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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을 권리 다시 쓰기 - 자본주의를 가로지르는 인문학 로드맵
강신주 지음 / 오월의봄 / 2024년 3월
평점 :
책 제목인 <상처받지 않을 권리>는, 자본주의를 살아가며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음을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상처받기 쉬운 이유는, 무엇이든 돈으로 환원할 수 있고 교환가능하다는 생각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실 많은 것을 돈을 주고 살 수 있다. 우리 각 개인조차 노동력이라는 잣대에 의해 평가받고, 어딘가에 속하며, 연봉을 비교하고, 그것에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 한다. 그리하여 삶을 살며 돈이 없으면 불행해 하고, 있어도 더 갖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더 가진 사람을 미워하며 자신의 돈과 비교하며 불행해한다.
비교하는 것은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가? 누구나 각자 다 하나뿐인 조합이니, 엄밀히 말하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주제는 바로 ˝허영˝이었다. 우리가 무언가를 사려고 할 때 그것이 정말 필요해서 사기보다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기 위해서 사는 경우가 있다. 옷을 예로 들어보자. 따뜻한 옷은 육체적 필요에 의한 것이지만, 남들과 다른 옷은 정신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나는 후자의 경우를 허영에 의한 소비라고 생각한다.
나는 예전부터 허영은 나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단어 자체의 느낌이 그렇지 않은가, 마치 헛된 미망을 쫓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허영을 가진 존재다. 허영이란 정신의 굶주림이다. ˝다른 사람이 찬양하는 특성을 마치 자신의 본성(본질)인 것처럼 여기는 마음˝에서 허영이 나온다. 그렇기에 허영의 다른 말은 ˝인정욕구˝이다.
우리는 남의 인정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그렇다면 허영이란 단순히 헛된 미망은 아닌 셈이다. 허영은 그 자체가 변화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허영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가치를 남의 인정에서 찾는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 남이 내게 칭찬을 하든 비난을 하든, 그 말 자체에 흔들릴 필요가 있을까? <초역 부처의 말>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이 바로 ˝바라지 않는다˝ 였는데, 이는 남에게서 인정을 바라지 않음을 의미한다.
허영은 그림자와 같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실재가 있다면, 그림자는 빛의 각도에 따라 길어지기도, 짧아지기도 한다. 그림자는 대강의 형상을 드러낼 뿐, 그것이 곧 나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다른 사람과 구분되고 싶어하는 마음, 이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마음이다. 하지만 구분되고 싶어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음을 감추려는 시도다. 즉 인간은 모두 같은 존재이기에 달라지고 싶어한다.
남의 인정을 바라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몫을 살아낸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