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말 풍요의 바다 2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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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보다 무서운(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미 의식을 극대화하면 결국 할복자살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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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말 풍요의 바다 2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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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해서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무슨 그런 또라이가 다 있나‘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을 읽은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미시마(히라오카) 상은 ˝그다운 삶˝을 살다 간 것이다.

알면서도 맞이하게 되는 파국이 있다. 우리에게는 죽음이다. 누가 어떤 식으로 죽든, 그게 자기 마음에 드는 방식이면 그만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기에 자신의 앎과 행동을 일치시킨 그에게 어렴풋한 존경심마저 든다.

하지만 미시마 유키오의 사상은 이웃나라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곱게 보이지 않는다. 또한 합리적인 시선으로 보려고 해도, 전혀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나는 미시마 상을 ˝누에˝에 비유하고자 한다. 그의 삶 자체는 고치를 만드는 곤충과 같다. 벌레가 만드는 직물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엿본다. 좋은 주제에 아름다움이 없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열한 주제나마 아름다움이 있는 게 나은 걸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확실한 것은 내가 <달리는 말>을 읽으면서, 이 소설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면의 고백>을 사며 전작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감동을 다시 느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소설가로서 이 정도면 좋은 삶이 아니었을까 싶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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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3
공자 지음, 소준섭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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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잘 듣는 사람 만드는 데 치중하는 유치한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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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3
공자 지음, 소준섭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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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는 공자 사후 제자들이 기록한 스승의 언행을 집대성해 낸 책이다.
동아시아의 가장 큰 스승이라 할 수 있는 공자의 말과 행동을 배울 수 있다고 하기에 큰 기대를 했으나, 실망이 제법 컸다.

물론 좋은 부분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배움‘으로 대표되는 자기 수양의 강조다. 공자는 배우고 또 배웠다. ˝내가 아는 게 가장 많은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나보다 배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공자는 말한다.

하지만 그 이외의 말들은 그저 좋은 말로만 느껴질 뿐,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살아오며 들은 명언에는 <논어>가 출처인 말들이 참 많았다. 그런 말들을 보며 <논어>를 꼭 다 읽어보리라 생각했으나, 정작 책 전체를 읽어보니 공자 사상이 가진 한계점이 눈에 들어왔다.

수기치인으로 대표되는 공자의 사상은 ˝먼저 자신을 수양한 뒤에 남을 다스리라˝를 골자로 한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통치 문란의 원인을 집권자 개인에게 돌리는 방식인 것이다. 즉 사회 문제를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문제로 돌려버림으로써, 책임소재 묻기에만 급급한 사상이 될 수 있는 취약점을 갖고 있다.

또한 공자 사상은 기본적으로 ‘남에게 쓰임 받기 위한‘ 학문이다. 그렇기에 예법에 대한 집착이 심하고, 유신을 주장하되 혁명에는 반대하는 보수성을 갖고 있다. 또한 고착된 계급을 정당화하는데, 이는 ˝군군, 신신, 부부, 자자˝로 대표되는 ˝정명 사상˝에 잘 나타나 있다.

정명 사상은 ˝~다움˝을 강조하는 사상이다.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 그 일을 도모하지 않는 것˝이 바로 정명이다. 자신의 몸가짐을 조심하고 ˝~다움˝에 집착하는 것은 피지배계층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기에 정명 사상은 기본적으로 지배 계급의 논리로 쓰이기 좋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상 임금에게 ˝임금답지 않다˝고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에, 남는 것은 ˝신하는 신하답게˝라는 피지배계층에 대한 기강 잡기뿐이다.

<논어>를 읽다 보면 칭찬과 비난에 대한 구절이 많이 나온다. 바로 ˝군자˝와 ˝소인˝으로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놓고, ˝군자는 ~하고, 소인은 ~한다˝는 식으로 평가하는 식이다.

하지만 칭찬이라는 것은 비난과 마찬가지로 한 가지 실재에 대한 방향만 다른 그림자일 뿐이다. 남을 칭찬하는 걸 자주 하는 사람은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이고, 비난도 곧잘 할 사람이다.

공자의 비극은 ˝말 잘 듣는 사람˝ 만드는 가르침을 설파했으나, 정작 본인은 어떤 군주에게도 쓰이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에 따라 인정욕구도 제대로 채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공자는 반역을 비난했으나, 정작 반역을 일으킨 역적에게 자리를 제안받자 수락하려고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그의 제자 자로가 이를 비난한다). 즉 지행합일이 되지 않는 것이다.

제자가 ˝3년상을 꼭 치러야 합니까?˝라고 묻자, ˝네가 편하다면 1년상만 해라˝라고 공자는 답한다. 그리고 제자가 사라지자 ˝그 녀석은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나보다, 3년상을 치르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라고 한탄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기원전 6세기의 중국이 그렇게 경제적으로 풍족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3년 동안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도 사회가 굴러갈 수 있었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데도 3년상을 하는 게 과연 합리적인 행위일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공자 사상의 한계는 바로 ˝전통˝과 ˝~다움˝에 집착한다는 데 있다. 전통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공자가 3년상 같은 전통에 집착했던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던 방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20대에 처음 이 문장을 들었을 때 무척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논어>를 다 읽고 나니, 겉으로만 그럴듯한 나르시시스트의 말을 듣는 것 같다. ˝죽어도 좋을 만큼 나는 배우는 걸 사랑해˝라고 말하는.

번외.
공자 사상과 반대로, 노장사상은 철저히 지배계층의 처세술 같다. 따라서 지배계층은 노장사상을 국민(피지배계층)에게 배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이 둘(공자, 노자)의 공통점은 ˝적정함˝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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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자성록 열린책들 세계문학 196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박민수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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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록』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전쟁을 수행하고 통치하는 동안 떠오른 상념들을 기록한 작품이다.

첫째, 스토아학파는 자연 내지 우주의 운행과 질서를 결정론적으로 해석한다. 즉 자연 내지 우주의 삼라만상은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그 어떤 필연적 법칙에 따라 생성되고 존재하며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주가 필연적 법칙에 따른다면 이런 법칙을 존립시키는 무엇, 즉 우주의 운행과 질서를 좌우하는 무엇이 먼저 존재해야 할 것이다. 철학에서는 그런 무엇을 흔히 〈실체〉라 부르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비롯한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 실체를 〈이성〉 혹은 〈신〉이라고 칭한다

셋째, 자연의 운행이 신의 이성적 법칙에 따르는 것이라면, 자연의 운행에 거역하는 태도나 행위는 무모한 것이며 고통을 가져올 뿐이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우주의 운행 법칙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신은 이 세계를 가장 좋은 방식으로 설계했고 늘 올바른 결정을 내린다고 판단해야 한다. 세계 안의 모든 사건은 신에 의해 궁극적으로 선을 향하도록 결정되어 있다. 이성적 신의 선한 의도에 의해 결정된 세계 및 역사의 흐름을 〈섭리〉라 하며, 이런 섭리가 개인의 인생사로 구현된 것을 〈운명〉이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인간이 삶에서 겪는 그 어떤 사건도 근본적으로는 악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

요컨대 신적 이성에 의해 주어진 인생 역할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태도이며, 또 그럴 때에야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발휘하여 우주의 운행 법칙을 깨닫고 섭리와 운명에 순응하며 살 때야 행복을 얻는다. 그리고 스토아 사상가들은 그런 〈자연스러운〉 삶을 가리켜 〈덕〉이 있는 삶이라 일컫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스토아 철학에서 이성적 삶과 덕 그리고 행복은 모두가 동의어다. 스토아 철학자들에게는 덕을 갖추지 못한 채 사는 것, 즉 비이성적으로 사는 것이 유일한 〈악〉이다. 그 밖의 모든 것, 즉 사람들이 중시하는 생명이나 건강, 소유, 명예와 사람들이 혐오하는 노령과 질병, 죽음, 가난, 예속, 불명예 등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닌 〈관심 밖의 대상〉, 이른바 〈중간물〉에 불과하다.

여섯째, 결정론 내지 섭리론의 관점에 따른다면 세상에 불행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행과 불행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구별은 우리의 그릇된 생각과 판단에서만 존재한다.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그처럼 그릇된 생각을 품게 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충동이나 열정, 욕망 등의 정념이다. 정념은 이성을 현혹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릇되게 행과 불행을 구분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인간의 과제는 이런 정념과 지속적으로 투쟁하는 데 있다.

인간은 정념을 완전히 극복한 후에야, 다시 말해 영혼을 열정에서 해방시킨 후에야 덕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평정의 상태를 스토아 사상가들은 〈아파테이아apatheia(without passion)〉라 부른다.

결정론 내지 섭리론은 인간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면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윤리의 존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도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비롯한 스토아 철학자들은 결정론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 논리적으로가 아니라 선언적으로 ─ 인간의 자유를 얼마간 용인하려 한다.

모든 것이 신적 이성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에게는 무엇인가를 선택할 자유가 없으며 따라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필요도 없게 된다.

철학의 기능은 의학적 치료 수단에 비유될 수 있다.

철학은 영혼의 치료 기술이다.

스토아 철학은 크리스트교의 확산과 교리 수립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사실 금욕적 도덕을 엄수하고 외적 재물을 경시하라는 주장이나 세계 전체가 하나의 지고한 존재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 그리고 민족과 계층의 구별을 넘어서는 보편적 인간애의 사상 등에서 스토아 철학과 크리스트교는 중요한 접점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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