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 역사에서는 통일이 기본이고 가끔 분열기가 끼여 있었던 반면, 로마 제국 이후 정치적 구심점이 없었던 유럽의 역사에서는 분열이 기본이고 이따금 국지적 통일이 이루어지는 역사가 전개되었다. 이 점이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다.

석굴암에서 굽어보는 바로 앞바다는 문무왕의 해중릉인 대왕암이 있는 곳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왜구가 경주를 침략하는 주요 노선인 탓으로 신라 왕실에서 불력으로 방어하기 위해 절을 많이 지은 곳이었다. 그렇다면 불국사와 석굴암은 정신적인 왜구 방어기지였던 셈이다.

만약 성공했더라면 독서삼품과는 과거제로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집권자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의 수준이다.

‘골(성골, 진골)’에 속하는 왕족은 시험을 치르지 않고도 원하는 직책을 가질 수 있었고, ‘품’에 속하는 귀족들, 그중에서도 최상층 세력인 육두품은 독서삼품과에 응시하느니 차라리 중국에 유학을 가는 게 관직 임용에서나 학문적으로나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균전제란 쉽게 말해 토지[田]를 농민들에게 고르게[均]나누어주고 일정량의 생산물을 조세로 거두어들인다는 제도다(일본의 반전제도 내용은 같다)

원래 새 나라가 출범할 무렵에는 토지가 흘러넘치게 마련이다. 이전 왕조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하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서 새로이 분급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중기쯤 되면 토지가 부족해진다. 인구는 늘어나고 봉급을 주어야 할 관리도 늘어난다(관리의 봉급은 물론 토지다). 결국 그 부담은 농민들에게 지워지고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토지를 버리고 떠난다. 당이 무너진 과정도 바로 그랬다.

40대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에서부터 45대 신무왕까지 여섯 명의 왕은 모두 원성왕의 증손이다. 비록 그중 세 명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기는 했지만, 800년에서 839년까지 40년 동안 신라 왕위는 친형제 셋을 포함해서 형제들끼리 주고받은 셈이다. 만약 당의 제국 정부가 예전처럼 굳건했더라면 그렇듯이 신라의 왕위 계승이 어지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쿠데타로 집권한 신라 왕을 책봉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문책을 가했을 테니까. 그러나 당시 당의 황실은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으므로 변방의 사정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신라의 왕권마저 넘볼 수 있었던 이유는 당 제국이 더 이상 동북아시아 질서의 축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해가 영토 확장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선왕의 역량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역시 당의 국력이 약해졌다는 배경의 덕분이다.

발해는 전성기 때조차도 랴오둥을 노리지 않았다. 그것은 발해의 운명을 위해 커다란 판단 실수였을 뿐 아니라 당말오대에 북방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분위기에 역행하는 자세였다. 설령 힘이 모자란다 해도 당이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발해는 어떻게든 랴오둥에 진출하려 노력했어야 한다. 만주를 근거지로 삼는 왕조로서 랴오둥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결국 패망하고 만다는 것은 일찍이 고구려의 역사 전체를 통해서도 분명한 사실로 확인된 바 있다

발해가 만주에 안주한 것은 곧 북방에서 부는 새로운 바람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발해를 대신해 세대교체의 선두 주자로 발돋움한 것은 거란이었다. 몽골 초원의 동부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던 거란은 당의 약화를 틈타 서서히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남북조시대에 북조를 지배한 옛 선비족의 후예였다.

당 제국이289년의 사직을 끝으로 멸망했을 때, 거란의 우두머리인 야율아보기는 드디어 요

를 건국했다

‘애제’라면 ‘슬픈 황제’라는 뜻이니까 황제의 시호로는 영 이상하게 보이는데, 시호 자체가 죽은 뒤에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중국 역사에서 비운에 죽었거나 한 왕조의 마지막이 된 황제는 대개 애제 또는 공제(恭帝)라고 부른다. 재위 중에 쿠데타가 일어나 살해당한 신라의 혜공왕, 애장왕, 민애왕 등의 시호에 ‘공’이나 ‘애’가 들어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불행히도 진성여왕은200년 전의 선배 여왕들과 같은 조건에서 출발하지 못했다. 그때는 비록 왕실은 흔들려도 나라는 튼튼할뿐더러 무엇보다 진골 귀족들의 충실한 지원을 받았으니까.

궁예가 첫 도읍지로 정한 오늘날 철원의 위성사진이다. 이것으로 궁예는 반란군의 수괴에서 일약 일국의 왕으로 출세했는데, 이렇듯 중부 지방에서 쉽게 반란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애초부터 신라가 전국적인 왕조가 되지 못하고 경주 정권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곧이어 견훤이 전주에서 일어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중국 측 사서에 옛 고구려를 고려라 표기한 경우가 많은 탓으로 고구려는 고려라고도 불렸다).

후백제나 후고구려라는 국호에서 ‘후(後)’라는 수식어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붙인 것일 뿐 당대에는 그냥 백제와 고구려였다. 견훤과 궁예가 옛 왕조의 부활을 선언한 데는 중국 역사에서 모방한 탓도 있을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는, 특히 분열 시대에 탄생한 새 왕조들이 전통과 권위의 결여를 극복하기 위해 옛 왕조들(특히 춘추전국시대의 나라들)의 국호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907년에 중국의 당 제국이 마침내 멸망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예고된 사태였지만 그래도 중국은 신라 왕실의 영원한 정신적 지주였다. 이제 그 기둥이 무너졌으니 신라의 사직도 얼마 남지 않을 게 뻔했다.

고려는 중앙집권화를 이루지 못한 데다 고구려의 후예라는 구호와는 반대로 신라의 경주 정권을 계승한 데 불과했기에 중화 세계의 ‘약한 고리’로 남았고, 거란의 요와 여진의 금으로 이어지는 비중화 세계의 만만한 목표물이 될 수밖에 없다.

새 왕조가 들어설 경우에는 헌 왕조를 무너뜨리는 아픔을 겪어야 정상이다. 그런 과정이 생략되었기에 고려는 새 나라답지 않게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걷지 못하고 모순에 찬 첫걸음을 내딛게 된다.

첫 번째는 중앙정부와 지방 호족 세력 간의 모순

그는 즉위한 뒤 곧바로 호족들에게 일일이 사신을 보내면서 저자세를 취했다.

935년 자신에게 투항해온 견훤을 상부
上父
라고 부르며 받든 것은 그런 외교의 대표적인 사례다(견훤은 그보다 불과 열 살가량 위였으니 왕건의 저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런 그의 정책을 중폐비사(重幣卑辭)라고 부른다. 말뜻은 비단[幣]을 주고 말[辭]을 낮춘다는 것인데, 실제로 왕건은 호족들에게 재물을 주고 후하게 대하면서도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고 겸손하게 행동했다. 고압적인 궁예와는 정반대였으니 호족들은 당연히 만족했다. 아버지 때부터 오랜 2인자로 처신한 데서 몸에 익은 태도였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자세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왕건이 생각한 안전장치는 신라의 상수리제도를 모방한 기인
其人
제도였다. 지방 관리를 수도에 파견하게 하는 상수리제도에 비해 기인제도는 관리가 아니라 호족의 자제를 볼모로 삼는 것이므로 더 강력했다.

혈연보다 더 강력한 안전판이 또 있을까? 호족들을 다 친척으로 만들면 된다. 즉 통혼으로 혈연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한 가족이니 서로 믿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호족들은 국왕의 권위를 빌릴 수 있고 국왕은 호족들의 힘에 의지할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스물아홉 명의 아내에게서 얻은 그의 아들들은 알려진 것만 해도 무려 스물다섯 명이었다. 이 왕자들이 고려왕조의 첫 번째 진통을 부른다.

그 덕분에 왕건은 고려만이 아니라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아내를 거느린 국왕이 된다(조선시대의 왕들은 더 많은 처첩을 거느렸지만 그때는 후궁이 제도화되었으므로 비교하기 어렵다). 기록에 나와 있는 것만도 무려 스물아홉 명(왕후 여섯 명, 부인 스물세 명)인데, 거의 대부분이 호족 세력과 결탁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한 결과였으니 그야말로 ‘육탄적’인 정책이 아닐 수 없다.

943년에 왕건이 죽자 일단은 맏아들인무

가 혜종
惠宗(재위943~945)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그가 오래 버티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맏이라는 강점은 있으나 스물다섯 명의 왕자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그 기준이란 바로 외가의 힘이다. 왕자들 모두 아버지는 왕건으로 같으므로 왕자들의 ‘실력’은 곧 어머니 집안의 세력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왕건은 미약한 왕실을 강화하기 위해 근친혼을 적극 장려한 바 있었다(근친혼이 금기시되는 것은 유학이 뿌리를 내리는 조선시대부터다).

고려 태조 왕건은 왕권 안정을 위해 각지의 호족들과 통혼을 맺어 살아 있을 당시엔 효과를 보았으나, 사후에는 왕위 계승을 두고 분쟁을 넘어 내전까지 치르게 됐다. 훈요십조에는 권력 승계의 원칙이랄 게 없고 두루뭉술하게 서술되어 후대의 혼란을 왕건이 자초한 셈이 되었다.

문제는 사병 조직의 근간이 노비라는 점이었다.

호족들이 많은 노비를 거느리게 된 것은 주로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호족들이 멋대로 토지를 병합하면서 토지에 딸린 양민들을 강제로 노비로 삼았기 때문이다.

956년에 광종은 노비안검법
奴婢按檢法
을 시행했다. 노비들을 풀어주라는 조치였는데, 말하자면 노예해방인 셈이다. 그러나 실제 목적은 인도주의적인 데 있지 않고 호족들의 무장 조직을 약화시키려는 데 있었다.

게다가 노비안검법은 광종에게 짭짤한 부수입도 주었다. 노비에서 양민으로 신분 상승한 그들이 이제 호족이 아니라 중앙정부에 조세를 바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호족들은 경제적 기반이 약해졌고, 그만큼 중앙 재정은 튼실해졌다.

그들의 실제적인 권력은 자기 마음대로 지방 관리를 임명하고 지방행정을 주무르는 데서 나왔다. 따라서 그것마저 뿌리 뽑지 않으면 호족들의 세상을 종식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광종이958년에 추진한2차 개혁은 바로 과거제였다.

과거제의 ‘형식’은(관리 임명권을 중앙에서 쥐게 되므로)호족 세력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었고, 과거제의 ‘내용’은(유교 체제를 성립시키는 데 도움이 되므로)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과거제를 통해 중앙집권을 이룬다는 꿈은 이미 물 건너갔고, 결국 중앙정부는 호족들과 다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속현
屬縣(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행정구역)이다.

쉽게 말해 중앙정부가 파견한 지방관은 대호족의 ‘손님’처럼 형식적인 수령의 지위만 유지하고 사실상의 지방행정은 호족이 알아서 관장하는 식이다. 모두335개에 이르는 고려의 현 가운데 속현의 비율이 무려90퍼센트 이상

(이후 속현은 조금씩 줄었으나 완전히 소멸한 것은 중앙집권화가 확실히 이루어진 조선시대의 일이다).

중국의 송에 해당하는 한반도 왕조는 후대의 조선이다. 당에서 시행된 과거제가 송대에 꽃피웠다면, 고려에서 시행된 과거제는 조선사회의 골간이 되었다. 송이 완벽한 유교 제국이었다면, 조선은 완벽한 유교 왕국이었다. 즉 송과 조선은 둘 다 유학 이념에 입각한 사대부 지배 체제의 완성형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나중에 보겠지만 송과 조선에서 당쟁이 극에 달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유학이 체제 내에 완전히 뿌리를 내렸다면 그다음에는 유학 내부의 논쟁이 벌어지는 게 순서일 테니까.

전시과에서 토지를 분급하는 기준에는 관품
官品
과 더불어 인품
人品
이라는 모호한 요소가 섞이게 된다.

인품이란 지방 호족들의 세력을 뜻하는 용어다. 쉽게 말해 세력이 큰 호족은 인품도 높다는 것이다

관품과 더불어 인품이 전시과의 기준이라는 것은 곧 고려가 관료제를 지향하면서도 실은 귀족 체제에 머물고 말았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국가가 관리들에게 토지를 녹봉으로 내준다고 해서 토지 자체의 소유권을 넘겨주는 것은 아니다. 사실 소유권 자체를 주면 근본적인 문제가 생기게 된다. 토지를 받은 관리가 퇴직하고 나서 반환받을 수도 없어질 뿐 아니라 나중에는 재정(토지)이 바닥나 새로 관리를 뽑을 수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시과에 따라 관리들에게 주어지는 ‘토지’란 토지의 완전한 소유권이 아니라 재임 기간 중 할당받은 토지의 생산물(즉 조세)을 수취할 권리, 즉 수조권
收租權
이다.

유학의 경전인 《시경
詩經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땅의 사람 중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 이것을 왕토
王土
, 왕민
王民
사상이라고 부르는데, 정치적 지배자가 나라 전체의 주인이라는 동양 특유의 사상이다.

이 사상에 따르면 모든 토지는 왕의 소유이므로 토지를 누구에게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산관
散官(퇴임한 관리)은 임기가 끝났으므로 법제상으로는 토지의 수조권을 반납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퇴직금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수조권을 반납하고 나면 관리와 그의 가족들은 먹고살 길이 없다. 그래서 관리가 퇴임한 뒤에도 사실상 수조권은 계속 보장된다. 이런 관행이 자리 잡으면서 그 토지의 수조권은 자연스럽게 자식에게도 상속된다. 애초에 녹봉으로 받은 토지가 사실상 그 가문의 소유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화폐경제의 시대가 아니었기에 관리들에게는 월급봉투 대신 토지를 주었다. 그러나 모든 토지의 소유권은 왕(국가)에게 두고서 수조권만 준 데서 모든 폐단이 비롯된다.

신라에서 고려로 이행할 때 중국에서는 당­?송 교체기였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이행할 때 중국에서는 원­?명 교체기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거란을 멀리하라고 가르친 훈요십조는 고려왕조가 실은 새우의 처지임을 망각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일찍이 진시황은 원교근공
遠交近攻(멀리 있는 나라와 교류하고 가까이 있는 나라를 공격한다)이라는 정책을 효과적으로 구사해 대륙 통일을 이룬 바 있었지만, 그것은 주체가 힘과 실력을 갖추고 있을 때나 쓰는 전략이다. 바깥으로 내세울 것 없고 안으로 취약한 고려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요를 적대시하고 먼 송에 사대하려 한 모순된 대외 정책은 결국 한반도에 피바람을 부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42년, 연개소문은 평양성 남쪽에서 휘하 병력의 열병식을 한다는 구실로 귀족들을 초대했다. 귀족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지만,100여 명이나 초청을 받았는데 어쩌랴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귀족들의 예상과 달리 연개소문은 그 자리에서 그들을 모조리 살육하고 곧바로 궁중에 들어가 영류왕까지도 살해해버렸다. 그런 다음 왕의 조카를 보장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대막리지
大莫離支
가 되어 고구려의 전권을 장악했다.700년 고구려 역사상 최대의 쿠데타였다.

우두머리는 둘일 수 없는 걸까? 불행히도 짝을 이루어 나라를 구해냈던 두 영웅인 영류왕과 을지문덕은 막상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나서는 화합을 이루지 못했다. 영류왕은 장수왕 이래 고구려 왕실의 전통적인 정책인 남진을 고집한 반면, 을지문덕은 중국의 왕조 교체기를 틈타 랴오둥을 다시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랴오둥은 길이 멀어(원래 랴오, 즉 요遙라는 땅이름부터가 ‘멀다’는 뜻이다) 양곡을 수송하기 어렵고 고구려는 수성을 잘하여 정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의 말은 고구려 정벌의 어려움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었다.

밤낮으로 두 달간을 공략한 끝에 당 태종은 안시성을 부술 수 없음을, 아울러 고구려를 정벌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신라의 가장 큰 임무는 전투보다 ‘보급’

일찍이 고구려 정벌에서도 중국이 가장 애를 먹었던 부분은 바로 군량을 확보하는 문제였다.

오히려 보급 병력이 정작 필요한 전투 병력보다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앞서 본 것처럼 수의 고구려 침공 때는 보급 병력이 전투 병력의 두 배를 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라 왕실은 근친혼 때문에 아들과 사위가 모두 왕의 직계 후손이었고 따라서 친가와 외가의 구분이 모호했으므로 갈문왕 제도가 성립할 수 있었다.

신라 특유의 갈문왕(葛文王) 관습은 여기서 비롯된다. 갈문왕이란 신라 초기에 왕의 아버지, 장인, 형제 등에 두루 주어지는 일종의 관직 같은 신분이었다. 쉽게 말해 왕위 계승권이 있으나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족들에게 현직 왕이 ‘위로’하는 의미에서 수여한 작위라고 보면 된다.

317년 한족 왕조인 진이 강남으로 옮겨가 동진으로 명패를 바꾸자 화북 일대는 북방 민족들의 세상이 되었다. 이른바5호라고 불리는 민족들이 옛 중국 문명의 발원지이자 전통적 중심지인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였는데, 그중 고구려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은 앞서 보았듯이 선비족이었다.

삼국시대의 국가들은 ‘선’ 개념의 국가라기보다 성곽을 중심으로 하는 ‘점’ 개념의 국가였다. 그러므로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라는 중요한 ‘점’을 제거한 것으로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볼 만한 근거가 충분했다.

중국의 역사가 통일 지향적인 근본적인 이유는 유럽과 달리 확고한 지리적 중심(중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사에 등장한 모든 나라는 늘 지리적 중심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으므로 아무리 분열이 심하다 해도 궁극적으로는 통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북조에서는 여러 나라가 동시에 병립하며 혼돈상을 보였고, 남조는 동진 이래로 왕조가 차례로 교대하는 식이었다. 중국 전체로 보면 북조의 안정이 더 중요했다).

오랑캐의 개념은 중화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주나라 시대부터 있었으나, 민족적으로 분명히 구분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부터다. 그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부터 장성 이북의 민족들이 오랑캐로 규정되었다.

원래 한족은 황허 문명을 이어받은 중원 부근의 민족만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춘추시대에 초·오·월 등의 제후국이 성장하면서 강남이 먼저 편입되었고 전국시대에 진이 강성해지면서 중원 서쪽까지 포함되었다. 진시황이 대륙을 통일한 것은 결과적으로 한족 문명권의 문을 닫아건 셈이다.

한반도에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삼국이 탄생하고 활발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그런 혼란과 분열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일찍이 한이라는 강력한 통일 제국이 힘을 유지하고 있었을 때는 한4군에 눌려 고대국가 체제조차 이루지 못한 게 그 증거다.

4세기 초반에 고구려가 낙랑을 정벌할 수 있었던 것도, 또 후반에 랴오둥까지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분열기의 중국이 동북아시아의 구심점 노릇을 하지 못하는 형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달력(역법)과 연호는 독립국의 상징이므로 이 무렵에 비로소 신라는 당당한 왕국이 된 것이다. 지금은 세계의 대다수 나라가 서양의 달력(서기)을 쓰니까 달력의 존재를 당연시하지만, 공통적인 달력이 없었던 과거에는 나라마다 연도를 셈하는 기준이 달랐다. 가장 일반적인 기준은 현직 왕을 기준으로 삼는 것인데, 이를테면 서기 536년을 법흥왕 23년이라고 하는 식이다.

북주 황실의 외척인 양견
楊堅
이라는 자가 제위를 찬탈하고 새로 수

라는 나라를 세웠다

589년에 양견은 남조의 마지막 나라인 진을 정복하고 오랜 남북조시대를 종식시켰다.220년 한이 멸망한 이후 무려369년 만에 다시 천하 통일이 이루어진 것

중국 역사는 분열기에 성장·발전하고 통일기에 안정·퇴조하는 현상을 되풀이한다.

중국은 늘 화북에 정치적 중심을 두고 강남을 경제적 중심으로 삼는 게 기본 공식

만약 남중국의 왕조가 통일을 이루었다면 그 예상대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족이 세운 남중국의 여러 왕조는 남북조시대 내내 물리력이 취약했다. 그러나 이민족들이 세운 호전적인 북중국의 왕조들은 북위가 지배하던 안정기를 제외하고는 내내 자기들끼리 중원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따라서 새 통일 제국인 수가 북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주변에 대해 향후 강력한 압박 전술로 나오리라는 점을 예고하고 있었다.

남조의 왕조들은 후대에 ‘6조(六朝) 르네상스’라 불리는 찬란한 문화의 시대를 열었다(오, 동진, 송, 제, 양, 진 등 남조의 여섯 왕조를 6조라고 부른다). 화가 도연명, 고개지, 서예가 왕희지 등이 바로 이 시대의 예술가들이다. 반면 북조의 왕조들은 시대적 필요에 따라 균전제와 과거제 등 사회제도를 만들었다. 이렇게 보면 오랜 분열 시대에 남중국과 북중국은 마치 분업을 하듯이 중국 사회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북위는 강남까지 아우르지 못한 반쪽 제국이라는 결함을 지닌 탓에 고구려와 타협해야 했고, 고구려는 어차피 중원을 목표로 하지는 않았으므로 서열을 인정하는 선에서 북위와 타협해야 했다. 그렇다면 언제든 중국에 북위보다 강력한 통일 왕조가 들어설 경우 고구려의 평화, 나아가 한반도의 평화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할 터였다. 거꾸로 말하면 한반도 삼국이 서로 다투면서도 성장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데는 중국이 남북조로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배경이었던 것이다.

3년간의 접전 끝에 종합 전적1승1무1패로 무승부를 기록한 양제와 영양왕은 공교롭게도 같은 해(618)에 죽었는데, 양제는 부하인 우문화급
于文化及
에게 살해당했으니 더 억울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군주들은 죽었지만 그들이 남긴 후유증은 심각했다. 대규모 전란으로 국력이 탕진된 두 나라는 이후 쇠락의 길로 급속히 빠져들었다.

양제가 암살되자 그의 이종사촌인 이연
李淵
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국의 명패를 당

으로 바꾸었다.

결국 수 제국은 불과30년도 존속하지 못하고 새 통일 왕조로 교체되었다.800년 전 첫 통일 제국의 시대를 열었던 진·한 교체기와 너무도 닮은꼴이었다.

진평왕은 아들을 두지 못하고 딸만 셋을 두었기 때문

골품이 중요한가, 성별이 중요한가?
고민하던 귀족들은 골품을 선택한다. 비록 여성이라 할지라도 성골이 아직 남아 있는 이상 왕위 계승권자는 성골이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진평왕의 맏딸인 덕만이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신라는 물론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되는 선덕여왕
善德女王(재위632~647)이다.

두 여왕이 다스린20여 년 동안 왕실 후계 문제는 충분히 정리되었다. 이제 성골은 남자든 여자든 완전히 씨가 말랐으니 굳이 여왕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선덕과 진덕 두 여왕의 재위 기간은 오히려 옛 귀족 세력이 무너지고 이들 두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신귀족들이 집권하는 좋은 계기로 작용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의할 점은 ‘오늘’의 관점에서 당시의 한반도?일본의 관계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현대의 시각으로 과거를 보면 역사를 올바로 파악하기 어려울뿐더러 자칫하면 현재의 이해관계에 따라 역사를 왜곡하게 될 수 있다.

한때 일본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던 임나일본부설이나 일부 국내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한반도 왕계의 일본 경영설은 내용으로 보면 정반대지만, 둘 다 지금의 시각에서 과거를 본 그릇된 주장일 뿐 아니라 극우적 역사관에서 나온 허구적 이데올로기다. 고대에는 한반도도 일본도 단일한 나라가 아니었고 민족적 정체성도 생겨나지 않았으므로, ‘두 지역’은 한 쪽이 상대를 지배하는 일방적인 관계를 취한 게 아니라 서로 자연스럽게 교류했을 것이다.

다시 분열의 대륙풍이 불기 시작한다.1000년 전 주의 동천 이후 전개되었던 춘추전국시대에 이어 중국의2차 분열기다.1차 분열기에 제후국들은 주 왕실을 예의상으로만 섬기면서 실은 자기들끼리 패권을 다투었다. 그러나2차 분열기의 제후들은 아예 한 황실의 문을 닫아걸고 노골적으로 패권 다툼을 벌인다.

사실 당시 위는 오와 촉이 동맹을 맺고 거세게 도전하는 상황을 맞고 있었으므로 후방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 판에 랴오둥 태수 공손연
公孫淵
이 오나라와 위나라 사이에서 농간을 부리며 외교적 이득을 취하고 있었으니 분통이 터질 따름이었다(랴오둥은 후한 말부터3대에 걸쳐 공손씨 가문이 독립 왕조처럼 지배하고 있었다)

공통의 이해관계를 토대로 하는 동맹은 그 이해관계가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법이다.

, 화북을 장악한 위는 북방과 동북방을 개척했다. 랴오둥 정벌과 고구려 침략은 이 전략의 일환이다. 그러나 만주까지 손에 넣으려는 시도가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만주를 복속과 제어의 대상으로 볼 뿐 정복과 지배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게 된다. 따라서 만주에 관해서는 늘 모호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 ‘만주의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만주 출신의 청 제국이 대륙을 정복하는 17세기의 일이다.

특히 3세기 후반부터 화북 일대는 이른바 5호(‘다섯 오랑캐’)로 불리는 북방 민족들이 주름잡게 되는데, 이들 중 하나가 선비족

고구려는 중앙 권력이 불안정한 고비마다 귀족들의 쿠데타가 발생해 도약의 계기를 만들어냈다. 이번에도 효과는 있었다.15대 미천왕
美川王(재위300~331)이 된 소금장수 을불은 나라의 대내외적 우환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개가를 올렸다. 우선 조카의 즉위를 본 봉상왕이 두 아들과 함께 자결함으로써 장차 권력 분쟁의 불씨가 사라졌다.

진이 한을 계승할 만한 통일 제국이 못 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을 무렵, 미천왕은 고구려에 기회가 왔음을 감지했다. 그는 예전처럼 랴오둥에 미련을 두지는 않는다. 이제 전선은 북쪽이 아니라 남쪽에 구축해야 한다. 특히 모국인 한이 멸망한 지80년이 넘었는데도 한4군의 하나가, 더구나 중국과 접경하지도 않는 중국의 군현이 아직까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이 불합리하다. 미천왕의 눈앞에는 일찍이 동천왕이 품었던 따뜻한 남쪽 나라의 꿈이 어른거린다.

204년에 랴오둥의 공손씨 정권은 낙랑군 이남의 지역을 따로 떼어내 별도의 군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대방군이다.

(앞서 보았듯이102년에 신라는 파사왕이 가야의 수로왕에게 중재를 구할 정도로 약소국이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와 신라의 초기 다툼에서는 신라의 규모가 상당히 과장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신라는 역사에 이름조차 누락된 여러 소국과 함께 위로는 진한, 아래로는 변한과 가야에 막혀 있었으므로 충청도 일대까지 진출할 힘은 없었다.

마치 당시에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 중남부의 패권을 놓고 겨루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백제는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를 장악하고 남쪽과 동쪽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었으나 신라는 아직 경상도 일대의 수많은 소국 중 하나에 불과했으며, 아직 자기 지역의 패자로 발돋움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역사를 이해할 때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 바로 후대의 상황을 과거로 소급하는 것이다. 백제와 신라는 오늘날까지 이름과 역사가 전해지기 때문에, 막연히 두 나라를 처음부터 상당히 안정된 나라로 인식하기 쉽다

‘생존이 곧 미덕’이라는 말은 당시 신라에 가장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는 그냥 존속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신라와 엇비슷한 처지였던 주변의 소국들은 신라의 풀이 조금씩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그 풀로 고여 들었다. 북쪽의 말갈이 백제와의 전쟁에서 지면 그 유민들은 신라로 내려왔다. 낙랑과 대방의 백성들도 난리를 피해 남쪽으로 오는 사람이 늘어났다. 심지어 일본에서조차 바다 건너 신라로 오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내해왕의 뒤를 이은 조분왕
助賁王(재위230~247)은231년 지금의 김천에 해당하는 감문국을 공격해 영토화하고, 다시5년 뒤에는 영천의 골벌국을 병합했다(고구려나 백제의 초기 역사와 달리 생소한 소국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신라 초기 한반도 남동부가 그만큼 부족국가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최종 승자는 위도 아니었다. 당대에 이루지 못한 조조의 야망은 아들이 제위에 오름으로써 성공한 듯했으나 곧이어265년에 사마염
司馬炎
이 새로 진

을 건국함으로써 중국의 삼국시대는 짧게 끝났다.
하지만 그것은 통일이 아니라 오랜 분열의 서곡에 불과했다. 이후 중국은589년 수

제국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300여 년 동안 여러 왕조가 교체되는 혼란기를 맞게 되며, 더욱이5세기부터는 화북과 강남에 각기 다른 왕조들이 병존하는 남북조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동북아시아 질서의 중심이 약화된 격변의 시대를 맞아 한반도 역사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생겨난다.

중요한 것은 신라가 그 외래인들을 적대시하기는커녕 전혀 낯설게 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애초부터 토박이가 없는 이주민 국가였고 초기 왕계도 여러 외래인 세력이 얽혀 형성되었던 만큼 신라는 어느 민족, 어느 집단이 찾아오든 배척하지 않았다. 초기 신라가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바로 이 열린 태도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땅의 역사는 사람의 역사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인도사라고 하면 ‘인도인’의 역사라기보다 ‘인도라는 땅’의 역사를 가리킨다.

우리 역사의 무대에서 주역으로 활동한 사람들 중에는 우리 민족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있었다.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과 갈라서기도 했고, 우리 민족의 일부로 편입되기도 했다. 우리 역사의 진정한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 사람보다 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국 대륙이 분열된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고대 삼국이 발달하고, 중국이 통일되면 한반도에도 단일 왕조가 성립하는 역사적 반복은 우리 역사가 동북아시아 문명권의 중심인 중국의 역사와 불가분한 관계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이 책은 ‘한민족의 역사’보다 ‘한반도의 역사’에 중점을 둘 것이다.

아담과 셋과 에노스가 각각930년,912년,905년에 달하는 각 시대의 ‘건국자’라는 뜻일 것이다.

고대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는 게 하나의 전통이었다.

그렇다면 단군도 특정한 개인이라기보다 지배 집단의 이름이거나 지배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였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후대에 전승되면서 마치 특정인의 이름인 것처럼 바뀌었을 테고, 더 후대에는 건국 시조로 섬겨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 오랜 기간 동안 단군은 무엇을 했을까? 신화에 따르면 단군은 도읍을 평양에서 아사달로 옮기고 수백 년 동안 나라를 더 다스린 뒤, 중국 주나라의 무왕
武王(재위 기원전1111~기원전1104)이 기원전1122년에 동방으로 보낸 기자
箕子
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아사달로 들어가 은거했다고 한다.

넷째는 주나라가 세워진 기원전12세기 무렵에 단군 지배 집단이 고조선의 지배자라는 자리에서 밀려났다는 뜻이다. 이것은 한반도가 다시 중국 역사와 접촉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단군신화는 중국에서 밀려난 어느 부족이 동쪽으로 와서 현지의 원주민(한반도인)에게 미작 농법을 전하고 그들을 다스리는 지배 집단이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단군 신화가 만들어진 시기는 적어도 주나라 성립 이후이며, 그 지은이는 단군의 ‘진짜 후손’들, 즉 고조선의 지배 집단일 것이다. 그들은 직계 조상인 단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당시까지의 역사 기록을 토대로 신화를 만들었을 테고, 비록 평화로운 정권 교체였다고는 해도 주나라 계통의 새로운 지배 집단에 대해 부정적이었을 것이다

300여 년 동안 중원 일대를 지배한 주나라는 주변 세계가 점차 문명의 빛으로 밝아짐에 따라 영향력이 줄어든다. 급기야 주나라 왕실은 기원전771년 견융의 침입을 받아 도읍을 하오징
鎬京
에서 동쪽의 뤄양
洛陽
으로 옮기면서 왕실만 간신히 보존하는 약소국으로 전락한다. 이 사건을 주의 동천
東遷
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을 신호탄으로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가 개막된다. 이때부터 진시황이 대륙을 최초로 통일하는 기원전221년까지 약550년 동안 중국은 통일적인 구심점이 사라지고 제후국들이 주름잡는 기나긴 분열 시대를 보낸다. 제후들은 상징적으로는 주나라 왕실을 섬기나 사실상의 독립 군주나 다름없다.

이 화려한 분열의 시대에 중국 문명은(이후 두 번 다시 그런 시대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동양 사상의 뿌리도 그 무렵에 생겨났다.

유학 이념의 뿌리는 주나라가 성립한 기원전12세기, 더 멀게는 중국 문명의 탄생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탄생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핵심은 줄곧 충효 사상에 있다. 유학은 인간 세계가 수직적인 질서로 짜여 있으며, 하위 질서가 상위 질서에 복종하고 충성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훗날 공자가 주에서 발달한 예의 개념에 인

의 개념을 더해 유학을 창시했지만,

유학 이념을 사실상 완성한 것은 주나라였다. 공자가 늘 주나라를 이상적인 국가의 모델로 삼았던 이유, 나아가 그 이후에도 수천 년 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양 사회에서 내내 주나라를 받들자는 존주
尊周
사상이 유지되었던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韓’이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글자가 된 것은 준왕과 관련이 있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시대에는 지배 집단만 이주민이었으나 위만조선 때부터는 관리와 백성 들의 상당수가 중국 출신이었다.

개국한 지50여 년이 지나 제국이 안정되는 한 무제
武帝(재위 기원전141~기원전87)의 시대에 이르면 그 관계가 역전된다. 무제는 흉노와의 해묵은 빚을 청산하고 흉노를 멀리 서쪽으로 쫓아버렸다(이 흉노의 민족이동은 수백 년 뒤 유럽에서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는 세계사적 변혁을 불렀다.).

고구려의 거센 공격을 받은 낙랑은 간신히 멸망을 면했으나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졌다. 이후 낙랑은313년에 최종적으로 멸망할 때까지 수백 년간 명맥을 유지하면서 북쪽의 고구려와 남쪽의 삼한 사이에서 완충지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역사에는 모본왕이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래 쿠데타로 실각한 왕은 그런 평가로 남는 법이다.

온조는 아차산의 원래 거점을 위례
慰禮
라고 불렀는데, 강을 건너서도 그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하북 위례와 하남 위례로 구분한다(지금의 서울 송파구의 몽촌토성이 하남 위례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위례라는 명칭은 한강을 가리키는 ‘아리(阿利)’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고, 왕을 가리키는 백제어인 ‘어라하(於羅瑕)’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 아리는 한강의 ‘한’처럼 크다는 뜻이므로 수도의 명칭으로 적합했을 것이다. 또한 어라하는 중국 사료에 백제 왕의 호칭으로 나오는데, 실제 발음이 어땠을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 역시 ‘크다’는 뜻과 관계가 있다.

말갈은 만주족의 갈래로서 유목 문명권에 속한 부족이며,

옥저는 만주 동남부와 함경도, 동예는 옥저의 남쪽에서부터 경상북도 북부까지 퍼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민족적으로 두 나라의 주민들은 대부분 말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두 나라는 2세기 말경에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셋 중 어디에 붙을까? 온조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정답을 찾아냈다. 우선 말갈은 논외다. 사납고 싸움을 즐기는 데다 문명의 성격이 다르고 특정한 국가 체제를 이루고 있지 않다. 그다음 낙랑은 중국 계열인 데다 온조 자신이 떠나온 고구려 쪽으로 향하는 방향에 위치해 있으니 동맹의 대상은 아니다. 따라서 답은 마한밖에 없다.

온조는 정세를 읽는 감각이 무척 뛰어났다. 낙랑과 마한은 아직 백제에 버거운 상대였으나 실은 저물어가는 해였다. 어차피 두 나라는 몰락할 터, 따라서 백제는 해가 지고 나면 어느 쪽 방향으로 진출할지를 미리 계획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다면 백제가 선택할 방향은 남쪽밖에 없다. 온조가 낙랑을 뿌리치고 마한과 우호를 유지한 것은 그런 판단에서였다. 미래의 적에게 오히려 우호를 보이는 그의 전략은 장기적인 정세관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신라 왕실의 성은 박씨, 석씨 외에도 김씨가 있지 않던가? 김씨가 오늘날 대한민국 최대의 성씨가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신라는 박씨(혁거세), 석씨(탈해)에 이어 김씨의 건국신화도 필요하다.

이주민 국가였던 만큼 신라는 건국 시조가 여럿일 수밖에 없다.

가야의 김수로왕을 시조로 삼는 김해 김씨 이외에 모든 김씨의 시조는 김알지다.

다른 세력들과 달리 탈해가 일본 출신이라는 사실은 한반도와 일본의 고대 관계가 상당히 밀접했음을 말해주는 강력한 단서다.

당시 일본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수많은 나라로 분열되어 있었고, 신라에 도움만이 아니라 피해도 많이 끼쳤다

더욱이 후대의 평범한 지배자들은 자연스럽게 한 시대의 획을 그은 선배이자 영웅의 이름을 계속 간직하려 했을 것이다(이집트의 파라오들이 호루스의 환생임을 자처한 것도 같은 맥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