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영화의 시대, 개정2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반성완 외 옮김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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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1880년 이후 자연주의는 서서히 쇠퇴하며 인상주의가 나타난다.

인상주의는 ˝도시적 양식˝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19세기 말의 도시에서는 기술의 발전으로 상품을 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었으므로 오늘의 새것이 내일은 헌것이 된다.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나오는 ˝새것˝ 때문에 물질적 자산에 대한 집착이 약해지고, 그 결과 정신적 자산에 대한 집착마저 희미해지게 된다. 따라서 순간적인 인상에 집착하는 예술 사조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상주의를 저자는 ˝동적 발전 경향의 정점˝이며, 정적 중세상의 완전한 해체라고 한다.

영속성과 지속성을 중세의 특성이라고 한다면, 그 대척점에 있는 것, 즉 순간성의 예술이 인상주의라는 것이다.

햇빛의 색이 모두 같은 색일까? 흰 벽지는 모두가 다 같은 흰색일까?

햇빛의 색이 새벽, 오전, 정오, 오후, 황혼에 모두 다르듯, 모든 것은 쉴 새 없이 변화하는 상태에 있고, 각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는 것, 기억된 색채가 아닌 실제 색채(구체적 인상)를 포착하는 것. 그것이 인상주의다.

인상파가 보기에 모든 것은 일시적이며, 현실이란 존재가 아니라 생성, 결정된 상태가 아니라 움직이는 과정이다.

인상파는 지금 우리에게는 익숙하고, 가장 인기 있는 예술 사조 중 하나지만, 처음 나왔을 땐 엄청난 충격이었다고 한다. 인상주의 전시회에 간 사람들은 ‘조롱받는‘ 기분을 느끼며 화를 냈다고 한다.

마네, 모네, 고흐는 현재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인데, 정작 그 당시에는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니 놀라웠다. 어쩌면 난해하기로 악평 높은 현대 미술도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사랑받는 날이 오지 않을까?


<20세기 예술과 영화의 시대>

19세기 예술의 기틀이 1830년에 잡힌 것처럼 20세기 예술은 1920년에 기틀이 잡힌다. 즉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20세기 예술의 틀이 잡힌 것이다.

이 시기 예술 사조는 형식의 새로움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다.

다다이즘은 모든 클리셰에 대한 저항이다. ˝영원의 척도로 볼 때 모든 인간 행위는 쓸데없는 것˝이라는 다다이즘 선언문에서 엿볼 수 있듯이, 다다이즘은 예술의 포장이라 할 수 있는 형식을 파격적으로 파괴한다. 이른바 형식의 테러리즘이다.

큐비즘으로 유명한 피카소는 이러한 다다이즘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 작가이다. 항상 새로운 화법을 추구한 그는, 형식을 매번 새롭게 함으로써 형식의 자의성을 보여주었다. 예술이 단순히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예술과 자연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현상이다˝는 명제를 피카소를 보며 재확인할 수 있다. 즉 작품은 현실(자연)에 덧붙이는 주석일 뿐인 것이다.

초현실주의는 다다이즘에 자동기술법을 더함으로써 무의식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보면 꿈을 꾸는 듯한데, 이는 매너리즘 시기 그림과도 비슷한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1929년 미국에서 대공황이 일어나고,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으로 인해 체제가 무너질 거라는 두려움이 퍼지게 된다.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을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각 국가에서 사회주의(ex_볼셰비즘)와 파시즘(ex_나치)이 퍼지게 된다. 이 두 가지 사회체제의 공통점은 ˝기술중심주의˝이다.

예술에서 가장 기술적인 면이 강한 영화가 사회주의의 선전 도구로 쓰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영화는 그림책처럼 이해하기 쉽고, 언제 어디서든 값싸게 즐길 수 있기에, 진정한 민중 예술로 거듭나게 된다.

연극과 영화는 비슷하지만, 영화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시간과 공간이 서로 비슷하게 쓰인다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몽타주 기법을 보면 여러 컷을 2~3초 단위로 짧게 잘라 보여줌으로써 시간과 공간이 혼재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느낌은 연극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으며 온전히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다.

또한 영화는 운동, 속력, 속도를 묘사할 때 가장 영화답다. 어떤 연극도 영화만큼 액션신을 잘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영화가 활동사진이며, 기술에 근원한 예술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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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세트 - 전4권 - 개정2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반성완 외 옮김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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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리즈들도 그렇지만 특히 4권이 가장 현학적이고, 부르주아지(신흥부자)들과 자본주의에 대한 가없는 증오로 가득하다. 벼락부자에 대한 혐오 이면에는, 행운을 잡지 못한 아쉬움과, ‘내가 그렇게 돼야 했는데‘라는 회한이 가득차 있는 듯하다. 돈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지식을 쌓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렇게 똑똑한데 돈이 별로 없다니 세상은 썩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지식인이란 이토록 역겨운 특성도 갖고 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읽으면서 내내 든 생각 대충 다음과 같다.

*사람은 어떻게든 남과 달라지고 싶어 한다.
: 비교하고 구분 짓고 ˝남과 다름˝을 강조하는 이면에는, 오히려 인생의 본질은 ˝거기서 거기˝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예술은 형식이다
:본질은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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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영화의 시대, 개정2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반성완 외 옮김 / 창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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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상황과 자연주의 문학>

우리가 아는 문학의 기틀은 1830년에 잡힌다.

1830년은 프랑스 7월 왕정(1830~1848)이 시작된 시기다.

7월 왕정을 한마디로 말하면 ˝절충과 타협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정치적으로는 진보, 경제적으로는 보수주의의 시기였다. 실상은 부르주아를 위한 정책을 대거 실시하여, 이 시기 이후 부르주아가 귀족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하게 된다.

˝어떤 사회도 귀족 없이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7월 왕정의 귀족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대기업가(부르주아지)들입니다˝

1836년 어느 의원이 했다는 이 말에서 7월 왕정 당시의 상황을 대략 짐작해 볼 수 있다.

즉 1830년 이후 모든 것은 자본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고, 자본을 많이 쌓은 사람들이 칭송받는 사회가 된다. 자본주의는 중세 후기부터 계속 발전되었지만, 자본이 사회를 지배하는 논리로서 두각을 드러낸 것은 1830년 7월 왕정 이후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지금 사회의 기틀이 잡힌 게 바로 1830년 7월 왕정기이므로, 예술이 사회를 반영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현대 문학의 기틀은 1830년에 잡혔다고 저자는 주장하는 것이다.

19세기는 또한 소설의 황금기였다.
1836년 <라 프레스(La press)>라는 신문이 광고를 싣고 구독료를 낮춤으로써 대중 독자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이러한 신문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읽을거리는 단연 연재 소설이었다.

신문으로 인해 소설 수요가 폭증하자 각국에서는 걸출한 소설가들이 나오게 된다.

프랑스 - 뒤마, 스탕달, 발자크, 플로베르, 졸라
영국 - 디킨스, 조지 엘리엇
러시아 -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19세기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연주의는 예술적 묘사에 자연과학의 정밀성을 적용한 사조다.

낭만주의까지는 진실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주관적이었다면, 자연주의부터는 그 기준이 더 객관적으로 바뀌게 된다.

자연주의가 19세기의 주도적인 사조로 자리 잡게 된 이유에는 1848년 혁명의 실패에 대한 좌절감이 깃들어 있다.

1848년 프랑스에서는 7월 왕정을 뒤엎는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그 결과 제2공화정이 시작되는데, 이 제2공화정은 3년 뒤 1851년 나폴레옹 3세가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사라진다. 그 뒤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기(1851~1870)가 시작된다.

이러한 실패한 혁명에 의해 사람들은 이상이 좌절됨을 느꼈고, 그에 따라 현실(사실)에 집착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로 19세기의 주도적인 문예사조는 자연주의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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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공통점은 서구식 개인주의를 사회악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19세기는 여러모로 벼락출세의 시기였다. 부르주아는 귀족을 밀어내고 새로운 귀족이 되었다. 돈만 가지고 있던 그들은 혁명을 교묘하게 이용해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획득한다.

나폴레옹은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유럽의 황제가 되었다. 여러모로 19세기는 사회적 상승 의지가 강한 시대였다.

스탕달은 이를 ˝나폴레옹의 문제˝라고 말하며, 영웅적 개인을 추켜세웠다. 모름지기 영웅이라면 사회적 인습을 무시하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같은 러시아 작가들은 이러한 서구식 개인주의를 자기파괴에 이르는 길로 보았다.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콜니코프는 가난한 대학생이다. 돈이 없어서 학업을 중단한 그는 자신도 나폴레옹 같은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전당포를 운영하는 유대인 노파를 죽이는 일은, 벌어들인 돈을 사회에 환원한다면, 영웅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생각했던 대로 노파를 죽인 순간, 이것은 큰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주인공은 파멸의 길로 나아간다.

˝포위당한 도시를 폭격하는 것이 왜 도끼로 살인하는 것보다 더 영예로운 건가, 나는 이해할 수 없어.˝

이러한 라스콜니코프의 말에서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톨스토이도 <안나 카레니나>에서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주인공(안나 카레니나)을 통해, 개인의 선택이 무한한 자유를 가질 수는 없다고 역설한다.

두 작가는 사회로부터의 개인의 해방, 개인의 고독/고립을 최대 악으로 보았다는 면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는 러시아 문학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책의 작가인 아르놀트 하우저는 이러한 공동체 중심 사고방식의 이유를 러시아의 늦은 발전(20세기 초반까지도 러시아는 농업국가였다)에 있다고 보았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러시아 문학이 이 시대에도 읽히는 이유는 개인의 소외와 고립이 오히려 현대에 더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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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
메리 셸리 지음, 박아람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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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에 출간된 책. 이 책이 200년을 넘게 살아남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프랑켄슈타인>은 현대적인 소설이다.

형식적인 면에서 쉽고 간결하다는 것이 그렇고
내용적인 면에서 개인의 소외와 과학의 방종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쉽고 간결한 형식에 나는 약간 실망했다. 세계 최초의 SF 소설이라 하니, 어느 정도 과학적 서술이 나오려니 기대했으나, 이 소설에서 과학적인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괴물의 창조 역시 구체적인 과정/원리 없이 번개처럼 갑자기 일어난 사건에 가깝게 묘사된다. 반면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하게 나오는 걸 보면, 아마 작가 본인이 과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이 책을 처음 구상하고 펴낼 때, 작가는 10대 후반이었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온 시기가 1818년이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전보가 발명되기 이전이었으며 진화라는 개념조차 정립되기 이전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녀의 상상력이 놀랍기만 하다.

가장 놀라운 건 서사가 매우 단조롭다는 것이다.

이 소설을 짧게 요약하자면, ˝어떤 사람이 시체를 되살리고, 되살아난 괴물이 창조주의 소중한 사람들을 죽이며 분풀이를 한다. 둘은 서로를 죽이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이다.

정말 단조로운 서사다. 보통 이야기가 풍부해야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소설은 단조로운 이야기에도 재미있다.

그 이유는 ˝설정˝ 때문인 거 같다. 다른 말로 하자면 ˝대립 구도˝가 흥미진진하다.

자신이 만든 괴물과 싸우는 프랑켄슈타인은, 자기 그림자와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빛이 있는 한, 그 둘은 불가분의 관계다. 하지만 실체가 사라지면 그림자도 사라진다.

이 소설의 설정은 정말 여러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고, 다 말이 된다. 그래서 고전이 되지 않았나 싶다. 시간이 흘러도 계속 재해석할 수 있어야 고전이 되는 건 아닐까?

원작을 보기 전에 뮤지컬을 먼저 봤는데, 소설을 보니 뮤지컬이 각색을 꽤 많이 했다 싶었다.

원작과 뮤지컬의 차이로는
1. 빅토르 어머니의 죽임이 괴물 탄생과 직접적 연관 없음
2. 괴물의 탄생이 앙리 클레르발과 연관 없음
3. 괴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원작에서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음

이 세 가지가 가장 큰 거 같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뮤지컬의 각색이 정말 좋은 거 같다. 특히 괴물의 탄생을 앙리와 연관시킨 부분 덕분에, 둘 사이의 관계에 이입하기가 더욱 쉬워진 느낌이 있었다. 괴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무대 연출이 정말 좋았기에, 원작에서는 어떻게 괴물을 만들지 기대했는데 정말 아무런 원리도 없이 뚝딱 만들어져서 좀 어이가 없었다.

괴물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살인마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내가 앙심을 품은 건 불행하기 때문이야.˝ -201p.g

세상에서 배척당하면 증오와 이기심을 품는 게 당연한 걸까?

197~199p.g 부분에서 괴물이 어떻게 주인공 동생과 하녀를 죽였는지에 대한 트릭 설명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정말 작위적이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초반부, 괴물에게 어느 정도 선한 마음이 있는 것처럼 묘사한 것치고, 그렇게 갑자기 악해지는 게 개연성(혹은 핍진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조커>에서 조커가 되기 전 주인공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살인마에게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는 현대의 목소리에 이 작품은 약간 맞지 않는 구석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소설이 앞으로도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부족한 부분보다 훌륭한 부분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모든 아웃사이더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매우 현대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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