재개발 4구역 남일당 빌딩을 삼킨 화염과 거대한 검은 연기, 해군기지 사업단이 세워 놓은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힌 구럼비로 가는 길목, 콜트악기의 불 꺼진 공장, 대추리 황새울 들녘에서 현수막에 목이 감겨 던져진 시인 송경동과 경찰에 끌려나오는 가수 정태춘,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 올라 158일째 농성 중인 김진숙, 광주 금난로 로케트전기에서 해고되어 비좁은 교통감시탑에 올라 68일째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들, 서울 가산동 기륭전자 앞 포클레인을 점거하며 농성하던 노동자들, 아, 노동자들.

작가는 위태로운 현장에 뛰어들어 흔들림 없이 장면 하나하나를 기록한다. 민감하고 위험한 곳에서 자란 '사진이라는 털'은 비극적이고 절망의 몸통을 향해 돌진한다. 간혹 그의 마음도 흔들린다. "그들과 눈맞춤하지 않으려 애쓰며 꾹꾹 눌러댔다." 부조리의 시간 속에서 그는 브레히트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읊조리며, '그들'과 함께 "서정의 우물로 뛰어들지 않고 절망의 현실이 파놓은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한편, 지극한 현실만큼 극적인 드라마도 드물다. 그것은 진실의 실체를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드러낸다는 면에서 그렇고, 현재 우리가 믿고 있는 실체를 뒤흔다는 면에서 그러하다. 작가는 대추리에서의 사진들 속에서 훗날 쌍용차 노동자의 모습을 발견하며 모진 회한에 젖는다.

작가는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이 세상을 떠난 뒤 필름을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던 고인의 사진이, 용산참사 3주기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철거민 가족과 함께 빗속에 앉아있던 김근태를 만난다. 또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에서 현실정치의 주모자로 활약하는 우상호와 22년 전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영정을 들고 있던 청년 우상호의 사진을 대비시킨다.

6월의 그날, 정치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받아들여서도 안 됐던 청년은 8월의 이날, 현실정치의 주모자로 서 있다. 그는 오늘,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까.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그의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까. 이 사진은 22년 2개월 후의 그를 보여주고 있고, 청년은 이한열의 죽음을 온몸으로 품었던 운동권 학생에서, 386대표 국회의원으로, 혹은 새천연 NHK 가라오케 사건의 연루자로, 저작권법 개악의 주도자로, 여당과 야당의 대변인으로 변모해왔다. 그에게서 무엇을 납득해야 하는지 누구는 알 것이나, 누구는 모를 것이다.(98쪽)

희망은, 절망 곁에 있을지 모른다


사진은 어떤 시간, 장소, 사람, 사건에 대한 '존재 증명'이 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그때 그곳'과 '지금 그곳', '그 시간의 존재'와 '이 시간의 존재' 간의 다름에 굴복하는 '부재 증명'이 된다. 작가는 "존재를 증거하기 위해 태어났으나 부재를 증거하고야마는 사진의 역설"을 헤아리면서도, 끊임없이 세상의 의미와 타자의 의미를 묻는다.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사진의 길은 과연 무엇인가.

세상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품고, 단지 바라봄이 아니라 사진으로 재현함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란 쉬운 일만은 아니다. 아무도 잘 쓴 글씨를 문학이라고 하지 않는다. 사진이 쉽지 않은 건 마치 문학처럼 타자의 의미를 묻는 일이기 때문이다.(7쪽)

수잔 손택은 "사진은 첫째로, 보는 방식이다. 보는 것 그 자체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사진은 파편일 뿐이며, 파편의 축적은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고도 하였다. 하지만 축적된 파편은 잊혀지지 않는 진실에 근접할 수 있으며, 그것은 사진의 희망이 될 것이다.

사진은 비참한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작가의 슬픔을 담보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지경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유효한 단서가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작가는 미약한 존재를 겁박하는 무도한 세력에 맞서 모든 절망을 또박또박 기록한다. 그리고 사진 밑에 "어쩌면 희망은, 절망 곁에 있을지 모른다"란 문장을 새겨 놓는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가 그 몸통을 향해 돌진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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