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이 만질 수 있고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된 지 적어도 나흘은 지난 지금은

이완과 어떤 방식으로든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품을 수 없을지라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여기로 가, 이거 사, 저거 해! 약간 깔보는 듯한, 얕잡아 보면서 놀리는 듯한 목소리. 병에 걸리기 전에도 이완은 대체로 그런 태도로 콘스턴스를 대했다.

어쩌면 이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파트는 아들 녀석들이, 녀석들이라 부르기에는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아들들이 이완의 장례식에서 강력히 주장한 대안이었다. 두 아들은 각각 뉴질랜드와 프랑스의 도시에, 콘스턴스를 자주 찾아오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기 쉬운 먼 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파트는 양로원을 돌려 말한 것이지만 콘스턴스는 그 대안을 고깝게 여기지 않는다. 아들들은 본인들에게 가장 간편할뿐더러 콘스턴스에게도 최선일 수 있는 방법을 원한다

콘스턴스는 이완의 목소리가 실제가 아님을 안다. 이완이 죽었음을 안다.

콘스턴스는 알핀랜드에 깊이 빠져들고부터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주의가 산만해진 탓에 수십 년 전에 만료된 면허를 갖고만 있었다. 알핀랜드는 무수한 생각을 요한다. 정지 신호 같은 부차적인 세부 사항들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밀어내 버린다.

시인과 포크 가수와 재즈 뮤지션과 배우 가운데 푼돈이라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그건 콘스턴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콘스턴스는 가난을 매혹적으로 여길 수 있을 만큼 젊었다.

콘스턴스는 개빈을 뒷바라지할 돈을 벌기 위해 알핀랜드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시인들과 포크 가수들은 콘스턴스의 알핀랜드 이야기를 비웃었다. 당연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었겠나? 콘스턴스 본인도 자기 이야기를 비웃었다. 콘스턴스가 대량으로 찍어 내는 삼류 문학은 존중받을 만한 문학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콘스턴스가 점점 알핀랜드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알핀랜드는 오로지 콘스턴스의 것이었다. 알핀랜드는 콘스턴스의 피난처이자 요새였다

콘스턴스는 늘 그 질문을, 외도에 관한 질문을 던지기를 두려워했다. 바보는 아니었기에 누구와 그러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았다. 이완에게서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완도 개빈처럼 떠나 버릴까 봐 두려워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도무지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이완은 콘스턴스를 떠났다. 이완은 침묵했다. 사라졌다.

한때 레이놀즈는 개빈이 사람들을, 적어도 일부 사람을 흉보는 면에 홀딱 빠져 있었다. 그게 곧 개빈이 남들보다 우월한 지적 능력과 세련된 취향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심술에 불과하다고, 아니면 비타민 결핍 증상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깔아뭉갠다고 해서 당신이 우월해지는 건 아니야.

대학은 돈을 원하고, 그래서 뭣도 모르는 애들을 끌어들인다. 그런 다음에는 그 애들을 머릿속에 지식만 잔뜩 채워 넣은 속 빈 강정으로 만들지만 그에 걸맞은 일자리는 제공하지 않는다. 대학에 가느니 배관공 자격증을 얻는 편이 낫다.

개빈은 이룬 것도, 받은 상도 없었다. 찬사를 받고 부러움을 살 만한 얇은 시집 한 권도 출간하지 못했다. 그는 무명의 자유를 누렸고, 뭐든 쓸 수 있는 백지 같은 미래가 눈앞에 펼쳐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콘스턴스는 오로지 개빈이라는 사람 자체를 깊이 아꼈던 것이다. 그의 내면을.

하루의 첫 커피, 하루의 첫 담배, 마법처럼 나타나 하루의 첫 시를 이룬 첫 구절. 그런 시는 대부분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건 용납할 수 없다고! 콘스턴스는 내 사생활이야. 사생활! 여태 그런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겠지!"
"개빈, 당신은 당신 글을 팔았어." 레이놀즈가 말한다. "그러니 이제 공공 자료라고."
"개소리 집어치워! 내가 아니라 네가 팔았지! 이 배신자 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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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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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역사>, <서울 1964년 겨울> 빼면 정말 심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로만 가득하다. 이딴 게 ‘감수성의 혁명’이고 ‘국문학GOAT’라면, 그냥 국문학 안 읽을란다. 작가의 비틀린 이성(여성)관이 역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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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벚꽃 동산 열린책들 세계문학 22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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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냐 :
바냐 아저씨, 사는 거예요. 길고 긴 낮과 오랜 밤들을 살아 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들을 참아 내요. 지금도, 늙은 후에도, 쉬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요. 그리고 우리의 시간이 찾아와, 조용히 죽어 무덤에 가면 얘기해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하느님이 가엾게 여기시겠죠. 우리는, 아저씨, 사랑하는 아저씨, 밝고 아름답고 우아한 삶을 보게 될 거예요. 우리는 기뻐하며, 지금 이 불행을, 감격에 젖어 미소를 띠며 돌아보겠죠. 그리고 쉬는 거예요.

소냐 :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천사들의 소리를 듣게 될 거고, 보석이 깔린 하늘을 보게 될 거고, 지상의 모든 악과 우리의 모든 고통이 온 세계에 가득한 연민 속에 묻혀 가는 것을 보게 될 거예요. 우리의 삶은 조용하고, 평온하고, 달콤하게 어루만져질 거예요.

… … …

소냐 :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천천히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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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고전의세계 리커버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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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에 대한 통찰이 놀라웠다. 모든 사람들이 신념을 갖는 순간, 그 신념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 - 맹목적인 믿음은 그 자체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명제에 대한 의심이 있어야 그 명제를 더욱 철저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는 곧 사회의 다양성이 많은 게 좋다는 사상으로 이어지고, 사회 구성원 각자에게 맞는 삶을 살게 하는 게 좋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정말 좋은 책이다. 다만 왜 사회주의를 지지했는지는 의아하지만 -사회주의야말로 파시즘을 통해 전 사회가 같은 사상을 갖게 되는 것 아닌가?- 아마 지금도 살아 있다면 사회주의를 옹호하진 않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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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종횡무진 한국사 2 - 조선 건국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남경태의 가장 독창적 역사 읽기 종횡무진 시리즈
남경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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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논리에도 약소국의 운명을 강대국들끼리 멋대로 결정하는 것은 비열한 책동이었으므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20년 뒤인 1924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
桂太郞(1848~1913)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특사인 윌리엄 태프트
William Taft
와 밀약을 맺고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교차 승인해주기로 약속했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이 조선을 소유했다는 뜻이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그 소유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는 뜻이니,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하는 순간 이미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셈이다.

어차피 국왕도 책임을 회피한 마당에 대신들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모두 여덟 명의 주요 대신들 가운데 다섯 명이 찬성함으로써 을사보호조약
乙巳保護條約
이 통과되었는데, 이완용과 이지용, 이근택
李根澤
, 박제순
朴齊純
, 권중현
權重顯
이 바로 을사오적
乙巳五賊
이라 불리는 자들이다.

이듬해1월에 을사조약을 주도한 일본 공사관이 해체되고 통감부
統監府
가 성립되었다. 이제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속국이 되었으므로 공사관 대신 정식 지배 기관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과연 통감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공사관의 위상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바로 조선 정부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박탈하는 것이었으니까.

당시 유럽 세계에서 태풍의 눈은 독일이었다. 뒤늦게 국가 통일을 이루고 후발 제국주의 국가로 나선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전 세계의 식민지 분할이 사실상 완료되자 누구보다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독일은 같은 처지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을 맺고 형세의 역전을 도모했다. 그러자 독일의 강력한 군사력에 긴장한 영국은 라이벌 프랑스에다 오랜 앙숙인 러시아까지 끌어들여 삼국협상을 맺고 삼국동맹에 대비했다. 국제적 평화회의가 필요해진 이유는 이런 유럽의 정세 때문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가1907년에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를 열자고 열강에 제안하면서 고종에게 특사를 파견하라는 초청장을 보내온 것이다. 회의의 목적은 유럽에 감도는 전운을 해소하자는 것이지만 니콜라이가 굳이 종속국의 지위에 있는 조선에까지 초청장을 보낸 것은 일본에 조선을 빼앗긴 것을 억울하게 여긴 탓이었다

의병은 이미2년 전인1905년부터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 의병이 일어난 것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있었던1895년 무렵이지만 그때는 사안이 일회성인 탓에 의병도 얼마 안 가 사그라졌다. 그러나 을사조약은 국가의 존망이 걸린 사건이었으므로 이번의 의병은 규모에서나 강도에서나 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 데다 고종이 반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는 사태에 이르자 ‘을사의병’은 자연히 ‘정미의병’으로 이어지면서 한층 치열해졌다.

비록 때늦은 저항이라 하더라도 의병의 의의는 적지 않다고 해야겠지만, 의병 운동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자주독립의 취지는 높이 살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위정척사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병들의 공격 대상에는 침략자 일본과 그 앞잡이들은 물론이고 개화사상을 가진 인물들까지 포함되었으며, 이념적 목표도 외세를 완전히 배제하고 옛날의 제도를 부활시키려는 데 있었다.

40년 전의 위정척사 운동이 그랬듯이 의병 운동 역시 성리학적 세계관을 동력으로 하는 시대착오적이고 수구적인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개인적인 동기로 거사한 게 아니라 대한의용군 참모중장이라는 자격으로 조선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적을 쏘아 죽인 것이므로 자신을 전쟁 포로로서 취급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 것이다. 자신의 행위를 테러가 아닌 전쟁이라고 밝힌 것은 그가 의병 운동과 항일운동의 본질적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의병 운동은 조선의 왕실과 옛 체제를 부활시키려 했지만, 항일운동은 ‘왕국으로서의 조선’에 집착하지 않고 ‘주권국가로서의 조선’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1910년8월22일에 데라우치와 이완용이 비밀리에 만나 합병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왕조는 건국한 지519년 만에, 왕계로 치면27명의 왕을 역사에 남기고 최종적으로 문을 닫았다.

어찌 보면1800년에22대 왕인 정조가 죽으면서 망했어야 할 왕조가100년 이상 온갖 추한 꼴을 보여주면서 쓸데없이 존속한 셈이다.

전임 통감과 달리 군 출신의 데라우치가 새 통감으로 부임했다는 것은 일본의 조선 합병 전략이 막바지 단계에 왔음을 뜻했다. 사진은 1910년 7월 23일에 데라우치가 마차를 타고 부임하는 장면인데, 다음 달에 합병이 이루어지면서 그는 통감에서 총독으로 승진한다.

이완용이라는 조선 측 파트너가 있는 한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빼앗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매국노든 뭐든 이완용이 엄연히 조선을 대표하는 관직에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하면 안 된다. 그는 분명히 순종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아 데라우치와 ‘국제법상으로 하자 없이’ 합병을 조인한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입장에서는 국가 간의 정치적 행위를 진행한 데 불과하다(일본의 침략 행위를 비난하는 것과 절차의 하자를 따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허수아비라고 해도 일국의 왕과 전권대신이라면 그 지위에 걸맞은 역할을 가지고 있다.

을사조약이 체결될 때 고종의 경우도 그랬듯이, 만약 순종이 합병 조약에 끝까지 강력하게 반대했다면, 또 이완용 같은 적극적인 협력자가 나오지 않았다면 일본의 식민지화 작업이 상당한 난항을 겪었을 게 분명하다(실제로 일본은 조약의 비준을 순종의 ‘조칙’이라는 형식으로 발표했다).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는 영악하게도 기존의 토지 소유 개념이 모호하다는 데 착안했다.
전통적으로 한반도 왕조들은 왕토 사상을 바탕으로 했다. 쉽게 말해 전국의 모든 재산, 특히 부동산은 오로지 왕(국가)의 것이므로 왕 이외에는 그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물론 조선에 근대적인 토지 소유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으로 중대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사실상 모든 토지제도가 기능 마비되면서 왕토의 개념이 무너진 상태였다. 따라서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토지의 사유화가 진행되어 토지의 매매도 이루어졌다. 다만 그것이 공식적으로 제도화된 게 아니라 관행적으로 이루어져왔다는 게 문제인데(현실적으로는 왕토 사상이 무력해졌지만 공식적으로는 조선의 국체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았다), 일본이 노린 약점은 바로 그 공식과 관행의 틈이었다

쉽게 말해 소유권을 문서로써 입증할 수 없는 모든 토지는 졸지에 임자 없는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유권을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일부 농민들의 토지도 등기를 거쳐 소유권을 인정했다. 여기까지가 토지조사사업의 긍정적인 측면이다(토지 소유의 근대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토지조사사업이 시작되자 일본은 많은 측량사와 기술자를 파견해 한반도의 상세한 지적도를 작성했다. 이 거대한 토지조사사업은 모든 자원을 면밀히 파악하여 수탈 경제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결국 수백만의 농민은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잃고 영세 소작인 또는 화전민으로 전락해버렸다.

이렇게 해서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게다가 이 과정을 더욱 가속화시킨 것은 한반도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라는 이름에서 ‘척식
拓殖
’이란 개척 이주를 뜻하는 말이다. 원래는 일본 농민의 조선 이주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게 도미노처럼 작용해 조선 농민의 만주 이주까지 촉발하게 되었다.

1908년에 조선과 일본 양국은 함께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라는 합자회사를 만들었다. 곧이어 합병이 이루어지게 되므로 합자회사라는 사실은 별 의미가 없지만, 창립 당시 본사를 서울에 둔 한반도 최초의 주식회사였다.

우선 동척은 주로 곡창지대의 조선 농민들로부터 헐값으로 토지를 사들였다. 이 과정에는 함께 진행되던 토지조사사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등기가 불가능한 토지는 곧바로 동척의 부동산이 되었고, 등기된 토지라 해도 새로 제정된 소유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농민들은 동척의 집요한 공세에 휘말려 싼값으로 땅을 팔아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동척은 이렇게 마련한 토지를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는 농업 이민자들에게 팔아버렸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후발 제국주의 열강(동맹국)

영국과 프랑스 등 선진 제국주의 열강(연합국)

1914년6월28일 발칸에서 한 발의 총성과 함께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중국은 독일이라면 이를 갈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연합국 편인데, 일본은 어느 편으로 참전했을까? 제국주의의 ‘발달 수준’으로 보면 일본은 후발 제국주의에 속하므로 동맹국 측에 붙어야 한다. 그러나 세계적인 기준으로 보면 그렇지만 지역적인 기준에서 보면 다르다. 아시아에서 일본은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연합국 측에 가담하게 된다.

전쟁 과정에서 일본은 태평양 지역에 산재한 독일의 해외 식민지들을 차례로 접수하고(후발 제국주의인 독일은 식민지 분할이 거의 완료된 시점에서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나섰기에 태평양의 작은 섬들에 대해서까지 왕성한 ‘식욕’을 보였다)

어쨌든 연합국 측은 아시아에서 제 몫을 해준 일본을 기특하게 여겼다.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은 독일이 가지고 있던 중국에 대한 모든 이권을 승계하고, 나아가 만주 지역의 개발권마저 차지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신흥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을 축으로 아시아의 제국주의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게 연합국 측의 의도였으니, 여기서 중국의 사정 따위는 전혀 배려될 수 없었다. 그런 탓에 결과적으로 연합국은 차후 일본의 중국 침략을 공식 승인한 셈

개전 초기부터 연합국 측에 가담해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나름대로 열심히 싸웠는데도 전후의 논공행상에서는 승전국에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결국 승전의 대가가 고작 독일 대신 일본을 불러들인 것뿐임을 자각하게 된 중국 민중은1919년5월4일에 전국적인 반일 시위를 벌였다.

1919년1월에 고종이70년에 가까운 욕된 삶을 마감하고 죽었는데, 때가 때인지라 그가 일본인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하지만 식민지 세상에서 설움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못난 국왕이라 해도, 독살설이 헛소문이라 해도 폭발의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 분위기가2월8일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으로,3월1일에는 서울 종로의 한 음식점에 저명인사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원래 거사 일자는3월3일 고종의 장례에 맞추었으나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틀 앞당겨졌다).
3·1운동의 민족 대표33명은 음식점에서 나와 순순히 경찰에 연행되었으나, 그들도 총독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터졌다. 미리 소식을 듣고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수천 명의 어린 학생과 시민 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분노한 조선 민중들은 각 종교계 인사들의 정치적 선언에 불과한 사건을 엄청나게 증폭시켜 이후 몇 개월 동안 한반도 전역, 나아가 만주와 연해주까지 ‘대한 독립 만세’의 구호로 뒤덮는 대형 사태로 엮어냈다.

따라서 이 사건은 한 가지 중대한 교훈을 남겼다. 지속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려면 지도부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1919년4월에 중국 상하이에서는 정치 망명객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
大韓民國臨時政府
를 수립하게 된다.

하지만 명칭은 ‘정부’라고 해도 식민지가 된 조국의 현실에서 도망쳐나온 인물들이 제대로 항일 투쟁을 지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1945년 해방 때까지 임시정부가 거창한 명칭과 달리 그저 명패만 내리지 않은 것에 가장 큰 의의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몇 년 뒤인1925년4월17일에 김재봉
金在鳳(1890~1944), 김원봉
金元鳳(1898~1958), 이여성
李如星(1901~?)등의 젊은 청년들은 서울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비밀조직인 조선공산당을 창립했다. 임시정부와 조선공산당은 둘 다3·1운동의 영향으로 탄생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준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국 대통령 윌슨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 노선이었다

그러나 윌슨은 유럽 세계 내에서만 민족자결권이 적용된다고 주장했으니, 식민지·종속국의 처지와는 무관했다.

당대에는 당대의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다. 지나고 보면 알기 쉽더라도 막상 그 시대의 한복판에서는 시대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는 것은 중대한 역설이다. 비록 박쥐처럼 이중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일본은 ‘체질상’ 동맹국에 가까웠기 때문이다(그런 점은 원래 독일에 붙으려다가 달마치야 해안 지대를 주겠다는 연합국 측의 막판 제의에 마음을 돌린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것은 일본의 그런 야망을 연합국이 사후 승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유럽을 잿더미로 만든 세계대전을 계기로 오히려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인류 최초의 세계대전은 패전국만이 아니라 전승국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연합국 중에서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받지 않은 나라는 일본과 미국뿐이었다.

세계경제가 최대의 호황을 누리던 시점에서 갑자기 터져나온1929년의 세계 대공황이 없었다면 혹시 일본은 경제적인 노선, 즉 정상적인 제국주의화의 길로 나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 경제를 순식간에 마비시킨 공황의 피해는 태평양 건너 일본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일본은 경제 대국이었으나 대외 의존도가 높다는 게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군부가 제시한 해법은 만주를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고, 나아가 중국마저 정복해서 경제 위기를 타개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통 정치인의 길을 걸었고 자유주의 이념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던 하마구치 총리가 피살된 것이다. 이 사건은 정부와 군부의 싸움에서 군부가 승리했음을 뜻

일본 군부는 그 노선을 구현할 ‘건수’를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없으면 만든다.1931년9월18일에 일본의 만주 주둔군인 관동군의 일부 장교들은 남만주 철도를 몰래 폭파해놓고 그것을 중국군이 저지른 짓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만주사변인데, 일본이 도발한 예전의 전쟁들과 마찬가지로 선전포고 없이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불과 닷새 만에 랴오둥 일대를 손에 넣었고, 두 달 뒤에는 만주 전역을 장악했다. 중국의 위안스카이 정권은 일본의 의도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만주를 거저 내주다시피 했다.

이듬해 봄에 일본은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
溥儀(1906~1967)를 불러와 만주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우고 만주를 합법적으로 손아귀에 넣었다.

당시 중국이 만주를 쉽게 포기한 데는 역사적으로 만주에 대한 집착이 덜한 전통도 작용했을 것이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이 무너진 것은 제국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인 동시에 300여 년에 걸친 이민족 지배가 끝난 것이기도 했다. 중국은 비록 지배자는 군벌이었으나 한족 정권으로 복귀했다. 알다시피 만주는 청 황실의 고향

이 사건에 힘입어 그 이듬해 젊은 조선공산당원과 원로급 민족주의자 들이 처음으로 새로운 조직을 통해 상견례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탄생한 민족운동 통합 조직이 바로 신간회
新幹會
였다.6·10만세운동으로 일본이 유화책으로 돌아선 덕분에 신간회는 처음부터 합법 단체로 출범할 수 있었다.

1920년대부터는 만주에서도 본격적인 항일 투쟁이 시작되었는데, 일본의 치안력이 한반도만큼 강력하게 작용하지 못하는 지역이었기에 이곳의 투쟁은 일찌감치 명망가 중심의 정치 운동에서 벗어나 무장투쟁의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항일 투사의 사관학교에 해당하는 신흥무관학교
新興武官學校
를 비롯해 북로군정서
北路軍政署
와 서로군정서
西路軍政署
등의 무장 조직들이 모두1919년에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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