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식 세탁소 - 정미경 소설집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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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상황> 7월호에 기고한 서평입니다. 



위태롭다, 그런데 그것이 희망이란다


삶은 위태롭다. 의연하고 돌올했던 명분들과 날선 마음의 결기가 이리 쉽게 무너질지 몰랐다. 몸살을 앓았다. 몸살이란 영혼의 슬픔을 감당하는 육신의 고뇌가 아닐까, 생각했다. 나의 민낯은 대체로 초라하고, 가슴은 대체로 서럽다. 저마다의 울음을 간직한 책(혹은 외면한 채) 살아가다 어느 순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직면하고 나서야, 추락을 경험하고 나서야, 격동에 처하고 나서야 자신의 비루함을 받아들인다. 

정미경의 네 번째 소설집 <프랑스식 세탁소>에 실린 일곱 편의 작품들, 일곱 명의 주인공들은 어떤 사연에 휘말리며 겹겹이 싸두었던 자신의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하나같이 아프고 어둡고 쓸쓸하고 막막하고도 불안하다”(작가의 말, 280쪽). 진실이 위험한 건, 곧 탄로날 위선의 운명 때문이다.

<프랑스식 세탁소>(정미경 지음│창비 펴냄│2013년 5월)

첫 번째 단편 <남쪽 절>의 주인공 ‘김’은 출판사 대표다. 직원이라곤 아내 ‘은애’뿐이다. 만들고 싶은 책만 만들고 싶어서 독립했지만,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기 위해 만들고 싶지 않은 책도 만들어야 한다. ‘은애’는 그가 만들고 싶은 책만 만들었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김’은 그런 ‘은애’를 타박한다.

철없긴. 책임을 진다는 게 무언지, 너는 몰라. 하긴, 그 철없음을 사랑했다만.(<프랑스식 세탁소>, 26쪽)

그 소신은 사실 ‘김’의 것이었지만, 그것은 이제 철없는 한때의 결기로 치부된다. 삶에 대한 책임감은 자못 결연하다. 현실적인 헤아림은, 한때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것들을 조롱한다.
  ‘김’은 베스트셀러 작가를 붙잡기 위해 바둥댄다. 대필작가의 양심선언으로 추락을 경험했던 '작가'는, ‘김’의 출판사를 저울질하며 재기를 탐한다. ‘김’은 용산 남일당을 거쳐 전쟁박물관 옆 23층 빌딩 라운지에서 '작가'와 만난다. 23층에서 내려다 본 화염에 휩싸인 재개발 풍경은 "벙어리들이 저희끼리 수화로 떠드는 것을 볼 때의 고요한 소란과 닮았다". 한밤 중 ‘김’은 ‘은애’에게 그 현장의 철거민을 미친놈들이라 불렀고, ‘은애’는 그들이 “왜 미쳐서 자신을 부숴버리는지 헤아려줄 순 없냐”고 자조하듯 묻는다.
  소설은 서사의 큰 흐름 속에 작은 에피소드를 배치시키며, 아득한 현실과 지극한 현실을 저울질한다. 아득한 현실은 소신대로 살 수 없는 ‘김’과 ‘은애’의 비루한 현실이며,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투쟁하다 죽어간 철거민들의 현실일 것이다. 지극한 현실은 그 비루함에 목매는 처연한 현실이며, 철거민을 ‘미친놈들’로 부르는 무도한 일상일 것이다. 위태롭게 질주하던 ‘김’은 사무실 옆 미술관에서 완고한 어둠을 경험한다. 처음엔 섬뜩한 불안이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완고한 어둠이 흔들릴 즈음, 그는 아득한 그 무언가를 조우한다. 그리고 ‘조금만 더, 여기 머물고 싶다’고 읊조린다.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마지막 단편 <프랑스식 세탁소>는 열망의 추락을 매혹적으로 그려낸다. 이 소설은 복지재단 이사장인 ‘나’와 사보에서 우연히 접한 소설 요리사 ‘르와조’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망할 것 같았던 재단은 젊은 이사장의 열정적이고 탁월한 사업 수완 덕에 되살아난다. 갈등하던 조직은 안정적으로 운영된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가증스런 속물에 가까웠다. 행정실장의 불륜을 덮어주며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던 그는 행정실장의 여자였던 ‘미란’과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재단 비리 의혹에 감사를 받자 그는 ‘미란’을 철저히 무시하고 그녀의 희생을 강요한다. 무력한 ‘미란’은 결국 자살하지만, 그의 위선은 별다른 요동 없이 건재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그도 ‘르와조’의 비극을 읽으며 차츰 균열되기 시작한다. 요리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으로 살았으나, 그 자부심이 훼손당하자 ‘르와조’는 끝내 죽음을 선택했다. ‘르와조’의 죽음 앞에 돌연 그의 수치심이 시작된다. 숨겨져 있던 삶의 속내가 홀연히 탄로날 때, 그토록 견고했던 위선은 급격히 허물어진다.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지음│이현주 옮김│한국기독교연구소 펴냄│2007년 2월)

정미경의 소설을 읽으며, 문득 유대인 랍비로서 온 인류를 사랑했던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이 고찰한 ‘인간의 정황’이 생각났다. 헤셸에 의하면, 성경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봄’(vision)이며, ‘인간의 신학(theology)이 아닌 하느님의 인간학(anthropology)’이다. 하느님이 주시한, 성경 속 서사의 주인공들도 대체로 위태롭다. 덧없는 욕망들을 품고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어떤 끝없는 동경’에 취해 살아간다. 하여, 우리가 마주치는 것은 패배뿐이라고, 우리 신앙이 견뎌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뿐이라고 탄식한다.
  ‘하나같이 아프고 어둡고 쓸쓸하고 막막하고도 불안’한 정미경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낯설지 않다. 사연은 개별적이나 그 위태로움은 보편적이다. 굳건한 위선은 있을 수 없다. 지극한 현실에 몰려 아득한 현실의 비루함에 처한 자에게 완고한 어둠은 역설의 희망이다. 열망을 훼손당한 비굴한 인생에게 수치심은 유일한 희망이다. 혜셀은 “인간은 갈망하고 안개 속에서 갸날픈 촛불을 밝히지만, 끝내 무기력하고 가당찮다”고 말하며 이렇게 묻는다. “선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영혼의 상처를, 그 공포와 좌절을 치유할 것인가?” 그리고 그 유일한, 역설의 희망을 이렇게 위로한다.

찢어진 마음만큼 온전한 것은 없다. 뉘우치는 마음은 결코 우리의 영적 능력에 대한 인식, 영원한 책임과 병행하는 영원한 숭고함에 대한 인식을 손상시키지 않는다.(<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305쪽)

위태롭다, 그런데 그것이 희망이란다. 희망은 완고한 어둠처럼 막막하나, 완고한 어둠만이 희망을 잉태한다. 서럽던 가슴은, 다행히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속삭임을 듣고 희망을 움켜쥔다. 그래, 그것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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