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대단한 몸을 가졌더라도 이제는 시체일 뿐인데 뭐."

돌아오겠다는 약속, 하지만 돌아오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는 상황.

"뭘요?" 조리가 거의 소리를 지르듯이 묻는다. "저를 뭐 어디서 풀어 주시겠다는 거예요?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돌로 만든 벌집에서요. 당신은 오랫동안 거기에 갇혀 검푸른 벌들에 쏘이고 있었거든요. 형벌로요. 그리고 당신이 개빈을 해치지 못하게 막는 의미로요."
"이분이 파열의 주홍 마법사였군요!" 너비나가 말한다.

셋째 날, 가족들은 축축한 지푸라기로 관을 채운 다음 묘지로 끌고 가서 기도문과 수수한 묘비를 세우고 땅에 묻었다. 그리고 3개월 후 언니는 결혼을 했다.

죽고 나니 더 자유로웠다. 오로지 엄마만 내 방에, 가족들이 내 예전 방이라고 부른 공간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이웃에게는 나를 추모하는 사당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엄마는 가능한 한 빨리 자리를 떴다. 가급적 숨기려고는 했지만 엄마는 당연하게도 나를 원망했다. 누군가를 안쓰럽게 여길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며,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상대방의 고통은 그가 내게 의도적으로 가하는 악의적인 행위로 느껴지는 법이다.

"팔아요."라고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내 목소리는 이제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방 비울게요. 제가 머물 수 있는 데가 한 군데 있어요." 엄마는 고마워했다. 가여운 사람. 엄마가 내게 갖는 애착은 손거스러미나 사마귀에 느끼는 애착과 같았다. 나는 엄마 것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나를 제거할 수 있어서 기뻐했다. 한평생 당신의 의무를 충분히 다한 것이다.

샘의 얼굴에서 눈이 차지하는 비율은 그의 어깨와 뱃살의 비율처럼 변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 푸른 눈을 이용해 먹을 수는 있었다. 아직 대부분의 경우 효과가 있었다. 물론 남자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남자들은 다른 남자가 늘어놓는 헛소리를 더 잘 분간한다.

샘과 기네스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그러니 이혼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형식적인 절차만 거치고 나면 샘은 또다시 일정한 직업 없이 빈둥대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달팽이처럼 등에 집을 얹고 세상을 방랑할 것이다. 어쩌면 그게 샘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삶일 수도 있다.

메트라즐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샘은 딸랑딸랑 부딪히는 여러 개의 열쇠 꾸러미에서 가게 열쇠를 찾는다. 파트너는 이미 가게 뒤편에서 평상시의 업무를, 가구를 위조하는 일을 하고 있다. 아니, 가구 위조가 아니라 가구 개량이다. 파트너의 이름은 네드다. 정확히는 그가 주장한 이름이다.

네드는 말하자면 목재를 다루는 보톡스 의사로, 일반 보톡스 의사와 달리 목재를 젊어 보이게 만들기보단 늙어 보이게 만든다.

샴페인 상자 옆에는 역시 개봉하지 않은 샴페인 잔이 몇 상자 있다. 플라스틱이 아니라 질 좋은 유리잔이다. 그리고 흰색 자기 그릇이 담긴 상자 몇 개, 휴지가 아닌 천으로 된 냅킨이 담긴 커다란 상자도 보인다. 누군가가 결혼식을 통째로 이 창고에 저장해 두었다. 그것도 호화 결혼식을.
종이 상자들 뒤에는 여행 가방이 몇 개 있다. 하나의 세트처럼 어울리는 완전히 새것인 선홍색 여행 가방이다.
그리고 그 뒤, 더 어두운 더 안쪽에는 신랑이 있다.

시신을 발견하고도 신고하지 않는 건 중범죄 아닌가? 최악의 사실은 이 남자가 살해당했으리라는 점이다. 살해당하지 않고는 스스로 화려한 예식용 양복 차림으로 몇 겹의 플라스틱 비닐 속으로 들어가 지퍼를 잠그고 그 이음새에 테이프를 붙일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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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이 만질 수 있고 살아 있는 상태가 아니게 된 지 적어도 나흘은 지난 지금은

이완과 어떤 방식으로든 대화를 나눌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품을 수 없을지라도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여기로 가, 이거 사, 저거 해! 약간 깔보는 듯한, 얕잡아 보면서 놀리는 듯한 목소리. 병에 걸리기 전에도 이완은 대체로 그런 태도로 콘스턴스를 대했다.

어쩌면 이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파트는 아들 녀석들이, 녀석들이라 부르기에는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아들들이 이완의 장례식에서 강력히 주장한 대안이었다. 두 아들은 각각 뉴질랜드와 프랑스의 도시에, 콘스턴스를 자주 찾아오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기 쉬운 먼 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파트는 양로원을 돌려 말한 것이지만 콘스턴스는 그 대안을 고깝게 여기지 않는다. 아들들은 본인들에게 가장 간편할뿐더러 콘스턴스에게도 최선일 수 있는 방법을 원한다

콘스턴스는 이완의 목소리가 실제가 아님을 안다. 이완이 죽었음을 안다.

콘스턴스는 알핀랜드에 깊이 빠져들고부터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주의가 산만해진 탓에 수십 년 전에 만료된 면허를 갖고만 있었다. 알핀랜드는 무수한 생각을 요한다. 정지 신호 같은 부차적인 세부 사항들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밀어내 버린다.

시인과 포크 가수와 재즈 뮤지션과 배우 가운데 푼돈이라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그건 콘스턴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콘스턴스는 가난을 매혹적으로 여길 수 있을 만큼 젊었다.

콘스턴스는 개빈을 뒷바라지할 돈을 벌기 위해 알핀랜드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시인들과 포크 가수들은 콘스턴스의 알핀랜드 이야기를 비웃었다. 당연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었겠나? 콘스턴스 본인도 자기 이야기를 비웃었다. 콘스턴스가 대량으로 찍어 내는 삼류 문학은 존중받을 만한 문학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콘스턴스가 점점 알핀랜드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알핀랜드는 오로지 콘스턴스의 것이었다. 알핀랜드는 콘스턴스의 피난처이자 요새였다

콘스턴스는 늘 그 질문을, 외도에 관한 질문을 던지기를 두려워했다. 바보는 아니었기에 누구와 그러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았다. 이완에게서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완도 개빈처럼 떠나 버릴까 봐 두려워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도무지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이완은 콘스턴스를 떠났다. 이완은 침묵했다. 사라졌다.

한때 레이놀즈는 개빈이 사람들을, 적어도 일부 사람을 흉보는 면에 홀딱 빠져 있었다. 그게 곧 개빈이 남들보다 우월한 지적 능력과 세련된 취향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심술에 불과하다고, 아니면 비타민 결핍 증상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깔아뭉갠다고 해서 당신이 우월해지는 건 아니야.

대학은 돈을 원하고, 그래서 뭣도 모르는 애들을 끌어들인다. 그런 다음에는 그 애들을 머릿속에 지식만 잔뜩 채워 넣은 속 빈 강정으로 만들지만 그에 걸맞은 일자리는 제공하지 않는다. 대학에 가느니 배관공 자격증을 얻는 편이 낫다.

개빈은 이룬 것도, 받은 상도 없었다. 찬사를 받고 부러움을 살 만한 얇은 시집 한 권도 출간하지 못했다. 그는 무명의 자유를 누렸고, 뭐든 쓸 수 있는 백지 같은 미래가 눈앞에 펼쳐져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콘스턴스는 오로지 개빈이라는 사람 자체를 깊이 아꼈던 것이다. 그의 내면을.

하루의 첫 커피, 하루의 첫 담배, 마법처럼 나타나 하루의 첫 시를 이룬 첫 구절. 그런 시는 대부분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건 용납할 수 없다고! 콘스턴스는 내 사생활이야. 사생활! 여태 그런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겠지!"
"개빈, 당신은 당신 글을 팔았어." 레이놀즈가 말한다. "그러니 이제 공공 자료라고."
"개소리 집어치워! 내가 아니라 네가 팔았지! 이 배신자 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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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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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역사>, <서울 1964년 겨울> 빼면 정말 심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로만 가득하다. 이딴 게 ‘감수성의 혁명’이고 ‘국문학GOAT’라면, 그냥 국문학 안 읽을란다. 작가의 비틀린 이성(여성)관이 역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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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벚꽃 동산 열린책들 세계문학 22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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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냐 :
바냐 아저씨, 사는 거예요. 길고 긴 낮과 오랜 밤들을 살아 나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주는 시련들을 참아 내요. 지금도, 늙은 후에도, 쉬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요. 그리고 우리의 시간이 찾아와, 조용히 죽어 무덤에 가면 얘기해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울었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하느님이 가엾게 여기시겠죠. 우리는, 아저씨, 사랑하는 아저씨, 밝고 아름답고 우아한 삶을 보게 될 거예요. 우리는 기뻐하며, 지금 이 불행을, 감격에 젖어 미소를 띠며 돌아보겠죠. 그리고 쉬는 거예요.

소냐 :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천사들의 소리를 듣게 될 거고, 보석이 깔린 하늘을 보게 될 거고, 지상의 모든 악과 우리의 모든 고통이 온 세계에 가득한 연민 속에 묻혀 가는 것을 보게 될 거예요. 우리의 삶은 조용하고, 평온하고, 달콤하게 어루만져질 거예요.

… … …

소냐 :
우리는 쉬게 될 거예요!

천천히 막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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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고전의세계 리커버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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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에 대한 통찰이 놀라웠다. 모든 사람들이 신념을 갖는 순간, 그 신념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 - 맹목적인 믿음은 그 자체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명제에 대한 의심이 있어야 그 명제를 더욱 철저히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는 곧 사회의 다양성이 많은 게 좋다는 사상으로 이어지고, 사회 구성원 각자에게 맞는 삶을 살게 하는 게 좋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정말 좋은 책이다. 다만 왜 사회주의를 지지했는지는 의아하지만 -사회주의야말로 파시즘을 통해 전 사회가 같은 사상을 갖게 되는 것 아닌가?- 아마 지금도 살아 있다면 사회주의를 옹호하진 않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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