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2년, 연개소문은 평양성 남쪽에서 휘하 병력의 열병식을 한다는 구실로 귀족들을 초대했다. 귀족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지만,100여 명이나 초청을 받았는데 어쩌랴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귀족들의 예상과 달리 연개소문은 그 자리에서 그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곧바로 궁중에 들어가 영류왕까지도 살해해버렸다. 그런 다음 왕의 조카를 보장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 大莫離支 가 되어 고구려의 전권을 장악했다.700년 고구려 역사상 최대의 쿠데타였다.
우두머리는 둘일 수 없는 걸까? 불행히도 짝을 이루어 나라를 구해냈던 두 영웅인 영류왕과 을지문덕은 막상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나서는 화합을 이루지 못했다. 영류왕은 장수왕 이래 고구려 왕실의 전통적인 정책인 남진을 고집한 반면, 을지문덕은 중국의 왕조 교체기를 틈타 랴오둥을 다시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랴오둥은 길이 멀어(원래 랴오, 즉 요遙라는 땅이름부터가 ‘멀다’는 뜻이다) 양곡을 수송하기 어렵고 고구려는 수성을 잘하여 정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말은 고구려 정벌의 어려움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었다.
밤낮으로 두 달간을 공략한 끝에 당 태종은 안시성을 부술 수 없음을, 아울러 고구려를 정벌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일찍이 고구려 정벌에서도 중국이 가장 애를 먹었던 부분은 바로 군량을 확보하는 문제였다.
오히려 보급 병력이 정작 필요한 전투 병력보다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앞서 본 것처럼 수의 고구려 침공 때는 보급 병력이 전투 병력의 두 배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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