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역사는 사람의 역사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인도사라고 하면 ‘인도인’의 역사라기보다 ‘인도라는 땅’의 역사를 가리킨다.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주역으로 활동한 사람들 중에는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있었다.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과 갈라서기도 했고, 우리 민족의 일부로 편입되기도 했다. 우리 역사의 진정한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보다 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국 대륙이 분열된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고대 삼국이 발달하고, 중국이 통일되면 한반도에도 단일 왕조가 성립하는 역사적 반복은 우리 역사가 동북아시아 문명권의 중심인 중국의 역사와 불가분한 관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이 책은 ‘한민족의 역사’보다 ‘한반도의 역사’에 중점을 둘 것이다.
아담과 셋과 에노스가 각각930년,912년,905년에 달하는 각 시대의 ‘건국자’라는 뜻일 것이다.
고대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는 게 하나의 전통이었다.
그렇다면 단군도 특정한 개인이라기보다 지배 집단의 이름이거나 지배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였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후대에 전승되면서 마치 특정인의 이름인 것처럼 바뀌었을 테고, 더 후대에는 건국 시조로 섬겨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 오랜 기간 동안 단군은 무엇을 했을까? 신화에 따르면 단군은 도읍을 평양에서 아사달로 옮기고 수백 년 동안 나라를 더 다스린 뒤, 중국 주나라의 무왕 武王(재위 기원전1111~기원전1104)이 기원전1122년에 동방으로 보낸 기자 箕子 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아사달로 들어가 은거했다고 한다.
넷째는 주나라가 세워진 기원전12세기 무렵에 단군 지배 집단이 고조선의 지배자라는 자리에서 밀려났다는 뜻이다. 이것은 한반도가 다시 중국 역사와 접촉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단군신화는 중국에서 밀려난 어느 부족이 동쪽으로 와서 현지의 원주민(한반도인)에게 미작 농법을 전하고 그들을 다스리는 지배 집단이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단군 신화가 만들어진 시기는 적어도 주나라 성립 이후이며, 그 지은이는 단군의 ‘진짜 후손’들, 즉 고조선의 지배 집단일 것이다. 그들은 직계 조상인 단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당시까지의 역사 기록을 토대로 신화를 만들었을 테고, 비록 평화로운 정권 교체였다고는 해도 주나라 계통의 새로운 지배 집단에 대해 부정적이었을 것이다
300여 년 동안 중원 일대를 지배한 주나라는 주변 세계가 점차 문명의 빛으로 밝아짐에 따라 영향력이 줄어든다. 급기야 주나라 왕실은 기원전771년 견융의 침입을 받아 도읍을 하오징 鎬京 에서 동쪽의 뤄양 洛陽 으로 옮기면서 왕실만 간신히 보존하는 약소국으로 전락한다. 이 사건을 주의 동천 東遷 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신호탄으로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가 개막된다. 이때부터 진시황이 대륙을 최초로 통일하는 기원전221년까지 약550년 동안 중국은 통일적인 구심점이 사라지고 제후국들이 주름잡는 기나긴 분열 시대를 보낸다. 제후들은 상징적으로는 주나라 왕실을 섬기나 사실상의 독립 군주나 다름없다.
이 화려한 분열의 시대에 중국 문명은(이후 두 번 다시 그런 시대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동양 사상의 뿌리도 그 무렵에 생겨났다.
유학 이념의 뿌리는 주나라가 성립한 기원전12세기, 더 멀게는 중국 문명의 탄생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탄생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핵심은 줄곧 충효 사상에 있다. 유학은 인간 세계가 수직적인 질서로 짜여 있으며, 하위 질서가 상위 질서에 복종하고 충성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훗날 공자가 주에서 발달한 예의 개념에 인 仁 의 개념을 더해 유학을 창시했지만, ● 유학 이념을 사실상 완성한 것은 주나라였다. 공자가 늘 주나라를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로 삼았던 이유, 나아가 그 이후에도 수천 년 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양 사회에서 내내 주나라를 받들자는 존주 尊周 사상이 유지되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韓’이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글자가 된 것은 준왕과 관련이 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시대에는 지배 집단만 이주민이었으나 위만조선 때부터는 관리와 백성 들의 상당수가 중국 출신이었다.
개국한 지50여 년이 지나 제국이 안정되는 한 무제 武帝(재위 기원전141~기원전87)의 시대에 이르면 그 관계가 역전된다. 무제는 흉노와의 해묵은 빚을 청산하고 흉노를 멀리 서쪽으로 쫓아버렸다(이 흉노의 민족이동은 수백 년 뒤 유럽에서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는 세계사적 변혁을 불렀다.).
고구려의 거센 공격을 받은 낙랑은 간신히 멸망을 면했으나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이후 낙랑은313년에 최종적으로 멸망할 때까지 수백 년간 명맥을 유지하면서 북쪽의 고구려와 남쪽의 삼한 사이에서 완충지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역사에는 모본왕이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래 쿠데타로 실각한 왕은 그런 평가로 남는 법이다.
온조는 아차산의 원래 거점을 위례 慰禮 라고 불렀는데, 강을 건너서도 그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하북 위례와 하남 위례로 구분한다(지금의 서울 송파구의 몽촌토성이 하남 위례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위례라는 명칭은 한강을 가리키는 ‘아리(阿利)’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고, 왕을 가리키는 백제어인 ‘어라하(於羅瑕)’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아리는 한강의 ‘한’처럼 크다는 뜻이므로 수도의 명칭으로 적합했을 것이다. 또한 어라하는 중국 사료에 백제 왕의 호칭으로 나오는데, 실제 발음이 어땠을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 역시 ‘크다’는 뜻과 관계가 있다.
말갈은 만주족의 갈래로서 유목 문명권에 속한 부족이며,
옥저는 만주 동남부와 함경도, 동예는 옥저의 남쪽에서부터 경상북도 북부까지 퍼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민족적으로 두 나라의 주민들은 대부분 말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나라는 2세기 말경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셋 중 어디에 붙을까? 온조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정답을 찾아냈다. 우선 말갈은 논외다. 사납고 싸움을 즐기는 데다 문명의 성격이 다르고 특정한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지 않다. 그다음 낙랑은 중국 계열인 데다 온조 자신이 떠나온 고구려 쪽으로 향하는 방향에 위치해 있으니 동맹의 대상은 아니다. 따라서 답은 마한밖에 없다.
온조는 정세를 읽는 감각이 무척 뛰어났다. 낙랑과 마한은 아직 백제에 버거운 상대였으나 실은 저물어가는 해였다. 어차피 두 나라는 몰락할 터, 따라서 백제는 해가 지고 나면 어느 쪽 방향으로 진출할지를 미리 계획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백제가 선택할 방향은 남쪽밖에 없다. 온조가 낙랑을 뿌리치고 마한과 우호를 유지한 것은 그런 판단에서였다. 미래의 적에게 오히려 우호를 보이는 그의 전략은 장기적인 정세관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신라 왕실의 성은 박씨, 석씨 외에도 김씨가 있지 않던가? 김씨가 오늘날 대한민국 최대의 성씨가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신라는 박씨(혁거세), 석씨(탈해)에 이어 김씨의 건국신화도 필요하다.
이주민 국가였던 만큼 신라는 건국 시조가 여럿일 수밖에 없다.
가야의 김수로왕을 시조로 삼는 김해 김씨 이외에 모든 김씨의 시조는 김알지다.
다른 세력들과 달리 탈해가 일본 출신이라는 사실은 한반도와 일본의 고대 관계가 상당히 밀접했음을 말해주는 강력한 단서다.
당시 일본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수많은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고, 신라에 도움만이 아니라 피해도 많이 끼쳤다
더욱이 후대의 평범한 지배자들은 자연스럽게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선배이자 영웅의 이름을 계속 간직하려 했을 것이다(이집트의 파라오들이 호루스의 환생임을 자처한 것도 같은 맥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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