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실은 근친혼 때문에 아들과 사위가 모두 왕의 직계 후손이었고 따라서 친가와 외가의 구분이 모호했으므로 갈문왕 제도가 성립할 수 있었다.

신라 특유의 갈문왕(葛文王) 관습은 여기서 비롯된다. 갈문왕이란 신라 초기에 왕의 아버지, 장인, 형제 등에 두루 주어지는 일종의 관직 같은 신분이었다. 쉽게 말해 왕위 계승권이 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족들에게 현직 왕이 ‘위로’하는 의미에서 수여한 작위라고 보면 된다.

317년 한족 왕조인 진이 강남으로 옮겨가 동진으로 명패를 바꾸자 화북 일대는 북방 민족들의 세상이 되었다. 이른바5호라고 불리는 민족들이 옛 중국 문명의 발원지이자 전통적 중심지인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는데, 그중 고구려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앞서 보았듯이 선비족이었다.

삼국시대의 국가들은 ‘선’ 개념의 국가라기보다 성곽을 중심으로 하는 ‘점’ 개념의 국가였다. 그러므로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라는 중요한 ‘점’을 제거한 것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볼 만한 근거가 충분했다.

중국의 역사가 통일 지향적인 근본적인 이유는 유럽과 달리 확고한 지리적 중심(중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사에 등장한 모든 나라는 늘 지리적 중심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으므로 아무리 분열이 심하다 해도 궁극적으로는 통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북조에서는 여러 나라가 동시에 병립하며 혼돈상을 보였고, 남조는 동진 이래로 왕조가 차례로 교대하는 식이었다. 중국 전체로 보면 북조의 안정이 더 중요했다).

오랑캐의 개념은 중화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주나라 시대부터 있었으나, 민족적으로 분명히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부터다. 그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부터 장성 이북의 민족들이 오랑캐로 규정되었다.

원래 한족은 황허 문명을 이어받은 중원 부근의 민족만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춘추시대에 초·오·월 등의 제후국이 성장하면서 강남이 먼저 편입되었고 전국시대에 진이 강성해지면서 중원 서쪽까지 포함되었다. 진시황이 대륙을 통일한 것은 결과적으로 한족 문명권의 문을 닫아건 셈이다.

한반도에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삼국이 탄생하고 활발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그런 혼란과 분열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일찍이 한이라는 강력한 통일 제국이 힘을 유지하고 있었을 때는 한4군에 눌려 고대국가 체제조차 이루지 못한 게 그 증거다.

4세기 초반에 고구려가 낙랑을 정벌할 수 있었던 것도, 또 후반에 랴오둥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분열기의 중국이 동북아시아의 구심점 노릇을 하지 못하는 형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달력(역법)과 연호는 독립국의 상징이므로 이 무렵에 비로소 신라는 당당한 왕국이 된 것이다. 지금은 세계의 대다수 나라가 서양의 달력(서기)을 쓰니까 달력의 존재를 당연시하지만, 공통적인 달력이 없었던 과거에는 나라마다 연도를 셈하는 기준이 달랐다. 가장 일반적인 기준은 현직 왕을 기준으로 삼는 것인데, 이를테면 서기 536년을 법흥왕 23년이라고 하는 식이다.

북주 황실의 외척인 양견
楊堅
이라는 자가 제위를 찬탈하고 새로 수

라는 나라를 세웠다

589년에 양견은 남조의 마지막 나라인 진을 정복하고 오랜 남북조시대를 종식시켰다.220년 한이 멸망한 이후 무려369년 만에 다시 천하 통일이 이루어진 것

중국 역사는 분열기에 성장·발전하고 통일기에 안정·퇴조하는 현상을 되풀이한다.

중국은 늘 화북에 정치적 중심을 두고 강남을 경제적 중심으로 삼는 게 기본 공식

만약 남중국의 왕조가 통일을 이루었다면 그 예상대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족이 세운 남중국의 여러 왕조는 남북조시대 내내 물리력이 취약했다. 그러나 이민족들이 세운 호전적인 북중국의 왕조들은 북위가 지배하던 안정기를 제외하고는 내내 자기들끼리 중원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따라서 새 통일 제국인 수가 북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주변에 대해 향후 강력한 압박 전술로 나오리라는 점을 예고하고 있었다.

남조의 왕조들은 후대에 ‘6조(六朝) 르네상스’라 불리는 찬란한 문화의 시대를 열었다(오, 동진, 송, 제, 양, 진 등 남조의 여섯 왕조를 6조라고 부른다). 화가 도연명, 고개지, 서예가 왕희지 등이 바로 이 시대의 예술가들이다. 반면 북조의 왕조들은 시대적 필요에 따라 균전제와 과거제 등 사회제도를 만들었다. 이렇게 보면 오랜 분열 시대에 남중국과 북중국은 마치 분업을 하듯이 중국 사회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북위는 강남까지 아우르지 못한 반쪽 제국이라는 결함을 지닌 탓에 고구려와 타협해야 했고, 고구려는 어차피 중원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으므로 서열을 인정하는 선에서 북위와 타협해야 했다. 그렇다면 언제든 중국에 북위보다 강력한 통일 왕조가 들어설 경우 고구려의 평화,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할 터였다. 거꾸로 말하면 한반도 삼국이 서로 다투면서도 성장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데는 중국이 남북조로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배경이었던 것이다.

3년간의 접전 끝에 종합 전적1승1무1패로 무승부를 기록한 양제와 영양왕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618)에 죽었는데, 양제는 부하인 우문화급
于文化及
에게 살해당했으니 더 억울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군주들은 죽었지만 그들이 남긴 후유증은 심각했다. 대규모 전란으로 국력이 탕진된 두 나라는 이후 쇠락의 길로 급속히 빠져들었다.

양제가 암살되자 그의 이종사촌인 이연
李淵
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국의 명패를 당

으로 바꾸었다.

결국 수 제국은 불과30년도 존속하지 못하고 새 통일 왕조로 교체되었다.800년 전 첫 통일 제국의 시대를 열었던 진·한 교체기와 너무도 닮은꼴이었다.

진평왕은 아들을 두지 못하고 딸만 셋을 두었기 때문

골품이 중요한가, 성별이 중요한가?
고민하던 귀족들은 골품을 선택한다. 비록 여성이라 할지라도 성골이 아직 남아 있는 이상 왕위 계승권자는 성골이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진평왕의 맏딸인 덕만이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신라는 물론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되는 선덕여왕
善德女王(재위632~647)이다.

두 여왕이 다스린20여 년 동안 왕실 후계 문제는 충분히 정리되었다. 이제 성골은 남자든 여자든 완전히 씨가 말랐으니 굳이 여왕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선덕과 진덕 두 여왕의 재위 기간은 오히려 옛 귀족 세력이 무너지고 이들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신귀족들이 집권하는 좋은 계기로 작용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의할 점은 ‘오늘’의 관점에서 당시의 한반도?일본의 관계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현대의 시각으로 과거를 보면 역사를 올바로 파악하기 어려울뿐더러 자칫하면 현재의 이해관계에 따라 역사를 왜곡하게 될 수 있다.

한때 일본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던 임나일본부설이나 일부 국내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한반도 왕계의 일본 경영설은 내용으로 보면 정반대지만, 둘 다 지금의 시각에서 과거를 본 그릇된 주장일 뿐 아니라 극우적 역사관에서 나온 허구적 이데올로기다. 고대에는 한반도도 일본도 단일한 나라가 아니었고 민족적 정체성도 생겨나지 않았으므로, ‘두 지역’은 한 쪽이 상대를 지배하는 일방적인 관계를 취한 게 아니라 서로 자연스럽게 교류했을 것이다.

다시 분열의 대륙풍이 불기 시작한다.1000년 전 주의 동천 이후 전개되었던 춘추전국시대에 이어 중국의2차 분열기다.1차 분열기에 제후국들은 주 왕실을 예의상으로만 섬기면서 실은 자기들끼리 패권을 다투었다. 그러나2차 분열기의 제후들은 아예 한 황실의 문을 닫아걸고 노골적으로 패권 다툼을 벌인다.

사실 당시 위는 오와 촉이 동맹을 맺고 거세게 도전하는 상황을 맞고 있었으므로 후방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 판에 랴오둥 태수 공손연
公孫淵
이 오나라와 위나라 사이에서 농간을 부리며 외교적 이득을 취하고 있었으니 분통이 터질 따름이었다(랴오둥은 후한 말부터3대에 걸쳐 공손씨 가문이 독립 왕조처럼 지배하고 있었다)

공통의 이해관계를 토대로 하는 동맹은 그 이해관계가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법이다.

, 화북을 장악한 위는 북방과 동북방을 개척했다. 랴오둥 정벌과 고구려 침략은 이 전략의 일환이다. 그러나 만주까지 손에 넣으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만주를 복속과 제어의 대상으로 볼 뿐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게 된다. 따라서 만주에 관해서는 늘 모호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 ‘만주의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만주 출신의 청 제국이 대륙을 정복하는 17세기의 일이다.

특히 3세기 후반부터 화북 일대는 이른바 5호(‘다섯 오랑캐’)로 불리는 북방 민족들이 주름잡게 되는데, 이들 중 하나가 선비족

고구려는 중앙 권력이 불안정한 고비마다 귀족들의 쿠데타가 발생해 도약의 계기를 만들어냈다. 이번에도 효과는 있었다.15대 미천왕
美川王(재위300~331)이 된 소금장수 을불은 나라의 대내외적 우환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개가를 올렸다. 우선 조카의 즉위를 본 봉상왕이 두 아들과 함께 자결함으로써 장차 권력 분쟁의 불씨가 사라졌다.

진이 한을 계승할 만한 통일 제국이 못 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을 무렵, 미천왕은 고구려에 기회가 왔음을 감지했다. 그는 예전처럼 랴오둥에 미련을 두지는 않는다. 이제 전선은 북쪽이 아니라 남쪽에 구축해야 한다. 특히 모국인 한이 멸망한 지80년이 넘었는데도 한4군의 하나가, 더구나 중국과 접경하지도 않는 중국의 군현이 아직까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이 불합리하다. 미천왕의 눈앞에는 일찍이 동천왕이 품었던 따뜻한 남쪽 나라의 꿈이 어른거린다.

204년에 랴오둥의 공손씨 정권은 낙랑군 이남의 지역을 따로 떼어내 별도의 군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대방군이다.

(앞서 보았듯이102년에 신라는 파사왕이 가야의 수로왕에게 중재를 구할 정도로 약소국이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와 신라의 초기 다툼에서는 신라의 규모가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신라는 역사에 이름조차 누락된 여러 소국과 함께 위로는 진한, 아래로는 변한과 가야에 막혀 있었으므로 충청도 일대까지 진출할 힘은 없었다.

마치 당시에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 중남부의 패권을 놓고 겨루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백제는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장악하고 남쪽과 동쪽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었으나 신라는 아직 경상도 일대의 수많은 소국 중 하나에 불과했으며, 아직 자기 지역의 패자로 발돋움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역사를 이해할 때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후대의 상황을 과거로 소급하는 것이다. 백제와 신라는 오늘날까지 이름과 역사가 전해지기 때문에, 막연히 두 나라를 처음부터 상당히 안정된 나라로 인식하기 쉽다

‘생존이 곧 미덕’이라는 말은 당시 신라에 가장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는 그냥 존속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신라와 엇비슷한 처지였던 주변의 소국들은 신라의 풀이 조금씩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그 풀로 고여 들었다. 북쪽의 말갈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지면 그 유민들은 신라로 내려왔다. 낙랑과 대방의 백성들도 난리를 피해 남쪽으로 오는 사람이 늘어났다. 심지어 일본에서조차 바다 건너 신라로 오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내해왕의 뒤를 이은 조분왕
助賁王(재위230~247)은231년 지금의 김천에 해당하는 감문국을 공격해 영토화하고, 다시5년 뒤에는 영천의 골벌국을 병합했다(고구려나 백제의 초기 역사와 달리 생소한 소국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신라 초기 한반도 남동부가 그만큼 부족국가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최종 승자는 위도 아니었다. 당대에 이루지 못한 조조의 야망은 아들이 제위에 오름으로써 성공한 듯했으나 곧이어265년에 사마염
司馬炎
이 새로 진

을 건국함으로써 중국의 삼국시대는 짧게 끝났다.
하지만 그것은 통일이 아니라 오랜 분열의 서곡에 불과했다. 이후 중국은589년 수

제국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300여 년 동안 여러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기를 맞게 되며, 더욱이5세기부터는 화북과 강남에 각기 다른 왕조들이 병존하는 남북조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동북아시아 질서의 중심이 약화된 격변의 시대를 맞아 한반도 역사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생겨난다.

중요한 것은 신라가 그 외래인들을 적대시하기는커녕 전혀 낯설게 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애초부터 토박이가 없는 이주민 국가였고 초기 왕계도 여러 외래인 세력이 얽혀 형성되었던 만큼 신라는 어느 민족, 어느 집단이 찾아오든 배척하지 않았다. 초기 신라가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바로 이 열린 태도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땅의 역사는 사람의 역사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인도사라고 하면 ‘인도인’의 역사라기보다 ‘인도라는 땅’의 역사를 가리킨다.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주역으로 활동한 사람들 중에는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있었다.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과 갈라서기도 했고, 우리 민족의 일부로 편입되기도 했다. 우리 역사의 진정한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보다 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국 대륙이 분열된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고대 삼국이 발달하고, 중국이 통일되면 한반도에도 단일 왕조가 성립하는 역사적 반복은 우리 역사가 동북아시아 문명권의 중심인 중국의 역사와 불가분한 관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이 책은 ‘한민족의 역사’보다 ‘한반도의 역사’에 중점을 둘 것이다.

아담과 셋과 에노스가 각각930년,912년,905년에 달하는 각 시대의 ‘건국자’라는 뜻일 것이다.

고대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는 게 하나의 전통이었다.

그렇다면 단군도 특정한 개인이라기보다 지배 집단의 이름이거나 지배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였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후대에 전승되면서 마치 특정인의 이름인 것처럼 바뀌었을 테고, 더 후대에는 건국 시조로 섬겨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 오랜 기간 동안 단군은 무엇을 했을까? 신화에 따르면 단군은 도읍을 평양에서 아사달로 옮기고 수백 년 동안 나라를 더 다스린 뒤, 중국 주나라의 무왕
武王(재위 기원전1111~기원전1104)이 기원전1122년에 동방으로 보낸 기자
箕子
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아사달로 들어가 은거했다고 한다.

넷째는 주나라가 세워진 기원전12세기 무렵에 단군 지배 집단이 고조선의 지배자라는 자리에서 밀려났다는 뜻이다. 이것은 한반도가 다시 중국 역사와 접촉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단군신화는 중국에서 밀려난 어느 부족이 동쪽으로 와서 현지의 원주민(한반도인)에게 미작 농법을 전하고 그들을 다스리는 지배 집단이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단군 신화가 만들어진 시기는 적어도 주나라 성립 이후이며, 그 지은이는 단군의 ‘진짜 후손’들, 즉 고조선의 지배 집단일 것이다. 그들은 직계 조상인 단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당시까지의 역사 기록을 토대로 신화를 만들었을 테고, 비록 평화로운 정권 교체였다고는 해도 주나라 계통의 새로운 지배 집단에 대해 부정적이었을 것이다

300여 년 동안 중원 일대를 지배한 주나라는 주변 세계가 점차 문명의 빛으로 밝아짐에 따라 영향력이 줄어든다. 급기야 주나라 왕실은 기원전771년 견융의 침입을 받아 도읍을 하오징
鎬京
에서 동쪽의 뤄양
洛陽
으로 옮기면서 왕실만 간신히 보존하는 약소국으로 전락한다. 이 사건을 주의 동천
東遷
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신호탄으로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가 개막된다. 이때부터 진시황이 대륙을 최초로 통일하는 기원전221년까지 약550년 동안 중국은 통일적인 구심점이 사라지고 제후국들이 주름잡는 기나긴 분열 시대를 보낸다. 제후들은 상징적으로는 주나라 왕실을 섬기나 사실상의 독립 군주나 다름없다.

이 화려한 분열의 시대에 중국 문명은(이후 두 번 다시 그런 시대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동양 사상의 뿌리도 그 무렵에 생겨났다.

유학 이념의 뿌리는 주나라가 성립한 기원전12세기, 더 멀게는 중국 문명의 탄생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탄생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핵심은 줄곧 충효 사상에 있다. 유학은 인간 세계가 수직적인 질서로 짜여 있으며, 하위 질서가 상위 질서에 복종하고 충성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훗날 공자가 주에서 발달한 예의 개념에 인

의 개념을 더해 유학을 창시했지만,

유학 이념을 사실상 완성한 것은 주나라였다. 공자가 늘 주나라를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로 삼았던 이유, 나아가 그 이후에도 수천 년 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양 사회에서 내내 주나라를 받들자는 존주
尊周
사상이 유지되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韓’이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글자가 된 것은 준왕과 관련이 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시대에는 지배 집단만 이주민이었으나 위만조선 때부터는 관리와 백성 들의 상당수가 중국 출신이었다.

개국한 지50여 년이 지나 제국이 안정되는 한 무제
武帝(재위 기원전141~기원전87)의 시대에 이르면 그 관계가 역전된다. 무제는 흉노와의 해묵은 빚을 청산하고 흉노를 멀리 서쪽으로 쫓아버렸다(이 흉노의 민족이동은 수백 년 뒤 유럽에서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는 세계사적 변혁을 불렀다.).

고구려의 거센 공격을 받은 낙랑은 간신히 멸망을 면했으나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이후 낙랑은313년에 최종적으로 멸망할 때까지 수백 년간 명맥을 유지하면서 북쪽의 고구려와 남쪽의 삼한 사이에서 완충지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역사에는 모본왕이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래 쿠데타로 실각한 왕은 그런 평가로 남는 법이다.

온조는 아차산의 원래 거점을 위례
慰禮
라고 불렀는데, 강을 건너서도 그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하북 위례와 하남 위례로 구분한다(지금의 서울 송파구의 몽촌토성이 하남 위례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위례라는 명칭은 한강을 가리키는 ‘아리(阿利)’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고, 왕을 가리키는 백제어인 ‘어라하(於羅瑕)’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아리는 한강의 ‘한’처럼 크다는 뜻이므로 수도의 명칭으로 적합했을 것이다. 또한 어라하는 중국 사료에 백제 왕의 호칭으로 나오는데, 실제 발음이 어땠을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 역시 ‘크다’는 뜻과 관계가 있다.

말갈은 만주족의 갈래로서 유목 문명권에 속한 부족이며,

옥저는 만주 동남부와 함경도, 동예는 옥저의 남쪽에서부터 경상북도 북부까지 퍼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민족적으로 두 나라의 주민들은 대부분 말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나라는 2세기 말경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셋 중 어디에 붙을까? 온조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정답을 찾아냈다. 우선 말갈은 논외다. 사납고 싸움을 즐기는 데다 문명의 성격이 다르고 특정한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지 않다. 그다음 낙랑은 중국 계열인 데다 온조 자신이 떠나온 고구려 쪽으로 향하는 방향에 위치해 있으니 동맹의 대상은 아니다. 따라서 답은 마한밖에 없다.

온조는 정세를 읽는 감각이 무척 뛰어났다. 낙랑과 마한은 아직 백제에 버거운 상대였으나 실은 저물어가는 해였다. 어차피 두 나라는 몰락할 터, 따라서 백제는 해가 지고 나면 어느 쪽 방향으로 진출할지를 미리 계획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백제가 선택할 방향은 남쪽밖에 없다. 온조가 낙랑을 뿌리치고 마한과 우호를 유지한 것은 그런 판단에서였다. 미래의 적에게 오히려 우호를 보이는 그의 전략은 장기적인 정세관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신라 왕실의 성은 박씨, 석씨 외에도 김씨가 있지 않던가? 김씨가 오늘날 대한민국 최대의 성씨가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신라는 박씨(혁거세), 석씨(탈해)에 이어 김씨의 건국신화도 필요하다.

이주민 국가였던 만큼 신라는 건국 시조가 여럿일 수밖에 없다.

가야의 김수로왕을 시조로 삼는 김해 김씨 이외에 모든 김씨의 시조는 김알지다.

다른 세력들과 달리 탈해가 일본 출신이라는 사실은 한반도와 일본의 고대 관계가 상당히 밀접했음을 말해주는 강력한 단서다.

당시 일본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수많은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고, 신라에 도움만이 아니라 피해도 많이 끼쳤다

더욱이 후대의 평범한 지배자들은 자연스럽게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선배이자 영웅의 이름을 계속 간직하려 했을 것이다(이집트의 파라오들이 호루스의 환생임을 자처한 것도 같은 맥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금색 큐큐클래식 6
미시마 유키오 지음, 정수윤 옮김 / 큐큐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에 대한 존중. 다수가 소수를 무시할 권리가 있나? 게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변태성욕자“라는 말로 정의할 수 있나? 사실 그의 내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할복한 극우주의 소설가라는 말로 누군가를 정의할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유론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0
존 스튜어트 밀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태신앙이란 1세대가 아니라 물려받은 신앙이기에 쇠퇴하는 신앙.

그래서 “모든 사람이 신념을 받아들였을 때 그 신념은 쇠퇴하기 시작한다”는 것.

모든 기독교인들은 가난하고 겸손하며 세상으로부터 천대를 받는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믿는다.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맹세 같은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다. 누가 자신의 겉옷을 가져가면, 속옷도 벗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내일을 염려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만 완전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이런 것들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옳다고 한결같이 칭찬하면, 그것이 왜 옳은 것인지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 이유나 근거를 알지 못해도, 사람들은 그것이 옳다는 것을 믿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은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규범들을 그런 식으로 믿는다. 하지만 진정으로 살아 있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그 규범들이 그들의 행위를 규율해서, 그들이 그 규범들에 의거해서 실제로 행동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살아 있는 믿음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대적들을 공격하거나, 자신들이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에 그 규범들을 사용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그 규범들을 그들에게 상기시켜주면서, 그들이 결코 행할 엄두를 낼 수조차 없는 수많은 행위들을 그들에게 행하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 사람이 마치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착한 것처럼 위선을 떠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정말 정나미가 떨어지는 상종못할 사람으로 치부해버린다.

- <자유론>, 존 스튜어트 밀

하지만 우리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고, 이런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라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멸시받았던 유대교의 한 무명의 종파에서 로마 제국의 국교로 도약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반대한 사람들조차도 "이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를 보라"고 말한 것을 보면(오늘날에는 아무도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후의 그 어떤 기독교인들보다도 자신들이 믿는 신앙의 의미를 훨씬 더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기독교가 1,80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 그 세력을 더 이상 확장해 나가지를 못하고서, 여전히 거의 유럽인들과 유럽인들의 후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주된 이유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보여주었던 그런 모습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기독교의 교리들을 일반 신자들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믿고, 그 교리들 중 많은 것들에 상당히 큰 의미를 부여하여 엄격하게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들의 지성 속에서 그런 식으로 비교적 활발하게 움직여서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교설은 칼뱅Calvin이나 녹스Knox,19 또는 그들 자신의 품성이나 성향과 비슷한 점이 많은 어떤 인물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설일 뿐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교훈들은 그들의 지성 속에 수동적으로 공존해서, 아주 기분좋고 상쾌한 말들을 들었을 때 같은 효과만을 낼 뿐이고, 그 이상의 효과를 그들에게서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이때부터는 그 지지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의지와 의사로 그 교설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니라, 선대로부터 대물림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의 교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다른 교설로 전향하거나 개종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제1세대가 그랬던 것과는 달리 세상과 맞서서 그들 자신을 변호하거나 세상을 그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대신에 조용히 뒤로 물러나서, 자신들이 지지하는 교설을 반박하는 주장이나 논거들을 될 수 있는 한 귀 기울여 듣지도 않고, 반대자들에 맞서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번거로움도 피하려고 한다. 통상적으로 이때가 그 교설의 생명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때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어떤 신념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 신념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죽게 되게 된다는 것이 정말인가? 어떤 명제에 대한 의심이 여전히 존재해야만, 그 명제를 철저하게 이해하고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정말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