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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여성 평론가로 산다는 것 - 평론가 심영섭의 삶과 영화 그 쓸쓸함에 관하여
심영섭 지음 / 열린박물관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영화 평론가 심영섭, 그 예사스럽지 않은 날카로움, 혹은 그 속에 숨기운 명민한 감수성을 마음껏 만날 수 있는 책이다. 그는 임상심리학자이지만 영화 평론가로 밥벌이를 한다. '심영섭'이란 필명은 '심리학과 영화를 두루 섭렵한 사람'이란 뜻이란다. 여성권한지수 78위인(아마 영화계에선 더 바닥일 것이다), 견고한 '남성 아비투스'의 나라에서, 숱한 남성 감독을 제대로 까는, 그래서 욕먹는 여성 평론가이기도 하다. 평론, 혹은 비평, 하다못해 나같은 '듣보잡 서평'이라도 쓰려는 이들에겐, 적절한 귀감이 되는 책이다. 특히, 이 책의 제목이 된, 두 번째 순서로 앉혀진 짧은 글 하나 만으로도, 이 책은 매우 좋은 도전이자 위로가 된다.
"여성 평론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한편에서는 은근히 페미니즘적인 시각의 영화 평을 기대하기도 하고 또 한편에서는 페미니즘적인 영화 평만을 쓰는 편협한 영화 평론가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나는 그것이 편협이라면 평론가들은 아직 더 편협해도 된다고 믿는다. 오히려 영화 평론가들의 문제 중 하나는 어떤 이론적 바탕과 인문학적 소양 위에서 글을 쓰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는 것이니까. 그리고 이제는 알겠다. 이론을 가지고 영화에 대해 꿰어 맞추는 것이 가장 쉽다. 텍스트에 집중할 것. 그러나 나도 영화를 보며 꾸벅꾸벅 졸 때가 있다."(27면)
"중요한 것은 평론가라면 그것이 페미니즘이든 아니든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성찰이 깃든 전복력과 새로움을 발견하는 열린 시각이다. 더 나아가 '여성'이라면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넘어선 다원성 그리고 차이를 허용하는, 때로는 이방인, 무질서, 광기, 주변의 저급한 것들과의 화합을 꾀할 수 있는 파격과 너그러움이 깃들어 있으면 좋겠다. 나는 나를 남성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반대로 여성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29면)
"어쩌면 내게 20자 평에 관한 진실은 단 한가지였는지도 모른다. 목을 배려면 단칼에 벨 것. 20자 평을 하며 나는 내가 전생에 틀림없이 망나니였으리라고 믿게 되었다. 로저 이버트처럼 평생 동안 두 엄지손가락을 가지고 '썸 업, 썸 다운.' 하면서 영화의 생사를 결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앞으로는 20자 평을 하고 싶지 않다. 아니 하지 않을 것이다. 망나니 역할은 이제 충분히 했다. 영화 평론가가 아닌 임상심리학자 노릇을 하던 시절에 분명히 나는 좋은 사람이었다."(4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