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할 점은 ‘오늘’의 관점에서 당시의 한반도?일본의 관계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현대의 시각으로 과거를 보면 역사를 올바로 파악하기 어려울뿐더러 자칫하면 현재의 이해관계에 따라 역사를 왜곡하게 될 수 있다.

한때 일본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던 임나일본부설이나 일부 국내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한반도 왕계의 일본 경영설은 내용으로 보면 정반대지만, 둘 다 지금의 시각에서 과거를 본 그릇된 주장일 뿐 아니라 극우적 역사관에서 나온 허구적 이데올로기다. 고대에는 한반도도 일본도 단일한 나라가 아니었고 민족적 정체성도 생겨나지 않았으므로, ‘두 지역’은 한 쪽이 상대를 지배하는 일방적인 관계를 취한 게 아니라 서로 자연스럽게 교류했을 것이다.

다시 분열의 대륙풍이 불기 시작한다.1000년 전 주의 동천 이후 전개되었던 춘추전국시대에 이어 중국의2차 분열기다.1차 분열기에 제후국들은 주 왕실을 예의상으로만 섬기면서 실은 자기들끼리 패권을 다투었다. 그러나2차 분열기의 제후들은 아예 한 황실의 문을 닫아걸고 노골적으로 패권 다툼을 벌인다.

사실 당시 위는 오와 촉이 동맹을 맺고 거세게 도전하는 상황을 맞고 있었으므로 후방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 판에 랴오둥 태수 공손연
公孫淵
이 오나라와 위나라 사이에서 농간을 부리며 외교적 이득을 취하고 있었으니 분통이 터질 따름이었다(랴오둥은 후한 말부터3대에 걸쳐 공손씨 가문이 독립 왕조처럼 지배하고 있었다)

공통의 이해관계를 토대로 하는 동맹은 그 이해관계가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법이다.

, 화북을 장악한 위는 북방과 동북방을 개척했다. 랴오둥 정벌과 고구려 침략은 이 전략의 일환이다. 그러나 만주까지 손에 넣으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만주를 복속과 제어의 대상으로 볼 뿐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게 된다. 따라서 만주에 관해서는 늘 모호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 ‘만주의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만주 출신의 청 제국이 대륙을 정복하는 17세기의 일이다.

특히 3세기 후반부터 화북 일대는 이른바 5호(‘다섯 오랑캐’)로 불리는 북방 민족들이 주름잡게 되는데, 이들 중 하나가 선비족

고구려는 중앙 권력이 불안정한 고비마다 귀족들의 쿠데타가 발생해 도약의 계기를 만들어냈다. 이번에도 효과는 있었다.15대 미천왕
美川王(재위300~331)이 된 소금장수 을불은 나라의 대내외적 우환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개가를 올렸다. 우선 조카의 즉위를 본 봉상왕이 두 아들과 함께 자결함으로써 장차 권력 분쟁의 불씨가 사라졌다.

진이 한을 계승할 만한 통일 제국이 못 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을 무렵, 미천왕은 고구려에 기회가 왔음을 감지했다. 그는 예전처럼 랴오둥에 미련을 두지는 않는다. 이제 전선은 북쪽이 아니라 남쪽에 구축해야 한다. 특히 모국인 한이 멸망한 지80년이 넘었는데도 한4군의 하나가, 더구나 중국과 접경하지도 않는 중국의 군현이 아직까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이 불합리하다. 미천왕의 눈앞에는 일찍이 동천왕이 품었던 따뜻한 남쪽 나라의 꿈이 어른거린다.

204년에 랴오둥의 공손씨 정권은 낙랑군 이남의 지역을 따로 떼어내 별도의 군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대방군이다.

(앞서 보았듯이102년에 신라는 파사왕이 가야의 수로왕에게 중재를 구할 정도로 약소국이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와 신라의 초기 다툼에서는 신라의 규모가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신라는 역사에 이름조차 누락된 여러 소국과 함께 위로는 진한, 아래로는 변한과 가야에 막혀 있었으므로 충청도 일대까지 진출할 힘은 없었다.

마치 당시에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 중남부의 패권을 놓고 겨루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백제는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장악하고 남쪽과 동쪽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었으나 신라는 아직 경상도 일대의 수많은 소국 중 하나에 불과했으며, 아직 자기 지역의 패자로 발돋움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역사를 이해할 때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후대의 상황을 과거로 소급하는 것이다. 백제와 신라는 오늘날까지 이름과 역사가 전해지기 때문에, 막연히 두 나라를 처음부터 상당히 안정된 나라로 인식하기 쉽다

‘생존이 곧 미덕’이라는 말은 당시 신라에 가장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는 그냥 존속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신라와 엇비슷한 처지였던 주변의 소국들은 신라의 풀이 조금씩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그 풀로 고여 들었다. 북쪽의 말갈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지면 그 유민들은 신라로 내려왔다. 낙랑과 대방의 백성들도 난리를 피해 남쪽으로 오는 사람이 늘어났다. 심지어 일본에서조차 바다 건너 신라로 오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내해왕의 뒤를 이은 조분왕
助賁王(재위230~247)은231년 지금의 김천에 해당하는 감문국을 공격해 영토화하고, 다시5년 뒤에는 영천의 골벌국을 병합했다(고구려나 백제의 초기 역사와 달리 생소한 소국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신라 초기 한반도 남동부가 그만큼 부족국가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최종 승자는 위도 아니었다. 당대에 이루지 못한 조조의 야망은 아들이 제위에 오름으로써 성공한 듯했으나 곧이어265년에 사마염
司馬炎
이 새로 진

을 건국함으로써 중국의 삼국시대는 짧게 끝났다.
하지만 그것은 통일이 아니라 오랜 분열의 서곡에 불과했다. 이후 중국은589년 수

제국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300여 년 동안 여러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기를 맞게 되며, 더욱이5세기부터는 화북과 강남에 각기 다른 왕조들이 병존하는 남북조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동북아시아 질서의 중심이 약화된 격변의 시대를 맞아 한반도 역사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생겨난다.

중요한 것은 신라가 그 외래인들을 적대시하기는커녕 전혀 낯설게 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애초부터 토박이가 없는 이주민 국가였고 초기 왕계도 여러 외래인 세력이 얽혀 형성되었던 만큼 신라는 어느 민족, 어느 집단이 찾아오든 배척하지 않았다. 초기 신라가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바로 이 열린 태도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