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실은 근친혼 때문에 아들과 사위가 모두 왕의 직계 후손이었고 따라서 친가와 외가의 구분이 모호했으므로 갈문왕 제도가 성립할 수 있었다.
신라 특유의 갈문왕(葛文王) 관습은 여기서 비롯된다. 갈문왕이란 신라 초기에 왕의 아버지, 장인, 형제 등에 두루 주어지는 일종의 관직 같은 신분이었다. 쉽게 말해 왕위 계승권이 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족들에게 현직 왕이 ‘위로’하는 의미에서 수여한 작위라고 보면 된다.
317년 한족 왕조인 진이 강남으로 옮겨가 동진으로 명패를 바꾸자 화북 일대는 북방 민족들의 세상이 되었다. 이른바5호라고 불리는 민족들이 옛 중국 문명의 발원지이자 전통적 중심지인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는데, 그중 고구려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앞서 보았듯이 선비족이었다.
삼국시대의 국가들은 ‘선’ 개념의 국가라기보다 성곽을 중심으로 하는 ‘점’ 개념의 국가였다. 그러므로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라는 중요한 ‘점’을 제거한 것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볼 만한 근거가 충분했다.
중국의 역사가 통일 지향적인 근본적인 이유는 유럽과 달리 확고한 지리적 중심(중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사에 등장한 모든 나라는 늘 지리적 중심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으므로 아무리 분열이 심하다 해도 궁극적으로는 통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북조에서는 여러 나라가 동시에 병립하며 혼돈상을 보였고, 남조는 동진 이래로 왕조가 차례로 교대하는 식이었다. 중국 전체로 보면 북조의 안정이 더 중요했다).
오랑캐의 개념은 중화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주나라 시대부터 있었으나, 민족적으로 분명히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부터다. 그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부터 장성 이북의 민족들이 오랑캐로 규정되었다.
원래 한족은 황허 문명을 이어받은 중원 부근의 민족만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춘추시대에 초·오·월 등의 제후국이 성장하면서 강남이 먼저 편입되었고 전국시대에 진이 강성해지면서 중원 서쪽까지 포함되었다. 진시황이 대륙을 통일한 것은 결과적으로 한족 문명권의 문을 닫아건 셈이다.
한반도에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삼국이 탄생하고 활발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그런 혼란과 분열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일찍이 한이라는 강력한 통일 제국이 힘을 유지하고 있었을 때는 한4군에 눌려 고대국가 체제조차 이루지 못한 게 그 증거다.
4세기 초반에 고구려가 낙랑을 정벌할 수 있었던 것도, 또 후반에 랴오둥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분열기의 중국이 동북아시아의 구심점 노릇을 하지 못하는 형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달력(역법)과 연호는 독립국의 상징이므로 이 무렵에 비로소 신라는 당당한 왕국이 된 것이다. 지금은 세계의 대다수 나라가 서양의 달력(서기)을 쓰니까 달력의 존재를 당연시하지만, 공통적인 달력이 없었던 과거에는 나라마다 연도를 셈하는 기준이 달랐다. 가장 일반적인 기준은 현직 왕을 기준으로 삼는 것인데, 이를테면 서기 536년을 법흥왕 23년이라고 하는 식이다.
북주 황실의 외척인 양견 楊堅 이라는 자가 제위를 찬탈하고 새로 수 隋 라는 나라를 세웠다
589년에 양견은 남조의 마지막 나라인 진을 정복하고 오랜 남북조시대를 종식시켰다.220년 한이 멸망한 이후 무려369년 만에 다시 천하 통일이 이루어진 것
중국 역사는 분열기에 성장·발전하고 통일기에 안정·퇴조하는 현상을 되풀이한다.
중국은 늘 화북에 정치적 중심을 두고 강남을 경제적 중심으로 삼는 게 기본 공식
만약 남중국의 왕조가 통일을 이루었다면 그 예상대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족이 세운 남중국의 여러 왕조는 남북조시대 내내 물리력이 취약했다. 그러나 이민족들이 세운 호전적인 북중국의 왕조들은 북위가 지배하던 안정기를 제외하고는 내내 자기들끼리 중원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 따라서 새 통일 제국인 수가 북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주변에 대해 향후 강력한 압박 전술로 나오리라는 점을 예고하고 있었다.
남조의 왕조들은 후대에 ‘6조(六朝) 르네상스’라 불리는 찬란한 문화의 시대를 열었다(오, 동진, 송, 제, 양, 진 등 남조의 여섯 왕조를 6조라고 부른다). 화가 도연명, 고개지, 서예가 왕희지 등이 바로 이 시대의 예술가들이다. 반면 북조의 왕조들은 시대적 필요에 따라 균전제와 과거제 등 사회제도를 만들었다. 이렇게 보면 오랜 분열 시대에 남중국과 북중국은 마치 분업을 하듯이 중국 사회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북위는 강남까지 아우르지 못한 반쪽 제국이라는 결함을 지닌 탓에 고구려와 타협해야 했고, 고구려는 어차피 중원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으므로 서열을 인정하는 선에서 북위와 타협해야 했다. 그렇다면 언제든 중국에 북위보다 강력한 통일 왕조가 들어설 경우 고구려의 평화,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할 터였다. 거꾸로 말하면 한반도 삼국이 서로 다투면서도 성장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데는 중국이 남북조로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배경이었던 것이다.
3년간의 접전 끝에 종합 전적1승1무1패로 무승부를 기록한 양제와 영양왕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618)에 죽었는데, 양제는 부하인 우문화급 于文化及 에게 살해당했으니 더 억울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군주들은 죽었지만 그들이 남긴 후유증은 심각했다. 대규모 전란으로 국력이 탕진된 두 나라는 이후 쇠락의 길로 급속히 빠져들었다.
양제가 암살되자 그의 이종사촌인 이연 李淵 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국의 명패를 당 唐 으로 바꾸었다. ● 결국 수 제국은 불과30년도 존속하지 못하고 새 통일 왕조로 교체되었다.800년 전 첫 통일 제국의 시대를 열었던 진·한 교체기와 너무도 닮은꼴이었다.
진평왕은 아들을 두지 못하고 딸만 셋을 두었기 때문
골품이 중요한가, 성별이 중요한가? 고민하던 귀족들은 골품을 선택한다. 비록 여성이라 할지라도 성골이 아직 남아 있는 이상 왕위 계승권자는 성골이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진평왕의 맏딸인 덕만이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신라는 물론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되는 선덕여왕 善德女王(재위632~647)이다.
두 여왕이 다스린20여 년 동안 왕실 후계 문제는 충분히 정리되었다. 이제 성골은 남자든 여자든 완전히 씨가 말랐으니 굳이 여왕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선덕과 진덕 두 여왕의 재위 기간은 오히려 옛 귀족 세력이 무너지고 이들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신귀족들이 집권하는 좋은 계기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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